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도시에 갑자기 눈이 머는 전염병이 번진다. 전염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빠르다. 그러나 눈이 머는 원인은 알 수 없고,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이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된 것이지도 알 수 없다. 최초로 눈이 먼 사람과 한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이것이 전염병 임을 인지한 정부는 눈이 먼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접촉한 보균자들을 격리시키기에 이른다. 강한 전염성으로 인해 수용소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줄 어떤 인력도 없으며, 수용시설인 폐건물은 눈이 멀지 않고서야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다치거나 병이 들어도 약을 구할 수 없으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씻을 수도, 용변을 처리할 수도 없다. 하루 세번 정문에 두고가는 식사 또한 밖의 상황에 따라 점차로 불규칙해졌고, 그나마도 수용되는 인원이 많아짐으로써 공평하게 분배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수용된 그곳에서는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다. '한밤중에 예절을 지키는 것이, 누군가 돼지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137쪽)

이러한 상태를 두 눈으로 보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이후 도시 전체가 눈이 보이지 않게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들을 목격하며 차라리 자신의 눈도 멀어버렸으면 하고 바라지만, 비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때로는 할 수 없는 일도 감내하며 눈 먼 사람들과 함께 살기위해 발버둥친다.

 

도시 전체가 눈이 머는 대재앙은 인간의 악행을 더이상 참지못해 물의 심판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자 했던 노아의 방주 시대에 있었던 창조주의 대심판 같기도 하고, 세계질서를 새로이 확립하고 싶어하는 어떤 권력기관의 대살상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제3세계의 내전을 조장하는 외부의 힘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그렇지않고서야 갑자기 눈이 머는 이런 황당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질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초로 눈이 먼 남자가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주인공격인 의사의 아내는 어째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궁금증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기로 똘똘뭉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면서 부터 였는데,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비극이 생긴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구제불능의 잔인한 종이라는 것 아니였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강도만 다를 뿐 눈뜬 자들의 세계에도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다만 보고싶지 않은 것을 보지않을 재주 또한 타고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전범으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당시 이 재판 관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인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평범한 인상의 아이히만이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은 '명령에 따른 것'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아이히만의 경우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으로 약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즉 일어나는 불의를 보고도 보지않은 척 눈을 가리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 '인간다움'을 부르짖는 인간들이 평소 늘 하는 행동으로,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주체들은 히틀러나 아이히만 뿐만 아니라 유대인 학살을 보고도 못 본척  눈을 가렸던 당시의 모든 독일인, 유럽인들로 확대될 수 있겠다. 사실은 이들이 더 큰 악 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 사라마구는 헐리우드판 재난극을 상상한 것이 아니라, 버젓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즉, 무관심이라는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쪽)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수용자가 늘어나자, 그들 중에서 착취를 일삼는 깡패들이 생겨났다. 깡패들은 외부로 부터 배급되는 식량을 탈취하고, 수용자들로부터 돈을 요구한다. 그들은 수용자들의 돈을 전부 빼앗고나자 이번에는 여자들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병실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여자들은 이를 뿌리치지 못한다. 거부할 경우 그 병실에는 음식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는데 차라리 굶어 죽을 것을 다짐하거나, 악당들과 맞서지 않는 남자들의 무능함에 진저리가 났다. 죽는 것보다야 낫지않겠느냐는 생각이 정말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정조 관념같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을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해 주는 것은 '수치를 아는 것'이지 않은가. 이를 모른척하는 같은 병실의 남자들은 생존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들이 바로 '악인'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악인의 모습이 숱하게 등장하고, 그를 읽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소설을 읽는동안 반복해서 느낀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지않는다면 나 또한 '악인'인 것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불의를 목격하고도 눈 감아왔는지, 그 용기없음에 대해 자책할 수밖에.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가 구제불능인 인간의 이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면 마지막까지 눈이 멀지 않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작가는 그녀를 통해 희생과 헌신 또한 인간이 가진 본질 중 하나이고,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며,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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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6-02-2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맘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눈먼 사회, 그리고 한 명의 눈뜬 이.

비의딸 2016-02-24 15: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 한명이 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계속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그 한 명이 없었다면 소설이 씌일 이유가 없었겠더라구요.
<카인>을 읽고 사라마구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지 않았던게 억울할 정도더군요, 현재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은 정말 놀라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