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삼의 피
박종화 지음 / 어문각 / 1995년 9월
평점 :
절판


금삼의 피

                                                                                                           박종화

  박종화(朴鍾和 1901 1981) 호는 월탄(月灘). 시인, 소설가, 비평가. 서울 출생. 성균관대학교 교수와 서울시예술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고 1949년 발족한 한국문학가협회(韓國文學家協會)의 초대 회장이 됨. 서울신문사 사장, 서울시문화위원회 위원장 등을 거쳐 1955년 예술원 회장에 취임, 1회 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1966년 제15·16민족상을 수상한 상금으로 월탄문학상을 창설하였다. 대표적인 저서로 흑방비곡, 금삼의 피, 여인천하, 임진왜란 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박종화 [朴鍾和]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단종의 적인 한명회의 작은 딸로 성종의 왕비가 되었던 한빈은 불행하게도 왕비가 된 지 다섯 해 만에 아드님도 없이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은 지밀나인 윤씨를 숙의로 삼고 옥동자를 낳았다. 그리고는 숙의 윤씨로 왕비를 삼고 왕자로 왕세자를 책봉한다는 전교를 내렸다.

 

  성종은 여자를 좋아했다. 왕의 사랑을 받는 궁녀가 차츰 늘기 시작하여 왕자와 왕녀를 낳고 밴 비빈들만 꼭 열 사람이 되었고 자식은 스물여덟 분, 대군과 군만 열다섯이나 되었다. 그러고 보니 열 비빈들은 제각기 높고 귀한 자리를 탐하려는 큰 욕망과 야심이 발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다 원자인 연산은 아직 강보에 싸인 핏덩이요 중전 윤비 또한 튼튼한 뿌리가 없었기 때문에 군왕의 은총이 끊어지는 날이면 앞길을 예측할 수 없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신세였다. 그래서 더욱 원자를 애지중지 하고 있는데, 막 걸음마를 시작하자 쳇증 비슷한 병이 나서 앓기 시작했다. 약도 먹이고, 명산에 기도도 드리고, 불공도 바치고, 검하다는 박수와 무당을 찾아 문점도 하기로 했다.

 

  윤비의 어머니 정경부인 신씨와 삼월이 나인이 용하다는 이판수에게 점을 보고 그가 지목하는 장소에서 바늘 꽂힌 나무동자와 중전의 생월 생시를 쓴 종이 위에 식칼을 놓아 둔 상자를 발견한다. 그 짓은 네 발 가진 짐승의 성을 가진 여자가 했다는 것이었다. 중전은 비슷한 시기에 안양군 행을 낳고 요즈음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귀인 정씨의 소행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명확한 증거가 없었다.

 

  임금은 그녀를 총애하고 있고 대왕대비(성종의 할머니)와 왕대비(성종의 어머니)도 지난 봄 춘잠(春蠶) 때 중전이 무담 불참한 그녀를 문책하자 그녀를 두둔한 적이 있었다.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중전은 그녀를 직접 징치(懲治)하기로 결정한다.

 

  덕종 대왕(성종의 생부)의 후궁 숙의 권씨 집에 감찰 상궁의 하인이라는 사람이 편지 한 장을 놓고 갔다. 편지에는 엄소용과 정소용이 중전의 원자 아기씨를 모해하려고 흉계를 꾸몄다는 내용이었다. 권씨는 이 편지를 왕대비에게 갖다 주었고 대왕대비, 왕대비, 상감이 함께 이 편지를 보고는 중전이 시기, 모함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린다.

 

  상감은 통고 없이 불시에 중전의 처소에 들렀다. 왕은 비상과 방자하는 책들을 발견하고 왕대비는 평소 미워하던 중전을 폐하라고 지시한다. 상감은 삼월이를 친국하고 그 장면을 본 권씨는 중전과 원자를 위한다는 일이 오히려 그 반대가 된 것을 마음 아파하며 예종 왕비에게 도움을 요청하자 예종 왕비는 형방승지 임사홍에게 편지를 보낸다.

