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이 책의 서문에 해당하는 ‘들어가면서’를 보면,
이탈리아 여행에는 현지 가이드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 일관성보다 즉흥성을 선호하는 이탈리아에서 여행자들은 당혹스러운 일을 자주 겪는다. ‘기술보다 예술이, 실력보다 매력이, 품격보다 파격이’ 가치의 상위를 차지하는 곳이 이탈리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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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피렌체에서 태어나서 피렌체에서 최고의 주가를 올리다가 피렌체에서 죽은 마키아벨리에게 가이드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 산타 크로체 성당의 영묘에 새겨져 있는 짧은 묘비명이 증언하듯이, “어떤 이름도 그보다 뛰어나지 않다(TANTO NOMINI NVLLVM PAR ELOGIVM).” 피렌체의 아들로 태어나 피렌체의 최고 공직에 올랐으며, <피렌체사>를 집필한 마키아벨리보다 더 뛰어난 자질을 가진 가이드가 있을까? [pp. 16~17]
라고 쓰여있다. 다시 말해, 이 책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는 <군주론>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니콜로 마키아벨리(이하 ‘마키아벨리’)가 쓴 <피렌체사>를 길잡이 삼아 피렌체를 소개하는 책이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의 구성을 따라가고 있다. 즉, 피렌체에서 펼쳐졌던, 평민들의 자유 투쟁을 그린 1부와 메디치 가문이 걸어온 영광의 역사를 기록한 2부로 구성된 <피렌체사>처럼, <붉은 백합의 도시, 피렌체도>도 1부 평민의 시대(1216~1434)와 2부 메디치 가문의 시대(1434~1525)로 나눠 피렌체를 소개하고 있다.
동시에 과거 저자가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을 통해 피렌체를 중세의 암흑을 걷어낸 르네상스의 도시로 봤던 관점에 대한 반성도 곁들이고 있다. 저자는 보는 사람이 첫눈에 반하게 되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예술의 도시라는 화장을 걷어낸 피렌체는 계속된 분열과 투쟁으로 피에 물든 붉은 백합의 도시라는 것을 깨달았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아르노 강변에 핀 한 송이 백합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피렌체에서는 귀족과 귀족이, 귀족과 평민이, 평민과 평민이, 평민과 하층민이, 하층민과 하층민이 서로 싸우다가 결국 메디치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된다. 피렌체, 그곳은 피로 물든 거리였다. 지금까지 알던 피렌체는 잊어버리시라. 눈이 아닌 마음으로 피렌체를 보아야 한다! 피렌체는 아름다운 예술만 존재한 곳이 아니라 권력을 차지하려는 피 튀기는 투쟁, 이웃에 대한 끝없는 시기심, 조직적인 군사 반란과 길거리의 주먹다짐, 비열한 암살 시도와 간이라도 당장 빼서 줄 것 같은 아첨, 지배 받지 않으려는 평민과 하층민의 절규와 비명이 거리를 메웠던 곳이다. 피렌체의 성당과 공방, 수도원과 저택을 장식하고 있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들은 어쩌면 피로 물든 역사를 은닉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모른다. 가장 과격한 장소에 가장 아름다운 예술의 꽃이 피어 오른 도시가 바로 피렌체다. [p. 27]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 귀족의 몰락을 가져오다
‘피렌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메디치 가문을 떠올린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당시 유럽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귀족이 아닌 평민 출신이다. 이들은 어떻게 피렌체의 통치자가 되었을까?
이야기는 피렌체가 2차 삼두(三頭) 정치의 주역들에 의해 만들어진 무렵부터 존재했던,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 가운데 하나인 베키노 다리(Ponte Vecchio)에서 시작한다.
12세기 이탈리아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전통 봉건 영주 가문 중심의 교황파(Guelph)와 상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 부자 중심의 황제파(Ghibelline)로 갈려 다투고 있었다. 이들의 반목은 잘 알려진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몬테규(Montague) 가문과 캐퓰릿(Capulet) 가문의 갈등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그리고 그 결말도 비슷하다.
