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열하는 제국 - 11개의 미국, 그 라이벌들의 각축전
콜린 우다드 지음, 정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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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정체성은

 

흔히 미국이라고 하면 김동섭의 <미국을 만든 50개 주 이야기>처럼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50개 주(State)의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콜린 우다드(Colin Woodard, 1968~ )는 이 책, <분열하는 제국>을 통해 미국을 11개의 지역 국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지역 국민은 주(州)의 경계는 물론 캐나다나 멕시코의 국경까지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적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니 황당무계할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럴듯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설득력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수 세기 전에 형성된 미국의 지역 국민들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새롭게 이주해 온 무리들에 의해 그들이 가졌던 문화, 인종, 종교적 신념 등이 퇴색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류가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윌버 젤린스키(Wilbur Zelinsky, 1921~2013)는 “주인 없는 땅에 처음 정착한 사람들, 혹은 원주민을 쫓아내고 그 땅을 점령한 사람들이 독자적이고 지속 가능한 사회를 건설하는 데 성공했을 경우 맨 처음 거주민의 특성은 이후 그 땅의 사회, 문화지리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설령 그 최초의 정착민들이 아무리 소수였다 하더라도 말이다. 장기간 지속되는 영향력을 봤을 때, 수백 명 혹은 수십 명에 불과한 초기 정착민들이 몇 세대 후 이주해온 수만 명의 새로운 이주민보다 문화지리학적으로 훨씬 큰 의미를 지닌다.” [pp. 28~29]라고 대답한다.

 

 

미국을 구성하는 11개의 지역 국민(Regional Nations)

 

The 11 nations of North America

출처: 콜린 우다드, <분열하는 제국>, pp. 4~5

 

출처: https://www.businessinsider.com/the-11-nations-of-the-united-states-2015-7

 

 

1. 엘 노르테(El Norte)

아메리카 대륙에서의 유럽 문화의 전파는 스페인의 군인과 선교사에 의해 남쪽, 뉴멕시코 북부의 건조한 고원과 콜로라도 남부에서 시작됐다. 이들 스페인계 미국인들은 “17세기 스페인의 전통과 기술, 종교관습을 20세기까지 고스란히 보존”[p. 39]했다고 한다. 스페인인 여성이 부족했던 결과 1700년대 초가 되자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과 스페인계 백인의 혼혈인 메스티소를 중심으로 하는 히스패닉이 멕시코와 엘 노르테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그래서 이들을 가장 미국인답지 않는 국민이라고도 한다. 1848년 미국-멕시코 전쟁의 결과로 멕시코로부터 캘리포니아 남부, 텍사스 남부, 아리조나 남부, 뉴멕시코 등이 미국에 편입되었지만, 이들은 멕시코 북부의 주들과 함께 ‘노르테뇨(norteno)’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들은 미국도, 멕시코도 아닌 자신들만의 제3국가를 염원한다. 참고로 미국의 카우보이 문화는 이들이 스페인 남부에서 이식한 문화로 미국 최초의 카우보이는 인디언이었다고 한다.

 

2. 뉴프랑스(New France)

톨레랑스(Tolerance, 관용)가 살아있는 유토피아의 건설을 위해 신대륙으로 진출한 프랑스인의 후예다. 이들은 인디언을 정복하려는 스페인이나 쫓아내려는 영국과 달리 인디언을 포용하려고 했다. 그 결과 이곳에는 프랑스 문화만큼 원주민 문화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다. 인종적으로도 캐나다 프랑스인과 북미 원주민 사이의 혼혈인 메티스(metis)가 형성될 정도로 거의 공생관계가 되었다.

 

3. 타이드워터(Tidewater)

영주들이 경제 사회 정치를 지배하는 반(半)봉건사회를 이식하고자 한 영국 남부 젠트리의 후손이다. 이들은 소수의 농장주와 다수의 계약 노예로 구성된 사회를 형성했지만, 훗날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흑인 노예를 구입, 사유재산으로 삼기 시작했다. 스스로 ‘왕당파’로 규정한 이들에 의해 직접선거를 치르지 않고 의회가 임명하는 상원의원 제도와 선거인단 제도라는 귀족적 요소가 미국 헌법에 삽입되었다.

