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시대 100년 1-3권 (전3권) 세트
우리터 / 2003년 1월
평점 :


무인시대(武人 時代)

                                                                                                         이성훈

  이성훈(1939. 3. 29 ) 서울출생. 서울사범학교, 성균관대 졸업. 1965년 문학춘추에 데뷔. 단편, 꽁뜨, 장편, 역사소설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저자는 이 책을 역사의 교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어서 썼다고 한다. KBS-TV에 방영되어 인기를 얻은 바 있다.

 

  고려 인종 11년 섣달 그믐날 밤 나례(儺禮)에서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견룡대(牽龍隊正) 정중부의 수염을 불태우고 이에 격분한 정중부가 김돈중을 사정없이 폭행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김부식은 정중부의 처벌을 요청했으나 인종은 그의 주청을 물리쳤다.

 

  그 때의 나라형편은 밖으로는 여진족의 금()나라를 상국으로 섬기면서 외세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안으로는 서경 내란, 묘청의 난도 평정되었기 때문에 태평무사하여 문신이 무신들 알기를 제 집 종처럼 하고 있었다. 태조 왕건의 건국 초기에는 문무의 차별이 없었으나 광종 때 과거를 실시하면서 문무 양반의 차별이 생기고 관학(官學)의 성립과 사학(私學)의 발전에 따라 문귀무천(文貴武賤)의 사상이 갈수록 심해졌다. 인종의 뒤를 이어 20 여 세에 왕위에 오른 의종(毅宗)은 유흥에만 마음을 빼앗겨 놀이와 잔치를 지나치게 좋아했고 백성을 위하는 정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날도 보현원 잔치에서 문신 한뢰가 임금의 놀이를 수행하여 수박희(手搏戱)하던 늙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무신들의 참고 참았던 울분이 폭발했다. 밤이 되자 견룡행수(牽龍行首) 산원(散員)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 상장군(上將軍) 정중부(鄭仲夫) 등이 주동이 되어 문신들을 척살하기 시작했다. 피를 본 무신들은 더욱 흥분하여 눈에 보이는 문신들뿐만 아니라 궁으로 가서도 보이는 문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렸다. 그 북새통에 왕의 총애를 받던 무비와 김돈중은 몸을 피했지만 김돈중은 며칠 후에 붙잡혀 정중부의 칼 아래 목숨을 잃었고 무비는 그 후 이의방의 차지가 되었다.

 

  거사에 성공한 무신들은 그동안에 다시 주색에 빠져든 무능한 의종을 폐하여 태자와 각각 귀향 보내고 그의 동생 익양후(翼陽侯) 명종(明宗)을 내세운다. 명종은 즉위한 다음날 논공행상을 실시하여 정중부는 참지정사(參知政事), 이고를 대장군 위위경(大將軍衛尉卿), 이의방을 대장군 전중감(大將軍殿中監)에 임명하는 등 하찮은 무부(武夫)들에까지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하지만 문신들의 도움없이는 아무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안 그들은 왕명으로 숨어있는 문신들을 불러내고 대사령도 내리는 한편 정중부, 이의방, 이고를 벽상공(壁上功臣)으로, 채원, 양숙을 차등공신으로 각상(閣上)에 도형(圖形)케 하였다.

 

  중방이란 원래 고려의 중앙 서반직(西班職 : 26)의 최고 무관인 상장군과 대장군 16명이 군사에 관한 일을 의논하던 기관이었는데 정중부 거사 이후에는 그 기능이 확대되어 무인정치의 핵심체로 군사는 물론 경찰 형옥, 백관의 임면 및 포폄 기타 주례의 판정 등을 처리하는 사실상 행정의 최고기관이 되었으며 더욱이 중방을 대궐 안의 왕이 거처하는 근처에 두고 항상 임금의 동정을 감시하고, 왕과 연락을 긴밀히 하도록 하는 등 중방정치를 실시하였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기는 했으나 무능한 그들이 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나같이 그 전의 문신들과 같이 주색에 빠졌으며 내분까지 일어난다. 정중부의 아들 균과 사위 송유인이 감시를 하고 있는 중에도 이의방은 밤이면 무비를 중방으로 불러들여 그곳을 그의 놀이터로 삼는가 하면 궁녀는 말할 것도 없고 태후마마의 여동생까지 통간하고 그의 딸을 태자비로 앉히는 등 안하무인이다. 그러면서 그는 반역을 이유로 반란 동지 이고를 죽이고 채원도 죽인다.

