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밀란 쿤데라 전집 9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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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한 일상 속에 어느덧 찾아든 작은 설레임은 격정으로, 격정은 다시 무덤덤한 일상으로... 그리고 나면 그것으로 끝. 그 끝에 있는 것은 헤어짐이거나 동료애, 우정 혹은 연민 같은 것으로 남겨지며, 이런 것들이 세월을 덧입으면 '정'이라는 이름으로 끈끈해지는 것, 그것이 사랑의 수순인 것 같다. 간혹 무덤덤해진 일상 속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을 맞게 된다면 일상은 다시 격정으로, 설레임으로 역순하기도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랑에는 수명이 있다. 적어도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을 함의한 에로스적  '사랑'에는 말이다.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도 그랬다. 설레임이 격정으로 변환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불과 하루 반나절하고 30분쯤) 격정이 일상이 될 즈음 샹탈은 권태를 느낀다. 남자들이 더이상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다는 슬픔어린 그녀의 토로는 나이어린 애인을 향한 투정 아닌 투정일 수 있었겠지만, 장 마르크에게 그것은 샹탈에 대한 연민을 불러 일으키며, 그녀가 자신을 떠날 수도 있겠다는 혹은 그녀 스스로 나태해져 자신에게 더이상 여자로 다가오지 않을 수 있겠다는 일종의 불안을 느낀다. 장 마르크는 연상의 여인 샹탈과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모종의 사건을 계획하고, 샹탈은 샹탈대로 연하의 애인 모르게 비밀을 간직하게 되는데...

 

이야기는 재미있고 밀란 쿤데라의 다른 이야기들보다 훨씬 간소하지만, 장면들은 상징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꿈 속인지 현실인지 종잡을 수 없고, 상상인지 실제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이야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야기들 보다 훨씬 더 많은 상상력이 필요했다.

 

강신주의 <감정수업>을 읽으며 밀란 쿤데라의 <정체성>을 다시 읽어 보았다. 나 스스로 샹탈이 되어 보았다. 어느날 문득 알 수 없는 존재로 부터 날아온 연모의 편지를 읽은 나는 샹탈과 마찬가지로 한결 생생해지고, 활기차 진다. 알 수 없는 누군가라는 것에 일말의 두려움도 느끼겠지만, 그보다는 미지의 시선으로 나라는 존재에 대해 새로운 자긍심을 갖게 될 것이다. 남자에게 여전히 매력적일 수 있는 여자로서의 자긍심(?)은 나의 삶 전체를 아우르며 더 살만하고, 더 행복한 세상으로 주변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정체성. 타인의 시선에 의해서만 내가 '나'라는 것을 이해 할 수 있다. 서로를 비추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정체성을 갖지 못할 것이다. 꼭 사랑이 아니어도, 누구에게나 타인의 존재는 필요하다. 내가 '나'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일상은 마침내 의외의 사건 앞에 다시 격정으로 이어지고, 얼마간의 격정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들은 또다시 권태로워지겠지. 의심하겠지. 서로에게 상대가 최선인지를. 그것이 이른바 사랑이며, 인간은 사랑에 의해 더더욱 풍부하고 자긍심 넘치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사랑 이야기가 맞다면, 샹탈과 장 마르크의 사랑은 결국, 인간은 자기 자신 이외에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그녀가 이 편지를 쓴 사람이 그라는 것을 짐작했다면 무슨 이유로 그녀는 그것을 그토록 적대적으로 받아들였을까? 왜 그렇게 잔인했을까? 그녀는 모든 것을 짐작해 놓고 왜 그 속임수의 이유는 짐작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그의 어떤 면을 의심하는 것까? 이런 모든 의문에 대해 그는 오직 하나의 확신만 가질 수 있었다. 그는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 하긴 그녀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다. 그들의 생각은 전혀 반대되는 방향을 취했고 그 두 방향은 더 이상 만날 길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135쪽)

 

사랑에 위대함이 있다면 그것은 평범을 더이상 평범으로 존재하지 않게 한다는 거다. 일상이 더이상 일상일 수 없게 하는 것이 사랑의 힘이 아닐까. 샹탈이 원했던 것은 장 마르크의 일상적 사랑이 아니라, 미지의 남자로부터 받는 일탈적 사건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누구나(?) 원하는 사랑의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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