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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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 씨'라는 영화 제목에서 차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막돼먹은 영애 씨'를 아버지 카라마조프를 보면서 떠올렸다. '막돼먹은 영애 씨'라는 프로를 안 보았기 때문에 영애 씨가 정말 막돼먹었는지, 막돼먹었다면 어떤식으로 막돼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카라마조프 가의 아버지 표도르를 보면서 그야말로 '막돼먹은 표도르 씨'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두 아내에게서 세 아들을 얻었다. 지참금을 들고 온 아내들은 차례로 세상을 떠나고 지참금은 고스란히 표도르의 차지가 되었으며, 그녀들이 남긴 아들들에 대해서라면 표도르는 소 닭 보듯 여긴다. 결국 그들은 남의 손에 의해 성인이 되어 표도르를 방문한다. 첫째 아들 미챠는 어머니가 남긴 재산에 대해 아버지와의 담판을 위해, 둘째 이반은 형의 약혼녀인 카체리나에 빠져서, 셋째 알료샤는 거룩한 수도사가 되기 위해 그들의 고향이며 아버지가 있는 곳을 찾는다. 그 와중에 미챠는 아버지가 눈독을 들여온 그루센카에게 홀딱 반하고, 아버지는 아들과 연적이 된다. 그리고 곧 일어나는 살인 사건. 과연 범인은 미챠로, 친부를 살해한 것일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읽고나면 다양한 인간 군상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사회심리학 교수의 말에 힘입어 오래 전에 읽기를 시도했었지만, 그 당시에는 1권의 1/3도 채 읽지 못했다. 불화중인 카라마조프 가의 남자들이 추종자들에 의해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조시마 장로의 암자에서 화해를 위한 회합을 갖기로 한 장면 쯤 까지로 기억하는데, 자못 연극적이며 장황한 대사들에 기가 질렸고, 셋째 아들인 알료샤를 비롯한 종교적인 장면들이 거북스러웠던 것이다.

더구나 내가 읽기를 시도했던 민음사 출판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전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한 권 한 권이 너무도 두껍고 투박한 일명 벽돌책이기 때문에 미리부터도 잔뜩 긴장했던 탓도 있겠다(민음사의 세계문학전집에 대해서라면 나름 불만이 좀 있는데, 번역이 좋고 책이 튼실하다는 훌륭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홀쭉한 판형으로 인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처럼 들고 읽기에는 부담스러운 책들이 더러 있다). 원본의 판본을 따른 탓이겠지만, 4부 12편에 에필로그까지 있는 마당이라면 좀 더 읽기 좋게 나누어 분철했더라도 좋지 않았을까. 이건 뭐 책 세 권을 읽는 동안 손목 골절이라도 생긴 것 마냥 힘들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이러저러한 이유로 읽기를 실패한 후, 오랜기간 다시 읽기를 시도하기조차 껄끄러웠던 카라마조프네의 이야기를 읽어 볼 마음이 생긴 것은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면서 였다. 촘스키는 이 책에서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의 서사시 '대심문관'에서 발췌한 부분을 인용했는데, 바로 이 글을 읽고 지금이라면 카라마조프가 어렵지 않겠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 질 것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193쪽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창조해 낸 것일 수 있겠다는 의심을 요즘들어 하고 있는 나에게 이보다 더 흥미로운 글이 없었다.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대중적인 신은 진정한 신이 아닐 수 있겠다 라는 의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신이 인간과 세상을 그의 피조물로써 '사랑'한다면 우리 세상에는 설명되지 않는 일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유를 얻고나면 어서 빨리 자신이 경배할 대상을 찾는 것보다 더 끊임없고 더 고통스러운 근심거리는 없는 법. 경배를 하긴 하되 공동으로 해야 한다는 요구야말로 인간 개개인이 개별적이건 인류 전체로건 태초부터 골머리를 앓아온 주된 문제인 것이다. 공통적으로 함께 경배하기 위해 그들은 서로서로를 검으로 박멸해 나갔지. 그들은 신을 창조했고, 서로서로에게 너희의 신을 버리고 와서 우리의 신들 앞에 경배하라. 그러지않으면 너희와 너희 신들에게 죽음이! 라고 호소했지. -1권, 535쪽