  

4. 양키덤(Yankeedom)

뉴잉글랜드 황야에 교회와 학교를 중심으로 각 공동체가 자치 공화국으로 작동하는 종교적 유토피아를 세우겠다며 정착한 칼뱅주의자의 후예다. 따라서 종교가 다른 이들은 모두 추방할 만큼 종교적, 도덕적으로 불관용 정책을 펼쳤다. 이들은 젊은 비(非)숙련 남성 계약 노예 위주인 타이드워터 정착민과 달리 가족 단위로, 교육 수준과 경제 수준이 높은 중산층 가족 단위로 이주를 했기에 안정적이고 응집력이 높았다. 또한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전파하는 ‘선교’를 위해 주변을 활발하게 정복했다.

 

5. 뉴네덜란드(New Netherland)

1600년대 초반 지구상에서 가장 근대적이고 세련된 국가였던 네덜란드에 의해 형성되었기에 이곳은 종교적 관용과 경제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다만 이들의 관용은 무역과 사업을 위해 다양성을 참고 견딘 것이라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다양성과 관용, 계층 이동, 민간 기업 육성은 바로 이들이 남긴 유산이다.

 

6. 디프사우스(Deep South)

17세기 후반, 영국의 식민지였던 서인도제도의 바베이도스에서 미국의 남부 지역으로 이동한 농장주의 후예다. 노예제를 기반으로 소수의 백인 농장주에 의한 과두제 사회를 형성하였으며 인종에 따른 엄격한 카스트 제도가 적용되었다.

 

7. 미들랜드(Midland)

미국의 여러 국민 중 가장 ‘미국인’다운 혹은 전형적인 미국인에 가까운 사회가 영국 퀘이커 교도에 의해 건설된 미들랜드다. 이후 기근과 종교적 박해, 전쟁을 피해 독일에서 온 농부와 수공업자들이 합류해서 다수가 되었다. 정치에는 무관심한 편이지만, 이들의 영향인지 톱-다운 방식의 정부 개입에 대해 극도로 부정적인 시각을 지녔다.

 

8. 그레이터 애팔라치아(Greater Appalachia)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마지막 국민인 그레이터 애팔라치아는 끊임없는 전쟁에 시달려 온 영국 북부의 분쟁지대에서 계속 오르는 세금에 시달리다가 신대륙으로 이주한 스콧-아이리시인들의 자손이다. 거칠고 호전적이며 혈연에 집착하는 이들은 대중문화를 통해 ‘레드넥(redneck, 교육 수준이 낮고 보수적인 시골 사람을 일컫는 모욕적인 표현)’, ‘힐빌리(hillbillies, 두메산골 촌뜨기)’, ‘크래커(cracker, 남부의 가난한 시골 사람을 비하하는 표현)’, ‘하얀 쓰레기(white trash, 가난한 백인을 뜻하는 은어)’라고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배타적이나 개인의 자유와 주권을 끊임없이 갈구한다. 컨트리 음악, 스톡 카(일반 차를 개조한 경주용 차) 레이싱, 기독교 복음주의 등에 영향을 미쳤다. 특이하게도 자신들의 뿌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는 까닭에 “이름 없는 사람들”로 불리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미국인’ 혹은 ‘미국 원주민’이라고 말한다.

 

9. 레프트 코스트(The Left Coast)

뉴잉글랜드에서 온 상인, 선교사, 벌목꾼 무리와 그레이터 애팔레치아 출신의 농부, 채굴업자, 가죽 무역상 등으로 구성되었다. 덕분에 뉴잉글랜드의 유토피아 이상주의적 성향과 그레이터 애팔레치아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결합되어 근대적 환경운동과 글로벌 지식혁명의 산실이 되었다.

 

10. 파웨스트(The Far West)

미국이 가장 마지막으로 정복한 땅으로 “민족적 지역 문화가 아니라 외부 수요에 따라 정체성이 형성된 독특한 지역” [p. 336]이다.”이다.  광활한 황야지역이기에 대규모 산업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샌프란시스코 등에 본사를 둔 대기업이나 영유권을 지닌 연방정부 주도로 (식민지 개척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이곳은) 해안지역 국민의 이익을 위해 착취되고 수탈당하는, 일종의 내부 식민지 취급을 받았다.” [p. 23].

