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화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6
치누아 아체베 지음, 이소영 옮김 / 민음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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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현대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치누아 아체베의 <신의 화살>은 <모든 것은 산산이 부서지다>와 <더 이상 평안은 없다>에 이은 '아체베의 아프리카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이다.

<신의 화살>은 1920년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나이지리아의 작은 마을 우무아로를 무대로 한다. 부족의 정신적 지도자인 우무아로의 대제사장 에제울루는 영국과 기독교라는 새로운 시류 속에 부족과 화합하지 못하고 반목과 분쟁을 거듭하다 결국 파국을 맞는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체베는 우무아로를 무너뜨린 힘은 신문물과 기독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무아로 내부의 분열이라고 에제울루의 입을 통해 지적한다.

우리는 우리 것도 아닌 땅덩이를 놓고 피를 나눈 우리의 형제 옥페리를 상대로 싸움을 일으켰네. 그런데 자네는 그 문제에 개입했다고 백인을 비난하는군. 두 형제가 싸우면 이방인이 수확을 거두어들인다는 말도 들어보지 못했나?(233쪽)

 

소설의 제목인 '신의 화살'이 뜻하는 것은 우무아로를 비롯한 주변 여섯 마을의 신인 '울루'의 사제 에제울루를 상징한다. 에제울루는 자신을 울루 신의 화살에 걸린 화살로 비유하며, 자신이 행하는 모든 일이 바로 울루 신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신이 자신을 선택했다는 권위의식은 사제로 지내는 세월 동안 신의 대리인이 아닌 한 인간의 아집으로 이어진 것이다. 자신이 백인의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쌓은 분노를 부족민들을 향해 터뜨린 것인데, 당장 굶주림 앞에 서게된 부족민들은 에제울루의 사제적 능력을 의심한다. 이처럼 대제사장으로서 에제울루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순간 기독교는 우무아로를 비롯한 이보 부족들에게 자신들을 구원할 새로운 종교로 떠오른다. 에제울루는 동족간의 분열이 침략을 노리는 영국에게 빌미가 된다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제사장으로서 부리는 만용이 새로운 종교가 그들의 땅에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될 것은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어쨌든 에제울루가 신의 활대에 걸린 화살이라면 대제사장 에제울루의 몰락 역시 신이 계획한 일인 것이다. 어쩌면 아체베는 뭍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신의 대리인 조차도 사실은 한 사람에 불과하며, 사제가 신을 대신을 할 수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에제울루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것은 아닐까. 에제울루의 몰락이 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일부 종교지도자들의 모습과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오만 역시도 신의 주도하에 이뤄지는 일이라면, 신은 인간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 그의 화살을 파멸을 향해 쏘는 일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랬으면 하는 바램이다.

 

그들의 신은 고집스럽고 야망에 찬 사제에 대항하는 부족민들과 한편이 되었다. 그러니까 개인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부족민들보다 훌륭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부족민의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절대로 얻어 낼 수 없다는 조상들의 지혜를 확인시켜 주었다.(399쪽)

 

'식민지 수탈론'과 '식민지 근대화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인 태도로 아프리카 전통 사회가 서구문화에 동화되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내는 작가로 갈채를 받는 아체베의 <신의 화살>은 아프리카의 낯선 문화와 전통을 다루고 있음에도 읽기에 어렵지 않다. 뿐만아니라 이름 조차도 낯선 이보 부족의 결혼, 농사, 상거래, 구전되어 전해 내려오는 속담이나 아프리카 전통 가요 등의 세시풍속 외에도 집에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는 방법, 부족민들의 회합시에 상대방의 말을 경청하는 자세, 마을을 찾아온 낯선이를 대하는 태도 등을 통해 겸손하고 지혜로운 아프리카의 전통을 이해 할 수 있었다. 잘 알지 못하는 아프리카에 대한 거리감 때문에 반갑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다 읽고난 후에는 오히려 낯선 것을 이해했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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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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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의 작가로서의 회고록이라는 내용면으로도, 겨울에 읽기에도 너무 훌륭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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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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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적이라고 보여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꼭 같은 꿈이 있었는데, 아주 넓은 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결혼을 했고, 런던 근교에 빅토리아 양식의 거대한 주택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저택에서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아이를 낳는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지친 헤리엇의 건강 상태는 열외로 친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그들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 진 듯했다. 그러나 문제의 다섯째 아이가 잉태되고, 소설은 그렇게 무르익는다. 정상과 비정상, 문제 없음과 문제 있음으로 양분되면서.

