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련님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2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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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님>의 의의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는 중국의 루쉰[魯迅, 1881~1936]나 한국의 이광수(李光洙, 1892~1950)처럼 근대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물이다첫 소설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저자로도 알려져 있지만마쓰야마[松山]의 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도련님>으로 더 유명하다.

왜냐하면이 작품으로 나쓰메 소세키는 이미 봉건주의를 넘어 산업사회에 기반을 두고 사실주의를 구현한 찰스 디킨스의 선험적인 시선을 장착한 듯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도련님>은 그런 의미에서 유학 후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 나쓰메 소세키의 첫 소설로 보아 무방하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가 어떤 문학적 호기심의 시도로 출발한 것이라면 <도련님>은 근대 작가가 매달렸던 체험적 소재를 통한 사실주의의 실현이 녹아 든 동양의 첫 작품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p. 177]

 

 

도련님의 좌충우돌

 

도련님이라고 할 때 떠오르는 이미지는 귀하게 자라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애송이였다부족함 없이 자라서 돈에 얽매이지 않는그냥 바라만 봐도 귀티 나고 훤칠한 부잣집 도련님 말이다.

그렇기에 이 책을 읽고 나서 처음 번역한 이가 제목을 잘 선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저자인 나쓰메 소세키가 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교사를 거쳐일본에서도 오지라고 불리는 시코쿠[四國에히메[愛媛현에 있는 보통중학교로 전근해서 겪은 경험을 소재로 쓴 글이라고 한다그러니까 학교 선생님들 이야기인 셈인데왠지 욱하는 도련님의 좌충우돌 에피소드를 그렸다는 느낌이 든다.

 

사회의 물이 덜 든 애송이이기에 주인공은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쉬쉬하며 덮여버리던 일들과 타협하는 대신 우직하게 충돌한다처음 숙직하는 선생의 이불 속에 메뚜기를 집어넣는 기숙사 학생서화나 골동품을 강매하려는 하숙집 아저씨나 끝물호박[고가영어교사]을 멀리 보내고 그와 결혼을 약속한 마돈나[도야마네 딸]를 수중에 넣으려는 빨간 셔츠[교감등과의 갈등은 어쩌면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는 중학교 학생과 사범학교 학생간의 패싸움을 말린 일 때문에 산미치광이[훗타수학교사]가 부당하게 면직당하자주인공이 교장에게 가서 사직 의사를 밝히고 이력 같은 거야 아무래도 좋습니다이력보다 의리가 더 중요합니다.” [p. 165]라고 외친 일이 아닐까?

직장인의 필살기가 사직서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 쉽게 던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주인공의 도련님 같은 면모를 더 두드러지게 부각시키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짧은 교직 생활에 대한 스케치와 같은 이 소설이 그렇게 인기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소설 여기저기에 내비치는 주인공의 도련님다운 행위일지도 모른다.

현실에 존재하기 힘들기에 역설적으로 인기를 얻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런 도련님이 아닐까그래서 이 책의 해설을 쓴 소설가 백가흠도 도련님은 외롭다정직하기 때문에솔직하기 때문에관대하기 때문에순응하기 때문에 외롭다지금의 세상은 정직하면 손해 보는 곳이고솔직하면 비난받는 곳이고관대하면 무시당하는 곳이고순응하면 빼앗기는 곳이다도련님은 세상에서 손해 보고비난받고무시당하고빼앗기면서도 관대하다이는 전혀 인간을 신뢰하지 않는 것의 다른 마음이다인간을 윤리나 도덕예의 안에서 믿지 않기 때문이다허나 이는 슬픈 일이면서 망가진 세상에서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p. 183]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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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년 가게
이인우 지음 / 꼼지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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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여행사에서 주도하는 단체여행 외에 개별적인 배낭여행이나 유학 등의 이유로 해외에 거주하는 이들의 일상 블로그 등을 통해 도쿄나 교토 같은 일본의 유서 깊은 도시나 유럽의 오래된 도시에 숨어있는 듯 드러난 노포(老鋪)도 많이 소개되고 있다이런 노포들을 볼 때마다 부러운 생각이 드는데이는 이들 노포들이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다오히려 시간의 풍파 속에서 숙성된해당 가게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가게들이 위치한 골목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다시 말해사람이 살지 않아 껍데기만 남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문화재로서 해당 지역을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수도인 서울에도 그런 가게가 존재하지 않을까이 책에서 소개하는 가게들이 바로 그런 가게라고 할 수 있다.

