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 괴물이 된 이십대의 자화상 ㅣ 지금+여기 3
오찬호 지음 / 개마고원 / 2013년 12월
평점 :
지금 이십대들이 보여주는 삶의 지향이나 행태는 획일화된 외곬으로만 치달은 나머지 살벌한 경쟁 자체가 '모범적인 삶'으로 바뀌어 있다. 사회가 어쩔 수 없으니 그렇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그렇게 사는 것을 바람직한 사회생활로 이해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예컨대 평생을 학습능력 하나로 '단죄'받고 사는 시스템 따위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이를 문제시하기보다는 오히려 학력차별(학력위계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더 열심이고, 자기계발서를 인생 최고의 경전인 듯 떠받들며 안으로는 극단적 자기관리의 고통에 피가 마르면서도 밖으로는 사소한 경쟁우위를 위해 어떤 차별도 서슴지 않는 걸 '공정'하다고까지 여긴다. 도대체 무엇이 사태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은 걸까? (머리말 중에서)
현재 우리의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던 현병호의 <우리 아이들은 안녕하십니까>를 읽고 난 후, 이 책을 읽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덤벼야 겨우 살아남을까 싶은 경쟁으로 부터 내 아이만은 자발적 탈락했다고 좋아라만 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제 열다섯이 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려야만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이 보편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서울과 수도권의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하는 강사이고, 이 책은 2008년 부터 시작해 5년간 쓴 박사논문을 일반의 독자들이 읽기 쉽게 재구성한 것이다. 경쟁을 모범적인 삶이라고 여기며 오늘도 '닥치고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이십대 대학생들이 경쟁우위에 서기 위한 경주에서 어떠한 차별도 '공정'하다라고 생각하며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게 된 경위에 대한 연구이며, 지은이는 그 배후에 노력하면 세상에 못 이룰 게 없다는 식의 '자기계발의 논리'와 그를 배양하고 양산하는 '자기계발서'가 있다고 주장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80% 정도가 대학에 진학하는 오늘날에는 대학 졸업생의 80%는 비정규직에 내몰릴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 등장하는, 혹은 지은이에게 강의를 듣고 있는 대다수의 학생들은 현재 비정규직들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자기계발에 게을러 비정규직이 된 그들은 자기계발에 몸바쳐 헌신하는 자신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은이는 이것이 모든것은 개인의 책임이라고 보는 불합리한 사회적 함의와 이를 확산하는 자기계발서에 큰 책임이 있다라고 보는 것인데, 이시대의 자기계발이란 진정한 자기함양을 위한 계발이 아니라 고용인으로서 회사에 철저히 충복하기 위한 개발을 강조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십대가 스펙을 쌓고 자기계발에 열을 올리는 것은 어떻게든 취업을 하겠다는, 비정규직이 되지 않겠다는, 오로지 살아남겠다는 절체절명의 몸부림인 것이다.
온오프라인의 서점 판매 순위 1~10위에 있는 이십대 관련서 중 8~9종이 자기계발서라고 지은이는 밝히고 있다. 이들은 사회적 강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위한 자기계발과 스펙을 쌓기위해 없는 시간도 쪼개 쓰며, 지칠때마다 자기계발서를 통해 위안을 얻는 것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려니, 전투적인 자기계발 짬짬이 멈춰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살피면서.
오늘날의 이십대들이 경쟁을 위한 차별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자신의 위치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볼 수있는데, 불안의 이유를 사회구조적인 면에서 찾지 못하고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하고마는 것이 물론 자기계발서나 힐링서 때문 만은 아니다. 단지 자기계발서 때문이라면 차라리 더 문제가 쉽겠지만, 그 이전에 유아 시절 부터 '나'를 먼저 강조하는(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교육이 문제일 것이고, IMF시대를 지낸 부모의 사회 경제적 불안이 양육과정에서 자녀에게 그대로 전달되며, 공동체의 공존보다는 경쟁을 내면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이 모든 문제의 시발점은 사회구조적으로 공평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안이겠는데, 구조의 피해자들이 가장 충실한 구조의 유지자로 기여하기에 사회는 변화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125쪽) 나가는 것이다. 이에 지은이는 대안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 시발일 수 있다고 보았다.
나 역시 지은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감하지만, 그 대안을 생각할 때면 눈앞이 캄캄해지는 심정이다. 사회구조적인 문제는 개인이 바꿀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과 지성인이라는 대학생들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기 위해 남을 끌어내리는데 설마 이정도까지 유치하고 각박할까 싶은 것이다. 지은이는 왜 우리가 대안을 고민해야 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확실히 공감하는 게 자기계발 권하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근본적인 해결책이지 않겠는가(195쪽)고 주장하지만, 그마저도 나는 추상적으로 들린다. 자기계발 논리의 배후로 말하자면 자본일 것인데 말이다. 그것도 거대 자본이.
역시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자발적 탈락 뿐이지 않을까. 그러나 자발적 탈락자들은 어쩌면 패배자로 매도되기 십상이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만은 높은 우위에 설 수 있다는 자기계발의 허황된 믿음에 오늘도 내일도 여전히 올인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여기기 십상일 텐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이 책은 좀 널리 두루두루 읽혔으면 좋겠다. 적어도 아프니까 청춘이다 보다는 멈추면 보이는 것들 보다는. 그래서 아픈 것은 청춘이기 때문만이 아니라는 것을, 멈춰서 봐야 할 것은 자신의 부족함이 아닌 공동체의 존립 속에 나 개인의 삶이라는 것을 한번쯤 생각해 보았으면 싶다. 그래야만 우리에게도 미래가 있는 것이니까.
"대개 사람들은 위협당할 때 형편없어지네. 그런데 우리 문화가 사람들을 협박하거든. 우리 경제도 그렇고. 우리 경제 체계에서는 직장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위협을 느끼지. 언제 직장을 잃을지 모르니까 걱정이 되어서 말야. 그리고 사람은 위협을 받기 시작하면 자기만 생각하기 시작하네. 돈을 신처럼 여기기 시작하는 거야. 그게 다 우리 문화의 속성이라구."(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미치 앨봄/세종서적/19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