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의 두 번째, 통산 네 번째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자축(自祝)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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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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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도의 <드래곤 라자>라는 소설이 있다. 그 소설에서 드래곤의 ‘라자’로 선택된 사람은 개인이 아닌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중개인으로서 존재한다. 이 소설에서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는 드래곤의 ‘라자’처럼 최초의 나무와 인간 사이의 중개인으로 선택되고, 중개인으로서 살아간다. 그런데 이 나무와 인간 사이의 중개라는 것이 참 요상하다. 중개인으로 선택된 사람은 다양한 상황에서 사람들이 죽는 꿈을 꾸고, 그 중 정해진,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일. 그 중 단 한 사람만을 살릴 수 있는 일. 그보다 더한 지옥이 있을까? [p. 72]


사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꿈이라고 해도 사람의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것 때문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아니 매일 이런 꿈을 꿔야 한다면 스스로 목숨을 끊을지도 모르겠다. 그래 이건 ‘저주’다. 이걸 저주라고 할 수 없다면 무엇을 저주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 최초에 씨앗에서 움튼 나무가 선택한 단 한 사람을 내가 행동함으로써 구할 수 있다는 점이 이 일이 단순히 저주에 머무르지 않게 만들고 있다. 물론 장미수가 바랬던 것처럼 자신에게 소중한 사람을 단 하나라도 구할 수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일이다. 세상엔 공짜가 없으니까. 하지만, 그것조차 허용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잠들자마자 죽음이 보였다. 곳곳이 불탔다. 연기가 자욱했다. 숨이 막혔다. 목화는 내내 어린아이만을 바라봤다. 가장 먼저 의식을 잃은 그 아이를 목화는 간절히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목화의 의지는 소용없었다. 나무의 선택만이 중요했다. [p. 140]


장미수는 첫 번째 임신을 하면서, 임신 기간 동안 이 업의 수행이 유예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그녀는 동료들의 눈총에도 불구하고 계속 임신을 시도했다. 이런 것을 보면, 차라리 죽음으로써 이 고통을 벗어나려 시도하는 이도 있었을 텐데……. 의외로 고행(苦行)하는 수행자처럼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는 대를 이어가며, 이 중개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보통사람이라면 몇 번을 미쳐버릴 상황에서,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무는 왜 단 한 사람만 구할 기회를 부여할까? 그리고 그 사람들이 선택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드라마 <도깨비>의


‘신은 여전히 듣고 있지 않으니’, 투덜대기에

‘기억을 지은 신의 뜻이 있겠지’, 넘겨짚기에

늘 듣고 있었다.

죽음을 탄원하기에 기회도 줬다.

헌데, 왜 아직 살아있는 것이지?

기억을 지운 적 없다.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했을 뿐.

그럼에도 신의 계획 같기도, 실수 같기도 한가?

신은 그저 질문하는 자일뿐. 운명은 내가 던지는 질문이다. 답은, 그대들이 찾아라.


라는 유명한 대사처럼 진짜 신(神)은 그리스-로마 신화 속의 신들처럼 인간적이기보다는 방관하는 초월자(超越者)나 감정 없는 법칙(法則)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리고 나무를 신(神) 혹은 그에 가까운 존재로 간주하면 임천자, 장미수, 신목화가 겪은 현상들이 납득이 가긴 한다.

물론 납득이 간다고 해서 이를 당연하다는 듯이 수용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아니 같은 상황이라고 해도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물론 사람을 구하는 일을 거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업을 거부할 경우 대가를 치러야 했다. 웬만한 남자보다 힘이 센 할머니 임천자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간호사인 어머니 장미수는 두통을 앓아야 했다.

무병(巫病)을 앓는 이가 내림굿을 통해 무당이 되듯, 할머니 임천자는 중개자의 역할에 순응한다. 그러다가 죽음이 가까워지자 오랫동안 묻어두었던, ‘나는 왜 죽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그리고 자신도 누군가의 ‘단 한 사람’이었을 가능성을 떠올린다. 어쩌면 자신이 그렇게 살아났기에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맡았을지도 모른다고 여기게 된다.

반면 어머니 장미수에게 구할 수 없는 너무 많은 죽음에 비해 겨우 단 한 사람만 살릴 수 있는 능력은 ‘저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 한 사람조차 자신이 선택할 수 없으니……. 그녀에게 이 업(業)은 정해진 죽음의 대상자 가운데 신의 변덕 혹은 옹졸한 차별에 의해 한 사람을 제외시키는 것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그녀가 신(神)을 저주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신목화는 이 ‘업(業)’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목화는 액자 속의 글귀를 곱씹었다.

그분은 어디에 있는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언젠가 목화는 임천자의 혼잣말을 들었다.

신을 찾는 사람은 자기 속부터 들여다봐야 해. 거기 짐승이 있는지, 연꽃이 있는지.

언젠가 목화는 장미수의 혼잣말을 들었다.

