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베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37
서머셋 모옴 지음, 황소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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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디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이 긴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거든," 두 번째에 이어 세 번째 망령이 말했다네. "나 피아를 기억해 주세요.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그 경위는 보석 반지로 나를 아내로 맞은 그가 알고 있나이다."

서머싯 몸은  <인생의 베일>을 단테의 <신곡> 연옥편의 마지막 구절인 피아의 이야기에서 영감을 얻었다. 피아의 남편은 피아의 부정을 의심해 마렘마에 있는 성에서 유독가스로 피아를 죽이고자 하지만, 쉽게 피아가 죽지 않자 그녀를 창밖으로 내던져 버렸다는 이야기인데,  몸은 이 이야기를 듣고 월터와 키티의 이야기를 상상해 냈던 것이다. 관습에 따라 훌륭하다고 여겨지는 결혼을 했지만, 남편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불행의 여자를 노래한 시를 읽고 그 뒷이야기를 상상하는 작가라니, 작가라는 존재는 얼마나 매혹적인가. 내 어찌 서머셋 몸을 좋아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사교계와 사치, 허영만이 인생의 전부라고 보고 배우며 자란 키티는 아름다움을 무기로 좋은 혼처를 찾지만 스물다섯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못한다. 그러다 동생에 밀려 서두르듯 세균학자 월터와 결혼하게 되는데, 월터는 예의바르고 지성적인 남자로 감정을 쉽게 내비치는 사람은 아니지만 키티를 몹시 사랑했다.  

부모님의 결혼생활에서 단지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할 책임이 있는 남편과 그를 조종해 사교계에서 유력한 가문을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내라는 배움을 몸에 각인시킨 키티는 월터가 자신에게 쏟는 사랑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기에 그에게 어떤 욕망도 느끼지 않는다. 키티에게 있어 결혼은 아내와 남편이 맺는 계약관계의 다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월터가 자신을 몹시 사랑한다는 것을 비웃으며, 그를 충실한 남편의 역할로만 이용한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진짜 사랑이라고 여겨지는 남자를 만나는데, 그가 찰스다. 찰스와의 사랑이 진짜사랑이며, 그것을 위해서 희생하지 못할 것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키티는 사랑 앞에 그만큼 순진했다. 찰스는 자기관리에 뛰어난 바람둥이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아내의 부정을 알게된 월터는 그녀를 죽음의 소굴로 데려가는데, 그 결말은 영국 작가 골드스미스의 시 <미친 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로 표현된다. 한 남자가 잡종개와 친구가 되었는데, 그 개가 남자를 물어 사람들은 남자가 죽을거라고 하지만, 정작 죽는 것은 개였다는...

 

남자의 바람은 한때 지나가는 그야말로 바람일뿐이지만, 여자가 외도를 하면 집을 나간다는 말이 있다. 불륜을 저지르는 여자는 정열적이다. 적당히 즐기다 말 사랑이라면 모험을 시작하지도 않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여자는 그 누구보다 남편을 혐오하고, 단 한번도 남편을 사랑한적이 없으며, 따라서 자신은 몹시 불행하다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아니, 어쩌면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기 때문에 밖에서 사랑을 찾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한 집에서 같이 사는 남자에게 사랑 대신 경멸을 느끼는 불행 속에 찾아든 사랑이라니, 그 무엇이 아까울까. 

 

당신은 사랑이 뭔지 몰라. 찰스와 내가 서로를 얼마나 간절하게 사랑하는지 짐작조차 못할걸. 중요한 건 바로 그것뿐이에요. 우리의 사랑을 위한 희생쯤은 식은죽 먹기에요.

 

어리석고 경박하며 머리가 텅비도록 사교밖에 즐길 줄 모르게 길들여져 왔던 그시대의 일반적인 여자인 키티가 콜레라로 온통 죽음의 도시가 된 오지에서 새롭게 갱생했다는 이야기보다, 아내와 딸을 위해 자신을 죽이고 돈벌이 기계로만 취급되었던 아버지와 키티가 화해하는 장면보다, 키티가 찰스를 천상의 남자로 여기며 사랑하고, 결국에는 그 불륜이 들통날까봐 가슴떠는 장면이 너무도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랑에 빠진, 혹은 불륜에 빠진, 그리고 그 잘못된 사랑이 들통났을 때의 불안한 여자의 심리묘사가 자못 황홀할 정도다. 남자인 서머셋 몸은 어찌 이리도 여자의 심리를 잘 아는 것일까. <세설>의 작가 다니자키 준이치로에게도 똑같은 경탄을 했었는데, 내 주변엔 왜 이런 남자가 없는 것일까. 이토록 여자를 잘 아는 남자와 연애를 한다면 행복할까? 아니 오히려 매사 너무 빤하게 들여다 보이는 속마음 때문에 애를 태우게 될까?

 

한편, 한평생 돈벌이 기계로 봉사하고서도 더 많은 돈을 벌지 못한 까닭에 아내와 딸들로 부터 무언의 경멸을 감수했던 키티의 아버지가 아내의 죽음 후 자유를 찾아 떠나고자 하는 장면에서는 어떤 해방감을 느꼈다. 배우자 사망은 스트레스 지수를 가장 높인다는 데, 이들의 경우는 전혀 아닌 것 같다. 반대로 키티의 엄마는 어땠을까. 자신보다 남편이 먼저 죽었다면 그녀 역시 해방감에 몸을 떨었을까? 이쯤되면 남녀를 결혼으로 묶는 것은 매우 실용적인 제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면에서는 몹시 몹쓸 것이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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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amohhoon 2016-06-20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침없이 나아가는 필체가 인상적입니다.
많은 리뷰, 정말 대단하세요 :)

잘 보고갑니다 ㅎㅎ

비의딸 2016-06-22 09:59   좋아요 0 | URL
거침없이... (-- )( __)
개인적인 감상을 쓰는거라 느낌을 솔직히 적거든요. 거침이 없다라.. 좋은 건 아닌것 같아요. ㅠ.ㅠ

헬가 2017-10-14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의 딸님 글을 좋아하는 1인입니다 허식없이 솔직하게 성찰하는 글이 좋아서요 오랫동안 뜸하고 계셔도 즐겨찾기를 지우지 않고 기다리는 독자가 있다는거 기억해주셔요^ ^

비의딸 2017-10-16 10:29   좋아요 0 | URL
응?
별 것 아닌 제 개인적 감상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아준 분이 계시다니 정말 기쁘네요. 제가 좀 냄비기질이 있어 바르르 끓다가 곧 식곤 하죠... 책은 꾸준히 읽고 있지만 그 속도가 예전만 못하고요... 감상을 적어 남기는 일도 적잖이 귀찮아졌어요. 혼자 느끼고 말꺼면 무엇하러 애써 적어 남기나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하고요. ^^
기억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 좋은 가을날 헬가님에게도 기쁜 소식이 있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