 

  동북면 병마사인 김보당이 전 왕을 경주로 모시고 난을 일으키자 이의방은 양민과 문신들을 무차별 살육하고 난을 평정하였으며 이의민을 시켜 전 왕을 시해케 한다. 의종은 살해된 후 큰 솥 속에 넣어져 연못에 수장 당했다.

 

  집권 이후 끊임없이 이어지는 반란세력과 피의 보복, 계속되는 민란으로 정중부는 지쳐 갔다. 정중부는 칭병하여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집에 들어누웠으나 이의방과 그의 형 이준희가 찾아와 다시 관직에 나가게 된다. 그 무렵 병부상서 겸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이 일어난다. 이어서 승려들의 반란도 일어났다. 이의방은 사원을 불사르고 승려들을 도륙했다. 그런 그는 결국 연회석상에서 벌거벗고 계집을 껴안고 있다가 균에 의해 살해된다. 명종은 기뻐 정중부를 다시 문하시중으로 임명하고 정균에게는 추밀원 승선 벼슬을, 송유안에게는 추밀원 부사에 병부상서를 겸하게 했다. 조위총의 난이 끝나갈 무렵 천민인 망이, 망소이가 또 반란을 일으키지만 가까스로 난은 진압 된다.

 

  이의방이 죽었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의방 대신 정균이 안하무인으로 궁중에서 설치고 있을뿐. 정균은 이의방이 차지했던 집이며, 재물이며, 무비며, 갖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빼앗았다. 태후의 사저(私邸)와 별궁도 가졌다. 권력을 잡고 보니 욕심 밖에 나는 것이 없었다. 왕에게 공주까지 아내로 달라고 한다.

 

  “뿌린대로 거둔다던가? 칼로 흥한자 칼로 망한다고 정균의 지나친 욕심과 오만방자함은 경대승에 의해 징치(懲治) 된다. 경대승은 그를 따르는 견룡대정 허승, 김광림과 손을 잡고 정균, 정중부, 송유인을 척살한다. 그리고 이의민을 붙잡으러 하였으나 그는 자취를 감춘다. 거사 후 경대승은 임금을 안심시키고 바른 정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자신을 경호하기 위하여 일종의 사병 집단인 도방(都房) 설치하였고 이후 도방으로 인한 피해와 허승, 김광림에 대한 피해가 극심해지자 그는 손수 허승와 김광림을 죽이게 된다. 그러나 그도 잠들었다 깨어나지 못한.

 

  이의민은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 정권을 잡았다. 이의민은 키가 팔 척이나 되고 힘이 장사다. 정중부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보현원 거사, 김보당의 난, 의종 시해 등을 거치면서 대장군이 되었다. 경대승 집권시 숨어 있다가 그가 죽고 나자 임금을 겁박하여 중서문하 평장사의 공신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무신들 중에서도 최악이었다. 그가 계집종과 상관하니 그의 처는 건장한 종놈과 수작을 벌였다. 그의 세 아들 지순, 지영, 지광도 갖은 횡포를 자행했다. 그런데 김사미와 효심의 난이 일어나자 그의 아들 이지순을 시켜 신라 부흥을 부르짖는 세력들과 내통하여 임금의 자리를 노리기도 한다. 이지영은 국경지대를 시찰하면서 미색이 뛰어난 자운선을 데리고 왔었다. 최충헌이 어느날 연회석에서 자운선을 보고는 그녀를 빼앗아 오기로 결심한다.

