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인시대1-5 (전5권) 세트
밀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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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野人時代)

                                                                                                         이환경

  이환경(李煥慶 1950. 6. 20 ) 인천 출생. 대한민국의 대표 사극 드라마 작가. 한국인의 역사인식에 이 정도로 거대한 영향력을 미친 작가는 아직 없다고 한다. 대표작품으로는 무풍지대, 파천무, 용의 눈물, 야인시대, 태조 왕건, 영웅시대[2], 제국의 아침, 연개소문 등이 있다.

 

  김두한의 이야기는 장군의 아들 등 영화로도 많이 만들어진 바 있는데 이 작품은 그의 일대기를 그린 동명의 SBS 드라마 원작 소설이다.

 

  1966. 9. 22 정기국회 이틀째 국회 본회의장, 단상에 올라 연설을 하던 김두환은 국무위원들을 향해 똥물을 퍼부었다. 그리고 수감되었다.

 

  김두한은 1918. 5. 15 서울에서 아버지 김좌진과 어머니 박계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김좌진은 충남 홍성 출생으로 청산리대첩으로 유명한 독립군 사령관이었고, 조부는 홍성의 만석꾼 김형규라는 인물이었다. 김형규는 김좌진을 김옥균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개화사상이 투철했던 김좌진은 1907년 고향에서 호명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애국운동에 뛰어들었다. 군자금 모금으로 투옥되기도 하였으며 1917년 대한광복단으로 활동을 하다 일본 순사의 총에 맞고 도주 중 박계숙을 만났고 김두한이 태어나기 전 만주로 떠났다. 그리고는 항일전쟁에서 혁혁한 명성을 날린다.

 

  그러나 김좌진이 명성을 날릴수록 박계숙은 고등계 형사들로부터 시달림을 받는다. 김두한의 외조모인 신씨가 비록 유복한 살림을 하고 있었으나 이로 인하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날 정도였다. 김두한은 일곱 살 때 어머니와 함께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의 일을 뚜렷하게 기억했다.

 

  미와 경부는 박계숙을 매질하고 혹독하게 고문한다. 김두한은 일본인들에 대한 적개심으로 파랗게 불을 뿜고 있었다. 김두한은 순사들의 눈을 피해 외할머니와 원노인과 함께 아버지를 만나러 만주로 떠나 아버지를 만난다. 김두한은 아버지에게 회중시계를 받고 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향한다. 열차가 평양을 지날 무렵 외할머니는 숨을 거두고 김두한은 원노인과 달리는 열차를 탈출한다. 박계숙은 풀려났지만 고문에 의한 장 파열로 숨을 거둔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김두한은 개성에 있는 외삼촌 박도출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도박과 아편에 빠진 박도출은 아버지의 회중시계를 빼앗아 악질 고리대금 업자 가네야마에게 잡혔고 김두한은 시계를 되찾고 가네야마의 집을 불태우고 도망친다. 김두한은 산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유태권과 나석주를 만나 그들의 도움으로 순사들에게 쫓기면서도 무사히 경성에 돌아온다. 종로경찰서 앞에서 미와 경부를 만나 쫓기다 거지 정진영과 왕코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그들의 식구가 되어 수포교 시절을 시작한다. 그리고 왕초의 횡포에 맞서 왕초를 꺾고 새로운 왕초가 되었다.

 

  김두한은 삼청동에서 할머니와 큰어머니 오숙근을 만난다. 그리고는 원노인을 따라 살게 되고 그곳에서 유태권을 다시 만난다. 유태권은 무술의 고수였다. 김두한은 매일매일 체력을 단련하며 훈련하고 그로부터 무술 필살의 도를 배운다.

 

  몇 년이 지난 어느날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원 박상실에게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백야 김좌진 그는 불과 41세의 나이로 머나먼 북만주 땅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유태권이 만주에서 김두한을 데리러 보낸 최석규가 체포되고 원노인과 김두한도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다. 원노인은 고문으로 숨을 거두었고 김두한은 풀려났다. 삼청동에 들런 김두한은 할머니로부터 군자금 거금 1백 원을 받아 나와 종로로 향했다. 중국 밀선을 주선하겠다며 돈을 삼켜버린 털보를 조지고 김무옥을 병원에 입원시켜 버린다. 뿐만 아니라 보복을 위해 찾아 온 문영철을 돌려차기 한 방으로 끝내 버린다. 김영태의 전갈(傳喝)을 받고 만난 쌍칼은 돈을 돌려주며 독립운동은 만주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조선 상인들을 보호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라는 말을 듣고, 또한 그는 요시찰 인물로 만주로 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는 그의 부하가 되어 주먹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혼마찌의 하야시패가 종로를 넘보기 시작함으로써 종로 일대의 주먹세계에는 태풍전야처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국의 주먹황제라고 할 수 있는 구마적 고희경은 총독부를 등에 업은 하야시패와 손을 잡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고 그에 가장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이 신마적 엄동욱과 쌍칼 김기환이었다. 신마적은 칼을 잘 쓰고 동경 유학까지한 인텔리였고 힘이 장사였지만 성격이 포악하여 부하들이 따르지 않아 독불장군으로 행세했다. 하지만 구마적도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구마적과의 결투에서 패한 쌍칼은 조직을 떠나고 18세의 나이로 김두한이 종로 2가 주먹패의 새로운 오야붕으로 탄생한다.

