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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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타인의 고통이 날마다 중계되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그 안의 사람들은 그것이 비극인지도 모르는 채로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실이, 지켜보는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든다. 사건 현장에는 경찰이 출동하고, 방송 카메라가 들이닥친다. 인터넷은 비난여론으로 끓어오르고, 사회는 경악한다. 현대의 비극은 그렇게 떠들썩하게 상연된다. 그러나 그들의 삶에 대해 우리는 과연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288쪽/해설/차미령

 

적어도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그들의 불행에 대해. 표면적으로 들어난 조각들을 대충 끼워맞춰 보여주는 언론플레이 외의 사실,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들이 어떻게 고통스러웠는지, 그들이 얼만큼 불행을 느꼈는지,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는지, 결과로 중계되는 현실 사건은 얼마나 오랫동안 진행되어 온 일인지.

 

백가흠. 여인인줄 알았더니 꽃미남이다. 책날개에 인쇄된 사진을 들여다 본다. 살짝 숙인 얼굴과 손가락의 각도, 부드럽게 주름진 웃음짓는 눈꼬리와 입꼬리. 백가흠이라는 이름에서 느꼈던 어딘가 당찬 여자, 이를테면 <아웃>의 기리노 나쓰오 같은 타입의 여자일 것이라는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른 백가흠의 모습이다. 책을 다 읽고나서 사진을 다시 들여다 보자, 백가흠이란 미묘한 이름이 더더욱 미묘해지고 부드러운 그의 웃음이 약간은 설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뼈아픈 이야기를 썼지만,

<조대리의 트렁크>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들은 나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정말 뼈가 아프지는 않았다. 가출 소녀에게 일방적인 착취를 당하면서도 그아이를 매일 기다리는 폐품팔이 할아버지의 헌신에, 쓰레기와 함게 뒹구는 아직 말도 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의 굶주림에도, 옷장안에 숨어 누군가의 자살을 엿보는 한 아이의 비참한 마음도, 권위에의 맹종이 불러온 참사로 꽃게처럼 걷게 된 한 젊은 남자의 비극에도, 나는 가끔 가슴을 쓸며 그저 얼마간의 안타까움과, 혀차기, 그리고 '세상이 뭐이래!' 따위의 불만 한마디면 충분한 것 같았다.

나는 모른다. 폐품팔이 할아버지가 말도 안되는 헌신을 하고도 자신을 비참하게 느끼지 않는 이유를, 자신의 아이를 쓰레기더미 속에 방치하면서도 때때로 행복했을 한 어린 엄마의 마음을, 멀쩡한 몸으로 군대를 간 후 꽃게걸음을 걷게 된 아들을 둔 엄마의 찢어지는 가슴을,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살아갈 세월을. 어쩌면 모르기 때문에 그토록 쉬운 연민의 마음을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정혜윤의 <침대와 책>을 읽다가 <조대리의 트렁크>를 발견했다. <침대와 책>에 의하면, 백가흠은 신문의 사회면을 자주 본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소설보다 현실이 더 가혹한 것 아니냐고 했다는데.... 가혹한 현실을 내 피부로 느끼지 않음을 그나마 감사하며 살고 싶은 소시민적 생각이 든다. 좋은 것만 보고 살고 싶은 나의 이기심을 그저 소심함일 뿐이라고 항변하고 싶다.

아, 눈 감는다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 타인의 고통이여. 그러나 본다고 해서 내 것처럼 느낄수 없고, 사실은 느끼고 싶지 않은 그러나 느낄 수 있어야만 좋은 세상이 되리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있는...

 

동정Sympathy은 상대방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나도 똑같이 느끼는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슬퍼할 때 나도 같이 슬퍼하며 눈물 흘리는 것이 동정이다. 그러나 공감Empathy은 그것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의 고통을 깊이 이해한 후에 다시 나 자신으로 돌아와 어떻게 하면 그를 도울 수 있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 공감이다. 공감을 하려면 타인을 나와 분리된 독립적인 인간으로 볼 수 있고, 그의 마음을 잠시 내 것처럼 느껴도 자기를 잃지 않을 수 있는 건강한 자아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자아의 경계가 약한 사람들은 공감해야 할 순간에 상대방과 하나로 합쳐져 버린다. 즉 남의 고통에 사로잡혀 자신도 구덩이에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는 탓에 시련이나 아픔과 만나는 것을 꺼린다. (심리학 나 좀 구해줘/폴커 키츠, 마누엘 투쉬 지음/갤리온/86쪽)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다는 착각으로 나는 가끔 눈물을 흘리지만, 이 책에 의하면 나는 적당한 거리의 안정된 내 울타리 안에서 가끔 눈물을 흘리는 정도로만 만족하며, 그들을 동정하고 편한한 내 삶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이 끔찍하게 여겨 질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는 아직도 내겐 요원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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