때문에 이들은 개인의 자유에 극도로 민감한 자유지상주의자가 되었다.

 

11. 퍼스트 네이션(First Nation)

새롭지만 가장 오래된 지역국민으로 북미 원주민들이 자리잡고 있다. 공동체 의식과 환경보호에 대한 인식이 매우 강한 사회이다.

 

 

지역 국민으로 본 미국 역사

 

1. 미국 독립 전쟁

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 전쟁은 양키덤, 타이드워터, 디프사우스, 그리고 북부 그레이터 애팔래치아가 군사동맹을 맺어 자신들의 정체성과 문화적 관습, 제도를 위협하는 영국을 물리치고 이에 동조했던 미들랜드의 평화주의자와 뉴네덜란드의 왕당파를 정복한 전쟁이다. 이로 인해 뜻하지 않게 “첫째는 국가적 지위의 특성을 가진 느슨한 정치적 연대체가 생겨난 것이고, 둘째는 각 국민의 지도자들이 위기의식을 느낄 만큼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이 거세졌다.” [p. 198]

그 결과 식민지 연합을 이룬 6개의 지역 국민은 내부 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타협하여 새로운 헌법과 연방을 만들었다. 타이드워터와 디스사우스는 선거인단에 의해 선출되는 강력한 대통령제를, 뉴네덜란드는 양심과 표현, 종교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권리 장전을, 미들랜드는 각 주의 주권 보장을, 양키덤은 작은 주들도 상원에서 동등한 발언권 보장을 각각 반영시켰다.

 

2. 남북 전쟁

남북전쟁 시대는 오랫동안 ‘북부’와 ‘남부’ 사이의 투쟁으로 그려져 왔다. 하지만 이 두 지역은 문화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지역이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남북전쟁이 과연 노예 해방을 위한 것이었는지, 혹은 켈트족과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족 사이의 세력 다툼이었는지 여부를 놓고도 논쟁을 벌여왔다. (그러나) 어떻게 분석해봐도 명확하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결론밖에 도출되지 않았다.” [p. 311]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남북전쟁은 노예제 사회였던 타이드워터를 포함하는 디프사우스 세력과 이에 반대하는 양키덤 세력의 충돌이라고 한다.

 

오늘날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일상 생활과 경제 활동의 범위는 확대되었지만, “국민들 사이의 차이점을 약화시키기보다 오히려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2008년 언론인 빌 비숍(Bill Bishop, 1953~ )과 사회학자 로버트 쿠싱(Robert Cushing)은 <대분류(The Big Sort: Why the Clustering of Like-Minded America is Tearing Us Apart)>라는 책에서 1976년 이후부터 미국인은 자신과 가치관 및 세계관이 비슷한 커뮤니티로 각자 헤쳐 모이고 있다고 주장”[p. 29] 했다. 즉, 현재의 미국은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 여러 개의 지역 국민들로 재분류되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미국사를 11개 지역 국민의  각축으로 보는  이 책의 관점은 독특하다. 그리고, 다른

국가를 살펴볼 때  우리가 무심코 가지게 되는 선입견에 대한 경고와 발상의 전환에 대한  단

서로도 유용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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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 막고굴과 실크로드의 관문 - 오아시스 도시의 숙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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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고굴 답사

 

돈황(敦煌) 명사산(鳴沙山) 자락에 자리잡은 막고굴(莫高窟)에는 4세기경부터 시작해서 14세기까지 약 1천 년간에 걸쳐 석굴이 조성되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확인된 석굴은 492개인데, 이 중 수(隋)나라 때 97기, 당(唐)나라 때 225기가 만들어졌다니 전체 석굴의 4분의 3이 수당시대에 만들어진 셈이다.

