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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2년 5월
평점 :
인간과 휴머노이드의 구분이 의미 있을까?
저자는 <작별인사>가 개작(改作)을 거치면서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서 ‘어쩔 수 없이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두 개의 화두(話頭)는 서로 배제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나는 서로 섞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휴먼매터스 랩에서 휴먼매터스의 창립 멤버인 최진수박사의 아들로 살아오던 ‘철이’는 비 오는 날 아빠에게 우산을 가져다 주러 나갔다가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수용소에 끌려간다. 그곳에서 철이는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의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인 것처럼 행동한다.
처음엔 그저 그들을 흉내냄으로써 안전을 도모한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었는데, 점차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과연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그들의 관절은 연골과 윤활액 대신 인공적으로 합성한 유기화학 제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뇌에 뉴런 대신 회로가 있다는 것 등의 차이들이 있겠지만, 이미 많은 인간이 뇌에 칩을 박아 컴퓨터와 연결하거나, 잘린 팔다리 대신 인공 수족을 장착하여 높은 곳에 쉽게 뛰어오르거나 무거운 것을 가볍게 들고 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팔, 다리, 뇌의 일부 혹은 전체, 심장이나 폐를 인공 기기로 교체한 사람을 여전히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pp. 68~69]
어디까지가 인간이고 어디서부터가 기계인 걸까? 육체의 몇 %까지 인공 기기로 교체해야 기계일까? ‘뇌’만 남아있으면 인간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의 고유한 기억과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육체의 100%가 기계로 되어 있어도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소설 <작별인사>에 배경이 되는 시대라면 어디까지 ‘인간’이라고. 또 어디까지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거야?
~ 중략 ~
예를 들어 새로운 몸을 가지고 다시 태어날 민이는 예전의 그 민이일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어디까지 ‘나’일까? 팔도 교체할 수 있고, 다리도 교체할 수 있고, 몸의 모든 부품을 교체할 수 있다면, 그 부분들은 '나'가 아닌 거잖아. 그게 없어도 나는 나일까?”
“그렇지. 뇌가 그 경계일 거야. 의식은 거기서 생겨나니까.” [pp. 200~201]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이 소설 속에서 자신을 인간으로 알고, 인간처럼 살아가는 최신형의 하이퍼 리얼 휴머노이드는 겉보기에는 인간과 구분하기 어렵다. 그래서 스스로 기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기계파’ 휴머노이드는 수용소에서 자신이 인간이라고 주장하는 개체의 팔을 뽑아 버린다. 분명히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수단이기는 하다. 하지만 휴머노이드가 아닌 인간일 경우 이런 구분방법은 치명적인 부상이 된다. 따라서 내가 ‘인간’이라는 것을 확신하기 위한 수단으로는 적합하지 않다.
사실, 스스로를 ‘인간’이라 생각하는 ‘기계’, 아니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기계’를 그리는 작품은 이 작품 이전에도 존재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인간다움’에 대해 논의하는 작품으로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아이작 아시모프(Isaac Asimov, 1920~1992)의 단편 <바이센테니얼 맨(The Bicentennial Man)>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와는 다소 다르지만 외관상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리플리컨트를 다루는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도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네가 스스로 인간이라고 믿는 증거 같은 거 말야.”
“아, 음악. 음악이 있어. 나는 음악을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여. 정말 말 그대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 같아. 그리고 보니 수용소에 잡혀올 때도 소광장에서 하이든을 듣고 있었어.”
“마음은 움직이지 않아요. 마음은 그냥 안에 있어요.”
민이가 내 말을 잘랐다.
