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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송 (양장)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3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혁준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소송>의 줄거리를 읊어대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카프카를 알고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널리 알려져 책을 읽지 않은 사람조차도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소송>은 한 남자가 어느날 갑자기 소송을 당했으며, 그는 유죄라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 유죄인지, 누구로부터 무엇때문에 고발을 당한 것인지, 그 고발은 과연 합당한 것이였는지에 대한 것은 전혀 알 수 없고, 또 그와 같은 것들은 <소송>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저 '부당함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한 것이 틀림없다. 그가 무슨 특별한 나쁜 짓을 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기 때문이다.(9쪽)
특별한 나쁜 짓을 한 것 같지도 않은데 어느날 아침 평소와 같이 눈을 뜨자마자 느닷없이 송사에 휘말린 한 남자의 이 이야기를 비극으로 봐야 할까, 희극으로 봐야 할까. 사무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희극적으로 읽히나, 책을 덮은 후에는 여지없는 비극을 느끼듯 <소송> 역시 그렇다. 읽는 동안은 마치 영화 <덤 앤 더머>의 짐 캐리와 제프 다니엘스의 연기를 보는 것처럼 낄낄거리게 된다. 이건 뭐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니까.
주인공 요제프 K는 체포되었으나 그 체포의 이유는 도무지 알 수 없고, 분명히 체포되었다고 하는데도 구속없이 그의 일상은 계속되며, 법원이 가정집의 다락방에 연결되어 있질않나, 요제프 K를 감시하는 사람들은 업무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제프 K의 사무실 창고에서 태형리에게 하루가 넘도록 매를 맞기도 한다. 어떤 사건에 연류되어 요제프 K가 고소된 것인지는 도저히 알 수 없는데도, 사실상 도시의 모든 사람들이 요제프 K의 소송건에 대해 알고 있으며, 하물며 그것은 매우 중요한 소송 사건이라고들 한다. 당사자인 요제프 역시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체포된 것에 대해 인정한다. 때때로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생각해 보기도 하면서.
그런가하면 그는, 자신은 꽤 똑똑한 사람으로 잘못된 고소쯤은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서른 번 째 생일을 맞으며 체포되었듯, 서른 한 번 째 생일을 맞는 아침에는 처형당한다. 체포가 그랬듯이 처형도 느닷없이 희극적으로.
<성>을 비롯한 카프카의 장편소설 세 편은 고독의 3부작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들은 모두 미완성이다. <소송> 역시 그중 하나로, 완성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불구하고 요제프 K가 처형 당한다는 결말이 있다. 이는 카프카가 소설의 처음과 끝을 같은 시기에 써두고 내용을 채우는 식으로 <소송>을 썼기 때문이다.
법원도 한 번쯤은 자신의 권리를 지킬 줄 아는 피고인을 만나 봐야 한다.(156쪽)
<성>과 <소송>을 비롯한 카프카의 작품들은 일반적으로 시스템, 혹은 권위에 대항하는 한 개인의 비극으로 읽힌다. 그렇지만 <성>과 <소송>의 각 장면들은 대단히 희극적이다. 또한 크고 작은 에피소드들은 따로 편집해 각각의 단편으로 묶거나 혹은 앞뒤를 바꿔도 좋을 만큼 개연성없는 이야기의 연속이며, 그러한 장면들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익숙한 시선으로 읽는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바로 그점들이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데 있어 가장 큰 난점인 동시에 주안점이 되기도 한다. '어째서?', '왜?', '그래서?'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벌어진 상황에 대한 인물의 행동을 무심하게 보는 것이 카프카 소설의 관전 포인트다. 등장인물들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들을 보며 웃다보면 어느덧 '우리가 그렇지 않아?'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서 비로서 비극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뭉크의 '절규'를 연상시키는 <소송>의 표지그림은 대단히 비극적이다. 삼면이 가로막힌 황폐한 공간, 즉 감옥이라고 밖에 여겨지지않는 어두침침한 곳에 한 남자가 쪼그리고 앉아있다. 벗은 두 발과 어깨는 투명하리만치 창백하고, 머리칼 마저도 모두 잘린채로 두 팔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는 남자는 사방에서 조여오는 어떤 것들로 부터 자신을 지키고자 애를 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분명 죄인의 모습이고, 따라서 그런 그를 전면에서 비치는 서치 라이트는 마치 그를 심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자유롭지 못한 예속의 상태에 있는 남자의 머리 위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보이는 심판은 보는 이로하여금 비극적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사진 속에 절규하고 있는 남자는 단지 요제프 K가 아니라, '인간'을 대표하고 있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한 개인으로서의 요제프가 아니라 그 누구도 아닌 '아무나' 이거나, 혹은 '누구든'이거나, 더 구체적으로는 '나'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보는 이의 가슴을 죄어 오면서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때문에 비극을 작정하고 책을 펼치게 된다. 그러나 <소송>은 어디까지나 희극으로 읽어야 한다. 그래야 분명히 잘 읽힐 뿐더러 요제프 K의 상황이 더 극적으로 다가온다.
뭔가 잘못된 겁니다. 도대체 인간이라는 사실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단 말입니까?(264쪽)
해질무렵 두 친구와 길을 걷던 에르바르트 뭉크는 핏빛으로 물들어가는 석양 속에서 고막이 터질 듯한 자연의 비명을 들었다. 두 친구는 아무렇지않게 걸어가고 있었기에 뭉크의 공포는 더 극대화 되었을 것이다. 뭉크는 공황장애를 앓던 당시 느꼈던 극심한 공포가 '절규' 탄생의 밑바탕이었다고 고백했다. 뭉크의 '절규'를 보며 비명을 듣는 사람이 카프카라는 생각이 든다.
기독교가 말하는 원죄적 의미에서건, 사회 규범 테두리 안의 규율적 의미에서건 인간은 모두 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각각의 개인에게 심판의 서치 라이트가 밝혀질 때, 인간은 그 누구라도 절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를 간파한 카프카는 끊임없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렸다. 세상과 삶에 예민했던 카프카에게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안에 더해 권위적인 아버지로 부터 비롯된 공포가 있었다. 세상 모든 일에서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아버지는 카프카에게 언제나 심판자였다. 카프카는 아버지의 심판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한편으로 자신은 늘 유죄라고 생각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항상 옳았기 때문이다. 무엇을 잘 못했는지 모르면서 기소당한 요제프 K도 유죄였으며, 구원의 길이라 여겨 성으로 가길 원했던 <성>의 K 역시 성에 도달하지 못한다.
아버지를 두려워했던 카프카는 그의 장편소설들을 완성하지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인지도 모른다. 항상 옳은 아버지를 둔 아들은 언제나 유죄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끝은 죽음 외의 다른 길은 없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