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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 - 미국이 쓴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벗기다
노엄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시대의창 / 2014년 1월
평점 :
대한민국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
국가란 국민 입니다. -영화 변호인 중에서
변호인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가 지나치게 감정에 치우친 면이 없지않다는 평가를 받는 이 장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의 가슴을 울렸다. 국민이 곧 국가라는 말은 너무도 지당해서 오히려 불경스럽게 여겨질 지경이다. 노무현 정부의 비서실장이었던 문재인은 2009년 6월 9일, <한겨레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비서실장이 기억하는 노무현에 대해 묻자, '노 전 대통령을 비주류라 하지만 사실 이땅의 진정한 주류는 서민이 아닌가. 진정한 주류에게 주류의 몫을 돌려주고 싶어했던 대통령으로 기억하노라' 라고 말했다.
노무현, 그는 물론 완벽한 대통령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았어야 할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말할 필요조차 없겠지만, 노란 풍선을 흔들며 그의 청와대 입성을 마르고 닳도록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도 그랬고, 무엇보다 그 자신을 위해 그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만큼만이라도 서민의 입장에 서주었던 대통령이 우리의 역사에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겨도 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한다. 그는 어쨌든 마지막까지도 너무나 처절하게 서민스럽지 않았던가.
우리 모두의 불행이 바로 그것에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주류와 비주류의 길은 이미 정해져있다는 절대 믿고 싶지 않은 현실 말이다.
<촘스키, 만들어진 세계 우리가 만들어갈 미래>를 읽으며, 가장 의심스러웠던 것이 국민과 주류에 관한 것이였다. 한 나라를 구성하는 국민을 100으로 보고 비주류와 주류를 80과 10, 더 극단적으로는 99와 1로 나누곤 할 때, 과연 어느 쪽이 주류인가. 국민의 대다수가 주류가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주류'에 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다. '조직이나 단체 따위의 내부에서 다수파를 이르는 말.'
이 주류에 관한 헷갈림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은 아닌데, 우리에게는 자못 민주주의의 원조격으로 여겨지는 미국에서도 90퍼센트의 국민은 주류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 국민의 80%가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으며 정부가 국민 모두의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는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에 의해 운영된다고 생각하고, 무려 94%는 정부가 국민의 의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 시기에, 어느 당도 국민 여론을 반영하지 않는 듯 하다. -117쪽
한 나라가 나아갈 바를 결정하는 것은 주류일텐데, 미국이든 한국이든 그 주류는 어쨌든 국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한다는 것일까.
이 책은 촘스키가 2007년 부터 2011까지 <뉴욕 타임즈> 신디케이트에 기고한 칼럼을 묶은 것으로 <촘스키, 우리가 모르는 미국 그리고 세계>에 이은 두번째 칼럼집이다. 이 책의 52개 칼럼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탈을 쓴 전쟁광의 질주'와 '속고 속이는 진실 게임:미국에 민주주의는 없다', '세계 최강대국 타이틀전'라는 소제목 아래에 나뉘어 실렸다.
러시아 유대인 이민2세인 노엄 촘스키는 언어학자이며, 인지과학 혁명의 주역이다. 또한 그는 약자편에 서서 사회운동을 주도하는 일을 팔순을 넘긴 현재에도 멈추지 않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노엄 촘스키의 신자유주의와 미국의 제국주의에 관한 비판서인 것이다.
촘스키는 기본적으로 미국을 범세계적인 패권국이라 보기 때문에 그의 글은 미국내의 주류 언론에게는 거부 당하지만, 그렇더라도 그의 목소리는 국경을 넘어 세계로 퍼져나가고, 이 책 역시 그 중 하나로, 2007년에서 2011년 사이에 있었던 미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일들로 미국이 직접적으로 관여된 역사적 사건들에 관한 것이다.
중동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전쟁들과, 변화와 희망을 내건 오바마의 당선, 그리고 2009년 그의 노벨평화상 수상, 승승장구하는 중국의 오늘과 미래, 미국의 영향력으로 부터 점차로 벗어나고 있는 라틴아메리카, 미국의 강력한 우방이 아닌 까닭에 분할되고 찢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의 고립과 함께 영토 확장에 대해 공공연하게 들어나는 이스라엘의 야욕, 석유자원과 세계패권을 둘러싼 미국의 제국주의적 음모, 금융위기를 불러왔지만 정작 책임은 서민들에게 지우고 이제 다시 자신들의 배를 불리우며 돈잔치를 벌이고 있는 금융재벌들을 위한 금융 자유화, 정부를 지배하는 까닭에 정부로 부터 보호받고 보조금까지 받으며 더 많은 이윤을 위해 세계민을 이용하는 기업들의 전략인 자유무역협정, 그리고 2011년 10월 보스턴에서 일어난 풀뿌리 운동 '점령하라'에 이르기까지, 노엄 촘스키는 이 모든 사건들에서 비판적 시각을 늦추지 않는다.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즉 독립적인 학문기관으로 대우받는 교수인 촘스키는 그야말로 1%의 주류 지식인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권력의 불의를 향한 날선 비판과 행동하는 민중 지식인으로서의 모든 활동을 멈추지 않는 덕에 그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기도 한다.