1600쪽이 넘는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중 역시 백미라면 이반이 열 페이지 넘게 읊어대는 자신의 서사시 '대심문관'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심문관은 어느날 재림한 예수를 비난하는데, 인간에게는 천상의 빵을 위해 지상의 빵을 희생 할 만한  믿음이 없으며, 때문에 그들에게는 권위에의 복종을 위한 신비나 기적이 필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은 너무도 설득력있게 들려서 나는 대번에 이반에게 빠져들었다. 이반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면에서는 악마에 가깝게 여겨지기도 하지만, 악마라기 보다는 투철한 자의식으로 무장한 지적인 인간인 것이다. 오히려 악마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므로써만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지적이고 논리적으로 보이는 이반의 주장은 악마적이기 보다는 탐구적으로 여겨지며 바로 그점이 나에게는 가장 매력적인 것이다. 그는 뭇대중처럼 누구나 몰려가는 줄에 서지 않으며, 경배를 받쳐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의심을 내려 놓지않는, 그러나 결국엔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지극히 인간적인 캐릭터이다.

그에 비해 순종적이며, 지극히 선하고 순수해 그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을 불러 일으키는 천사와 같은 알료샤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역시 반감을 가졌는데, 정령 인간은 천사일 수 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는 카라마조프의 핏줄이 아니던가. 인간에 대해 의심이 많은 나로서는 알료샤의 내면에 대해서도 역시 믿을 수 없다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아버지인 파블로비치를 가장 많이 닮은 것은 첫째 미챠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머리보다는 행동으로 말하고 부패 속에 영혼을 질식시키는 방탕한 자이며, 다소 희극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저열함도 언뜻언뜻 비쳤는데, 그를 도스토예프스키는 카라마조프적 저열함이라고 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카라마조프라고 여겨지는(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와 백치 여인 사이에서 잉태 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하인 스메르자코프에 의하면 표도르를 가장 많이 닮은 인물은 의외로 둘째인 '이반'으로 밝혀진다. 어째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 케케묵은 위선과 미사여구에 대한 반항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반의 그것은 아버지인 표도르의 광대짓에 견줄만도 하다 싶다.

 

방탕하고 탐욕스럽고 저열하며 막무가내인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살해 되고, 미챠는 친부 살해범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미챠가 살해범이라는 증거는 바닷가의 모래알 만큼이나 널려있고, 사람들은 모두 미챠가 범인임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나 알료샤만은 미챠의 결백을 의심하지 않는다.

3권의 삼분의 일 가량을 차지하는 이 재판 장면은 소설의 절정인데, 미챠를 친부 살해범으로 모는 검사의 가열찬 주장이나 배심원의 동정을 유발하기 위한 변호사의 절절 끓는 논고는 도스토예프스키의 특기인 장황함으로 몇 장에 걸쳐 계속되지만 지루함을 느낄 여지가 없다. 변호인으로 페테르부르크로부터 초빙된 페츄코비치는 살인이 일어났다 하더라도, 이 사건은 친부 살해는 아니라는 희안한 주장을 펼치는데, 낳았다고 다 아버지가 아닌 즉 아버지 노릇이라고는 해 본 적이 없는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를 아버지라고 볼 수 없기 때문에 친부 살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페츄코비치의 바로 이 주장 때문에 미챠는 전락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막돼먹은 아버지일지라도 어떻든 부권에 대한 도전은 폐륜이며, 살인은 죄악이라고 보는 심성은 꼭 배심원들이 촌놈에 지나지 않기 때문 만은 아닐 것이다. 이 역시도 어쩌면 가장 러시아 적인 심성이 아니였을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십 대에 사회주의 경향을 띤 모임에 참석하고, 고골에게 보내는 벨린스키의 불온한 편지를 낭독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을 언도 받고 극적으로 감형된 후, 어이없게도 극우 보수주의자가 되었다. 때문에 친부 살해라는 본 사건은 조국인 러시아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거나 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은 도스토예프스키 최후의 작품으로 그의 모든 인생과 역량이 집대성 되어 있는 만큼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큰 무리는 없을 듯 하다.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죄와 벌>에 비해 읽기가 수월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카라마조프의 이야기를 읽다보니 <죄와 벌>을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졌고, 그 외의 <악령>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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