 

  다음날 왕은 사육신을 배신하여 죽게 한 영의정 정창손을 불러 의견을 물었으나 그는 땀만 뻘뻘 흘릴 뿐 말 한 마디 못한다. 이때 임사홍이 나서서 중전의 폐위가 이유 없으며 불가함을 아뢴다. 삼월이는 교형에 처해지고 감찰 상궁은 귀향을, 부원군 부부인 신씨는 궁중 출입을 금하게 하였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어느 날 밤. 임금은 중전의 처소를 방문했다. 원망하는 중전, 이를 달래려는 임금, 불이 꺼진 방안에서 옥신각신 하룻밤을 보낸 다음날 임금의 콧잔등에 아주 작은 생채기가 생겼다. 이 사실은 상궁을 통하여 즉시 왕대비에게 전해졌고 왕대비는 중전을 폐하라고 엄명한다. 두어 명 불가함을 아뢰었으나 워낙 지엄한 왕대비의 명, 중전은 통곡을 하며 폐서인 되어 친정으로 돌아온다.

 

  왕은 새로운 중전을 맞이한다. 폐비가 없는 궁중은 온통 왕대비와 정씨, 엄씨의 세상이다. 상감의 귀에 속살거려 들려오는 소리는 모두 그 전의 중전의 험이요 잘못이다. 임금은 그렇게 변해갔고 폐비는 밤과 낮으로 애끓는 눈물을 뿌리며 가슴 썩는 탄식을 날리다 차차 쇠약해졌고 그대로 병이 되어 나날이 새빨간 피를 상혈하게 되었다.

 

  폐비 사건이 일어난 지 사 년째 되는 어느 날 성종과 함께 학문을 논하던 채수와 권경우가 폐비의 처우 개선을 요청하자 임금은 역정을 내고 그들을 파직시켜 버린다. 그 동안 대왕대비가 돌아가시고 열세 살 된 동궁 연산이 가례를 지냈다. 동궁은 점점 어릴 때의 기억을 되살려내어 지금의 중전이 자신의 생모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왕대비와 정씨는 폐비를 하루 빨리 죽여 없앨 궁리를 하고 임금은 마침내 폐비에게 사약을 내린다. 폐비는 대성통곡하고는 원삼 소매에 달린 한삼을 부드득 뜯어 새빨간 피눈물을 닦아 동궁이 자라거든 전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하고 사약을 마신다.

 

  동궁은 서른셋의 나이에 사약을 받은 폐비가 생모인 것을 알게 되었다. 생기 팔팔하고 또렷또렷하고 날렵하던 동궁 연산은 음울하고 무겁고 진중해졌다. 폐비, 죄인의 아들. 가슴 속의 응어리들이 동궁의 순된 마음을 차츰차츰 좀먹어 들어갔. 술을 가까이 하게 되었고 궁녀들을 희롱하였다.

 

  성종이 서른여덟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임금의 자리에 오른 연산은 폐비를 종묘에 모시려 대왕대비에게 허락을 구하였으나 그녀는 이를 완강히 반대한다. 하여 사사로이 신주를 앉혀 사당을 두겠다 하였으나 이도 신하들에 의해 거절된다. 상감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효사모를 지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친제를 지내지는 못하였다. 상감은 가슴 위로 오르는 열을 삼키고 분을 누른다. 나날이 술과 여자로 화를 다스린다.

 

  연산 4년 무오 7.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에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하여 조의제문을 실었다. 이것이 단초가 되어 연산은 폐비의 일로 평소부터 거슬리던 사림파를 유자광 등 훈구파를 이용하여 도륙을 내버리는 무오사화를 일으킨다. 김종직이 부관참시되고 그의 모든 저서가 불태워졌으며 그의 제자들도 사형이 되거나 귀향을 가는 등 처벌을 받는다. 그 가운데는 평소 사림파들로부터 멸시를 받아 온 유지광의 개인적인 한풀이도 한몫을 하였다.

 

  생일을 맞은 제안대군에게 축하 차 갔던 연산은 장녹수를 만나 대궐로 데리고 온다. 녹수는 연산의 총빈이 되었고 녹수의 집에는 재물이 물밀 듯이 들어갔다. 임사홍과 폐비의 어머니 장흥부부인 신씨는 폐비가 가지고 있던 야광주를 박은 밀화 대삼작을 장녹수에게 바치고 현숙 공주의 생일날 초대하여 폐비에 관한 일을 소상하게 이야기 해 준다. 녹수는 금삼의 피를 자기에게 보내 달라고 요청한다.

 

  때는 갑자년 삼월. 장녹수는 폐비의 피 묻은 금삼을 상감에게 바치고 일의 전말을 소상히 보고한다. 임사홍과 외할머니 장흥부부인 신씨를 만나 사건의 전말을 재확인한 상감은 극도의 분함과 노여움이 터졌다. 어머니를 모함하여 죽인 원수 정씨와 엄씨는 상감이 휘두른 철여의(鐵如意)를 맞고 머리가 박살났다. 이를 질책하던 대왕대비에 부르르 사지를 떨며 맞서는 상감, 대왕대비도 할 말을 잃는다.