기도로 구할 수 있는 건 감사하다는 말뿐이지. 나머지는 다 인간 몫이야.

목화는 종종 상상했다. 깊은 산속에서 홀로 태어나 홀로 살다가 홀로 죽은 사람을. 작은 행성의 드넓은 바다에서 홀로 탄생해 홀로 숨 쉬다 홀로 소멸한 생명을. 끝없는 사막에서 홀로 피어나 홀로 메말라 가는 식물을. 그들이 확실히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신은 그들에게 관심이 있는가? 우주에서 생명이란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 신은 생명에 관심이 없다. 살려달라는 기도를 신은 이해하지 못한다. [pp.141~142]


그녀는 자신이 살려준 사람이 다시 자살하는 것을 보고, 질문하며 확인하고 싶어졌다.


이전까지는 오직 사람을 살리는 일에만 집중했다. 살아난 자가 얼마나 더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나무가 주는 생명에 시한이 있는가? 목화는 그 답을 알고 싶었다. 알아야 했다. [p. 165]


아무리 기록을 남겼다고 해도 그 수많은 죽음을, 아니 살아난 단 한 사람을 확인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다행히 어머니 장미수는 종합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였고 아버지 신복일도 그 종합병원 약제부에서 일했던 약사(?)였다.


병원으로 이송되거나 병원에서 살아난 사람이 많았다. 미수와 복일의 도움으로 목화는 그 중 몇 사람을 더 찾아갈 수 있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신을 믿어서 구원받았다고 길거리에서 증언했다.

~ 중략 ~

어떤 사람은 주말 봉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독거노인의 집을 청소하고 수리하는 일이었다.

~ 중략 ~

바닷가 근처에 사는 단 한 명은 아침저녁으로 해변의 쓰레기를 주웠다.

~중략 ~

누군가는 휴대폰으로 아내와 통화하며 큰 소리로 심한 욕을 했다. 오래 듣지 않아도 폭력적인 남편임을 알 수 있었다. [pp. 218~219


어쩌면 죽기 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이었다.

그렇다면 중개자의 역할은 무엇일까? 해답은 마테를링크의 <파랑새>에서 나오는 어린 남매의 비둘기처럼 바로 옆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근심처럼 해답도 같이 붙어 있다는 게 포인트야. 각자 자기 근심에서 빠져나갈 길도 같이 품고 있는데 당장 너무 힘들고 아프니까 나갈 길은 못 보고 지옥만 보는 거지.

~ 중략 ~

내 동생의 역할은 나갈 길 쪽으로 그 사람의 몸을 조금 돌려주는 거고. 그게 무슨 말이겠어. 내 동생이 그 사람을 구하는 게 아니고 자기가 자기를 구한다는 뜻이지. 누가 대신 살아주는 거 아니잖아. [p. 203]


이를 깨달은


목화는 타인의 삶과 죽음에 관한 판단을 멈추었다. 그리고 중개 중에 이전에는 하지 않는 것을 했다. 마음을 다해 명복과 축복을 전하는 일.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난 사람의 미래를 기원하는 일. 그것은 나무의 일이 아니었다. 사람으로서 목화가 하는 일이었다. 나무의 지시가 아니었다. 목화의 자발적인 마음이었다. [pp. 220~221]


다시 생각해보면, 그녀들이 중개자로서 일하는 꿈 속의 공간은 일종의 응급실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응급실에서는 의사가 당장 조치를 취해야 하는 위급환자라고 판단되면, 접수 순서에 상관없이 진료에 들어간다. 그렇게 보면, 최초의 나무가 판단한 단 한 사람을 중개자가 구할 수 있는 것도 당연하다. 게다가 할머니 임천자의 추측대로 누군가의 ‘단 한 사람’으로 선택되어 살아난 자가 중개인으로 뽑힌다면, 얘기는 다르다.

누군가의 죽음을 대가로 내가 살아났다면, 그 삶과 죽음의 무게만큼 내가 대가를 치르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저주라고 느낄 만큼 무거운 업(業)을 수행하는 것일지라도.


모르겠다. 거듭 생각해봐도 운명은 여전히 알 수 없다. 어쩌면 인간은 죽을 때까지 신이 던진 ‘운명’이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구하다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당신은 어떤 대답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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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소민아 2024-09-01 2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당선~축하드립니다!

KOEMMA 2024-09-07 19: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소민아님, 축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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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근대 한국 예술가의 삶을 다룬 책이 나왔을까?


근대(近代).

서양에서 산업혁명 이후인 18세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1945)까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조금 다른 시기를 가리키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흥선대원군의 집권(1864)부터 광복(1945)까지라고 한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에게 붙여진 ‘친일파’ 혹은 ‘빨갱이’ 낙인은 그 혼란기를 버텨온 많은 예술가들의 상당수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죄(原罪)였다.