 

가보지는 못했더라도 이름은 귀에 익어 친숙한 학림(學林다방은 그 이름을 사용한 지 100년도 안 되었지만스토리텔링이 살아있는 제법 오래된 가게에 속한다. 1956년 학림(鶴林)’이라는 이름으로 이 다방을 시작했던 신선희가 이민을 떠난 후경영난 속에 자주 주인이 바뀌는 혼란기를 거쳐 1987년 현재의 주인인 이충렬의 손에 들어가면서 노포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는 가게다그래서인지 이 책에서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다. “동숭동 대학로 ‘학림다방’은 서울에서(어쩌면 한국에서가장 오래된 다방이다그 이름을 얻은 지 63년째다. 1975년까지는 주로 서울대생들의 ‘살롱’이었고, 1980년대에는 이른바 ‘학림사건’을 통해 “학생과 노동자들이 혁명을 모의한 장소”로 이름이 났다한때는 경영난 때문에 레스토랑으로 ‘전락’했다는 소리를 들었고송강호전인권 등 현재 유명해진 배우와 가수들이 평범한 손님마냥 드나들던 때도 있었다. 21세기에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덕분에 중국인들까지 찾는 관광 코스가 되었고커피 맛이 좋아 바야흐로 ‘학림커피’라는 브랜드의 꿈까지 익어가는 중이다.” [p. 13]

 

노포하면 떠올리는 대를 이어 음식 장사를 하는 곳도 여기에 소개되어 있다. 1932 20대 초반의 새댁 홍기녀가 창업한 추탕집 ‘용금옥(湧金屋)’은 그녀의 사후 막내 며느리 한정자에게 이어졌다그리고 지금은 큰아들의 손자 신동민이 맡은 다동 용금옥과 한정자가 맡은 통인동 용금옥으로 갈라졌다각자의 사정은 있겠지만 이미 각자 다음 대로의 가업 승계를 준비 중이라고 한다아래에 소개된 것처럼 한 시대의 대명사가 될 정도의 노포라면 그 자체로 소중히 유지해야 할 문화재가 아닐까?

지금은 절판된 <용금옥 시대>(이용상서울신문사, 1993)라는 책이 있다해방 후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김일선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에서 귀국해 서울에서 추어탕 한 그릇을 먹고 서울역에서 기차로 평양에 간 이야기가 담겨 있다수주 변영로와 공초 오상순 등 당대 기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기행 기담도 수두룩하다책을 쓴 중국 항일유격대 출신의 시인 이용상은 이렇게 적고 있다. “8.15 해방이 되고 양풍이 불어 닥치고 우리 고유의 송편보다는 초콜릿으로 입맛이 변해가던 시대에도 끝까지 추탕으로 버티고 있는 노포 용금옥은 그 자체가 우리의 저항처럼 보인다때문에 나는 해방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를 용금옥 시대라고 구분 지은 것이다.” 한 개인의 회고담이라지만 일개 음식점이 한 시대의 대명사로 당당히 명명된 것은 영광이 아닐 수 없다.” [p. 47]

 

의외의 노포도 존재한다바로 대장간이다풍속화 속에서나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손으로 쇠를 다루는 대장간이 지금 이 시대에그것도 서울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그런 대장간 가운데 역사성과 희소성을 평가 받아 서울 미래유산에 선정된 대장간만 해도 동광 대장간불광대장간형제 대장간동명 대장간 네 곳이나 된다이 책에서 소개한 곳은 그 중 하나로 천호사거리에 자리잡은 동명(東明대장간이다. 1956년 서울 동쪽에서 제일가는 대장간을 꿈꾸며 시작한 대장간은 벌써 3대째 이어가고 있다. 3대인 강단호가 건축회사를 다니다가 위암으로 고생하는 아버지를 보다 못해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짠한 느낌도 든다.

