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김홍신의 대발해 1~10 세트 - 전10권
김홍신 지음 / 아리샘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대발해(大渤海)

                                                                                               김홍신

3. 개국 황제 대조영

  당나라 사신 이걸명은 말갈 진영에서도 고구려 진영에서와 똑같은 수모를 당했다. 이걸명의 진언에 진노한 무측천은 항장 이해고와 낙무정, 구에게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토평하라는 칙명을 내렸다.

 이해고 일행은 30만 대군으로 대조영을 추격한다. 고구려군은 노약자와 부녀자들만도 수만 명이나 되는 가솔을 데리고 가니 자연 진군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음이 급한 이해고는 강을 가로지르기 위해 부교를 설치하지만 고구려군의 기습 화공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강을 우회할 수 밖에 없었다.

 

  드디어 토평군이 가솔들을 따라잡아 그들을 공격하려는 순간, , 우에서 고구려군이 달려들고 달아나던 가솔들도 변복을 벗고 정예군으로 돌변하여 그들을 압박한다. 하지만 일시적으로는 토평군의 진군을 막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앞으로의 일이 더 큰 걱정이었다. 말갈도 마찬가지였 고구려군보다 한 발 앞서 가던 걸사비우는 자신들의 가솔들이 기습을 받는다는 봉화를 보고 혼신의 힘을 다하여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니 적군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걸사비우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살아남은 말갈의 군사들이 대조영에게 소식을 전했다. 한파가 휘몰아치고 폭설이 내려 전진이 어려워졌고 결국 수십만의 당나라 군사와 맞닥뜨려졌다. 군사들을 재편하여 적진으로 뛰어들던 고구려군의 뒤편 저 멀리에 무수한 인마가 먹장구름처럼 달려온다. 완전히 포위된 것이었다. 앞에는 이해고가 공격하고 뒤에는 손만영의 군사를 궤멸시켰던 양현기가 옥죄고 들었다.

 

  대조영은 위험을 무릅쓰고 정면 공격을 감행했다. 산을 타고 넘던 연충인이 능선을 타고 내려왔고 강을 따라 공격하던 검연각도 기수를 돌렸다. 마침내 달신의 군사들이 혈로를 뚫었다. 북녘으로부터 아련하게 함성이 들리더니 원군이 도착했다.

골사각과 걸초비우가 이끄는 말갈군과 역밀이 이끄는 거란군, 대중상과 송채륜 이끄는 고구려 군사에 대화인의 낭자군까지 합세했다. 적장 등원호가 쓰러지고 원군의 기병대가 적을 마구 짓밟자 당나라 군사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고구려군은 거의 하루 밤낮을 쉬지 않고 행군하여 산악으로 들어섰다. 대조영은 거란의 장졸들과 백성들을 모두 받아 들였다. 대조영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통수권을 내놓고 초막으로 들어가 속죄의 나날을 보냈고 병든 몸으로 아들을 따라 참선하던 대중상이 쓰러지자 비로소 초막에서 나왔다. 대중상은 해가 다가기 전에, 일흔아홉 살의 나이로 운명했.

 

  대조영은 그의 유지에 따라 그를 화장하여 뼈를 사방으로 뿌렸다. 겨울이 다가기 전 그들은 또 다시 이동하여 천생만사 끝에 천문령에 당도했다. 최문천이 홀한해 지하삼림에서 조련이 잘 된 군사와 군마, 양곡을 챙겨왔다. 고구려군은 군진을 넓게 잡고 진법과 병법을 익히고 군기를 엄격히 하는 등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했다. 패하면 도망 갈 곳도, 잃은 군사를 보충할 수도 없었다.

 

  무술(698)년 춘삼월, 이해고는 조정의 성화를 받으며 40만 대군을 진발할 채비를 서둘렀고 세작으로 심어 놓은 돌치를 통해서 적의 기밀을 탐지하고자 했다.

  적의 후방을 교란할 유격군으로 돌치가 임명되자 그는 군령을 어겨 가족을 잃었다는 두만호와 윤수명을 포섭하여 은밀히 계책을 짜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만호와 윤수명의 가족은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과 같이 돌치도 그 사실을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돌치는 윤수명을 죽이고 당나라 행영으로 달려가다 목이 잘리고 말았다. 고구려군 중에 적과 내통하는 자가 있는 것일까?

 

  이해고의 40만 대군이 공격을 시작했다. 이해고의 머릿속에는 전황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밀어붙여 날이 어두워지면 반란이 일어나고 횃불이 대조영의 퇴각로를 알려주면 밤사이 대조영을 잡고 적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었다.

  이해고는 전각과 북으로 당나라 군사들을 더욱 독려하여 더 깊숙이 삼림 속으로 들어갔다. 당나라군은 쫓기는 고구려군을 계속 몰아붙이며 선봉대가 대조영이 기다리고 있는 천문령 봉우리를 향해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랐다. 고구려 진영에서 북소리가 들리고 깃발이 흔들리며 불시에 사방에서 복병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바윗돌이 구르고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이해고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퇴각을 명했다. 대조영을 잡게 해 주겠다는 대조영의 사촌 아우 대사달의 간계에 속은 것이었다. 계곡으로 퇴각한 당나라군에게 이번에는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대사달이 바위와 통나무로 막아 만든 저수조를 터뜨린 것이었다. 당나라 군사들은 삽시간에 뒤엉켜 계곡으로 쳐박혔고 능선을 기어오르던 자들은 고구려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도망치는 당나라 군사들은 서로 걸려 넘어지고, 부딪혀 자빠지고, 먼저 도망치려고 아우성이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고구려 군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그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단숨에 고구려 진영을 무너뜨릴 기세였던 당군은 무참히 패한 채 퇴각했다.