한국 근대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각자의 시련을 딛고 내면을 벼리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예술가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연대하고 의지하며, 굶어 죽어도 ‘멋’을 유지했던 인간들이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였기 때문에, 세속의 무가치한 경쟁과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속세와 동떨어진 나머지 살아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림이나 조각을 팔지 못해 가난했으며, 심지어 죽고 나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지금도 한국인 대부분이 이름을 알고 있는 근대미술가는 기껏해야 이중섭, 박수근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나. 외국 작가라면 훨씬 더 많은 이름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한국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pp. 5~6]


최근 근대 경성(京城)의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는 기획이 몇 권 나왔다.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비롯해서 황정수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서촌편>(2022)과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북촌편>(2022)는 아마도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네 개의 틀로 분류한 예술가들의 삶


저자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2012년부터 한국 근대작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작가들의 아카이브(편지, 일기, 사진, 노트 등)를 체계적으로 수집 및 구축하는 업무를 최초로 기획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유영국: 절대와 자유] 등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의 개인전과 1930~40년 경성을 무대로 펼쳐진 미술과 문학의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 전시를 계기로 신문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으면서 전시회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책, <샬롱 드 경성>(2023)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된다.

‘1장 화가와 시인의 우정’에서는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이름으로 밀어닥친 신문물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옛 문인(文人)처럼 화가와 시인, 소설가가 장르를 넘나드는 우정과 협업을 통해 서로의 예술 세계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소개한다.

<오감도(烏瞰圖)> 등 초현실주의 시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상(李箱, 1910~1937)과 그의 절친으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야수파 화가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의 우정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 모더니즘의 완성자라는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 삽화가로 명성을 떨친 정현웅(鄭玄雄, 1910~1976), 한국에 모더니즘을 소개한 김기림(金起林, 1908~?)과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통해 복식사(服飾史)를 개척한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 등의 이야기는 낯설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북(在北), 월북(越北), 납북(拉北) 등의 사유로 상당 기간 그들의 작품까지도 금기(禁忌)시 되었기 때문이다.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소설 <나목(裸木)>의 집필 계기가 된,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유작전(遺作展)은 인연이 가져다 준 또 다른 형태의 예술 세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니까.


박수근은 1965년 5월 작고했는데, 같은 해 10월 유작전이 열렸다.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전시회에 갔다가 박수근의 작품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가 있었다. 바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였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서, 박수근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 소설 <나목>을 썼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주부로 살아가던 박완서는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나이 39세가 될 때까지 주부였던 사람이 이런 훌륭한 소설을 썼을 리 없다며, 잡지사에서 집으로 찾아가 진짜 박완서가 쓴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pp. 83~84]



‘2장 화가와 그의 아내’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들과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이며 후원자였던 아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화가는 알아도,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의 배우자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배우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들의 예술세계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그의 아내이자 수필가인 변동림(卞東琳) 아니 김향안(金鄕岸, 19116~2004)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혼 풍습으로 김환기가 일찍 결혼을 하고 딸을 셋 둔 채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변동림에게 선뜻 고백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 그에게 변동림이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셋이 아니라) 열이면 어때? 데려다 잘 교육시키면 되지.” “대신 당신의 아호(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 향안(鄕岸)을 내게 주세요.”

이렇게 해서 변동림은 김환기의 아호를 받아 김향안이 되었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죽음을 맞은 후,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같이 살자’는 희망을 안겨주며,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 중략 ~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그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김환기를 위해, 김향안은 1955년 홀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그녀는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에 김환기를 파리로 불러들였다.

~ 중략 ~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筆寫)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同志)’에 가까웠다. [pp. 158~160]



‘3장 화가와 그의 시대’에서는 야만의 시대를 버텨야 했던 화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혹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남긴 작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도리어 파리에서의 최린(崔麟)과의 불륜 그리고 이에 따른 이혼으로 대표되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은 어떨까?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한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등지고 산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이 지금보다 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서슴없이 가시밭길을 걷는 선구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로 인해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 불행히도 1933년 화실의 화재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타버려서 현재 전하는 그녀의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그녀는 온몸을 불태워 그 시대 여성에게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나아가다가 사그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길은 누군가 걸아 가야 생기는 것이므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었던 이쾌대(李快大, 1913~1965)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난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가 더 나아갈 기회를 앗아갔다. 안 그래도 그의 형 이여성(李如星, 1901~?)이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등에서 활약하다가 월북했는데, 그 자신마저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그가 남쪽에 남을 기회를 사실상 박탈해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지우는데 충분했다.


향토적 서정주의를 추구하여 ‘한국의 고갱’이라는 평가도 있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술 때문에 어이없이 목숨을 날려야 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술 그만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 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pp. 249~250]


일제강점기에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더불어 일본인이 인정하는 3명의 조선인 가운데 하나였던 천재 예술가는 이렇게 주사(酒邪)로 인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4장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은 고통과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오로지 예술을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의 짙고 깊은 ‘운명’을 이야기한다.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삶은 예술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진 이를 보여준다.