“이런 걸 비유라고 하는 거야. 마음은 물론 내 안에 있지만 흔들리고 무너지는 거야. 나는 집에서 들었던 아름다운 음악들을 떠올리면서 수용소의 끔찍한 날들을 견뎠어. 내가 기계라면 왜 음악 같은 것을 듣고 감정이 변할까? 음악은 기계에겐 아무 의미도 정보도 없는 소음일 뿐인데. 나는 시를 읽으며 감탄하고 영화를 보다가 괴로워하고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19세기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긴 소설을 안타까워하면서 읽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인간이 아니야” [p. 123]
여기에 한 가지 더하자면, ‘나를 '나'로 정의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이다. 예전에 화제가 되었던 ‘타진요(타블로에게 진실을 요구합니다)’ 사태를 기억하는가? 가수 타블로가 스탠포드 대학을 졸업한 ‘대니얼 선웅 리(Daniel Seon Woong Lee)’임을 증명하는 여러 증거들을 믿지 않는 ‘타진요’ 같은 이들이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내가 ‘나’임을 증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영화 <트루먼쇼>의 트루먼처럼 거짓으로 꾸며진 삶을 살았다는 것은 아니다. ^^;;
영생(永生), 그 덧없음에 대하여
미등록 휴머노이드라는 이유로 잡혀간 수용소에서 ‘철이’는 복제인간 ‘선이’와 버림받은 휴머노이드 ‘민이’를 만난다. 그들은 철이를 만나기 전에 이미 탈출을 시도하다가 민이의 왼쪽 팔목만 로봇 개에게 잃고 다시 잡혀왔다. 수용소에서 시간을 보내던 중, 민병대의 습격으로 수용소가 혼란해지자 철이, 선이, 민이는 탈출한다. 휴먼매터스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민이는 살해되고, 철이와 선이는 휴머노이드 재활용 업체를 운영하는 휴머노이드 달마를 만난다. 철이는 달마를 통해 자신이 휴머노이드임을 인지하고,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할 수 있음도 알게 된다.
나는 휴먼매터스 밖으로 나와 진짜 세상을 보았다. 민이 같은 휴머노이드가 존재하는 걸 이미 알아버렸고, 선이처럼 세상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는 클론과 친구가 되었다. 휴먼매터스는 내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세상의 혼란에 큰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언제나 문제의 일부였다. 아빠가 나를 원하는 것은 아마도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진행해온 자랑스러운 프로젝트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그가 정확히 나에게서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이 나를 통해 세상의 고통을 줄이고자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휴머노이드를 만드는 게 정말 그 휴머노이드를 위해서일까? 인간에게 필요한 장기를 생산하기 위해 선이와 같은 클론을 배양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로만 여기고 그것의 활용을 고민한다. 나의 ‘용도’는 정확히 무엇일까? 그것을 분명히 알기 전에는 휴먼매터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pp. 212~213]
하지만 누구도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하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개별성이 보존된다면, 레이먼드 F. 존스(Raymond F. Jones, 1915~1994)의SF소설 <합성 뇌의 반란(The Cybernetic Brains)>에서 ‘뇌’가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이름만 영생(永生)이지, 사실상 종신노예가 아닌가.
나의 의식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고, 내가 원하기만 하면 영생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나는 스스로를 인간이라고 여기고 있을 때 즐기던 것들에 흥미를 잃어갔다. 더 이상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보지 않았다. 그것들은 모두 필멸하는 인간들을 위한 송가였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단 것이다. 이야기는 한 번밖에 살 수 없는 삶을 수백 배, 수천 배로 증폭시켜주는 놀라운 장치로 ‘살 수도 있었던 삶’을 상상 속에서 살아보게 해주었다. 그러니 필멸하지 않을 나로서는 점점 흥미가 떨어졌던 것이다. [p. 276]
영생(永生)은 아니지만 판타지 소설에서 만 년의 수명을 가졌다고 설정된 드래곤의 경우, 긴 수명을 무게에 짓눌려 다른 생명체의 모습으로 유희를 떠나거나 장시간의 수면에 든다. 육신이 있는 존재도 그러할진대, 육체 없이 의식만 있는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 아닐까? 육체가 없다면 쉴 수도 없을 텐데……. 여기에 망각도 할 수 없다면……. 이영도의 <드래곤 라자>에 나오는 드래곤 ‘크라드메서’처럼 미치거나 자살해버리지 않을까?
하지만, 아서 C. 클라크(Arthur C. Clarke, 1917~2008)의 SF소설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를 보면,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방식은 개별성이나 독자성을 점차 상실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된다. 그 소설에서 인류는 점차 개개의 독자성을 상실하고, 기존의 인류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완전히 다른 새로운 종(種)으로 변한 끝에 ‘오버마인드’라고 부르는 하나의 거대한 정신체의 일부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 소설, <작별인사>에서는 인간도, 휴머노이드도 대부분 인공지능 네트워크의 일부가 되어 영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제목 ‘작별인사’는 개별성 혹은 독자성과의 작별인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 그리고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라는 종(種)이 개체성을 상실하여 ‘종(種)’으로서 소멸해버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