시작은 축하 연회에서의 사소한 다툼이었다. 하지만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라는 화약고는 이 작은 불씨를 전통 귀족의 몰락이라는 큰 화재로 발전시켰다. 물론 중간에 불씨가 사그라질 수 있는 기회는 몇 번 있었다. 하지만, 교황파의 맹주 부온텔몬티(Buondelmonti) 가문의 부온텔몬테는 두 차례나 화해를 위한 약혼을 파기하고, 교황파 가문의 부유하고 아름다운 여성과의 결혼을 강행했다. 이는 황제파에 대한 모욕과 도발로 받아들여져, 황제파의 맹주인 우베르티(Uberti) 가문이 결혼식에 가기 위해 베키오 다리를 건너는 부온텔몬테를 습격한다. 24년 후 이번에는 부온텔몬티 가문이 화해를 위한 결혼을 제안했고, 이를 받아들인 우베르티 가문을 결혼식장에서 몰살한다. 복수는 끝나지 않았다. 다시 10년이 흐른 뒤 우베르티 가문의 생존자가 신성로마제국의 지원을 받아 피렌체의 정권을 탈취하고 교황파의 생존자를 추방한다. 또다시 6년이 흐른 뒤 이번에는 교황파가 피렌체를 탈환하고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파괴하고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政廳)을 건축함으로써 교황파[부온텔모티 가문]와 황제파[우베르티 가문]의 길고 긴 복수극은 끝나고 만다.
힘을 회복해 다시 돌아온 교황파가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피렌체 황제파의 수장인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이었다. 웅장했던 저택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피렌체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베키오 다리는 시뇨리아 정청과 일직선으로 연결되는 광장에 건축되지 않았고 한 블록 빗겨나 있다. 이렇게 불편하게 도시를 설계한 이유가 있다. 피렌체를 다시 차지하게 된 교황파가 우베르티 가문의 저택을 무너뜨린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곳에 시뇨리아 정청을 새로 건축했기 때문이다. [p. 47]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에 따르면, 전통 귀족들이 이렇게 서로 피를 부르는 복수극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유력한 평민들(Grandi popolani, 이하 ‘그란디’)로 불린, 7개의 대형 직능 조합 출신 평민들이 피렌체의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행정장관직이 바로 귀족의 몰락을 초래한 원인이 되었다. 왜냐하면 평민들은 이런저런 구실로 귀족들을 행정장관직에서 배제했고, 결국 귀족들은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고 파멸했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하고 있던 귀족들은 처음에는 이런 변화에 저항하지 않았고, 그래서 귀족들끼리 서로 정부를 빼앗으려 애쓰다가, 마침내 그들 모두 권력을 잃고 말았다. [p. 60]
이렇게 권력을 획득한 평민,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상인이거나 기술을 익힌 사람’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싫어하던 귀족들의 행태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교황파 귀족들이 교황파 백당[비앙키]과 교황파 흑당[네리]으로 갈리고, 그들과의 거래 관계가 얽힌 평민이 가세하면서, 피렌체는 또다시 분열과 갈등의 상황에 놓이게 된다. 이렇게 끝없는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끝에 피렌체 사람들이 선택한 것은 아테네 공작이자 브리엔 백작인 프랑스인 발테르 6세(Walter Ⅵ, 1304~1356, 이하 ‘발테르 공작’)에게 종신 통치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장고(長考)끝의 악수(惡手)였다.
발테르 공작이 시민들에게 부과한 세금은 가혹했고, 그의 판결은 부당했으며, 그가 처음에 가장했던 성실함과 친절함은 교만함과 잔인함으로 바뀌었다. 그 결과, 많은 훌륭한 시민들과 뛰어난 평민들이 벌금을 물거나 추방당하거나 살해당했으며, 들어본 적도 없는 방법으로 고문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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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또 귀족들 중 상당수를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게 해주었지만, 그럼에도 계속 귀족들을 의심했다. 왜냐하면 자부심 강한 귀족이 자신의 절대 권력에 순순히 복종하며 살지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는 하층민들에게 이득을 주기로 했다. 외국의 용병에다 하층민의 지지만 있으면 독재를 유지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pp. 107~108]
결국 1년도 지나기 전에 발테르 공작의 전횡에 지친 귀족들과 평민들은 그를 축출하기 위해 도시의 중심부인 메르카토 베키오(Mercato Vecchio)에 모여 무장 봉기를 한다. 이들은 발테르 공작의 지휘를 받는 하층민[미누티(Minuti)]과 전투를 벌였고, 끝내 발테르 공작으로부터 피렌체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하겠다는 항복선언을 이끌어 낸다.