“장 선생님은 도와드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버려둔 것뿐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그분이 작품이 안 되고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술만 드실 때입니다. 그때는 소금조차도 한 번 안 찍어 잡수시지요.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 후에는 다시 캔버스에 밤낮없이 몰두하시지요.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는 그의 삶뿐 아니라 작품에 철저하게 녹아 있다. 1958년에 그린〈까치〉라는 작품을 보자. 이중섭에게는 ‘황소’가 화가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었다면, 장욱진에게는 ‘까치’가 그러했다. 장욱진은 마을 주변을 낮게 날며 세상 사람을 관찰하는 이 작고 영리한 새를 좋아했다. 그림 속 까치는 그믐날 깜깜한 밤에 홀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일견 조형적으로 단순하고 귀여운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는 화면 전체를 밤의 어둠으로 새까맣게 뒤덮은 다음, 매우 가느다란 도구로 수천 수만 번의 손놀림을 통해 검은 물감을 ‘긁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증맞은 까치 한 마리를 남기기 위해, 도대체 화가는 얼마나 여러 번 화면을 긁고 또 긁었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작업하길 좋아했던 그는 이 작은 화면을 긁느라 얼마나 많은 새벽을 홀로 지냈을까. 작가의 철저한 고독과 치열한 내면세계가 전해져 내게 이 그림은 도무지 귀엽지가 않고, 도리어 아프고 처절해 보인다. [pp. 288~289]


나혜석처럼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화가 일무(一無) 이성자(李聖子, 1918~2009)의 삶도 기구했다. 자식을 경성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한 분가가 끝내 별거로 이어졌다. 남편이 서울 집에 있는 세 아들을 인천으로 데려가자 그녀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떠나 버렸다. 예상밖에 그녀는 이곳에서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녀의 대표작 <내가 아는 어머니>가 1962년 파리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열린 [에콜 드 파리]에 출품되어 파리 화단의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성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동시에 어머니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세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붓질을 한 번 하면서, 이건 내가 우리 아이들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고,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렸다”고 이성자는 말했다. 그녀는 자식을 키우던 모든 열정을 오롯이 작품을 생산하는 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성자는 진정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향이 그립고 그래서 슬프지 않으냐는 파리 친구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

그런 ‘초월’의 세계관이 그녀의 삶을 지탱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세 아들은 어땠을까? 진짜 밥을 주는 대신, 밥 주듯이 그림을 그린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세 아들은 진심으로 예술가로서의 이성자를 존경했다. 물론 성장기에는 고난이 있었겠지만, 세 아들은 결국 이성자를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라났다. 1965년, 14년 만에 성공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이성자의 귀국전을 열어 준 것도 첫째 아들 신용석(1941~ )이었다. [pp. 322~323]


나혜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보여준 셈이다.


마치 스토리텔링이 있는 전시회 네 개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전시회장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옆에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해당 작품을 그린 이와 작품의 배경 등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도 힘든 시대였기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고, 어떤 명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남긴,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빛나니까.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억(記憶)’이라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한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작품을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열연한 저격수 안옥윤이 남긴 명대사 “모르지.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처럼 그들의 신념(信念)을, 그들의 노력을 전달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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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성당, 빛이 머무는 곳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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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네스크 양식이 형성되기까지


로마네스크 양식의 형성, 발달에는 ‘로마다운’이라는 뜻을 가진 ‘로마네스크’라는 명칭에서 볼 수 있듯이 게르만족의 로마에 대한 로망이 작용하고 있다. 이런 로망이 생기게 된 것에는 그들이 로마 제국을 문명의 상징으로 간주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때 우리의 부모 세대가 도자기조차 미제를 원해 코넬사의 강화유리 제품을 새롭고 좋은 도자기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그래서 게르만족은 로마 제국을 멸망시켰을 때, 내심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로마’라는 객관적인 문명의 기준이 사라졌으니까.

아마도 이런 기억들이 게르만족과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슬라브족의 심층심리에 새겨져서 그들이 각각 제2의 로마[신성로마제국], 제3의 로마를 주장한 것이 아닐까?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유럽의 패권을 장악한 게르만족들은 각자 자기방식대로 로마 제국에 정착했다. 그 중 하나인 프랑크족의 프랑크 왕국에서 재미난 일이 발생했다. 후한(後漢)의 승상(丞相)이었던 조조(曹操)가 선양(禪讓)받아 위(魏)나라를 세운 것처럼, 프랑크 왕국의 궁재(宮宰)였던 소(小)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로부터 선양(禪讓)받아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했던 것이다. 선양이라는 이름의 찬탈을 합리화하기 위해, 소(小) 피핀은 로마 교황의 권위를 빌려 피핀 3세로 즉위했다. 그렇기에 교황 스테파노 2세의 요청을 받자,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Pippinus Ⅲ, 재위 751~768)와 그 뒤를 이은 카롤루스 대제(Carolus Magnus, 재위 768~814)는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잡은 롬바르디아 왕국(Regnum Langobardorum, 568~774)을 공략, 프랑크 왕국에 편입시켰다. 이는 건축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정리, 발전시키고 있던,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기술을 서유럽 전체로 퍼트리고, 로마네스크 양식의 탄생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시공간적으로 단절된 로마 건축과 비잔틴 건축의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어떻게 10세기 프랑크 왕국에 나타났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 궁금증을 풀어줄 열쇠를 가지고 있는 나라가 있습니다. 게르만족의 일파로 알프스 북쪽에 살다가 568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에 자리를 잡은 롬바르디아 왕국입니다.