촘스키는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참여를 게을리하지 말고, 또한 행동하라는 마르크스의 가르침을 철저히 실천하는 지식인으로, 미국인이며 유대인이기도 한 그는 가자지구로 향하는 구호선 '자유선단'을 납치하는 파렴치한 범죄행위를 스스럼없이 벌이는 이스라엘과 이를 묵인하며 어쩌면 지지하기까지 하는 듯한 미국을 불량국가와 그 후원국이라 칭하며 비꼰다. 또한 미국이 세계에 행동하는 방식은 그들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암묵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며, 국제법과 국제규범을 무시하며 미국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타국가들에서 쿠테타를 조장하기도 하고, 경제 제재를 가하거나,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면서 이를 모두 프로파간다(심리공작용으로 선전되는 메세지, 일명 흑색선전)로 무마한다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자본이 국경을 초월해 부를 축적하는데만 혈안을 올리는 반면 촘스키는 국경을 초월해 세상의 변화를 꾀하는 지식인으로서의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만을 생각하느냐, 모두를 생각하느냐의 차이는 이토록이나 엄청나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한 나라뿐 아니라 세계를 움직이는 '주류'라는 것이 어느쪽이여야 할 지는 굳이 힘들여 고민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미국은 모든 면에서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으며, 세계를 지배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미국 경제의 흐름은 제조산업에서 점차로 금융 중심으로 옮아갔고, 최고경영자와 금융 대표같은 사람들의 부는 점차로 더 증가했으며, 부를 거머쥔 그들은 정치조차도 자신들의 부를 늘리는 수단으로 이용한다. 이에 반해 국민 대다수는 실업과 빚의 굴레를 헤어나기 힘들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90%가 없다면 나머지 10%도 없을 것인데, 주류의(다수의) 국민들은 어째서 10%를 용인하는 것일까. 또 소수의 그들은 다수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상상하는 것일까.
미국은 실제적으로 일당 체제이다. 즉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파벌로 나뉜 기업 정당 밖에 없다. (중간생략) 유권자들은 양 정당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지난 수세기 경험했듯이 진보적인 법안과 사회복지는 위에서 내려준 선물이 아니라 민중 투쟁을 통해 쟁취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민중 투쟁은 성공과 좌절을 반복하기 마련이다. 투쟁은 투표소에서부터 노동현장까지, 진정으로 민의를 반영하는 민주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4년에 한번이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진행되어야 한다. -114쪽
중동, 아프리카, 남미에 이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제주의 해군기지 등 세계 곳곳에서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 미국인들에 관한 촘스키의 증언을 보면서 정말 못견디게 화가났다. 대명천지에 어떻게 이런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인지 개탄을 멈출 수가 없는데, 일련의 일들을 보면서 신의 존재에 대해 회의를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라 미국은 하느님의 이름으로 종종 '악'을 뻔뻔하게 행하곤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약한자들의 신은 왜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까. 혹시 신도 '편애'라는 것을 하는 존재인 것이지 엉뚱한 상상까지 하게 된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 모든 상황은 언제든 변할 수 있고, 상황이 바뀌면 주류조차도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그때는 국민여론이 정부로부터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며, 미국 또한 세계의 공존을 위한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현재 미국의 주류들은 미국이 세계의 주인이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함께 세계를 공유하고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깨달아야 하며, 또한 미국민들은 자국의 모든 범죄행위를 옹호하지 않고, 국제법을 준수하라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2011년 보스턴의 '점령하라'와 같은 풀뿌리 운동이 도처에서 끈질기게 일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현재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 역시 자본은 초국적으로 거대해져 가고 있고, 국민들은 점차로 더 궁핍해져가고 있는 이 때에 북한이라는 공동의 적을 앞세워 미국의 속국을 자처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 말이다. 우리 역시 대다수의 국민들은 '애국'이라는 프로파간다에 휘둘리며, 정작 자신들의 이익만을 앞세우는 소수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된 것처럼 과연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곧 국가인가. 대다수 국민의 의견은 소외되고 무시되며, 정부에 반하는 개인에 대해서는 음으로 양으로 사찰과 제재를 가하는 정부 아래의 국민들이 정말 국가인가.
촘스키는 앉아서 책을 읽고 개탄한다고 해서 지식인이 아니며, 행동하고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배우고 성장하라고 말한다. 또한 그래야만 세상 달라질 것이고, 진보할 것이며 진정한 주류인 국민들이 주류의 몫을 돌려 받을 수 있다고 말이다.
우리가 지상의 유일한 지배자가 되려고 하는 이유는 그래야 약하고 미천한 대중에게 자유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복종해야만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대중은 소심해지고 겁먹고 행복해질 것이다. - 193쪽,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발췌
이 책을 읽고 몇년 전 읽다 포기한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다시 읽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