 

다섯번째 아이인 '벤'은 임신기간 동안에도 먼저 태어난 형제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였다. 벤을 뱃속에 담고 있는 동안 헤리엇은 지나치게 활동적인 태아로 인한 물리적인 고통외에도, 이전 네번의 임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물감 때문에 힘들어 한다. 벤은 태아였을 적부터 어머니를 거부했고, 하룻빨리 어둡고 답답한 자궁 속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 했다. 헤리엇 역시 자신의 뱃 속 아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어느 순간에는 '원수'라고 까지 생각했다. 벤은 태생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벤은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거의 유인원에 가까웠으며,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빛나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와 헤리엇을 비롯한 네명의 아이들과 그들의 일가 친척들은 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소리내서 말하는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삼가했다. 벤의 출생과 성장을 주욱 지켜본 담당의사 역시 벤의 비정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다를 뿐이고,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다름은 존중되어져야 마땅한 것이지 배척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의 '다름'은  기타의 모든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 헤리엇과 데이비드의 소망인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다. 해마다 헤리엇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파티에 참석하던 일가친척들은 점차로 파티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헤리엇의 세 자녀는 집을 떠나가길 원했고, 벤을 임신한 엄마가 적절히 돌봐주지 못한 넷째 아이 폴은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되어갔다. 이 모든일의 근원에는 정상적이지 못한  '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태생적 비정상성으로 인해 부모와 가족으로 부터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벤'에 대해 독자로서 동정하고 가족들의 처사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 레싱은 '벤'에 대한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기엔 벤의 모습이나 행동은 공포스러울 만큼 기괴하다. 벤이 어느 순간 가족 중 누군가를 헤치지 지는 않을까 초조할 정도다. 이쯤되면 벤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벤이 우리하고 아주 달랐기 때문에 데려간거야. (104쪽)

 

이윽고 벤은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가족들은 마치 해방을 맞은 듯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헤리엇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는 자격지심으로 자신이 가족들로 부터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띄게 안정되어가는 가족들의 평화는 죄책감과 공포로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헤리엇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 시한폭탄을 감춘 것처럼 위태롭다. 헤리엇이 벤을 되찾는 대신 가족들의 안정을 꾀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너무 쉽다. 정상성이 양육의 기준이 될 수 없고,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헤리엇은 벤을 되돌려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흩어진다.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대신 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공존하는 방향을 모색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정해진 답이다. 그러나 흩어진 가족도 각자의 삶을 위한 답일 수 있다. 어차피 삶은 각개전투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평범하고 건강한 두 젊은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꾸는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나, 21세기인 현재나 마땅히 장려되어야 할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19년 생인 작가 도리스 레싱은 사람들은 가족 생활이 최고라고 세뇌를 당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 (39쪽) 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가족적 배경을 가졌기에 그토록 '가족'에 대해 냉소적일 수 있었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 상이용사였던 도리스 레싱의 아버지는 영국을 떠나 아프리카 초원인 짐바브웨에 정착한다. 어린 레싱은 일반적으로 추종되는 주류의 생활을 벗어나 독립적인 자유 속에서 자랐다. 그러한 그녀의 성장배경은 레싱이 평생 어떤 집단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작가로 서게 했다. <다섯째 아이> 역시 이러한 독립적인 사상속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레싱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기형아를 낳은 부모들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나 단죄가 아니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정말 사랑인가. 인류 최대의 미덕은 정말 가족애인가.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길들여지고 가정적이며 야생과 자유로부터 멀어진 불쌍하기조차 한 모습으로 거기 앉아 있는 두 어른인 자신들을. (103쪽)

 

이 이야기를 통해 레싱은 희생뿐인 모성애라든지, 부모로서의 의무, 가족애 따위가 현대사회에는 적합지 않은 허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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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엠마뉘엘 베르네임 소설
엠마뉴엘 베른하임 지음, 이원희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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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는 없고, 마리의 저녁 초대는 취소되었다.