 

여기에 소개된 가게 가운데 개인적인 추억이 얽혀있는 곳도 있다대학 생활을 하면서 종종 약속 장소로 잡았던 신촌의 홍익문고’, 아버지와 몇 번 들렸던 안동국시 전문점 소호정’, 복학 전에 후배가 소개해 준 신촌의 사이폰 커피숍 ‘미네르바’ 등 별 생각 없이 들렸던 곳들이 백 년 이상 회자(膾炙)될 노포라니 왠지 기분이 묘하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24곳의 가게를 각각 소개할 때마다 사진이 아니라 일러스트를 먼저 내세우고, 가게의 역사를 보여주는 가게의 과거 사진, 그리고 스토리를 잘 엮어 맛깔 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나도 지금의 코로나 사태가 지나가고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다면 이 책에 실린 곳들을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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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의 흔적 - 돌과 바람의 조형, 이타미 준
이타미 준 지음, 유이화 엮음 / 미세움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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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미 준 혹은 유동룡

 

이타미 준[伊丹潤, 1937~2011]’으로 알려진 건축가가 있었다. 2019년 그의 삶과 작품세계를 다룬 <이타미 준의 바다>라는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였으니 이타미 준을 본명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오사카의  이타미[伊丹]’ 공항과 작곡가 최치정(崔致禎, 1927~1995)의 예명 길옥 윤/요시야 준(吉屋 潤)’에서 따온 이타미 준이라는 예명을 가진 유동룡(庾東龍)이라는 재일교포 건축가였다.

재일교포라는 것은 영원한 이방인을 의미한다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쪽발이로 불리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이니까어쨌든 그는 도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생활하면서 한국을 그리워하며 살아갔다그래서일까대학시절 혼자서 한국 여행을 하면서 조선의 민화건축달항아리[白磁大壺]에 빠져들었고수집과 연구를 시작했다.

훗날 그가 <이조 민화(李朝 民畵)>(1975), 오사무 무라이[村井修, 1928~2016]와의 공저인 <이조의 건축[李朝の建築]>(1981), <조선의 건축과 문화[朝鮮の建築と文化]>(1983), <한국의 공간>(1985) 등의 책으로 펴낸 것도 이때부터 쌓은 내공 덕분일 것이다.

뿐만 아니다말년에는 제주에 비오토피아의 [핀크스 퍼블릭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핀크스 맴버스 골프 클럽 하우스](1998), [포도호텔](2001), [()/()/(미술관](2006), [두손 미술관](2007), 그리고 [방주교회](2009) 등의 작품을 남겼다.

 

핀크스 퍼블릭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18~119

 

 핀크스 맴버스 골프클럽하우스


출처: <손의 흔적>, pp. 126~127

 

포도호텔


출처: <손의 흔적>, pp. 142~143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2~163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66~167  / 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미술관


출처핀크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두손 미술관


 



 

출처: <손의 흔적>, pp. 172~173, pp. 176~177 / 핀토스 비오토피아 홈페이지

 

방주교회


출처: <손의 흔적>, pp. 190~191

 

2003년 세계적인 동양박물관인 프랑스 국립 기메 박물관에서 이타미 준일본의 한국 건축가라는 제목으로 아시아인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이때 그는 국립 기메 박물관장으로부터 이타미 준은 예술가로서동시에 건축가로서 전통의 굴레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시공을 초월한 독창성과 현대성을 지닌 예술작품을 창조해왔다” [p. 9]는 찬사를 받았다.