~ 중략 ~

6~8세기 롬바르디아 왕국에서 발생한 건축을 롬바르디아 건축이라고 부르는데, 왕국은 국가차원에서 건축 장인들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호 육성하는 전통이 있어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 특히 조적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건축의 조적술은 로마 제국보다는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에 가까웠습니다.

콘크리트로 중심 벽체를 만들고 그 외벽에 높이가 낮은 벽돌을 쌓는 방식의 로마 제국의 조적술은 강도는 좋았지만, 작업이 복잡하고 벽체가 두꺼워져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반면에 비잔틴 제국의 조적술을 오직 조적으로만 벽체를 만드는 방식으로, 벽돌 하나의 높이가 높고 콘크리트 작업이 없어서 공사가 단순하고 소요 시간이 적었습니다. 롬바르디아 왕국은 이탈리아에서 비잔틴 제국과 전쟁을 하면서 제국의 조적술을 배우고 정리해 발전시켰습니다. [pp. 42~43]


덕분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싹도 카를루스 대제 시기에 발생했다. 그는 아헨 왕궁 성당(Palatine Chapel in Aachen)을 건설했는데, 로마 제국 시대의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장방형 평면의 성당)을 따르면서도 비주류에 속하는 산비탈레 성당(Basilica di San Vitale)의 팔각형 평면과 복층 갤러리를 수용, ‘프레-로마네스크’ 양식이라고 불리는 로마네스크 성당의 맹아(萌芽)를 보여주었다.


로마네스크 성당의 구조와 명칭

 

출처: <로마네스크 성당>, p. 37


 

각 국가별 로마네스크 성당  


로마네스크 성당의 특징으로는 창문과 문, 아케이드에 로마식 반원형 아치를 많이 사용한 점, 건물 내부를 떠받치기 위하여 원통형 볼트와 교차 볼트를 사용한 점, 또 아치 때문에 수평으로 발생하는 힘에 견딜 수 있도록 기둥과 벽을 두껍게 구축하는 반면 창문을 되도록 작게 만들었다는 점 등이 있다.

이런 로마네스크 양식은 십자군이나 성지 순례에 의해 여러 양식이 교류하면서 발전했고, 특히 수도회의 융성과 활약으로 여러 지역에 전파되었다.


야고보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지낸 열두 사도 중의 한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그의 무덤은 순례의 중심이 되기에 충분했습니다. 게다가 지중해의 머나먼 뱃길 끝 예루살렘보다도, 알프스의 높은 산 너머 로마보다도, 지척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서유럽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순례 성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 이미 네 갈래의 고정적인 순례길이 생겨났고, 이 순례길들이 지나는 곳에는 크고 작은 도시들이 형성되었으며, 그 곳마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순례 성당이 지어졌습니다. [p.101]



프랑스의 로마네스크는 ‘보편주의’와 ‘지역주의’라는 두 갈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보편주의는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 지방의 로마네스크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지방의 로마네스크로 나뉜다. 이러한 프랑스 남부 초기 로마네스크 성당은 11세기 전반부에 그 형식이 완성되어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전파되었다. 이런 보편주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는 노르망디 지방의 ‘캉의 생테티엔 수도원 성당(Abbaye Saint-Etienne de Caen)’와 부르고뉴 지방의 ‘제 3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Ⅲ)’로 대표된다.

지역주의로는 프랑스 남서부 지역의 성당이 하나의 공간으로 이루어진 홀(hall) 교회 양식의 ‘생사뱅 수도원 성당(Abbaye de Saint-Savin-sur-Gartempe)’과 네이브(nave)1)의 베이(bay)2)마다 천장이 석조 돔으로 올려진 돔(dome) 교회 양식의 ‘앙굴렘 대성당(Cathedrale Saint-Pierre d’Angouleme)’이 있다.



독일 북부의 초기 로마네스크는 보통 ‘오토 건축’이라고 불린다. 웨스트워크 자리에 이스트엔트의 성가대석과 앱스의 구성이 한 번 더 들어가는 ‘더블 엔더’가 특징인 이 양식은 작센 지역의 ‘힐데스하임의 성 미카엘 성당(Michaeliskirche in Hildesheim)’과 라인란트 하류 지역의 ‘트리어 대성당(Trierer Dom)’ 등이 대표적이다. 이러한 지역주의 성향의 오토 건축은 ‘제1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Ⅰ)’ 의 완공으로 보편주의로 성장했지만, 독일 로마네스크 양식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것은 ‘제2 슈파이어 대성당(Speyerer Dom Ⅱ)’이다.


