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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조선총독부 (1~5묶음판매)
배영사 / 1993년 1월
평점 :
소설 조선총독부
유주현
[ 제 3 권 ]
(---제2권에 이어---)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시위 군중에 대한 발포로 촉발되어 사토 헌병대장이 타살된 평안남도 사천리 사건이 조작하여 보고되자 총독부 내의 온건 세력인 하세가와와 야마가다 정무총감 대신에 강경파인 무관 출신의 고지마 경무국장, 요시노 경부보 등이 전면에 나서서 무자비한 탄압을 실시한다.
33인의 민족 지도자들과 만세 운동의 핵심 세력들이 모두 체포되어 사실상 지도층은 분쇄되었지만 만세 운동의 불똥은 꺼지지 않았다. 이화학당의 유관순은 서대문 감옥에서 발가벗겨진 채 화젓가락으로 온 몸의 지져지는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짖었고, 함북 회령경찰서에서 김순실은 발가벗겨진 채 혀를 깨물고 죽어 갔으며, 경기도 수원의 제암리에서는 부락민들을 교회당에 감금하고는 집중사격을 가하고 불을 질렀다. 또한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를 불질러 버리기도 하는 등 온갖 악랄한 고문과 잔인한 보복적 행패가 이어졌다.
3. 1부터 6월까지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 구금자 46,948명, 만세 운동 집회 횟수 1,542회, 참가 연인원 2,023,089명. 인구 2천만의 1/10이 독립 시위에 나섰던 엄청난 유혈의 참극이었다. 결국 하세가와와 야마가다가 경질된다.
고지마는 미와 가스사부로를 경보부로 승진 발령하고는 송병택, 총독부 비밀 정보원으로 특채되어 끄나풀처럼 활동하는 척하다가 독립 만세 봉기에 거짓 정보를 제공하고 사라진 박충권을 체포하기에 혈안이 된다. 그러나 그는 안악군 복사리에서 사라키 순사부장을 살해하고 유유히 사라졌다.
사이토 총독은 부임 첫날에 이어 일주일 만에 또 폭탄 세례를 받는다. 조선의 열혈 강우규가 총독 암살 미수로 체포되었다. 사이토는 문화주의를 표방한다. 헌병제도를 철폐하고 공무원과 교사들의 제복을 폐지하였으며 그들이 폐용했던 군도와 총기를 철폐했다. 그리고 몇가지 신문 발행을 허용했다.
의친왕 이강이 실종되었다. 상해로 가려던 이강은 서울로 호송되고 이강을 데려가서 독립운동의 상징적 역할을 하게하려고 했던 일당들은 모두 체포되었다. 여운형을 초청하여 설득하려던 일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1920년이 되어 사이토는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입에 올리기 시작한다. 시사신문(발행인 민원식), 조선일보(발행인 대정실업친목회의 예병석), 동아일보(발행인 김성수)가 발행 허가 되었으며 박충권이 미와에게 체포되었다. 홍범도 등이 이끄는 독립군은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참패시키고 김좌진은 청산리에서 일군을 괴멸시킨다. 박충권이 체포되었다는 얘기는 일제가 공로 다툼으로 꾸며낸 얘기였고 그는 청산리 전투에 참여하고 국내로 들어왔다.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대패한 일군은 그 보복으로 무고한 양민 2만여 명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만행을 서슴치 않는다.
미즈노 정무총감의 산미증산계획을 발표된 후 토지 개량 사업과 간척 공사도 빠르게 진척되어 갔다. 미즈노와 오바 조선군 사령관이 경질되고 아라요시 정무총감과 기쿠치 신노스케가 그 뒤를 이었다. 국내 사정으로는 대유학 김윤식과 천도교 영수 손병희가 지난 해 타계했으며 친일분자 민원식이 도쿄에서 암살되었다. 의열단 폭탄 사건 등 몇 건의 저항이 있었지만 그런대로 조용한 가운데 총독부의 위협과 포섭 공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전향하여 친일적으로 변신들을 하고 있었다.
1923. 9. 1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 요코하마 일대가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된다. 사회주의자들과 조선인들이 살인, 방화, 우물에 독약을 투입하는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조선의 보도관제 속에 일본에서는 자경단이 조직되어 조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학살이 자행된다. 박충권이 일본에 잠입하여 요시노 사쿠소 교수가 기록한 ‘조선인 학살 사건의 진상’을 확인한 바에 따르면 조선인 학살이 2,700명으로 기록되어 있었으나 6천명도 넘을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제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