이후 2005년 프랑스 자크 시라크 대통령이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를 수여하면서 그 이유를 이타미 준은 현대 미술과 건축을 아우른국적을 떠나 세계적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그의 작품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아시아 문화의 깊이를 체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 [p. 9]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다. 2006년 한국의 김수근 건축상을, 2008년 한국건축문화대상 우수상[작품_SK건설 기흥 아펠바움], 2010년 일본 최고의 건축상이라는 무라노 도고[村野 藤吾][작품_두손 미술관//석 미술관]을 수상했다.

 

 

도공의 무심한 마음으로 빚는 건축.

 

유동룡의 고국에 대한 목마름은 달항아리 등에 대한 애정으로 표현되었고그는 이를 다시 건축에 담으려고 했다그래서 그를 풍토경치지역의 문맥에서 뽑아낸 본질을 건축에 녹아낸 건축가라고 말한다.

나는 풍토경치지역의 문맥 속에서

어떻게 본질을 뽑아내 건축에 스며들게 할지를 생각한다.

조형은 자연과 대립하면서도 조화를 추구해야 하고,

공간과 사람자신과 타인을 잇는

소통과 관계의 촉매제여야 한다. ” [p. 7]

 

이를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로 [온양민속박물관]을 들 수 있다.

 

온양민속박물관


출처: <손의 흔적>, pp. 44~45

 

예나 지금이나 이 나라의 무덤은 모두 흙의 조형물이다지역성과 풍토성이 짙은 시골집땅에서 솟아오른 원초적인 반원 형태의 무덤에서 흙과 불꽃그리고 흙으로 빚은 조형의 원점을 발견한 느낌이다.

이번에 맡은 <온양민속박물관>은 시골집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근대의 벽돌을 만드는 방식처럼 황토를 틀에 넣어 누를 후 햇별에 말려 초벌구이 상태의 흙벽돌을 만들었다흙을 주제로 혹독한 자연 환경과 풍토성 속에 자립한 이 건축믈을 그 풍경에 맞설 수 있는 외관을 갖춘 셈이다.

그 지역의 돌과 흙으로 지역의 특성과 풍토에서 싹튼 전통 방식으로 건축물을 짓는 것은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개척하려는 노력이다.” [pp.51~52]

 

 

마지막 남은 손의 건축가.

 

유동룡은 오늘날 컴퓨터의 지배를 받아 현대 사회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건축에는 온기가 사라지고 디자인의 독특성에만 쏠려 감동을 잃어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그리고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정신문화까지 황폐해질 것을 염려했다그래서 그는 손으로 건축물을 설계하는 것을 고집했다아날로그적인 손으로 그리는 드로잉과 글쓰기를 통해사람의 온기를 밑바탕에 두고 그 땅의 울림과 바람의 노랫소리에 귀 기울이려고 했다.

나의 건축 작업에서 글과 드로잉은솜씨는 서툴어도 사람 냄새가 나고 따듯한 피가 흐르는 건축을 되돌아보기 위한 훈련의 선이라고 하겠다그것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것이고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것이다사각형 안에 원을 그리고 그 혀상이 공기와 같이 청명하고 생명을 머금은 것으로 드러나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그것도 어떤 경지에서 보면 말이라고 생각한다그리고 내게는 새로운 건축을 위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p. 16]

 

<이타미 준의 바다>에서 [먹의 공간부분에서 유동룡의 딸 유이화는 “아버지 대나무가 시간이 지나면 색깔이 바뀌거나 썩지 않아요?”라고 질문하자유동룡은 “그걸 의도한 거야그게 시간의 맛이지라고 말한다사람과 함께 나이 먹는 집이것이 그가 의도했던 자연스러운 건축이 아니었을까?