국가 차원에서 프랑스와 독일은 이탈리아를 두고 서로 경쟁했습니다. 그리고 교회 차원에서는 보편 교회인 로마와 가까운 프랑스 교회와 독일의 지역 교회가 긴장 관계에 놓였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이러한 대치는 성당 건축에서도 드러났는데, 제3 클뤼니 성당과 제2 슈파이어 성당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제3 클뤼니 성당은 보편 교회와의 관계 속에서 종교적인 면이 강했던 반면, 제2 슈파이어 성당은 지역 교회 차원에서 정치적인 색채를 많이 띠었습니다. 하지만 두 성당 사이에 공통점도 있었는데 그것은 각각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종합한 것과 그 결과로 모두 대형화를 이루었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제2 슈파이어 성당은 독일 로마네스크에서 가장 중요한 성당으로 독일 로마네스크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pp. 173~177]


덧붙이자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프랑스 로마네스크가 보여준 입체적이고 복잡한 구조와는 달리 평면적이고 단순하며 추상적인 면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로마네스크가 수직성을 강조하면서 국가보다는 교회의 우월성을 나타냈다면 독일의 로마네스크는 수직성과 수평성을 동시에 표현함으로써 국가의 권위를 교회의 권위와 함께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p. 180]



영국의 로마네스크 성당을 대표하는 것은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과 전성기 로마네스크 양식의 ‘더럼 대성당(Durham Cathedral)’다. 이들 영국 로마네스크 성당에는 기하학적이고 장식 위주의 ‘영국 로마네스크 양식’의 독특함이 묻어나 있다.

첫째, 수평성을 선호하는 영국의 정서가 반영되어 슈베(chevet)3)가 동쪽으로 길게 확장되어 있다.

둘째, 네이브도 확장되어 있다.

셋째,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를 통해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다.


프랑스와 독일에서의 대형화란 천장고를 높이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나 영국에서는 성당의 길이를 확장하는 것을 선호한 것입니다.

영국 로마네스크는 건물의 무게감 있는 외관을 강조한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역할을 한 것은 로마 벽돌을 재료로 하여 만든 회반죽 벽돌 쌓기입니다. 프랑스는 석재의 물질성과 구조에 대한 가능성을 보고 수직성을 추구했지만, 영국은 벽돌을 재료로 수평성을 유지했습니다. [p. 197]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 성당은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 교회 등의 전통에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보편주의가 아닌 지역주의에 속한다. 대표적인 성당으로는 롬바르디아 지역의 ‘성 암브로시오 바실리카(Basilica de Sant’Ambrogio)’, 토스카나 지역의 ‘산미니아토 바실리카(Basilica di San Miniato al Monte)’가 있다.



이탈리아의 로마네스크는 알프스 이북의 로마네스크에 비해서 로마 고전주의와의 연속성이 훨씬 깊습니다. 이미 초기 그리스도교 건축이 로마 고전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또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네이브월을 구성하는 아치, 오더, 볼트 등의 요소들과 바실리카에서 발전한 라틴 크로스 평면 역시 로마 고전주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로마네스크의 고전주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p. 210]


또한,


로마 제국과 로마 가톨릭교회와 지중해의 전통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첫 번째 특징을 이룬 것입니다.

이탈리아 로마네스크의 두 번째 특징은 지역주의입니다. 롬바르디아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 지역, 토스카나의 중부 지역, 그리고 시칠리아가 주도한 남부 지역이 각기 고유한 특징을 보입니다. 이러한 두 요인으로 인해 이탈리아 로마네스크는 초기와 전성기라는 시대적 구별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pp. 205~210]


중세 유럽이 ‘라틴어’라는 보편 언어와 ‘그리스도교’라는 보편 종교로 하나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로마네스크 양식의 발달과정에서 보듯이 각 국가별로 지역주의의 싹이 드러난 것이 훗날 국민국가로의 변화를 암시하는 듯해서 흥미로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처럼 이 책에서 소개된 성당들을 통해 로마네스크 양식, 그리고 로마네스크 성당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감을 잡을 수 있었다. 나중에 유럽에 갈 기회가 있으면 좀 더 보고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한국에 있다는 3대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 인천 답동성당, 전주 전동성당)을 방문하더라도 예전에 방문해서 보다 느꼈던 것과 다른 무엇인가를 더 보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1) 네이브(nave, 身廊): 중랑(中廊)이라고도 한다.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카식 교회당의 내부 중앙 부분으로, 성당에서 가장 넓은 부분이고 일반적으로 예배자를 위한 장소로 사용된다.


2) 베이(bay): 네 기둥으로 구획되는 평면의 한 단위를 의미한다.