그녀를 기다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어디 있는지 아무도 몰랐다. (49쪽)

 

로르는 독신으로서의 마지막 밤을 친구 마리와 보내기로 했지만, 지하철 파업으로 돌연히 약속이 취소된다. 로르와 새삶을 시작할 애인 프랑수아는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고, 로르는 급작스러운 외로움을 느낀다. 자신을 온통 쏟아부을 일이 있고, 친구가 있고, 애인이 있지만 홀연히 버려진듯한 '혼자'라는 느낌은 못견딜 쓸쓸함으로 로르를 덮쳐온다. 무엇보다 금요일이었고, 밤이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 출근과 퇴근의 시계추를 반복하는 현대인들은 주말을 앞둔 금요일 밤이면 많은 유혹을 느끼곤 한다. 정해진 일상으로 부터 조금쯤 벗어나는 자유를 상상하는 것이다. 때때로 유혹의 대상은 뚜렷이 존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신 스스로가 만들어낸 환상에 이끌린다. 그것은 한번쯤 괘도를 벗어나고픈 충동이기도 하고, 새로운 모험을 갈망하는 인류의 오랜 고질병이기도 할 것이다. 

<금요일 저녁>의 주인공 로르는 독신으로서 보내는 마지막 금요일 밤을 마음껏 누리고 싶은 충동으로 일탈을 감행한다. 마비된 도시에서 우연히 차에 태운 남자와 즉믈적인 사랑에 빠진 로르에게 이성은 없다. 단지 느낌과 감성,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일탈에는 반드시 제 궤도로 돌아오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따라서 로르는 남자의 생각 따위를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짐작할 뿐이다. 그녀에게 그는 내일이면 연기처럼 사라질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빨간 스커트로 대변되는  일탈의 밤을 지내고 맞은 아침, 로르는 그녀의 애인 프랑수아에게 둘러댈 말을 생각하며 택시에 오른다. 사람들은 계속 걸어 다닐 것이고, 이제부터 로르도 그들처럼 걸어 다닐 것이다.(128쪽)  그것이 보통 사람의 일상이며, 삶이다.

 

프랑스 작가 베르네임은 이십 년 동안의 작가 생활 동안 소설 다섯 편을 발표했다. 그런데 그 다섯 소설은 각각 백 페이지 정도의 분량을 넘지 않는다. <금요일 저녁> 역시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씌여졌다. 그 담백함 때문에 하룻밤으로 한정된 로르의 일탈이 더더욱 아슬아슬하다.

<잭나이프>, <커플>, <그의 여자> 등 베르네임의 다른 세 편의 소설에도 <금요일 저녁>과 같은 예기치 못한 상황이 이어지고 주인공은 일탈을 감행한다. 그러나 작가는 그들이 벌이는 탈선의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들이 벌이는 충동과 욕망의 순간을 묵묵히 묘사할 뿐이다. 따라서 독자에게는 그에 대해 어떠한 도덕적 판단도 필요치 않다. 다만, 그녀들의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타기가 나의 숨겨진 욕망, 혹은 풀어내지 못한 꿈들을 대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가득해진다. 그러나 별은 제 궤도를 고수할 수 있을 때만이 일탈이 가능하다.