  전열을 재정비한 당군은 전군을 동원하여 인해전술로 일제히 총공세를 감행했고 대조영은 배수의 진을 치고 이에 대항했다. 일진일퇴를 거듭했고 쫓기고 쫓는 전투가 연일 이어졌다. 대승과 대패가 교차했다. 결국 이해고는 수만의 군사만을 이끌고 퇴각하고 말았다. 불과 7만의 군사로 40만 대군을 깨뜨린 천문령 대첩이었다.

 

  당나라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무측천은 이해고를 죽이려 하였으나 유극량의 간곡한 주청으로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계속해서 반란의 잔당들을 토평하라는 명을 내렸다.

  동남쪽으로 행군로를 틀어잡은 대조영 앞에 최해가 5백 명의 무리를 이끌고 의탁해 왔다. 가는 길에 보현사에 들러 원오선사를 만난 대조영은 그로부터 복국보다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좋고 도읍은 우선 동모산으로 정하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듣는다. 대조영은 먼 길, 난관을 헤치며 동모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정세는 연합군이 요서에서 준동하지 않으면 돌궐이 요북으로 돌아갈 것이고 요서가 조용하면 당조는 반드시 대군을 일으켜 요동을 짓밟을 것이라 걱정스러웠다.

 

  대조영은 즉시 역밀과 측고를 보내 요서를 경계토록하고 환도성에 있는 을사성을 요서 쪽으로 진병케 했으며 대사달을 통정진 쪽으로 출병시켜 요서 일대를 흔들게 했다.

 

  대조영은 창업을 선포하기에 앞서 중신이 될 자들과 각 부의 수령들을 거느리고 태백산에 올라 제를 올렸고, 드디어 무술(698)8월 초하루, 고구려의 혼을 계승한 나라 발해의 시황으로 등극하고 만방에 발해를 선포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되었으며 영주에서 반당의 기치를 올린 지 3년 만의 대업이었다. 관제를 정하고 관작을 부여하였으며 미흡하나마 서서히 나라의 기틀을 잡아 나갔다.

 

  발해 황제 대조영이 친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돌궐의 묵철가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숭주와 귀주를 공격하게 한다. 이어서 규주와 단주를 점령하고 영주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는 낙양을 공략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당나라의 요서와 요동 출병을 막기 위한 계책이었다.

  묵철의 생각이 옳았다. 요서와 요동으로 출병하려던 당나라군은 돌궐을 막기 위하여 등주와 유주에 각각 10만 군사를 집결시켰다. 요서의 급변한 전황을 보고받은 대조영은 옛 고구려 땅인 신성과 요동성, 안시성과 오골성을 수복하기 위해 나섰다.

 

  약조한 대로 묵철이 요서를 공략한 덕에 대조영의 친정군은 신성을 깨뜨리고 천리장성을 따라 현도성과 개모성을 취하고 백암성까지 수복했다. 돌궐은 해족과 연합하여 당나라의 요충지 유주를 손에 넣었고 대조영은 손담의 활약으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요동성을 얻었다.

 

 당나라 조정을 들끓기 시작했고, 결국 오랑케들을 달래기로 하고 돌궐과 발해에 사신을 급파했다. 우선 달래 놓고 나중에 두 나라를 부추겨 싸우게 하든지 아니면 차례로 토평하든지 할 계획이었다.

 

  당나라의 사신은 맞은 대조영은 무측천에게 고구려 고지인 박작성과 비사성을 요구했다. 당나라는 우선 돌궐의 요구를 가납하여 압송했던 포로들과 막대한 재화를 돌려보냈고 묵철은 장성 밖으로 군사들을 회군하였. 당나라가 돌궐의 요구를 들어주고 난 다음 수순은 무엇일까?

  이 소식을 들은 대조영은 묵철에게 국서를 보낸다. 대조영의 국서를 받은 묵철은 미소를 짓고 발해와 당나라 사이에서 오는 이득을 즐기며 당나라에 군사를 일으키지 말라는 국서를 보냈다. 당나라 조정은 한 동안 쟁론을 벌였지만 화의책을 펼치기로 하고 당분간 정세를 지켜보기로 결정했다.

 

  곳곳의 말갈의 수령들이 동모산으로 와서 복속을 맹약했다. 긴 겨울이 지나자 원오선사가 세상을 떠났고 대조영은 원오의 유지를 받들어 그의 수제자 혜명을 국사로 삼았다.

 

  대조영은 마자수(압록강) 하류의 요충지 박작성을 수복하러 친정을 결행했다. 당나라 수성장 이개명은 군사의 수효를 믿고 무모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다 패하여 성 안으로 도망쳤고 원군을 끌고 온 당장 증색은 발해군의 수효를 보고 놀라 항복하고 말았다. 항장 증색은 당군으로 변복한 발해군을 이끌고 박작성으로 입성했고 수성군 장수들은 성을 버리고 도망쳤다. 박작구 확보에 나선 달신은 화공을 펼쳐 당나라 군선과 그들의 진영을 삽시간에 불바다로 만들고 박작구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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