 

먹의 공간


출처: <손의 흔적>, pp. 11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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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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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독한 삶뭉크 작품의 원천

 

절규로 유명한 화가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삶을 보면 마치 죽음이라는 향기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다.

다섯 살 때[1868] 어머니[Laura Bjolstad]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열세 살 때는 (가족 중 가장 각별했던) 누이 소피에(Sophie)마저 폐결핵으로 목숨을 잃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뭉크의 아버지[Christian Munch]는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종교에 매달렸다그리고 뭉크에게 엄격한 종교적 생활 방식을 강요했다병약하기까지 했던 뭉크는 학교를 그만두고 가정 학습을 받았기 때문에 교우 관계도 유지할 수 없었다그는 더욱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아이로 자라게 된다.” [p. 21]

그러한 사실만 보면 그의 앞에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와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다행히 그 자신은 죽음을 피할 수 있었지만어린 시절에 경험한 가까운 가족들의 죽음과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처럼 뭉크의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공황 장애우울증불면증정신 분열불안 장애환각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 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p. 14]

 

 

청춘사랑과 방황

 

21살이었던 1885뭉크는 보레(Borre)에서 가족들과 여름 휴가를 보내다가 한 여인과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그녀의 이름은 밀리 타우로브(Milly Thaulow), 이미 한 남자의 아내였다하지만사랑을 갈구하는 두 자유로운 영혼들의 앞에서는 그런 제약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뭉크의 첫사랑이었다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그녀가 자신이 고른 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을 때그녀의 옆에 선 사람은 뭉크가 아니었다그렇게 뭉크의 첫사랑은 성냥개비의 불꽃처럼 확 피었다가 화상만 남기고 사그라졌다.

 

<이별>


출처: <뭉크>, p. 43

 

뿐만 아니었다. “1889 11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뇌졸증으로 마비가 와 곧 세상을 뜨고 만다화가가 되기로 한 뒤부터 아버지와 마찰이 잦았던 뭉크는 아버지에게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했다게다가 아버지의 죽음 후 뭉크 가족의 불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아버지의 수입에 의존하던 가족들에게 경제적인 어려움이 뒤따랐고곧이어 여동생 라우라의 정신병이 발병하여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게 된다카렌 이모가 부업을 하고 막냇동생 잉게르가 피아노 레슨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지만 집안의 맏이로서 뭉크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화단에서 인정받고 화가로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뭉크를 짓눌렀다.” [pp. 44~45]

 

아이러니하게도 뭉크의 이러한 20대의 방황은 혁신적인 예술 탄생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대표작 <절규(The Scream)>를 비롯하여 <마돈나(Madonna)>, <불안(Anxiety)>, <아픈 아이(The Sick Child)>, <이별(Separation)>, <키스(Kiss)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서 가져왔다그래서 그의 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p. 14]

 

 

뭉크의 혁신적인 예술

 

뭉크는 여러 가지 혁신적인 시도를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첫째뭉크는 하나의 모티프를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번 그리는 것을 즐겼다.

<절규또한 4개의 버전과 판화본이 존재한다동일한 제목에 같은 모티프를 가졌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4개의 버전이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인다.” [p. 68]

 

<절규>(1893)


출처: <뭉크>, p. 12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게 알려진 버전이 노르웨이 국립 미술관에서 보관하는 1893년 작품이다.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절규>의 얼굴은 대부분 이 버전에서 기인한다판지에 템페라와 크레용으로 그린 이 그림은 잘 보면 특이한 점이 있다화면 오른쪽에 덧붙여 확장시킨 부분이 그것이다.” [p. 68]

 

또 다른 <절규가운데 2개를 뭉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뭉크 박물관은 판지에 크레용으로 그린 1893년 작과판지에 템페라와 유채로 그린 1910년 작의 두 가지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1893년 작은 크레용의 터치가 거칠고 건물과 배가 없다디테일이 약해 아마도 연습 버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반면 1910년 작은 템페라와 유채로 그려져 색이 선명하고 형태가 비교적 견고하다특징은 중심인물에 눈동자가 없다는 것이다.” [pp. 68~70]

