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조선총독부 (1~5묶음판매)
배영사 / 1993년 1월
평점 :


소설 조선총독부

                                                                                                           유주현

  유주현(柳周鉉 1921 ~ 1982) 소설가. 호는 묵사(默史). 경기도 여주 출생. 와세대대학 문과 수료. 1948번요의 거리로 데뷔. 주요작품으로 조선총독부 』 『언덕을 향하여』 『자매계보』 『신의 눈초리』 『신부들』 『대원군』 『파천무』 『대한제국등이 있다.

 

[제 1 권]

 

19091. 선천 역사(驛舍) 밖에는 순종의 백성들에 대한 마지막 작별 인사를 고하려는 서글픈 행차를 보기 위하여 이천여 군중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데 그들 앞에 통감 이토 히로부미가 나타나 을사보호조약의 당위성을 설파하자 군중은 하나 둘 흩어져 간다.

 

  1905년 을사년, 러일전쟁 후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얻은 일본의 이익에 불만을 품은 일본 국내 여론을 무마하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병탄을 계획한다.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 군사령관, 이토는 정부 각료들을 회유하고 고종황제를 겁박하여 한일보호조약안을 받아들일 것을 종용하지만 고종은 이를 완강히 거부한다.

 

  드디어 1117, 강제적인 어전회의가 열리고 보호조약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자 이토가 하야시 공사, 하세가와로 하여금 수십 명의 일본 헌병을 거느리게 하고 어전회의에 직접 참석하여 회의를 주도한다. 반대하는 참정대신 한규설이 별실에 감금되자 고종은 회의장을 떠나고, 반대하는 탁지부대신 민영기, 법부대신 이하영을 제외한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내부대신 이지용, 외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의 찬성으로 조약 문서에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하고 고종황제의 칙재(勅裁)를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1120일자 황성신문에는 장지연이 집필한 논설이 도도히 전개되고 있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황성신문이 정간되고 이완용의 집이 불벼락을 맞았으며 이근택은 자객에게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조선 통감 이토는 사냥길에 돌팔매를 맞아 부상을 입는 봉변을 당했으며 외국 공관장들은 외교권을 빼앗긴 대한제국에 계속 머물러야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장안의 상가는 일제히 문을 닫고 모든 학교는 수업을 중지했으며 만백성은 비분에 잠긴 채 오적을 박살하라는 함성과 함께 소위 보호조약을 즉각 폐기 선언하도록 황제에게 상소하는 피끓는 함성이 서울을 향해 총진군을 개시했다.

 

  이 무렵 고종 앞으로 전임 대관들의 피를 토하는 상소문이 그 수를 모르게 답지했다. 의정부 참찬 이상설의 상소문, 종일품 이유승의 통곡의 글, 법부주사 안병찬이 보낸 호소, 원임 의정대신 조병세의 직언 등등. 특히 거유 전 참판 최익현의 상소는 고종의 아픈 심장을 갈기갈기 찢어놓는 듯 격렬했다.

 

  고종을 뵙기 위해 대궐 앞 뜰에 엎드렸다가 대한문 밖으로 끌려나온 76세의 조병세는 일본 헌병대로 끌려갔다. 수많은 궁중과 함께 대한문에서 시위하던 민영환과 심상훈이 평리원에 끌려가 수감되었으나 고종의 명에 의해 풀려난다. 그러나 민영환은 마지막 절규를 남긴 채 자결하고 조병세가 그 뒤를 따른다. 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의거 자결한다. 강산이 온통 통곡이고 선혈이고 죽음의 소식뿐이었.

 

  조선통감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는 고미야를 궁내부차관으로 발령하고는 궁정을 손아귀에 넣도록 지시했다. 그리고는 울릉도와 백두산의 삼림 벌채권, 전국의 철도 부설권, 해양 어업권, 광산 채굴권, 우편 통신 항해의 모든 권리를 강탈해 버렸다. 전국에서 민요(民擾)가 일어나고 광무 10(1906) 72, 나이 쉰여섯에 황제 고종은 함녕전에 유폐되었다.

 

  그럼에도 황제는 1907년 화란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지만 일본의 방해공작으로 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하였고 이준은 분사(憤死)하고 만다.