3) 슈베(chevet): 대성당에서 본당 동쪽 끝의 반원형 부분, 두부(頭部)라고도 번역된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제대(祭臺)와 그 근처의 성가대석을 배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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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성당, 거룩한 신비의 빛
강한수 지음 / 파람북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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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 양식, 거룩한 신비의 빛]은 어떻게 구성되었나? 


이 책의 목차를 보면, 고딕 양식을 두 가지 카테고리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누고, 국가에 따라 ‘영국 고딕’, ‘독일 고딕’, ‘이탈리아 고딕’으로 나눈 것은 그런 느낌을 더 강하게 준다. 그런데 다르게 생각하면 이 책은 프랑스[초기, 전성기, 후기], 영국, 독일, 이탈리아 유럽 4개국의 고딕 양식을 국가별로 대표적인 성당들을 사례로 들어 소개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고딕 양식이란?


‘로마네스크’가 ‘로마다운’이란 뜻이었다면, ‘고딕’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을 가리키는 ‘고트인의’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 중략 ~

‘고딕’이라는 이름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이 양식을 두고 게르만족의 세련되지 못하고 야만적인 것이라고 경멸하면서 붙인 것인데, 계속 사용하면서 후대에 공식 명칭이 되었습니다. [p. 8]


마치 중국인들이 자신들의 나라는 ‘中’國이고, 자신들의 문화는 ‘華’라고 자부하면서 주변 국가와 문화를 ‘夷’라고 무시하는 것처럼, ‘고딕’이라는 명칭도 이탈리아인의 뒤틀린 자존심에서 붙여진 셈이다.


그렇다면 이 고딕 양식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정치적으로는 왕령지(王領地)를 실질적인 왕의 땅으로 만든 루이 6세(재위 1108~1137) 이후, 카페 왕조는 왕권 강화를 시작하여 중앙집권적 군주 국가로의 변화가 진행되었다. 종교적으로는 ‘서임권 분쟁’으로 유명한 교황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의 개혁 이후 로마 카톨릭 교회가 세속권력으로부터 성직자 임명권을 회수하여 교황권을 강화했다. 지리적으로는 카페 왕조가 영향력을 끼칠 수 있던 일 드 프랑스가 ‘몽샐미셸 수도원 성당(Abbaye du Mont-Saint-Michel)’으로 대표되는 북쪽의 노르망디와 ‘제 2 클뤼니 수도원 성당(Abbaye de Cluny Ⅱ)’으로 대표되는 남쪽의 부르고뉴 프랑슈 콩테(이하 ‘부르고뉴’) 사이에 있어 노르망디의 일체성과 부르고뉴의 대형화를 조화한, 보편주의 건축을 태동시킬 수 있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교집합이 루이 6세와 루이 7세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생드니 수도원장인 쉬제(Suger, 1081~1151)였다. 그는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모순의 갈등을 해결할 새로운 건축 양식, 즉 고딕 양식을 내놓았다. 최초의 고딕 양식 성당이라 할 수 있는 생드니 대성당(Cathedrale royale de Saint-Denis)에도 그의 손길이 닿았다.



전성기 고딕 성당의 요소


고딕 양식의 사상적 배경이 된 스콜라철학은 사유의 논리를 타인도 알 수 있는 명료성[명료화 원리]을 추구하고, 대론[~라고 생각된다. 正]과 반론[그러나 반대로. 反] 그리고 대답[나는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고 답한다. 合]으로 이어지는 논증 방식[일치(concordantia)의 원리]을 따른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건축에 있어서 이전까지 사용해오던 두 요소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면 그 중 하나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인 연구를 통하여 두 요소가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파사드의 창을 예로 들면, 전통적인 아치창은 긍정(대론)이고, 생드니 대성당에 나타난 아치창 위의 장미창은 부정(반론)입니다. 문제의 해결(대답)은 위그 리브르지에 건축가가 생니케즈 성당에서 장치창 안에 아치창을 통합함으로써 이루어냅니다.

고딕 성당의 수직화와 경량화라는 상호 모순의 두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고딕 건축가들은 유기적인 구조 체계를 연구했고, 결국 포인티드 아치, 리브 그로인 볼트, 플라잉 버트레스 등의 구조 부재들을 고안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 해결 방식이 일치성의 원리라는 스콜라철학의 습성이 확산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pp. 104~105]


저자는 고딕 성당 양식의 싹을 틔운 쉬제가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간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곧 창조주께서 첫날 만드신 빛으로 성당을 밝히고 그 안에서 둘째 날, 셋째 날의 피조물들로 가득 채우는 것이 그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p. 53]


라고 얘기한다. 쉬제의 바램 때문인지 고딕 성당의 벽체는 높고 얇게, 창은 크고 넓게 설계되었고 이로 인해 실내에 들어오는 빛의 양이 충분히 증가했다. 덕분에 성당의 맑은 투명창을 오늘날 고딕 성당하면 떠오르는 요소 가운데 하나인 색유리창[스테인드글라스]으로 바꿀 수 있었다. 이 모든 공간적 변화는 수직성의 원천인 포인티드 아치[Pointed Arch, 첨두(尖頭)아치)], 천장에 설치되어 하중을 안정적으로 분산하는 리브 그로인 볼트[Rib Groin Vault, 늑재 교차 궁륭(肋材 交差 穹窿)], 건물 외벽에서 팽창하는 힘을 지탱하고 구조적 안정성을 높이는 플라잉 버트레스[Flying Buttress, 공중 버팀벽] 덕분에 가능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건축 기술을 고딕 성당의 가장 큰 특징이자 핵심이라고 한다.