 

 갑자사화의 피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폐비의 문제에 직, 간접으로 관련이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벌을 받는다. 이미 죽고 없는 정인지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정창손의 송장을 세 동강으로 자르고, 한명회의 뼈다귀를 맷돌에 갈아 산지사방으로 헤쳐 버린다. 수많은 사람이 사약을 받고 재산을 적몰당하고 귀향을 떠났다. 폐비의 한많은 피눈물이 한삼 위에 물들게 했던 장본인 인수 왕대비가 세상을 떠났다. 인수대비의 오라버니 한치형의 무덤을 파헤쳐 시체의 목을 잘라버렸다. 폐비 윤씨였던 제헌왕후의 능 앞에서 금삼을 불살라 파묻어 어마마마의 모든 한 풀이를 끝냈다.

 

  상감은 술과 여자에 탐닉한다. 임사홍에게 채홍준사(採紅駿使)라는 벼슬을 내려 전국의 미인과 살찐 말을 뽑아 들이게 했다. 그러자 아첨배들이 미인과 좋은 말들을 다투어 바친다. 그 중 억지로 끌려온 최보비에게는 숙의의 직첩을 내리기도 하지만 그녀는 옛 낭군을 그리워하여 목을 맨다. 연산의 마음은 더욱 거칠어 졌다. 날마다 호화로운 잔치로 풍악소리가 끊어질 날이 없었다.

 

  어느날 연산은 흥청들을 데리고 창경궁 뒷동산에서 놀았다. 바로 담 너머에 있는 성균관 유생 몇이 흥청들과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본 연산은 흥청들을 목 베고 성균관을 멀리 옮겨 버린다. 사간원의 간관들을 혁파시키고 홍문관을 없애 버리고, 경연을 폐하고 독서당도 없애 버렸다. 선비들은 흩어지고 글 읽는 소리는 끊어졌다. 지도 위에 줄을 긋고 임금의 동산을 만든다고 백성들의 집을 헐고 문전옥답을 묵히고 조상들의 산소를 굴총했다. 그리고 금표 안으로 사람들이 못들어가게 했. 이를 어긴 백성 몇이 목이 달아난다. 연산은 또 임사홍에게 명하여 모든 벼슬하는 사람들이 항상 글자 열 자가 새겨진 패를 차게했다. ‘口是禍之門, 舌是斬身’(입은 화가 들어오는 문이요, 혀는 몸을 동강내는 칼이다)

 

  폐비의 원수를 갚은 척한(滌恨)의 옥사 이외에도 장녹수가 전향과 수근비를 시샘하여 일으킨 옥사, 경기 감사 홍귀달이 손녀딸을 왕세자비로 바치지 않아 연산의 뜻에 거슬려 일어난 옥사, 연산의 실정을 언문으로 투서해서 언문 수난 시대가 열렸던 것 등 참혹한 일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폭군 연산을 폐위시켜야 한다는 마음들은 은연 중 이심전심으로 퍼져나갔다. 전라도에서 비밀한 통문이 조선팔도에 띄워졌다. 이 통문은 전라도에 귀향 갔던 사람들이 이병을 일으켜 장안을 쳐들어오려는 격문이다. 이 소식을 들은 주중추 부사 평성군 박원종이 여러 사람들을 규합하여 진성대군을 옹립하기로 하고 군사를 이끌고 궁안으로 들어간다. 연산은 우의정 김수동에게 어보를 내어놓고 자리에서 물러난다.

 

  폐비 윤씨의 한 조각 원통한 피눈물 수건은 얼마나 길고 긴 파란만장의 어지러운 곡절을 일으켜 놓았더냐. 우는 이 있고, 웃는 이 있고, 사는 이 있고, 죽은 이 있, 슬픔이 있고, 환락이 있고, 의기가 있고, 간흉이 있었다.

 

  역사소설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저자의 소설은 더욱 그렇다 게다가 언어 표현의 풍요로움 조차 배울 수 있다. 읽던 중 한 가지 P. 74 “대왕대비께서 쓰셨던 안경을 옆에 벗어 놓으시며......” 는 작가의 실수인 것 같다. 당시 조선에는 안경이 보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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