 

<절규>(1895)


출처: <뭉크>, p. 70

 

마지막으로 독일의 미술 수집가 유진 폰 프란케트의 주문으로 1895년 제작된 판지에 파스텔로 그린 버전이 있다이 버전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

다른 버전에서는 배경의 길이 자유롭게 채색되어 있는데 반해이 그림에서는 마치 자를 대고 그은 것처럼 매우 정확하고 날카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배경의 두 남자를 주목해볼 만하다다른 버전에는 두 인물이 모두 서 있다그러나 이 파스텔 버전에서는 두 인물이 좀 더 섬세하게 표현되고 있다한 명은 서서 고개를 돌려 피오르를 바라보고 있고조금 뒤쪽의 다른 한 명은 난간에 기대어 있다.” [pp. 70~72]

덧붙이자면, <절규>에 앞서서 그 토대가 된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1892) <절망(Despair)>(1894)라는 작품도 있다.

<절망(Sick Mood at Sunset: Despair)>


출처: <뭉크>, p. 60

 

영원한 습작이 된, <아픈 아이>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는데이처럼 같은 작품을 조금씩 다르게 반복적으로 그림으로써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형상을 보다 완전하게 만들고자 한 것이 아닐까?

소설가 최인훈(崔仁勳, 1936~2018)이 그의 대표작인 <광장(廣場)>(1960) 10여 차례 개정과 개작(改作했던 것과 비슷한,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마음 때문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

뭉크가 남긴 많은 글 가운데 그의 예술을 가장 집약적으로 나타내는 문구이다뭉크는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풍경이나 사물을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지 않았다다시 말해대상을 관찰해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 본 것자신의 기억을 그리려고 했다.

기억이란 감정과 생각에 따라 만들어지는 것이며, ‘기억을 그린다는 것은 그림의 대상이 화가의 뜻대로 해석되고, ‘편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p. 13]

 

 

둘째작품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의도를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을 지에 관심을 가졌다.

뭉크 예술과 인생의 집대성이라 할 만한 <생의 프리즈>는 인간 삶의 여러 모습을 주제별로 엮어 보여주는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연작 아이디어로 작품의 배치 및 전시에 관한 뭉크의 관심이 빚은 결실이었다.

 

그가 <태양>과 같이 따뜻한 희망이 넘치는 그림도 그렸다는 점을 알게 된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절규> 하나만 알고 있던 화가 뭉크가 불행한 삶을 살면서 겪은 고독과 죽음을 그림을 통해 승화시키는 과정을 보는 것도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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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
주영하 지음 / 사계절 / 2005년 1월
평점 :
절판


사실 <그림 속의 음식음식 속의 역사>라는 제목과 책 소개만 보고 음식 그림을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책이라고 생각했다하지만이 책은 23장의 그림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한국적인 것이라고혹은 전통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것이 약 100년을 전후한 시기이른바 근대에 형성되었다는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그나마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할 만큼우리 스스로 전통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서양의 시선에서 본 이색적인 것을 전통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이를 저자는 프랑스에 유학을 다녀왔던 이정섭(李晶燮, 1895~?) <별건곤(別乾坤)> 12/13 (1928)이라는 잡지에 실은 글을 빌려 이야기 한다. “이정섭의 말처럼 김치, 갈비, 냉면은 1990년대 이후 세계적인 음식이 되어 오늘날에 이른다. 그러나 한국인이 끼니로 식사를 할 때 김치나 갈비는 반찬에 지나지 않으며 냉면은 별식이다. 늘 밥을 먹을 때 식탁에서 쌀밥이 제일 중요한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런데 쌀밥을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 태도는 우리 스스로 한국적인 것을 서양 사람들 시선에서 보기 때문이 아닐까?” [p. 91]


‘1장 그림으로 보는 서민의 음식 풍속’, ‘2장 그림으로 보는 궁중의 음식 풍속’, ‘3장 그림으로 보는 관리의 음식 풍속’에 실린 19장의 그림을 보면 우리에게 풍속화가로 널리 알려진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 1745~?),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 1758~1814 무렵), 긍재(兢齋) 김득신(金得臣, 1754~1822)의 그림이 절반 정도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지만한 가지 찜찜한 것이 있다.

