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평점 :
품절


대학교수인 데이비드 짐머는 아내와 두 아이를 비행기 사고로 잃고 자기파괴로 삶을 몰아가던 중 우연히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1920년대의 무성영화의 한 장면을 보게 된다. 콧수염을 기른 매우 잘생긴 배우가 출연한 '은행원 이야기'는 무성 코메디 영화였는데, 짐머는 바로 그 헥터 만의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보고 짐짓 웃음을 터뜨린 것이다.

 

6월 이후로 내가 뭘 보고 웃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고, 뜻밖에도 내 가슴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오며 허파가 들먹이기 시작하자 나는 내가 아직 완전히 바닥을 보이지는 않았다는 것, 나의 일부가 계속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18쪽

불의의 사고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배우자가 되었든 아이가 되었든 가족을 잃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것인데, 그들을 모두 한꺼번에 잃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을 것이란 상상을 막연하게 해 본다. 직접적인 인연은 없지만, 건너 아는 사람 중 그런 고통을 당한 이를 알고 있다. 그는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로 남편과 아들 딸을 잃고 그 혼자만 살아났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그의 소식은 그가 정신과에 입원해 있다는 것이였다. 그후로는 그의 불행을 지나가는 말로라도 입에 올리지 않으려 조심하는데, 불경스러운 말 한마디가 그의 불행을 부채질하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심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짐머는 자기파괴를 일삼던 중, 자신의 삶을 다시 이어가게 해 줄 헥터 만을 알게되고, 무성영화 배우로서의 헥터 만에 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살고자하는 본능적인 욕망을 이어간다. 짐머가 파헤치는 헥터 만의 일대기는 이 책을 이어가는 중심 스토리인데, 그는 1928년이 다 저물어가던 때에 갑자기 실종되었다. 실종 당시 헥터는 스물여덟이였고, 그후 60년이 지난 1988년에도 그의 실종에 대해서 아무것도 밝혀진게 없었다. 이에 데이비드 짐머는 사라진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쓰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자기 스스로에게 증명해 내고 있었던 것이다.

헥터 만의 책이 출판된 후, 짐머는 헥터 만의 아내라고 주장하는 프리다로부터 의문의 편지를 받게 된다. 이윽고 연이어 밝혀지는 헥터 만의 비밀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마치 거미의 입으로 부터 끊임없이 실을 뽑아내듯이 줄줄 흘려나오는 이야기들은 나로하여금 작가 폴 오스터의 끊임없는 상상력에 대해 또한번 놀라게 했다. 오스터는 이 책에서도 역시 '실종'에 얽힌 비밀을 다루고 있는데, 그 비밀들이란 다름 아닌 우연들의 연속이며, 우연들이 한겹한겹 다져진 결과가 바로 생의 비밀인 것이다. <달의 궁전>이나 <브루클린 풍자극>, 그리고 사적인 글쓰기에 관한 책 <빵굽는 타자기>와 <환상의 책>이 알게모르게 모두 인드라망의 구슬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이야기인 이 이야기는 한 작가가 같은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많은 상상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지에 대한 절정이다. 아, 나는 아직 폴 오스터의 미궁에서 헤어나고 싶지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