막고굴 석굴의 관람은 보존을 위해 하루 6천 명으로 관람인원을 제한하고 예약된 관광객만 15분 단위로 입장시키는 등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다. 막고굴 석굴을 관람하려면 먼저 막고굴 디지털 전시 센터로 가서 돈황과 막고굴에 대한 영상을 본 후 막고굴로 가는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 막고굴 부근에 도착해 버스에서 내려 막고굴 입구의 솟슬대문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여기서 가이드를 만나 석굴을 구경하게 된다. 구체적으로는 관람자 별로 2시간 동안 8개의 석굴을 볼 수 있으며, “막고굴 석굴 중 가장 큰 불상인 북대불(北大佛)이 있는 제96굴과 돈황문서가 발견된 장경동(제17굴)이 있는 제16굴은 공통으로 보여주고 나머지는 관람객들이 겹치지 않게 가이드가 조절하여 안내” [pp. 23~24]한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 1부 ‘막고굴’에서 두 차례에 걸쳐 11개의 석굴을 관람하고 막고굴에 있는 불상과 벽화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45굴의 모형(돈황박물관)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13

 

박공식의 제254굴 천장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8

 

북두형 천장의 제285굴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39

 

제275굴 교각미륵상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 93

 

돈황문서 수난기

 

막고굴은 한동안 잊혔다가 20세기에 주목 받기 시작했다. 1900년 도사(道士)를 자처한 왕원록(王圓?, 1851~1931)에 의해 제16실 안에 있는 감실, 지금은 제17굴로 불리는 장경동(藏經洞)에서 돈황문서 3만 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들 문서 가운데 연도를 알 수 있는 것을 보면 “가장 오래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인 353년의 필사본이고,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것은 북송(北宋) 때인 1030년에 작성된 필사본이다.” [p. 112]

비록 이곳에서 발견된 불경의 “대부분이 잔권(殘卷) 단편들이고 가짜 경전으로 의심되는 위경(僞經)도 적지 않다. 심지어 잘못 베껴 버려진 두루마리와 먹을 덕지덕지 칠한 잡다한 글씨의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응당 있어야 할 <대장경>에 수록된 주요 경전이나 <대반야경> 등 고급 불경이 없다”[p. 113]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돈황문서가 가지는 역사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행히도 이후 중국에서 ‘도보자(盜寶者)’라고 부르는 영국의 오렐 스타인(Marc Aurel Stein, 1862~1943), 프랑스의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 일본의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 1876~1948), 미국의 랭던 워너(langdon Warner, 1881~1955) 등이 돈황문서와 유물을 가져가 전세계로 흩어졌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905년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오브루체프(Vladimir A. Obruchev, 1863~1956)가 왕원록에게 승려의복용 직물, 향, 등잔용 기름, 구리 주발 등이 든 6꾸러미를 주고 고문서 2상자를 가져간 것을 시작으로, “1907년 영국의 오렐 스타인이 어리숙한 왕원록에게 소액의 기부금을 주고 약1만 점을 유출하여 영국박물관에 가져갔고, 1908년 프랑스인 폴 펠리오(Paul Pelliot, 1878~1945)가 다시 5천 점의 유물을 프랑스로 가져갔는데 그 중에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 필사본도 들어 있었다. 나머지는 청나라 정부가 북경으로 옮겨갔다. 뒤이어 일본의 오타니[大谷] 탐험대가 흩어져 있던 (약 600종의) 문서와 불상을 유출해갔고, 미국의 랭덤 워너는 (돈황문서가 아니라) 불상과 벽화를 뜯어갔다.” [p. 49]

 

돈황문서는 이렇게 흩어졌지만 남아있는 돈황벽화라도 수호한 이들도 있었다. 제백석(齊白石)과 함께 현대 중국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장대천(張大千, 1899~1983)은 1941년부터 막고굴 벽화를 모사하는 동시에 석굴마다 번호를 매기며 조사했다. 파리에서 활동한 전도유망한 화가였지만 귀국해 40여 년을 막고굴 보호와 연구에 헌신한 만주족 화가 상서홍(常書鴻, 1904~1994)도 있다. 조선족 화가 한락연(韓樂然, 1898~1947)은 3.1 운동에 참가했으며, 상해임시정부를 불신임하고 새로운 주체를 설립하려는 창조파에 속했다. 이후 그는 중국 공산당에 입당해서 중국 국민당 고급장교를 상대로 하는 통일전선사업에 종사했고, 이로 인해 국공합작의 와해 이후 체포되었다. 다행히 각계의 구명활동으로 “활동 지역을 서북지역[감숙성과 신강성]으로 한정할 것과 작품에 노동 인민을 그리지 않을 것을 조건” [pp. 234~235]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 이로 인해 그는 돈황 벽화를 모사하며 발굴조사에 몰두하면서 더 이상 막고굴이 훼손되지 않도록 수호하였다. 오늘날에는 돈황연구원이 그들의 뜻을 계승하고 있다.

