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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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리엇과 데이비드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적이라고 보여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젊은이들이다. 그들에게는 꼭 같은 꿈이 있었는데, 아주 넓은 집에서 많은 아이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미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헤리엇과 데이비드는 결혼을 했고, 런던 근교에 빅토리아 양식의 거대한 주택을 마련한다. 그리고 그 저택에서 첫째, 둘째, 셋째, 넷째 아이를 낳는다. 잦은 임신과 출산으로 지친 헤리엇의 건강 상태는 열외로 친다면,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그들의 소망은 거의 이루어 진 듯했다. 그러나 문제의 다섯째 아이가 잉태되고, 소설은 그렇게 무르익는다. 정상과 비정상, 문제 없음과 문제 있음으로 양분되면서.

 

다섯번째 아이인 '벤'은 임신기간 동안에도 먼저 태어난 형제들과는 사뭇 다른 아이였다. 벤을 뱃속에 담고 있는 동안 헤리엇은 지나치게 활동적인 태아로 인한 물리적인 고통외에도, 이전 네번의 임신 때는 느끼지 못했던 이물감 때문에 힘들어 한다. 벤은 태아였을 적부터 어머니를 거부했고, 하룻빨리 어둡고 답답한 자궁 속을 벗어나고 싶어하는 듯 했다. 헤리엇 역시 자신의 뱃 속 아이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정상이 아니라고, 어느 순간에는 '원수'라고 까지 생각했다. 벤은 태생부터 축복받지 못했다.

 

벤은 예쁜 아기가 아니었다. 그의 외모는 거의 유인원에 가까웠으며, 갓 태어난 아이의 눈은 분노와 증오로 빛나는 것 같았다. 데이비드와 헤리엇을 비롯한 네명의 아이들과 그들의 일가 친척들은 벤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소리내서 말하는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삼가했다. 벤의 출생과 성장을 주욱 지켜본 담당의사 역시 벤의 비정상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다만 조금 다를 뿐이고, 다르다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다름은 존중되어져야 마땅한 것이지 배척되어서는 안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의 '다름'은  기타의 모든 가족들을 힘들게 했고, 헤리엇과 데이비드의 소망인 행복한 가정을 파괴했다. 해마다 헤리엇의 집에서 열리는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파티에 참석하던 일가친척들은 점차로 파티에 참석하길 거부했다. 헤리엇의 세 자녀는 집을 떠나가길 원했고, 벤을 임신한 엄마가 적절히 돌봐주지 못한 넷째 아이 폴은 다루기 힘든 아이가 되어갔다. 이 모든일의 근원에는 정상적이지 못한  '벤'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태생적 비정상성으로 인해 부모와 가족으로 부터까지 환영받지 못하는 '벤'에 대해 독자로서 동정하고 가족들의 처사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작가 레싱은 '벤'에 대한 연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기엔 벤의 모습이나 행동은 공포스러울 만큼 기괴하다. 벤이 어느 순간 가족 중 누군가를 헤치지 지는 않을까 초조할 정도다. 이쯤되면 벤은 가족을 떠나는 것이 마땅하다. 가족의 평화를 위해.  벤이 우리하고 아주 달랐기 때문에 데려간거야. (104쪽)

 

이윽고 벤은 요양원으로 보내지고, 가족들은 마치 해방을 맞은 듯 활기를 되찾는다. 그러나 헤리엇은 자신이 낳은 아이를 버렸다는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뿐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았다는 자격지심으로 자신이 가족들로 부터 비난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눈에 띄게 안정되어가는 가족들의 평화는 죄책감과 공포로 언제 폭발할 지 모르는 헤리엇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곳에 시한폭탄을 감춘 것처럼 위태롭다. 헤리엇이 벤을 되찾는 대신 가족들의 안정을 꾀해야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너무 쉽다. 정상성이 양육의 기준이 될 수 없고, 다름을 존중하는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헤리엇은 벤을 되돌려야 했다. 그리고 가족들은 흩어진다.

가족들이 뿔뿔히 흩어지는 대신 벤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공존하는 방향을 모색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은 정해진 답이다. 그러나 흩어진 가족도 각자의 삶을 위한 답일 수 있다. 어차피 삶은 각개전투일 수 밖에 없지 않은가.

 

평범하고 건강한 두 젊은이가 행복한 가정생활을 꿈꾸는 것은 이 소설의 배경인 1960년대나, 21세기인 현재나 마땅히 장려되어야 할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1919년 생인 작가 도리스 레싱은 사람들은 가족 생활이 최고라고 세뇌를 당하는 거야.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지. (39쪽) 라고 말한다. 도대체 그녀는 어떤 가족적 배경을 가졌기에 그토록 '가족'에 대해 냉소적일 수 있었던 것일까.

1차 세계대전 상이용사였던 도리스 레싱의 아버지는 영국을 떠나 아프리카 초원인 짐바브웨에 정착한다. 어린 레싱은 일반적으로 추종되는 주류의 생활을 벗어나 독립적인 자유 속에서 자랐다. 그러한 그녀의 성장배경은 레싱이 평생 어떤 집단에 동조하기를 거부하는 작가로 서게 했다. <다섯째 아이> 역시 이러한 독립적인 사상속에서 탄생된 작품이다. 레싱이 그리고자 했던 것은 기형아를 낳은 부모들의 선택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나 단죄가 아니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가족은 정말 사랑인가. 인류 최대의 미덕은 정말 가족애인가.

 

그들은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길들여지고 가정적이며 야생과 자유로부터 멀어진 불쌍하기조차 한 모습으로 거기 앉아 있는 두 어른인 자신들을. (103쪽)

 

이 이야기를 통해 레싱은 희생뿐인 모성애라든지, 부모로서의 의무, 가족애 따위가 현대사회에는 적합지 않은 허상이라는 것을 보이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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