小說 太平洋戰爭〈1〉 (山岡莊八歷史文庫) (文庫)
山岡 莊八 / 講談社 / 198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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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야마오카 소하치

 야마오카 소하치(山岡莊八)1907년 일본의 니가타 현(新潟縣)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다니다 우편강습소에서 공부한 다음 우편국원, 대중잡지 편집장을 지내며 국민문학의 거장 하세가와 신(長谷川伸)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1934<선데이 매일>약속이 입상되면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1950년부터 1967년까지 무려 17년에 걸쳐 대하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을 집필 했다. 이 작품으로 요시카와 에이지(吉川英治) 문학상을 받았고 이는 소설 메이지(明治)천황(1963~1968), 태평양전쟁(1962~1971)과 더불어 일본의 특성을 찾는 3부작이 되었다.

  야마오카 소하치는 늘그막에 일본 수상들과 기업총수들의 사표(師表)로서 국가기업 경영전략에 대한 자문에 응했다. 1978년에 세상을 떠났으며,야마오카 소하치 전집46(1981~1984, 고단샤)이 발행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야마오카 소하치[Yamaoka Sohachi] (해외저자사전, 2014. 5., 교보문고)

  제 2차 세계대전과 태평양전쟁, 영화로도 많이 접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민족은 비록 외세에 의해서지만 가슴 벅찬 광복의 환희를 맛본다. 적대적 관계에서의 명과 암은 항상 서로 상충한다. 패전국 그들은 이 전쟁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는지 궁금해서 읽게 되었다.

 

  1940년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이 체결되고 1941년 일소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다. 메이지 유신 때 서구열강으로부터 살아남은 유일한 유색인종인 일본은 그 후 부국강병 정책을 일관함으로써 재벌이 탄생하고 군인의 무리가 날뛰기 시작하였다.

 

 전쟁을 일으킨 후 독일의 쾌속적인 진격은, 독일의 승리가 확실하다고 판단한 일본군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진주를 결정하게 한다. 당시 외상 마쓰오까 요오스께는 미국의 참전을 두려워 하여 루우스벨트 대통령과 회담을 희망하였지만 7. 18일 제3차 고노에 내각에서 배제된다.

 이리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진주는 결행되었고 그 보복으로 일본의 재미 자산이 동결되었다. 8. 1일에는 석유 금수가 통고되었다. 미국의 반응에 놀란 고노에는 군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루우스벨트와의 회담을 정식으로 요청하지만 미국은 이에 반대한다.

 그래서 작가는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의 건설의 야심 같은 문제는 차치하고 이와 같은 일련의 미국의 행동이 전쟁을 하지 않을 수 없도록 유도했다는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그 책임을 미국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아무튼 9. 6일 어전회의에서는 사실상 전쟁을 결의한다. 10. 18일 도오죠 내각이 성립되고 연일 회의를 거듭한 끝에 3개의 안이 상정되었는데 그 중 2개는 전쟁의 의결이었다. 결과, 외교는 121일까지, 외교가 성공하지 못하면 12월 초를 무력 개시 시기로 결정하였다. 당시 일본국민들의 정서 또한 전쟁 불사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도 이소로꾸는 서전에서는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는 11월부터 미국함대를 기습할 계획을 착실히 세운다. 당시의 일본은 건함 기술뿐 아니라 해군의 항공기 성능도 세계 제일 이었다.

 

  일본 시간으로 1280시 일본 함대는 적의 정박지 북쪽 이백 마일 해상까지 진출하여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때는 하와이 시간으로 755. ‘, , , , , .......’ 모르스 신호 의 연타가 돌격 명령이었다. 순식간에 진주만은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곧 비행장이 공격을 받았다. 기습은 성공적이었고 미국은 14척의 함정과 150대의 비행기를 잃었으며 2,000명 이상의 사람이 죽었다.

 문은 마침내 열렸다. 해군이 진주만 기습을 끝내고 본토로 귀항하려 할 때 데라우찌 히사이찌를 총사령관으로 한 육군은 말레이와 필리핀에서 행동하기 시작했다.

 말레이 반도를 점령하고 말레이 앞바다에서 영국해군을 격침시켰으며 싱가포르 공격, 필리핀 침공, 인도네시아와 자바 공략 등 파죽지세로 진군하고 있었다.

 

  일본은 반 년 이상에 걸쳐 미, , 오스트레일리아, 네델란드의 4개국 함대를 상대로 하여 태평양과 인도양을 전부 제압하여 무적함대로서의 위용을 자랑했다. 그러나 미국의 일본 본토 공습을 막아내기 위해 펼쳐진 작전이 사전에 미국에 의해 탐지되면서 항공모함 4대를 비롯한 최대의 해군력이 총동원 된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은 항모 3대를 포함한 군함 대부분이 괴멸당하는 참패를 당함으로써 제해권을 상실하고 결국은 패전으로 내달리게 된다.

 

  가아달카넬, 뉴우기니아, 버어마, 사이판이 잇달아 함락되고 가미가제 특공대의 참전, 레이테 섬, 이오이 섬, 오끼나와 등 에서의 처참한 패배에서도 항복을 모르고 대항하다가 결국은 원자탄의 폭격으로 그들의 허망한 꿈이 무너진다.

 

  1945. 8. 15 일본천황의 항복 선언으로 일본은 엄청난 충격과 혼란에 휩싸이며 자결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전범들은 처형되고 만주국은 종언을 구했다.

 

  작가는 밝히기를 누군가는 이 전쟁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하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시종일관 아시아의 평화를 교란한 것은 미, 영의 식민지 분할지배이며 전쟁은 유럽의 침략주의에 대항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일본군은 점령지역에서 환영을 받았다고 쓰고 있는 부분도 있다. 군국주의자들과 끝까지 저항하는 일본군을 미화한다. 지나치게 가정법을 많이 써서 패전을 아쉬워 하기까지 한다. 침략으로부터 고통받은 피지배국과 그 국민들에 대한 통렬한 역사적 반성은 그 어디에도 추호도 찾아 볼 수 없다. 더욱이 그는 본래, 만주민족에게 독립의 이념 따위를 바라는 것이 무리라면 무리였다. 한민족 역시 마찬가지다. 몇천년이나 몰법자(沒法子)란 한마디로 다른 민족의 지배 아래서 살아가도록 습관되어 온 민중에게 있어서는 오로지 침입자의 실력만이 문제인 것이다라는 인식의 소유자이면서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행세했었다. 통탄할 일이다. 이런 인식들이 일본사회 전반에 걸쳐 면면히 이어진다면 그들의 역사에 대한 진실한 반성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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