 

이러한 20세기에 일어난 막고굴 약탈, 즉 돈황문서의 수난사는 어떻게 보면 답사기와는 다소 핀트가 어긋나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현재 막고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부분이기에 수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일제 강점기에 많은 문화재를 약탈당한 우리의 입장에서는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정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돈황에는 막고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돈황 인근에는 막고굴 외에도 가볼 만한 답사처가 많다. 과주(瓜州) 혹은 안서(安西)에 있는 유림굴(楡林窟)은 막고굴의 자매굴이라고도 불리는데, 제2굴과 제3굴에서 탕구트계의 나라 서하(西夏)가 남긴 불교예술을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제2굴 서쪽 벽의 남측과 북측의 수월관음도는 고려의 불화인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를 떠올리게 한다.

 

제2굴의 수월관음도


 

출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2>, pp. 284~285

 

돈황 시내에서 각각 서남쪽, 서북쪽에 위치한 양관(陽關)과 옥문관(玉門關)은 예부터 서역으로 열린 실크로드의 관문이었다. 실크로드라고 해서 타클라마칸 사막을 가로지르는 길은 아니다. 위구르어로 ‘들어가면 나올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사막답게 타클라마칸 사막을 우회하는 길일 뿐이다. 그래서 실크로드의 두 관문인 양관과 옥문관을 따라 서역남로와 서역북로가 형성된 것이다. “양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남로는 곤륜산맥의 오아시스 도시인 누란(樓蘭)과 호탄[Khotan, 和田]을 거쳐 카스[喀什]에 이르는 길이다. 옥문관을 통해 나아가는 서역북로는 천산산맥을 따라가는 길로 투르판[Turfan, 吐魯蕃]에서 두 갈래로 나뉘어 천산남로는 쿠얼러[Korla, 庫爾勒]와 쿠차([Kucha, 庫車]를 지나 카슈가르[Kashgar, 喀什, 카스]에 이르고, 북쪽으로 나아가는 천산북로는 우루무치[Urumqi, 烏魯木齊]를 지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로 나아가는 초원의 길이다. 강인욱 교수의 지적대로 실크로드는 선이 아니라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점을 말한다.” [p. 304]

 

다음 권에서는 <서유기(西遊記)>의 모델이 된 현장법사(玄?法師)가 불경을 찾기 위해 떠났던 길을 따라 실크로드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살펴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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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고세훈 지음 / 한길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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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은

 

이 책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 이하 ‘오웰’)로 알려진 사람의 전기가 아니다. 이는 이 책이 한 개인의 삶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늘어놓는 연대기 혹은 편년체(編年體)라는 일반적인 전기 형식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서사와 사상을 연대기적으로 묶어서 서술하다가 읽는 즐거움과 주인공의 일관되고 체계적인 사유방식을 모두 놓칠까 염려” [p. 39]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것일까? 크게 오웰의 삶을 그린 ‘1부 생애’와 그의 사상과 작가로서의 글쓰기 태도를 다룬 ‘2부 사상과 글쓰기’로 엮여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이 책을 한 사람의 일생에 평론을 곁들인 평전(評傳)으로 볼 수도 있다.

한편으로는 ‘조지 오웰’이라는 모범 답안을 두고, 은연중 그와 비교하면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본 지식인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한 것으로도 보인다. 다만, 이런 방식으로 글을 엮어나가다 보니 내용상 중복되는 부분이 튀어나와 아쉬웠다.

