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롱 드 경성 -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천재 화가들
김인혜 지음 / 해냄 / 202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근대 한국 예술가의 삶을 다룬 책이 나왔을까?


근대(近代).

서양에서 산업혁명 이후인 18세기에서 제2차 세계대전(1945)까지를 가리키는 용어다. 동양에서는 나라마다 조금 다른 시기를 가리키는데, 국사편찬위원회의 분류에 따르면, 한국은 흥선대원군의 집권(1864)부터 광복(1945)까지라고 한다. 혼란과 격동의 시대인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에 해당한다. 게다가 이 시대를 살았던 많은 이에게 붙여진 ‘친일파’ 혹은 ‘빨갱이’ 낙인은 그 혼란기를 버텨온 많은 예술가들의 상당수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게 만드는 원죄(原罪)였다.


한국 근대기의 수많은 예술가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각자의 시련을 딛고 내면을 벼리는 과정을 거쳐,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든 그렇지 않든, 예술가끼리는 서로 자유롭게 연대하고 의지하며, 굶어 죽어도 ‘멋’을 유지했던 인간들이었다. 인간 본연의 순수함과 정직함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높은 가치였기 때문에, 세속의 무가치한 경쟁과 권력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대체로 속세와 동떨어진 나머지 살아서는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고, 그림이나 조각을 팔지 못해 가난했으며, 심지어 죽고 나서 오늘날까지 많은 이의 관심을 받지 못한다. 지금도 한국인 대부분이 이름을 알고 있는 근대미술가는 기껏해야 이중섭, 박수근 정도에 머물러 있지 않나. 외국 작가라면 훨씬 더 많은 이름을 나열할 수 있는 사람들도 한국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pp. 5~6]


최근 근대 경성(京城)의 예술가들의 삶을 다루는 기획이 몇 권 나왔다.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비롯해서 황정수의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서촌편>(2022)과 <경성의 화가들, 근대를 거닐다: 북촌편>(2022)는 아마도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대한 반성이 아닐까?



네 개의 틀로 분류한 예술가들의 삶


저자는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하며 2012년부터 한국 근대작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 작가들의 아카이브(편지, 일기, 사진, 노트 등)를 체계적으로 수집 및 구축하는 업무를 최초로 기획했다. 그리고, 이에 기반한 풍부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유영국: 절대와 자유] 등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의 개인전과 1930~40년 경성을 무대로 펼쳐진 미술과 문학의 상호관계를 보여주는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 전시를 기획했다고 한다. 나아가 이 전시를 계기로 신문에 [김인혜의 살롱 드 경성]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이 책 <살롱 드 경성>을 출간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책을 읽으면서 전시회를 둘러보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책, <샬롱 드 경성>(2023)은 크게 4장으로 구성된다.

‘1장 화가와 시인의 우정’에서는 ‘문명개화(文明開化)’라는 이름으로 밀어닥친 신문물의 세례를 받으면서도 옛 문인(文人)처럼 화가와 시인, 소설가가 장르를 넘나드는 우정과 협업을 통해 서로의 예술 세계를 성장시키는 과정을 소개한다.

<오감도(烏瞰圖)> 등 초현실주의 시와 심리소설의 개척자로 알려진 이상(李箱, 1910~1937)과 그의 절친으로 유명한 한국 최고의 야수파 화가 서산(西山) 구본웅(具本雄, 1906~1952)의 우정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적 모더니즘의 완성자라는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 삽화가로 명성을 떨친 정현웅(鄭玄雄, 1910~1976), 한국에 모더니즘을 소개한 김기림(金起林, 1908~?)과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를 통해 복식사(服飾史)를 개척한 청정(靑汀) 이여성(李如星, 1901~?) 등의 이야기는 낯설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재북(在北), 월북(越北), 납북(拉北) 등의 사유로 상당 기간 그들의 작품까지도 금기(禁忌)시 되었기 때문이다.

박완서(朴婉緖, 1931~2011)의 소설 <나목(裸木)>의 집필 계기가 된, 미석(美石)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의 유작전(遺作展)은 인연이 가져다 준 또 다른 형태의 예술 세계 성장이라고 할 수 있다. ‘박완서’라는 소설가가 세상에 나오게 된 계기니까.


박수근은 1965년 5월 작고했는데, 같은 해 10월 유작전이 열렸다. 유작전이 열린다는 신문 기사를 접하고 전시회에 갔다가 박수근의 작품 앞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는 감동을 받은 이가 있었다. 바로 소설가 박완서(1931~2011)였다. 그녀는 주체할 수 없는 심정을 안고서, 박수근과의 인연을 소재로 한 소설 <나목>을 썼다. 그리고 이 소설이 1970년 <여성동아> 현상 공모에 당선되면서, 주부로 살아가던 박완서는 소설가로 등단하게 된다. 나이 39세가 될 때까지 주부였던 사람이 이런 훌륭한 소설을 썼을 리 없다며, 잡지사에서 집으로 찾아가 진짜 박완서가 쓴 것인지 증명해 보이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pp. 83~84]



‘2장 화가와 그의 아내’에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화가들과 그들의 오늘이 있기까지 헌신적인 배우자이자 예술적 동지이며 후원자였던 아내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실 우리는 화가는 알아도, 스캔들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지 않는 한, 그들의 배우자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배우자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그들의 예술세계가 성립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1974)와 그의 아내이자 수필가인 변동림(卞東琳) 아니 김향안(金鄕岸, 19116~2004)의 경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조혼 풍습으로 김환기가 일찍 결혼을 하고 딸을 셋 둔 채 이혼한 상태였으므로, 변동림에게 선뜻 고백할 처지가 못 되었다. 그런 그에게 변동림이 용기를 북돋워주었다. “(셋이 아니라) 열이면 어때? 데려다 잘 교육시키면 되지.” “대신 당신의 아호(어릴 때 부르던 이름)인 향안(鄕岸)을 내게 주세요.”