 

  그런데 구마적은 종로 2가를 자기들에게 넘기라고 한다. 그러나 강하게 반발한 김두한은 구역을 접수하러 온 뭉치와 제비를 간단히 제압하고는 종로경찰서로 끌려 갔다 나온다. 김영태와 부하들은 구마적의 반격을 두려워 하며 마음 졸인다. 그런 중에도 신마적은 구마적의 부하들을 패고 김두한에게 행패를 부리고 일본 학생들을 두들기는 등 독자행보를 계속하고 있었으며 구마적은 하야시와 결탁하여 종로를 넘기고 이권을 취할 궁리를 하고 있었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명월관에서 설향에게 행패를 부리는 신마적을 찾아 간 김두한은 격투 끝에 신마적을 병원으로 보낸다. 얘기를 들은 구마적은 김두한이 점점 무서운 존재가 되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더 이상 놔두지 않기로 결심한다.

 

 종로패에게 상납금을 받으러 왔던 상하이박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김두한은 영철의 애인 아이란을 구하기 위해 하야시의 저택에 침입, 그로부터 현금 3천원을 강탈한. 하야시는 복면을 한 김두한에게 두려움을 느낀다.

 

  호시탐탐 앙갚음을 노리던 우미관패에 급습을 당하여 김두한은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 뭉치와 상하이박이 휘두른 각목을 맞은 김두한은 김영태에 업혀 길상사로 피해 누워 있었다. 그들이 떠난 종로는 우미관패들이 점령하여 상인들을 갈취하고 있었다. 김두한이 돌아왔다,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한 가운데 김두한은 멋지게 구마적을 제압하고 우미관을 접수했다. 우미관패들은 뿔뿔히 헤어졌다.

 

  김두한의 변한 모습을 본 할머니는 크게 실망한다. 김두한은 오야붕 회의를 소집했으나 참석하지 않은 자들을 찾아 나선다. 서대문의 작두를 제압하고 마포의 용식이를 압박하고 있을 때 상하이박에게 저격을 당했으나 다행이 목숨에는 지장이 없었다. 상하이박은 하야시에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 당하고 결국 김두한에게 무릎을 꿇었다. 마포의 용식이와 시구문의 짝코도 굴복하므로서 김두한은 명실상부한 암흑가의 황제가 되었다.

 

  훔친 아편을 국내로 들여와 처분하려던 와싱턴이 야쿠자 아사히마찌패의 두목 다나카에게 초죽음이 되었을 때 김두한이 나타나 다나카를 부수고 아편을 불살라버린 다음 그를 구해 치료까지 시켜 준다. 그런 중에도 하야시의 처제 나미코의 구애를 거절하고 불량 학생들로부터 구해준 박인애를 만나 데이트를 즐기던 김두한은 그녀의 아버지에 의해 고발되어 미와 경부에게 체포된다.

 

  나미코의 방문을 받은 박인애는 아버지에게 김인식과 결혼하는 조건으로 김두한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하고, 그는 고발을 취소한다. 그러나 요 시찰 인물인 김두한은 8개월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풀려난다. 출감하여 보니 종로경찰서에 마루오카 형사가 부임해 있고 조직은 풍비박산이 나 있었다. 한 달 동안 김무옥을 시켜 마루오카의 약점을 파악한 김두한은 마루오카에게 도발하여 그를 굴복시키고 오히려 그와 친하게 된다. 그후 평양축구단과 231의 싸움으로 종로경찰서에 연행되었을 때도 마루오카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된다.

 

  하야시패와의 대립은 서로 물러설 수 없게 되고 드디어 쌍방은 4040의 결투를 합의하였다. 그런데 김두한이 나미코를 만나고 있던 그 시간 아사히마찌패가 종로 곳곳을 기습하여 아수라장을 만들고는 들이닥친 순사들에게 우미관패들과 함께 종로경찰서로 연행되어 갔다. 위기에 처한 김두한은 새벽에 홀로 장충단공원으로 가서 40명의 사무라이와 혈투를 펼친다. 몇차례 칼을 맞은 위기의 순간 3명의 부하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달려들어 함께 처절한 혈전을 펼친다. 지친 김두한 일행이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 고노예와 하야시가 현장에 나타나고 가미소리의 비겁함을 질책하며 그들은 물러간다. 그 후 병원에 찾아 온 하야시는 패배를 인정한다. 김두한은 우미관으로 돌아왔다.