 

 

오웰의 사상과 글쓰기 태도

 

장 폴 샤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 이하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지식인이란 집단은 지적 능력에 관계되는 일을 통해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한 후에, 자신들의 영역을 벗어나, 인간이라는 보편적이고 독단적인 개념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사회와 기존의 권력을 비판하기 위해 자신들의 명성을 남용하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 [p. 14]이라고 비판한다.

이와 비슷하게 오웰은 “권력 언저리에서 킁킁대며 안일과 위선과 표변을 일삼는 지식인에 대한 거대한 보고서” [p. 33]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지식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웰이 보는 지식인은 어떤 존재일까?

첫째, 지식인은 무지몽매한 민중을 가르치는 자가 아니다.

흔히 지식인이라고 하면, 무지몽매한 민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1984>와 <동물 농장>으로 알려진 오웰은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전제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독자들을 가르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즉, “그는 궁핍과 질병이 주는 삶의 신산(辛酸)함에도 불구하고 승자 진영에 편입되고자 안달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을 피해자 편에 서서 그들의 눈과 입을 빌려 관찰하고 발언하기를 지속했다. “오웰은 가르치려 들지 않았고, 설교하지 않았으며, 간섭하려 하지 않았다 (…) 그는 결코 시끄럽지 않았으며, 불안한 자의 독단을 보이지 않았다 (…) 그는 관광여행의 안내자의 태도를 취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었다.”” [p. 34]

 

둘째, 지식인은 늘 진실과 정직하게 대면해야 한다.

작가는 자신도 모르게 지녔음직한 정치적 편견 혹은 종교적 가치에 대해 스스로 민감할수록 미적, 지적, 정직성의 희생 없이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는 확률이 더 높아진다. 인간에겐 너무도 명백하여 변경 불가능한 사실들, 그리하여 조만간 직면해야 할 사실들을 무시하는 능력, 곧 진리가 아님을 알면서도 믿으려는 성향이 있다. 마침내 틀렸음이 밝혀졌을 때에도 옳음을 보이기 위해 사실들을 비트는 것이 인간이다.” [p. 503]

샤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사회에서 가장 소외 받는 계층, 즉 일반적으로 피지배계층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이고 가장 확장된 이익을 대변하는 ‘보편적 계급’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이들의 입장에 서거나 이들을 대변할 경우에만 올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을 갖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는 지배계층의 일부일 수 밖에 없는 지식인이 자신의 시각으로 피지배계층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아닌 그들의 시각을 가지려 해야 한다는 얘기이면서 동시에 지식인이 피지배계층이 될 수 없는 한계를 지적하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오웰은 이러한 샤르트르의 주장을 가장 잘 구현한 지식인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오웰에게는) 이데올로기든 신앙이든 혹은 권력에 의해서든 그것이 작가가 마땅히 누려야 하는 자율성을 제한한다면, 작가의 생명인 정직성 또한 제약될 수밖에 없음이 자명해 보였다.

오웰로서는 진실, 사실과의 정직한 대면, 그리고 그러한 대면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그는 인간이 주관적인 감정을 온전히 배제하지는 못할지라도, 이러한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가능하면 사고로부터 그것을 걷어내는 일은 가능하다고 보았다. 읽을 만한 것을 쓰기 위해서는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pp. 502~503]고 여겼던 것이 아닐까?

 

 

정치적 글쓰기라는 예술

 

우리가 학창시절에 KAPF나 프로문학을 배우면서, 문학에 정치적 의도가 들어가면 작품이 아니라 선전선동의 도구로 전락하기 쉽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정치적 글쓰기라고 하면 예술과는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웰에게 문학과 정치적 가치는 상충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말년에 그는 자신이 지난 10년 동안 늘 가장 원했던 것이 “정치적 글쓰기를 하나의 예술로 만드는 것”이라고 고백했다.” [p. 503]

오웰이 보기에는 “소설을 쓰는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언제나 보통사람과 계급적으로 유리된 중간계급에 속해 있다. 보통사람, 특히 노동계급(의 삶)과의 접촉이 쉽지 않을 때 작가들은 주제나 소재의 부재에 시달리며, 단어와 표현의 미학적 유희에 쉽게 빠져든다. (그 결과로 산출된 작품들은) 모든 것이 허용된 듯이 보이지만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재미는 있을지라도 감동은 찾기 힘들다.” [pp. 526~527]