메디치 가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다
하지만, 지난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한 귀족들과 평민들은 여전히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권력투쟁에 몰두했다. 나아가 프랑스 혁명 시기의 상퀼로트(Sans-Culotte)처럼, 피렌체의 최하층민[치옴피(Ciompi), 이하 ‘치옴피’]가 전면에 나서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치옴피를 대상으로만 사용하게 강제된 은화인 피치올로(Picciolo)가 지속적으로 가치 절하되면서 그들의 실질 구매력은 떨어져, 생활고가 심해졌기 때문이다. 견디다 못한 그들은 산타 크로체 광장에 모여 임금 인상과 더 많은 일자리를 달라고 요구했다. 평화로운 집회로 시작되었지만, 어떤 치옴피의 연설로 치옴피들도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때 던져진 불씨는 폭동과 집단 약탈로 물든 치옴피 반란(1378)으로 치달았다. 이 반란으로 치옴피 정부가 수립되었지만, 치옴피의 리더나 그들에게 우호적인 살베스트로 데 메디치(Salvestro de’ Medici, 1331~1388 ?, 이하 ‘살베스트로’)는 처음부터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실권은 옛 귀족 출신으로 피렌체의 마지막 그란디였던 알비치(Albizzi) 가문,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들의 통치에 방해되는, 살베스트로 등은 차례로 추방되었다. 아마도 이 일 때문에 메디치 가문은 ‘동네건달’ 이미지는 탈피했을지 몰라도 ‘그란디들의 하수인’이라는 이미지는 더 짙어졌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최후의 그란디 가운데 스트로치(Strozzi) 가문, 스칼리(Scali) 가문, 알베르티(Alberti) 가문이 몰락하자 남은 것은 교황파 흑당[네리]의 당수(黨首)였던 도나티 가운이 이름을 바꾼 알비치(Albizzi) 가문뿐이었다.
이 결정을 권고한 사람이 누구든, 그는 당신의 힘을 빌려 하층민들로부터 권한을 빼앗자마자, 그 침해로 당신의 적이 될 하층민들의 도움을 받아 당신의 권한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이오. 그리 되면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던 자들의 설득으로 조르조 스칼리와 톰마소 스트로치의 파멸에 동의했으나 그 직후 자신을 설득했던 바로 그자들에 의해 추방당한 베네데토 델리 알베르티의 운명과 똑 같은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오. [p. 195]
이러한 난장판 속에서 등장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이하 ‘조반니’)는, 우리가 알고 있는 메디치 가문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그는 매우 부유하지만 친절하고 자비로운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평민 귀족(Noviles populares)’라고 불리며 존경을 받았다. 여기에 ‘치옴피 혁명의 아버지’ 살베스트로의 후광이 곁들여지자, 조반니는 이를 바탕으로 옛 귀족과 그란디, 평민들과 하층민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면서 피렌체 시민들의 찬사를 받았다. 또한 본업인 은행업에서 ‘의리와 신용’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간주되고 있음을 감안,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교황 요한네스 23세에 대한 의리를 지켜, 한번 거래한 고객은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조반니의 뒤를 이은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519~1574, 이하 ‘코시모’)는 대규모 공공 건축 사업을 펼치고 예술가들을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나아가 이렇게 ‘우리 모두를 위해 아낌없이 베푼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줘서 피렌체 시민들에게 메디치 가문의 사소한 잘못은 눈감아주어야 한다는 부채의식과 나도 기회가 오면 엄청난 혜택을 누릴 수 있다는 기대 심리를 조장했다. 덕분에 1433년 10월 오랜 정적(政敵) 알비치 가문에 의해 추방되었지만 1년 만에 반대로 알비치 가문을 추방하고 되돌아갈 수 있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의 실질적인 참주(僭主)가 되었다.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16~1469)의 짧은 통치를 거쳐 새로운 메디치가의 가주가 된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 이하 ‘로렌초’)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그는 은행가가 아닌 문학적 소양을 갖춘 군주처럼 행동했고, 본업인 은행 경영에서 멀어져 점차 관리 감독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로렌초가 은행업에 무관심해지자 메디치 은행의 주요 지점들도 잇달아 문을 닫았다.