풍(風)은 지배자의 윤리적 덕목(德目)이며, 속(俗)은 피지배자의 실천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풍’으로 ‘속’을 교화해야 한다는 풍속교화(風俗敎化)가 지배자가 풍속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당연히 지배자에게는 풍속을 살피는 일이 무척 중요했다.” [p. 63]

조선 후기 풍속화가들의 등장과 이들의 그림 자체가 백성들의 처지를 살피고 그들을 교화하기 위한 기초 자료일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풍속화 한 작품 한 작품마다 당대(當代서민들의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17세기 네덜란드의 정물화와 풍속화 등과는 달리 음식의 모습이 또렷하고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유숙(劉淑, 1827~1873) <대쾌도(大快圖)>를 보면서

술잔 옆에는 사각 함에 노란색의 음식이 놓였다. 딱히 그림만으로는 그 정체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상상을 해보면 담긴 그릇으로 보아 떡 아니면 과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걸리와 어울려야 한다고 생각하면 떡일 가능성이 더욱 크다.” [p. 28]


김득신의 <강상회음(江上會飮)>에서는 숭어찜을 얘기하면서

사실 이 그림만으로 어떤 생선인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다만 대강의 생김새로 짐작해보면, 숭어일 가능성이 크다. 원래 숭어는 바닷물고기이다. (하지만 그림 속의 생선이 백과서전에 묘사된 숭어의 생김새와 유사하고,) 음력 4월쯤이 되면 산란을 위해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많이 등장하고 간혹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pp. 37~38] 숭어의 상태를 보면 이 그림 속의 물고기는 숭어라고 보아야 한다고 언급한다.


이렇게 풍속화 속에 그려진 음식을 찾아 무엇인지 추정하고역으로 그 당시의 풍속과 백성들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다른 이의 시선을 따라가는 것이지만 독특하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홉스봄(Eric Hobsbawm, 1917~2012)은 <전통의 창조>(1983)이라는 책에서 전통이란 근대 국민국가가 만들어 낸 창조물이라고 했다. 이런 의미에서 민속학에서 말하는 국민 혹은 민족의 민속 역시 국민국가가 창조한 일종의 표상(表象, represent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과정에서 피지배층의 민속은 언제나 존재해 왔던 실재(實在, reality)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국민 혹은 민족의 민속은 실재를 표상한 창조물이다. 즉 국민국가에 복무하는 민속학을 지향한 근대의 민속학자들이 실재하는 민속 중에서 특정한 현상들을 묶어서 표상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pp. 254~255]

, ‘한국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자생적으로 생겨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인식된 것이 아니라 일본’ 혹은 대한민국이라는 국민국가에 복무하는 학자들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인 셈이다.


그렇기에 저자도 나오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21세기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 조선적 ‘전통’이 주로 18~19세기에 형성된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이 시대를 연구하면 가장 ‘한국적인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18~19세기의 생활사를 제대로 연구해 본 연구자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러한 가설은 절대적인 명제가 될 수 없다. 최근에 밝혀지고 있는 사실이지만, 우리가 '조선적'이라고 믿고 있는 가장 일반적인 명제들 중 일부분은 실제로 20세기에 들어와서 만들어진 계몽적 근대성의 표상(表象)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pp. 249~250]라고 말한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림 속의 음식음식 속의 역사>라는 제목처럼 조선 시대 풍속화를 통한 음식 이야기가 아니라, ‘[조선]의 표상과 실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다라는 부제(副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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