오웰이 이런 말을 한 것에는 어떤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혹은 독자들을 선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글쓰기를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오웰은 ‘보통사람들의 품위(common decency)’가 사회 곳곳에 스며드는 세상을 꿈꿨다. 언어가 간결하고 명료하면 보통사람들이 정치적 논의로부터 배제되거나, 지도자들에 의해 쉽사리 속임을 당할 수 없으리라는 것이 그의 믿음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글쓰기의 어려움과 정치작가로서의 다짐을 이렇게 토로했다.

책을 쓰는 일이란, 어떤 고통스런 질병을 한 차례 길게 앓는 것 같은 끔찍하고 탈진시키는 투쟁이다. (...) 자신의 개성을 말살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는다면, 읽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쓸 수 없다. (...) 내 작업을 돌아볼 때, 내가 생기 없는 책을 쓰고, 미사여구, 의미 없는 문장, 화려한 수사, 곧 눈속임에 취해 있을 때는 예외 없이 정치적 목적을 결여했을 때였다는 것을 본다.” [p. 36]

 

즉, 오웰에게 중요한 것은 “일관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일관된 도덕적 힘이었다. 무릇 이데올로기는 개인의 선택을 강요하지만, 도덕적 힘은 개인의 선택을 추동(推動) 한다. 오웰의 도덕적 힘은 (<카탈로니아에 경의를[Homage to Catalonia]> (1938) 등에서 드러나는) 피해자에 대한 연민 그리고 (<버마 나날들[Burmese Days]>(1934)에서 보듯이) 가해자로서의 수치와 죄의식에 터를 잡고 있다.” [p. 35]

따라서 그가 사회주의자로 알려졌지만 그것은 어떤 이데올로기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경험에 바탕을 두고, 보통사람에 의해 보통사람의 가치와 정서가 구현되는 정치에 희망을 걸었던 결과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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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가능한 세계들
앤 드루얀 지음, 김명남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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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이 나오기까지

 

칼 세이건(Carl Sagan, 1934~1996)이라고 하면 대부분 <코스모스(Cosmos)>(1980)라는 이름의 책이나 다큐멘터리를 떠올린다.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s)>의 저자인 앤 드루얀(Ann Druyan, 1949~ )은 바로 그 칼 세이건의 아내이자 천문학자인 스티븐 소터(Steven Soter, 1943~ )와 함께 <코스모스>의 원고를 함께 작성한 사람이다.

그래서일까? 1996년 칼 세이건이 사망한 후에도 그녀는 그의 유지를 이어받아 스티븐 소터와 함께 2014년 <코스모스>(1980)의 업데이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코스모스: 스페이스타임 오디세이(Cosmos: A Space Time Odyssey)>에 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을 뿐 아니라 제작 및 감독에 참여했다.

그렇기에 40년의 시간이 흐른 2020년에 앤 드루얀이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와 같은 방식으로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Cosmos: Possible Worlds)>을 출간하고 동명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왜 <코스모스: 가능한 세계들>을 출간 및 제작했을까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 이하 ‘아인슈타인’)은 1939년 세계박람회 개막식에서 “과학이 예술처럼 그 사명을 진실하고 온전하게 수행하려면, 대중이 과학의 성취를 그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도 이해해야 합니다.” [p. 26]라고 말했다.

앤 드루얀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의 이 말이 ‘코스모스’ 프로젝트의 꿈이라고 한다. 그녀가 보기에는 이것이 “우리가 직면한 여러 위기를 전부는 아니라도 많이 해결해 줄 만한 열쇠” [p. 7]라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과학의 성취를 표면적 내용뿐 아니라 더 깊은 의미까지 이해한다는 것을 “최대한 많은 사람이 과학을 지금과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 [p. 7]이라고 본 것이다. 사실 우리는 과학을 도구로서 받아들이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데 그녀는 과학을 도구가 아닌 사상 혹은 관점으로 수용하기를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분명히 그녀도 과학이 가지는 부정적인 영향력은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처럼 과학이라는 학문을 내용적 측면이 아니라 형식적 측면에서 받아들이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닐까? 그래서 그녀는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과학자들처럼 장기적인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이른바 지도자들은 다음 선거 혹은 사분기 평가까지의 시간에만 신경 씁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근시안적 사고를 지속할 여유가 더는 없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위기는 우리가 제대로 해결해 내지 못할 경우, 지구 문명 전체를 파괴할 위기이니까요.” [p. 9]라고 말한 것일 것이다.