 

백 페이지 남짓한 엠마뉘엘 베르네임의 책 네 권이 우리나라에서 한꺼번에 출간되었다. 도서정가제도 시행된 마당에 책 값이 좀더 저렴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넉넉한 레이아웃과 행간이 베르네임의 간결한 문체를 돋보이게 하는 건 사실이지만, 가난한 독자로서는 같은 값이라면 좀 더 많은 책이  아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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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일기
폴 오스터 지음, 송은주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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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일기>는 64세의 폴 오스터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적은 기록이다. 그는 과거의 자신을 '당신'으로 지칭하며, 지나온 시간을 회상하는데 그 기록은 시간순이 아니다. 오히려 기억나는 순서라고 보는 것이 맞다. 하나의 줄기를 잡고 시간을 거슬러올라가며 기억나는 데로 적은 자유로운 형식의 글인 것이다. 때문에 이번에(미국에서는 2012년에,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1월) 출간된 책 제목이 '일기'인 것은 너무나도 온당하다.

 

하나의 줄기로 '흉터'라거나, 자신이 살던 '집', 혹은 '어머니' 등을 떠올리는 회상 속에서 오스터는 때로는 열살의 아이로 되돌아가 한여름의 마당에 서 있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는 육신의 쾌감에 몸을 맞기는 청년이 되는가 하면, 다음 장면에서는 개미둑에 쪼그리고 앉아 넋을 놓는 서너살의 꼬마이기도 하고, 바로 그 다음 순간에는 갑작스런 어머니의 죽음에 공황장애를 겪는 장년의 오스터가 되기도 한다.

 

언제 어느때의 장면이건 그 세밀한 기억력에 나는 몹시 놀랐는데, 작가는 꼼꼼한 관찰력뿐만 아니라 치밀한 기억력까지 갖춘 존재인가 보다 싶다. 64세에 열몇 살, 혹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서너 살 시절의 장면까지를 기억하는 것이 무척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기억력은 오스터 특유의 세밀한 묘사력에 비한다면야 그다지 놀라운 것도 아니다. 언제 어느때, 어떤 일을 기억하건 꼼꼼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그건 기억이라기 보다는 작가다운 창작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나'를 담고 있는 그릇인 '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라고 늙으며 종래에는 '죽음'에 이른다. 오스터는 이를 '당신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일' 이라고 칭하는데, 이때의 '당신'은 오스터 자신을 가르키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를 향한 것이기도 하다. 때문에 책을 읽으며 나는 자주 나의 어린 시절과 아직 오지 않은 노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인생의 종착역이라고 밖에는 여길 수 없는 회색빛의 겨울로 대변되는 노년의 시기는 대작가 오스터에게도 역시 낯선 일이다. 그 낯섦에 오스터는 다소 당황스러워 하고 있는데, 그 와중에 오스터는 순차적으로 노화하는 과정을 다 겪고 난 뒤 맞는 죽음은 얼마나 평화로운 일인가에 대해 얘기한다. 물론 인간은 언제 어느때고 얼마든지 죽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늘은 '기적'일 수 밖에 없고, 지금 이순간  죽지 않고 살아있는 모든 인간들은 행운아들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아들에게도 죽음의 순간은 여지 없이 다가올 것이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자신의 삶에 대해 회고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채로, 있었던 적도 없는 것처럼 사라지기 전에.

 

이제 너무 늦기 전에 말해 보라. 그러면 더 이상 할 말이 남지 앟을 때까지 계속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아니면 당신의 이야기는 잠시 밀어 두고 당신이 살아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 첫날부터 오늘까지 이 몸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기분이었는지 살펴보자. 감각적 자료들의 카탈로그랄까. '호흡의 현상학'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되겠다. (p.7)

살아오면서 무수하게 겪는 크고 작은 압박과, 고통과, 슬픔과, 기쁨, 환희, 놀라움, 혹은 무미건조함을 다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가 제아무리 뛰어난 작가일지라도 말이다. 그렇지만 제 몸에 새겨진 시간의 흔적과 제 정신에 쌓이는 감정의 순간들을 한시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정 자신의 삶을 살았다고 말 할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책이다.

그러니 매 순간의 '나'를 느끼는 '나'는 마땅히 행복하리라. 비록 내일 당장 죽게 된다 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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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4-11-20 0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 예순에도 나이 열에도 나이 서른에도
참말 언제나 오늘은 기적이지 싶어요

비의딸 2014-11-20 11:06   좋아요 0 | URL
참말.. 참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