 

  최충헌은 동생 충수와 거사를 단행한다. 이의민 4부자가 척살되고 그 어느 때보다도 철저한 숙청이 이루어지면서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었다. 이의민과 그의 아들들은 삼족을 멸했으며 이의민의 일당, 심지어 그들의 노비들까지 모조리 죽여버렸다. 또한 최충헌의 숙청에 반대하거나 반기를 든 일부 장군들은 그 자식까지 죽여 반역의 씨를 말려 버렸다. 봉사 10조를 주상(奏上)하여 민심의 안정을 꾀하지만 임금은 미온적이고 해서 임금을 폐위시키고 신종(神宗)을 옹립(擁立)한다. 경승은 귀향을 보낸다.

 

  왕위 찬탈까지 권유하던 최충수는 태자비를 폐위하고 형과 상의 없이 그의 딸을 태자비로 삼고자 하였으나 최충헌이 이를 반대하자 형제는 칼부리를 마주한다. 세에 밀린 충수는 임진강을 건너고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추격병들에 의해 죽고 말았다 그리고 그 소식을 듣도 태자궁에 들어가려던 그의 딸이 임진강까지 가서 물에 뛰어 들어 자살하고 말았다.

 

  이후 더욱 튼튼하게 지위를 다져 가며 그가 처음부터 꿈꾸었던 개혁 의지를 실천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정중부 이래의 악순환을 막기 위해 반대파는 물론,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불리하거나 의심이 가는 자는 가차없이 숙청을 가했다. 살해 음모에 대비하여 도방을 차리고 웬만한 것은 도방에서 처리했다. 때때로 자기 집에 문무관 3폼 이상을 모아 국사를 논의하기도 했다. 외출할 때에는 임금님 행차 이상으로 어마어마한 위용을 자랑했다. 물론 사병(私兵)도 양성했다. ‘더 이상 무신 간의 싸움은 없어야 한다. 내가 마지막이다이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자 꼭 필요한 자리에는 문신을 등용하고 과거를 실시하였다.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있나?” 민란은 계속되고 그의 종 만적도 난을 도모하다 붙잡혀 수장 당한다. 그는 더 한층 강경 일변도로 나가지 않을 수 없었다.

 

  최충헌의 허락을 받고 신종이 물러나고 희종이 보위에 올랐다. 희종은 최충헌에게 파격적인 벼슬을 내렸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태사(守太師),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상장군(上將軍), 상주국(上柱國), 판병부어사대사(判兵部御史臺事), 태자태사(太子太師). 희종은 특히 그를 은문상국(恩門相國)이라 부르며 그후로도 여러 칭호와 식읍을 내렸다. 최충헌은 흥녕부를 세우고 교정도감을 설치한다. 차츰 반란 세력의 소요가 줄어들긴 했으나 아직도 그의 목을 노리는 세력은 그치지 않았.

 

  최충헌은 이의민을 죽일 때, 아우 충수와 싸울 때,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할 때 등 항상 자신의 편이었던 생질 박진재를 의심하여 고문하고 다리의 힘줄을 잘라 귀향을 보내 그를 죽게한다. 물론 박진재의 문객들도 모두 숙청한다. 그는 진강후로 책봉되었고 사실상 나라의 제 일인자가 되었다. 희종 5년에 청교역 반란 음모가 발각되자 이를 구실로 희종을 폐위하고 강종을 추대한다. 60에 보위에 오른 강종은 2년 뒤 승하하고 고종이 그 뒤를 잇는다.

 

  고종 3. 나라의 형편이 외우내환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대륙에서 몽고가 강국으로 등장하자 그에 쫓긴 거란이 압록강을 넘어 고려로 침입 해 오지만 평소 국방을 등한시 해 온 고려는 고전을 면치 못한다. 결국 몽고와 형제지국으로 국교를 맺고서 위기를 수습한다. 이런 난리에는 최충헌이 맥을 못 추었지만 그의 자식을 왕손과 혼인시키고 자신은 왕씨 성을 하사 받는 등 경사와 영화가 그치지 않았다.