 

인류는 이 책의 1장 처음에 쓰여진 것처럼 “우리는 이 광막한 우주에 출현한 지 얼마 안 된 어린 존재” [p. 39]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기술적 사춘기’ 즉, “젊은 문명이 스스로를 파괴할 기술적 수단을 갖추었지만, 아직 그런 파국을 예방할 성숙함과 지혜를 갖지 못한 위험천만한 시기” [p. 421]를 거치는 것도 당연하다.

어쩌면 저자가 인류가 자초한 ‘대멸종의 시대’를 언급하면서도 낙관적인 전망을 버리지 않는 것은 “우리 중 충분히 많은 수가 전 세계 과학자들의 말을 마음에 새긴다면, 그리고 행동한다면, 이 재앙을 충분히 멈추고 되돌릴 수 있다고” [p. 8] 믿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는 ‘칼 세이건 <코스모스>의 정식 후속작’이라는 책소개를 들어 저자가 <코스모스>(1980)에 대한 신뢰와 지지에 기대어 이 책을 썼다고 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책이 말한 대로 과학이라는 열쇠로 인류가 재앙을 멈출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신시켜 무의식 중에 파멸로 향하는 인류의 발걸음을 멈추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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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 부산 근대건축 스케치
최윤식 지음 / 루아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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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근대의 기점을 어디로 잡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논의가 있지만, 일본에 의해 강화도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내적으로 근대화가 시작되고 외적으로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는 1876년도 주요한 후보 가운데 하나이다.

동래부(東萊府) 관할이었던 부산포(釜山浦)가 도시로서의 틀을 잡게 된 것이 앞에서 언급한 강화도 조약에 의해 개항장으로 지정된 이후이니 어떻게 보면  ‘부산(釜山)’이라는 도시의 존재감은 근대도시로 형성되면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전쟁 등을 거치면서, 또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과정에서 근대도시 부산의 거리와 건축물은 훼손되거나 소멸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저자는 “오래된 것이 낡은 것이 아니라 쓰지 않은 것이 낡은 것이다. 그 낡은 것조차 얼마 남지 않았으니 뒤를 이을 부산 사람들에게 미안할 따름이다” [p. 5]라고 말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렇기에 1910년대 부산항과 1926년 무렵의 광복로, 1930년대 대청정 거리 모습에서 시작해 1943년 화재로 소실된 태평관, 1953년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된 옛 부산역, 공회당 그리고, 부산우편국, 1979년에 철거된 부산세관, 1983년에 헐린 상품진열관, 마지막으로 현재 보존되고 있는 석당박물관, 일신여학교, 임시수도기념관, 부산근대역사관 등에 대한 68점의 세밀화를 우리에게 건네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1910년대 부산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9

 

부산우편국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72~73

 

석당박물관

출처: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 pp. 84~85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노화되어 간다. 도시의 거리와 건축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거리와 건축물에는 그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갔던 사람들의 기억이 자연스럽게 녹아있다. 단순히 우리가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러한 공간들을 계속해서 파괴하기만 하면 오래 전부터 이루어졌던 자연 파괴의 대가를 지금에 받는 것처럼 또 다른 형태의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저자가 사라졌거나 사라질 위기에 있는 건축물, 잊혀진 거리를 세밀화의 방식으로 남기는 것은 벌목으로 더 이상 나이테가 생기지 못하는 나무처럼, 그 공간에 쌓인 추억과 이야기가 휘발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사라진 건축, 잊힌 거리>는 건축에 관심 있거나 부산의 역사에 흥미를 느끼는 이에게는 큰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책등이 없는 누드 사철 제본으로 되어 있어 68점의 세밀화를 보다 편하고 제대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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