고딕성당의 구조


출처: <고딕성당>, p. 92



각국의 고딕 성당


프랑스 고딕은 건축 구조의 발달 단계에 따라 시대적으로 구분하여 초기 고딕, 전성기 고딕, 후기 고딕으로 나뉜다. 초기 고딕은 크게 두 가지 방향성을 지니고 있었는데 수직성을 지향하는 생드니 대성당과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Paris), 수직성과 더불어 고전적 비례를 위한 수평성도 함께 고려하는 랑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Laon)이 대표적이다. 이 두 흐름은 전성기 고딕에도 이어졌는데, 수평성도 고려하는 부르주 대성당(Cathedrale Saint-Etienne de Bourges)과 수직성을 지향하는 샤르트르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Chartres)이 대표적이다. 다만, 프랑스 고딕의 주류는 수직성을 강조하는 쪽이었고, 랭스 대성당(Cathedrale Nortre-Dame de Reims)에서 절정을 이루며 프랑스 고딕을 완성시켰다고 평가된다. 고딕 양식의 쇠퇴기인 후기 고딕은 빛의 밝음 그 자체만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13세기 중반에 시작된 레요낭(Rayonnant) 양식과 15세기에 등장한 플랑부아양(Flamboyant) 양식으로 대표된다. 생트샤펠(Sainte-Chapelle)과 트루아의 성 우르바노 바실리카(Basilique Saint-Urbain de Troyes)로 대표되는 레요냥 양식이 구조가 단순해진 성당의 전체 조도를 일정하게 맞추기 위해서 최대한으로 넓힌 창을 효과적으로 표현한다면, 루앙의 생마클루 성당(Eglise Saint-Maclou de Rouen)으로 대표되는 플랑부아양 양식은 처음부터 장식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한다.



영국은 노르망디를 통해 프랑스 전성기 고딕 양식을 수입했지만 지역주의적 독립성을 가미하여 초기 영국 양식(Early English style), 장식 양식(Decorated style, 곡선 중심), 수직 양식(Perpenddicular style, 직선 중심)으로 분화되었다. 초기 영국 양식은 수평성과 기하장식이라는 영국 고딕 성당의 전형을 이룬 켄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을 증축하는 과정에서, 장식 양식은 레요냥 양식과 곡선 양식이 조화를 이룬 요크 민스터(York Minster)에서, 수직 양식은 글로스터 대성당(Gloucester Cathedral)에서 각각 시작되었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진 프랑스와 달리 지방분권이 강한 독일


프랑스 고딕건축의 수입에 철저히 의존하는 경향과 독일만의 독자적 양식을 고집하는 경향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두 양상이 하나로 합쳐졌지만, 독일에서는 각각의 양식을 이루면서 독일 고딕만의 특색을 가졌습니다. [p. 207]


따라서


프랑스의 고딕 보편주의를 따른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을 독일 고딕의 전성기로 본다면, 이후의 독일 고딕은 지역주의가 강세를 이루어 다양한 형태로 분화됩니다. [p. 215]



완성된 고딕 양식이 전해진 영국이나 독일과는 달리 이탈리아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짙은 영향 아래 고딕 요소가 첨가되는 정도에 머무른다.


보편적인 프랑스 고딕 성당의 구조 원리를 배워서 이탈리아에 고딕 성당을 세운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의 장인이 프랑스의 고딕 성당을 보고 스스로 학습하여 이탈리아 고유의 고전적 그리스도교 전통에 입각하여 재해석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고딕 양식은 전례가 없는 고유한 형태로, 이탈리아 고딕의 전형이 되었습니다.

결국 이탈리아 고딕을 보면 영국의 캔터베리 대성당과 웨스트민스터 수도원 성당, 독일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과 쾰른 대성당처럼 프랑스의 전성기 고딕을 거쳐 완성된 고딕 양식이 수입된 사례는 없고, 매우 배타적인 방법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인지 믿기지 않겠지만, 골목마다 성당으로 가득 찬 로마에서 고딕 성당은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이 유일합니다. [pp. 229~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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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4-03-18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럽 여행 때 만난 뾰족한 첨탑이 특징인 이런 건축 양식이 고딕임을 알았지만 이렇게 깊은 지식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아요.

KOEMMA 2024-03-22 09: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시우행님, 격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