 

  전쟁은 갈수록 치열해 지고 일본의 압제도 더욱 극렬해졌다. 그 무렵 정진영은 공상당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김두한은 레슬링 선수 황병관과 함께하던 자리에서 전쟁터로 떠나는 일본 헌병과 시비가 붙어서 3개월 동안 몸을 피해 우미관을 떠나 있다가 돌아왔을 때 그의 부하들은 모조리 잡혀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김두한은 다시 종로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으나 노무라 대위와 약속한 유도 유단자 3명을 쓰러트리고 헌병대에서 석방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말썽을 피우던 상하이박은 마침내 주먹패 5백 명이 보는 앞에서 도끼로 손목이 잘리는 댓가를 치뤘다. 징용장을 받은 많은 주먹패들이 김두한에게 대책을 요구했다. 전국의 주먹패들이 모여 들었다. 총독부의 단게 총감을 만난 김두한은 반도의용청년대를 조직하고 주먹패들의 징용을 막아내었다. 그때 이정재가 청년대의 서기 일을 맡아 보게 된다. 일본은 또 김두한을 이용하기 위해 청년단 이정재 등 3명을 경찰로 임용까지 한다. 그런데 그들이 고등계 문달영을 체포해 취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김두한은 김부미와 결혼한다.

 

  부민관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고 다이너마이트를 구해 주었던 김두한은 또다시 미와 경부를 만나 고문을 당한다. 일본이 항복하고 김두한은 석방되었다. 그를 괴롭히던 미와 경부는 그의 부하 신영균에 의해 타살되었다.

 

  해방 정국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공산당이 싫어서 평양을 떠나 온 황병관과 이화룡을 만나고 백의사 박용직을 만난 김두한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상실이 공산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공산주의 활동과는 손을 끊고 백의사 단원으로 가입한다. 그리고는 박헌영을 납치하는 임무가 맡겨진다. 그러나 임무는 실패로 끝나고 정진영과 적으로 돌아섰다. 김두한은 유진산을 만나 대한민청 감찰부장 자리를 맡는다. 조병옥과 장택상도 만난다.

 

  시라소니와의 대결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두한이 스스로 무릎을 꿇고 그를 형님으로 모셨다. 찬탁, 반탁 시위가 계속되면서 좌,우익의 충돌이 갈수록 심해졌다. 민청의 활동비가 부족하여 오숙근의 집도 잡히고 장안의 부호들도 털었다. 여운형 납치 사건과 관련하여 CIC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기도 하는가 하면 철도노조 총파업 현장에 뛰어 들어 사태를 진압하기도 하는 등 좌익 활동을 분쇄하기 위해 종횡무진 활약을 계속 했다. 그 과정에서 여공을 강간하던 양코가 김두한의 총탄에 응징을 당한다. 조선민청 대원들의 함정에 빠져 총상도 입었다. 대한민청 대원들은 시공관을 습격하고 조선민청 정진영과 김천호를 타살한다. 김두한은 살인교사범으로 체포되어 CIC로 끌려간다. 김두한은 사형선고를 받고 오키나와 미군 형무소로 이송 되었다. 그는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의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

 

  김구가 안두희에게 암살되었다. 이듬해 북한 공산군의 기습 남침으로 전쟁이 발발 했다. 부산에서 의용군을 모집하여 훈련시킨 김두한은 포항전투에 참전한다. 김무옥과 문영철은 그곳에서 전사하였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이 수복되고 김두한은 서울로 올라 왔다. 휴전이 되고 김두한은 대한건설부흥단을 건중친목회로 전환시켰다. 그곳에는 막대한 이권이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주먹들이 다투어 모여 들었다.

 

  이정재는 해방전 반도의용대의 김두한 밑에서 총무를 맡기도 하였으나 그와 결별했고 피난시절에는 부산의 토박이 주먹들에게 위기에 몰렸을 때 시라소니의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는데 동대문파의 보스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기붕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고 정치테러의 배후에 항상 그가 있었다.

 

  조병옥의 권유를 받은 김두한은 국회의원 출마를 결심한다. 김두한은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종로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그러나 자유당의 공작으로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 되어 자유당에 입당할 수 밖에 없게 된다.