 

  최충헌이 병이 들자 또 한 차례 최씨 가문을 노리는 반란 모의 있었지만 진압되고 말았다. 결국 최충헌이 죽고 최우가 그 뒤를 이었다. 고종 8년 임금은 최우를 진양후(晋陽侯)에 봉했다. 최우는 집권하자 인심을 얻는 일도 하였지만 교정도감, 도방, 정방 정치를 하였다. 그리고 좌·우별초와 신의군의 삼별초를 조직하였다.

 

  고종 12년 평소 횡포가 심했던 몽고의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에서 살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런데도 1, 2년 아무말이 없던 몽고가 6년만인 고종 18년에 갑자기 침략해 왔다. 그 이전 고종 14년에에 최우는 주연지와 관련하여 그의 심복 김희제와 그의 세 아들과 여러 사람들을 죽이고 귀향을 보냈다.

 

  최우의 아우 향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잡혀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고종 18년 몽고의 살례탑이 압록강을 넘어 몽고 땅을 침입했다. 결사항전을 결의하고 화의가 성립이 안되자 몽고군은 그들의 야만성을 그대로 발휘하여 집과 재물을 모두 불 태우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조리 죽였다. 심지어 닭이나 개 등 가축까지 씨를 말렸다. 최우는 강화로 천도(遷都)를 결정한다. 몽고의 2차 침입은 처인성에서 살례탑이 승려 김윤후에 의해서 죽자 실패로 돌아갔다. 3차 침입은 당고(唐告)가 역적 홍복원을 앞세워 밀고 내려왔다. 이때 신라 이래로 국보인 황룡사 구층탑이 소실되었다. 조정은 불교의 힘으로 나라를 구하기 위해 팔만대장경 조판에 착수 한다. 고종 24년부터 14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81,137판의 팔만대장경을 완성하였다.

 

  최우가 쓰러졌다. 최우는 창기인 서련방이라는 여자가 낳은 두아들 만종과 만전이 있었는데 모두 남의 손가락질을 받는 위인이라 머리를 깎아 중을 만들었으나 그 또한 비행이 극심하여 부득이 만전을 환속시켜 이름을 항이라 고치고 벼슬을 주고 가병(家兵)도 나누어 주었다. 그가 최우의 뒤를 이었다. 그도 마찬가지로 몽고에 대항하면서 그에 반하는 세력들을 숙청하고 주색에 탐닉하다 죽고 아들 의가 그 뒤를 이었으나 김준이 반란을 일으켜 최의의 목을 베었다. 최씨 4대 육십 여 년의 무단정치가 막을 내렸다. 김준은 원래 최우의 심복이었으나 최우의 총희와 간통을 하다 적발되어 고성으로 귀향을 갔다가 다시 부름을 받은 바 있었는데 그가 반역에 성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때도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었다. 몽고는 침입을 계속하고 출륙환도와 국왕의 친조를 재촉하였다. 더 이상 몽고에 대항할 힘을 잃은 고종은 태자를 몽고에 보내 몽고를 섬기기로 하였다. 사실상의 완전 항복이었다.

 

  고종이 승하하고 태자가 귀국하여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원종(元宗) 임금이다. 김준의 뜻에 따라 차일피일 환도를 미루던 원종은 친조하여 몽고의 세조를 만나고 환국한다. 횡포가 극심했던 김준도 임연에 의해 죽고 임연 또한 원종을 폐하였다가 복위시키기도 하는 등 그 횡포는 전자들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런데 임연은 갑자기 등창이 터져 죽고 말았다. 아들 임유무는 자형(姊兄)인 홍문계와 송송례에 의해 죽고 원종은 환도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삼별초는 배중손을 중신으로 뭉쳐 진도, 탐라로 이동하면서 끝까지 몽고에 저항하였다. 그 뒤 삼별초의 잔당을 이끌고 다시 저항하던 김통정도 결국 죽고 생포돤 장수들도 처형 당했다.

 

  결국 무신정권도 외세에 의해 종말을 맞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피의 악순환, 그 가운데 백성들의 엄청난 고통. 국가의 명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데도 오직 자신의 권력만을 탐한 그들을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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