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의 노래 1-2
생각의나무
평점 :


칼의 노래

                                                                                                             김 훈

  김훈(1948. 5. 5 ) 서울출생. 고대 영문학 중퇴. 오랜 기자생활 후 1994년 문학동네 소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으로 데뷔 여러편의 작품이 있다.

  작가가 20대 초반 난중일기를 읽고 그 때의 감정을 30년이 지난 다음 작품화 했다고 한다.

 

  이 소설은 임진란이 나고 이순신 장군이 탄핵되어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나 백의종군할 때부터 적의 유탄에 맞아 죽는 순간까지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장군이 작가에 빙의(憑依) 되어 자기 서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남해안의 버려진 섬들, 그 위로 자욱하게 내려앉은 숨 막히는 적요(寂寥), 바다를 가득 메운 떠다니는 시체들, 간간히 부는 바람에 실려 오는 시체 썩는 냄새, 징징징 칼의 울음이 들리는 듯하다. 잠 못 이루는 밤에는 수천수만의 적들의 노 젓는 소리가 환청으로 들려온다.

 

  조선 수군의 연합함대가 칠천량에서 대패, 전멸하고 원균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도원수 권률이 진주에 들렀다가 온다는 전갈이다. 그러나 진주성은 계사년 함락되어 5천 여 관민이 모두 성안에서 도륙되어 폐허로 방치되어 왔다.

 

  어머니의 부고를 받았다. 어머니를 뵈올 때는 늘 어서 가거라. 가서, 나라의 원수를 크게 갚아라고 하셨다. 임금으로부터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한다는 교지를 받았다. ………신의 몸이 아직 살아있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소 3마리를 잡고 술 10말을 풀어 굶주린 장졸들을 먹여 격려하고 인근 마을의 백성들에게도 보냈다. 군복도 제대로 걸친 자가 없다. 우수영엔 군사 120명과 배 12척뿐이다. 명량으로 유인하여 적을 맞는다. 일자진을 펼치고 나아가고, 밀고, 떨어져서 멀리 쏘고 적을 섬멸한다.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도 탈영병은 수시로 발생한다. 명량에서는 헤아릴 수 없는 적들이 몰려왔고 수를 셀 수 없는 적들이 죽었다.

 장계를 보낸 지 두 달 만에 논공행상이 내려왔다. 은전 스무 냥의 무게가 섬뜩했다. 임금이 보낸 선전관 이원길은 열흘 동안이나 수영에 머물면서 탈영한 배설에 관해 조사한다. 임금은 수군통제사의 역모를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원길이 돌아간 지 보름 뒤에 임금이 보낸 면사첩(免死帖)을 받았다. ‘면사너를 죽여 마땅하지만 죽이지는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셋째 아들 이면은 고향 아산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싸우다 적의 칼을 받았다. 소금창고 안에서 숨죽여 울었다.

 

  적들은 명의 육군에 의해 남하하여 경상도에서 전라도에 이르는 남해안 8백리 포구마다 성을 쌓고 장기 농성 태세로 들어갔다.

간간이 새로운 배들이 만들어 졌다. 간헐적인 전투는 발생하지만 적들은 오지 않았다. 새칼에 검명(劒銘)을 새겼다. “一揮掃蕩 血染山河

 

  임진년에는 갑옷을 벗을 날이 없었다. 임금은 의주로 피난하고 선왕들의 능이 파헤쳐졌다. 임금은 압록강 가에서도 자주 울었다. 임금은 울음과 언어로써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언어와 울음이 임금의 권력이었고, 언어와 울음 사이에서 임금의 칼은 보이지 않았다. 임금의 전쟁과 나의 전쟁은 크게 달랐다. 바다에서, 적들은 늘 정면에서 달려들었다. 적의 함대는 무수한 깃발로 뒤덮혀 있었다. 적들은 젊은 수탉처럼 치장하고 살기를 뿜어냈다. 적들이 무너지는 모습도 달려드는 모습과 닮아 있었다. 임금은 조속히 적을 무찌르라 독촉한다. 적은 조선인 포로를 전진 배치하여 또 다시 다가오고 있었다.

 

  정유년 지나고 무술년이 되어 명과 일본의 강화 협상 소문이 퍼져 있었다. 명의 총병관 진린이 수군을 지휘하여 남해안으로 이동했다. 무슨 일인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군대의 철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한다. 왜군은 이제 철수할 것이다. 진린은 적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이득만을 챙겨 돌아갈 것이다. 임진년보다 더 크고 깊은 무서운 적의로 나는 잠들지 않았다.

  밤이면 해안과 섬에 적들의 봉화가 올랐다. 비가 내리는 새벽 거금도 남단을 우회하는 적들의 외곽을 봉쇄하여 달이 뜰 무렵에 싸움이 끝났다. 적선 50척이 깨어졌고 50척이 달아났다. 적들은 부상자 5백 명을 죽이고 조선인 포로 중 병약자 3백 명을 죽여 바다에 버렸다. 적이 물러가버린 빈 바다에서 죽을 수는 없다. 하루하루가 무서웠다. 오는 적보다 가는 적이 더 무서웠다.

 

  노량의 물길은 사나웠다. 나는 빌고 있었다. 이제 죽기를 원하나이다. 하오나 이 원수를 갚게 하소서. - 지금 싸움이 한창이다.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마라. 을 계속 울려라 ……………

 

  앞에는 왜적 뒤에는 임금, 이순신 장군의 절망을 강하게 느낀다.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해 한 몸을 바친 거룩함과 숭고함을 다시 새긴다. 성웅(聖雄)으로 추앙받는 이순신 장군은 당시 일본에서 조차 무서워 했음을 소설 대망(도쿠가와 이에야스)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그가 지휘한 해전은 세계해전사에도 그 이름을 남겨 일본의 장군들도 존경하는 인물로 손꼽히고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라가 백척간두(百尺竿頭) 위태로움에 처했을 때 生卽必死 死卽必生으로 살신성인(殺身成仁)한 민족의 영웅, 장군을 존경한다.

 

  여담이다. 전국 곳곳에 세워진 장군의 동상은 그냥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적 경의의 실체(實體)이며 외세의 침략에 굴복하지 않는 민족의 자긍심이다. 얼마전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의 장군 동상을 외진 곳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겠다고 했다. 발상 자체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역사를 잊는다면 그들에게 미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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