 

  건중친목회는 이권 분배 문제로 부하들간의 갈등이 표출된다. 평소 시라소니의 행동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정재의 부하들이 시라소니를 암습하여 만신창이를 만들고 이석재는 그나마 온전한 왼쪽 다리마저 쇠뭉치로 박살을 냈다. 이 사건으로 시라소니는 무려 6개월 간 병원 신세를 졌고 그 이후로 암흑계를 떠나 기독교에 귀의하여 죽을 때까지 선교사업에 일생을 바쳤다. 동대문파와 명동파는 결국 화해를 했다.

 

  김영태와 신영균도 이제는 국회의원인 김두한을 떠나야 했다. 이정재는 동대문 상인들을 중심으로 거대한 폭력조직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라소니에 대한 복수로 전 켈로부대 대원들의 습격이 있었다.

 

  3선 개헌으로 국회는 아수라장이었다. 이정재를 위시한 정치 깡패들은 국회에까지 들어와 국회의원들을 위협했다. 김두한이 특무대에 연금되는 동안 3선 개헌은 부결되었으나 정부는 사사오입하여 가결이라고 담화문을 발표했다. 정치가 혼란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정치인 40명을 제거하라는 밀명을 받은 김동진이 이영숙과 손을 잡고 조직을 배신하자 이석재는 김동진을 저격한다. 이정재는 조직을 유지광에게 맡기고 구속된다. 유지광은 남은 이영숙마저 제압한다. 이정재는 18일만에 석방되었다. 부패한 정권을 등에 업은 동대문 사단의 행패는 갈수록 심해졌다. 연예계를 휘어잡고 있는 임화수는 김희갑을 폭행하기도 하는 등 온갖 행패를 일 삼았으며 유지광의 부하들은 선거 유세장마다 나타나 야당 활동을 방해했다. , 부통령 선거에서 개표부정까지 모의했지만 이기붕은 결국 선거에서 지고 말았다. 이정재의 정치행사에서의 깡패 행위는 더욱 심해지고 김두한과는 더욱 대립하게 되었다. 국회에까지 찾아와 난동을 부리며 김두한에게 도발하지만 김두한은 주먹이 아니고 국회의원이었다.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은 이대통령의 양자로 경무대로 들어 간다. 민주당은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계획하고 그 경비를 김두한이 맡아서 옛날 부하들에게 부탁을 하게 된다. 연설장에 난입한 유지광이 이끄는 폭력배들은 국회의원들을 폭행하고 난장판을 만든다.

 

  이정재가 유지광을 앞세워 명동을 공격한다. 함정에 빠진 명동파는 차례로 구속되어 살실상 완전히 붕괴되기에 이르렀다. 이정재는 명동이 붕괴되자 이천으로 내려가 선거운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낙선을 우려한 이기붕이 이정재의 선거구를 가로챘다.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패배했고 이정재는 동대문을 임화수에게 맡기고 물러났다.

 

  조병옥이 서거하고 선거는 장면과 이기붕의 대결이 관심사였다. 마침내 운명의 3. 15. 자유당의 지시를 받은 임화수와 유지광은 몰표를 투표함 속에 넣기 시작했다. 한 낮이 되자 마산에서 부정선거에 대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유지광 일당이 고대생들을 습격한다. 이것이 기사화되면서 시위는 더욱 격화되고 마침내 경찰은 시위대에 발포를 하고 만다. 결국 이기붕 일가는 자살하고 이승만 대동령은 하야하고 하와이로 망명한다.

 

  장면과 선거구가 겹쳐 홍성에서 출마한 김두한은 뜻을 이루지 못한다. 과도정부가 들어서고 동대문 조직이 모조리 검거되었다.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고 종로의 보궐선거에 도전하였지만 다시 고배를 마신다. 그리고 5. 16 쿠데타가 일어났다. 폭력배 1,500. 전국에서 활약하던 주먹패 대부분이 체포되었다. 혁명재판부의 선고에 의해 이정재, 임화수는 사형 집행되고 유지광은 무기징역으로 감형 받는.

 

  김두한은 김종필과 손잡고 애국단을 발족시킨다. 그러나 김종필이 외유를 떠나자 조직은 힘을 잃었고 김두한은 또다시 선거에서 패배하고 만다. 그러나 김종필의 권유로 출마한 용산의 보궐선거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당선되었다.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던 김두한은 한독당 내란음모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나기도 했다. 국회 오물 투척 사건으로 6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그 후 야인이 된 김두한은 여러 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으나 잘 된 것이 없었고 고혈압으로 쓰러져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천하에 비열하고 뻔뻔스럽고 교활하고 음흉한 것이 정치인인데 김두한이 어울렸을까? 그는 국회에서 독립운동을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풍운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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