 

  헤이그 밀사 사건을 계기로 이토의 사주를 받은 송병준은 고종의 양위를 위하여 날뛰기 시작했으며 고종은 1907719일 눈물을 흘리며 양위를 결정한다. 8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자 이에 격분한 박승환이 자결하면서 장졸들이 들고 일어나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이에 따라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였으나 일본 군대에 의해 제압당하였다.

 

  이토는 또한 유학이란 명목으로 겨우 열한 살인 세자 은()을 도쿄로 보내 인질로 삼는다.

 

  대한의 독립을 다시 찾기로 우덕순 등과 혈서로 맹세한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의병을 조직해 활동하던 중 하얼빈에 온 이토, 일본 영사 가와가미, 만철 이,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를 저격한다.

 

  190912, 일진회 회장 이용구는 백만의 민의(民意)’라는 그럴듯한 전제 아래 한국을 일본에 합병해 주십사하는 상주문과 청원장과 성명서를 내 놓았다. 일진회의 외곽 단체들도 덩달아 소란을 떨었다. 그러나 일진회의 합방론을 정면으로 반대하는 군중 연설회가 원각사에서 열리고, 이용구는 하룻밤에 잠자리를 세 번씩이나 옮겨야 했고 이완용은 이재명의 칼에 맞아 명동 성당 앞에서 고꾸라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데라우찌 통감의 독촉을 받은 이완용은 나라를 팔아먹는 의제를 가지고 각의를 열고 말 몇 마디로 뚝딱 이를 통과시켜 버렸다. 치욕의 날이었다. 1910. 8. 22 조인된 조약은 8. 29에 반포되고 드디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설치되었다.

 

  초대 총독으로 일본국 육군대장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부임하였다. 그리고 그 후 이왕 책봉식(李王冊封式)이 있었다. 대한제국의 황제가 저들 변방의 한낱 허울뿐인 왕으로 격하되었다.

 

  데라우치 총독은 부임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바꾸지만 특히 언론에 신경을 썼다. 어용지로서 경성일보와 우리말 신문인 매일신보만을 남겨두고 돈으로 신문사를 사서 모두 폐간시켜 버렸고 자기에게 비판적인 본국의 신문은 숫제 부산항에서 압수해 버렸다. 그는 조선을 철저하게 다스려 한국의 강토와 국민들을 일본식으로 일신해 버리자는 동화정책을 시행코자 하였다. 총독정치 36년의 집요하고 악착스런 집념이 여기에서 그 터를 닦았던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일인들의 이민을 철저히 단속했으며 재벌들의 조선 진출도 당분간 억제해 버렸다. 일본에서 데라우치의 정책을 비판하는 소리가 물 끓듯 했지만 그는 고집을 굽히지 않고 그의 헌병 무단정치는 날로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안악 사건을 조작하여 일으켜 안악, 신천, 재령 일대의 신망있는 지식인들을 모조리 감옥에 쓸어 넣었다.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에게는 종신형이 김구 이하 여러 명에게는 15년에서 5년까지의 징역형이 내려졌다.

 

  합병 1주년을 기해 신민회 지사 6백 명을 검거하여 고문하고 회유한 뒤 데라우치 암살 음모라는 범죄 사실을 조작, 신민회 간부 105인을 구속하는 세칭 백오인사건(百五人事件)을 일으킨다. 그런데 재판 중 사건이 조작된 것임이 밝혀져 재판은 중지된다.

 

  1912. 8. 13 조선의 토지조사령이 공포됐다. 토지조사 결과 수많은 땅들을 총독부가 빼앗아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에 넘겼다. 동척은 이를 이주해 온 일본 이민들이 소작하도록 했고 그 소작 땅은 다시 조선 농민들에게 하청 소작을 시켜 농민들 위에 군림하는가 하면 아예 삶의 터전인 농토를 잃고 쫓겨 가는 농민들도 부지기수였다. 또한 웬만한 상권은 모조리 독점하고 고리대금까지 운용하니 가난한 농민들은 더욱 가난해져 갔다. 반면에 이를 틈탄 약삭빠른 조선인들이 한몫을 챙기기도 하였다. 아무튼 총독부와 동척에 대한 비난이 대단한 가운데서도 토지조사 사업은 착착 진행되어갔다.

 

  온 나라가 토지조사 사업으로 발칵 뒤집어져 있을 때 그들은 중지되었던 재판을 벼락같이 열고 이 땅의 무고한 애국지사 105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린다.

(---2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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