로렌초의 뒤를 이은 ‘불행한 자’ 피에로 데 메디치(Piero de’ Medici, 1472~1503)는 무능한 리더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그는 창과 칼로 싸우던 시대에서 대포와 화약으로 싸우는 시대로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밀라노의 군사력을 지렛대 삼아 ‘힘의 균형’을 유지하던 외교정책을 즉흥적으로 변경한다. 이 결정으로 밀라노와 프랑스가 침공하자 그는 겁을 집어먹고 피사 항구 등 토스카나의 여러 도시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협상을 추진했다. 피렌체의 목줄을 넘겨주려는 협상은 피렌체 시민에 의해 거부되었고, 그를 포함해 겁을 집어먹은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제일 먼저 도시에서 탈출하고 만다.
모든 것을 독점하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되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사>에서
마키아벨리는 지금까지 메디치 가문, 귀족, 그란디의 지배하려는 욕망과 이들의 지배를 거부하려는 피렌체 평민과 하층민들의 적의가 모든 악의 근원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충돌은 로마에서도 일어났다. 로마나 피렌체나 계급 갈등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부자와 가난한 자, 권력을 가진 자와 지배 받는 자, 많이 배운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는 갈등을 일으킨다. 그러나 이로 인해 국가나 도시, 혹은 집단이 분열된다면 그것은 두 계급 모두에게 해악을 끼치는 일이다. 이것이 악의 근원이다. 그렇다면 로마는 어떻게 충돌을 막고, 세계를 호령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 피렌체는 이 충돌 때문에 몰락해갔다지만, 로마는 이 악의 근원을 슬기롭게 피해 갔다. 피렌체는 계급 간의 싸움을 이어갔지만, 로마는 논쟁을 거쳐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법을 만들었다. 피렌체는 한쪽의 압도적인 승리를 갈구했지만, 로마는 양보를 통해 양쪽의 승리를 도모했다. 로마에서 지배하려는 자는 타협할 줄 알았고,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자는 지배하려는 자와 명예를 함께 누리는 법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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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렌체에서는 평민이 승리하자 귀족은 정부의 요직에서 철저히 배제당했다. 따라서 만일 귀족이 다시 관직에 오르려면, 행동과 성격과 생활방식 모두 진짜 평민이 되거나, 적어도 평민처럼 보일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이유로, 평민의 호의를 얻기 위해 가문의 문장과 이름을 바꾸는 귀족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귀족 안에 있던 관용의 정신과 군사적 미덕은 사라지고 말았고, 결코 한 번도 이것들을 가져본 적 없는 평민의 내면에서 다시 이것들을 살려낼 수도 없었다. 그 결과 피렌체는 점점 더 왜소해지고 비루해졌다. [pp. 415~417]
라고 얘기한다. 로마인과 달리 피렌체 사람은 서로 ‘지배 받지 않을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권력투쟁에 몰두한 결과 그들이 속한 공동체의 몰락이라는 배드엔딩을 가져왔다. 어쩌면 이것이 마키아벨리의 <피렌체사>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자인 김상근 교수도 후기(後記)에 해당하는 ‘피렌체를 떠나며’에서
권력을 잡은 자와 권력을 잡으려는 자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그야말로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다. 지배하려는 자의 욕심과 지배 받지 않으려는 자의 저항이 우리 사회가 지탱할 수 있는 비등점을 넘어, 일촉즉발의 위기에 몰려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자본가와 노동자의 갈등은 이미 도를 넘었다. 제3의 집단임을 자처하는 정치가들은 권력을 잡기 위해 오히려 두 집단의 갈등을 부추긴다. 두 집단을 갈라치면 칠수록 사회적 갈등은 양산되고, 정치가들에게 돌아갈 이익은 커진다. 분열되면 흥분하기 쉬운 것이 대중의 속성이고, 흥분한 대중은 이성을 잃고 진영 논리의 이분법에 빠져들게 된다. 진영 논리 속에서 정책과 미래 전망은 빛을 잃는다. 무엇을 이야기하는 지보다 어느 쪽에 속했는지가 사리판단의 기준이 된다. [pp. 420~421]
라고 얘기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