이렇게 해서 변동림은 김환기의 아호를 받아 김향안이 되었다. ‘같이 죽자’는 이상과의 사랑이 죽음을 맞은 후, 변동림은 김환기에게 ‘같이 살자’는 희망을 안겨주며, 김향안으로 다시 태어났다.

~ 중략 ~

김향안은 1944년 김환기와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 후, 1974년 김환기가 뉴욕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30년간 그의 생을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 전쟁이 끝나고 자신의 예술이 세계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고 싶어하는 김환기를 위해, 김향안은 1955년 홀로 프랑스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작품 슬라이드만 달랑 들고서! 그녀는 소르본대학과 에콜 드 루브르에 다니면서, 프랑스어와 미술사를 먼저 공부했다. 그리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와 교제하여 김환기의 아틀리에를 구하고, 개인전 일정도 잡은 후에 김환기를 파리로 불러들였다.

~ 중략 ~

김향안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김환기를 위해, ‘화가의 아내’라는 일종의 직업 정신을 가지고 그의 성공을 지원했다. 뉴욕 체류 시절에는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고, 종일 글을 옮겨 적는 필사(筆寫)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이어갔지만, 그녀는 자신의 일을 내조라기보다 서로 돕는 일이라고 정의한 적이 있다. 이들의 관계는 부부임을 넘어 ‘동지(同志)’에 가까웠다. [pp. 158~160]



‘3장 화가와 그의 시대’에서는 야만의 시대를 버텨야 했던 화가들의 파란만장한 삶과 작품 세계를 소개한다.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가 정월(晶月)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이다. 그녀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혹은 신여성의 대표주자로 최초의 페미니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많은 이들이 그녀가 남긴 작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 도리어 파리에서의 최린(崔麟)과의 불륜 그리고 이에 따른 이혼으로 대표되는, 불꽃처럼 살다간 그녀의 삶 정도만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예술가로서의 나혜석은 어떨까? 나혜석은 비슷한 시기에 도쿄의 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후 한평생 거의 서양화를 손에서 놓지 않고 살았다. 학교 교사를 하면서도 그림을 그렸고, 남편을 따라 유럽과 미국을 돌아다닐 때에도 그림을 그렸고, 세상을 등지고 산중에 있을 때에도 그림을 그렸다. 그 무렵이 지금보다 더 여성이 사회적 활동을 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는 서슴없이 가시밭길을 걷는 선구자였다. 더구나 그녀는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세상과 맞서며 여성으로서의 주체적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했다. 결국 이로 인해 그녀는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끝내 멈추지 않았다. 불행히도 1933년 화실의 화재로 그녀의 작품 대부분이 타버려서 현재 전하는 그녀의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이처럼 그녀는 온몸을 불태워 그 시대 여성에게 길을 제시하고 스스로 나아가다가 사그라진 것일지도 모른다. 길은 누군가 걸아 가야 생기는 것이므로…….


‘한국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었던 이쾌대(李快大, 1913~1965)은 일제의 잔재를 벗어난 한국적 리얼리즘 미술을 창조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한국전쟁은 그가 더 나아갈 기회를 앗아갔다. 안 그래도 그의 형 이여성(李如星, 1901~?)이 몽양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당 등에서 활약하다가 월북했는데, 그 자신마저 인민군으로 오인되어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민족주의 좌파에 속하는, 그가 남쪽에 남을 기회를 사실상 박탈해버리는 결과가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미술사에서 그의 이름 석자를 지우는데 충분했다.


향토적 서정주의를 추구하여 ‘한국의 고갱’이라는 평가도 있던 이인성(李仁星, 1912~1950)은 술 때문에 어이없이 목숨을 날려야 했다.


서울 북아현동에 살던 이인성은 이날도 술을 마시다가 치안대원과 시비가 붙었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술 그만 마시고 집에 돌아가라며 자꾸 간섭해 대는 대원들에게 “내가 누군지 모르냐. 내가 이인성이다!”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가 하도 당당하니까, 어쩌면 높은 사람인가 보다 하고 대원들이 이인성을 놓아주었다.

그런데 동네 사람에게 이인성이란 자가 누구냐고 물어보니, 권력자이기는커녕 그림 그리는 화가라고 하지 않는가. 화가 치민 치안대원들이 ‘환쟁이 주제에’ 하는 생각으로 이인성의 집을 찾아가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공포탄을 쏜다는 것이 그만 이인성의 머리에 적중하고 말았다. “오발이다!” 외마디를 남기고 대원들은 사라졌다. 무방비 상태의 이인성은 어린 딸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튿날 숨을 거두었다. 향년 38세였다.

후에 소설가 최인호는 이인성의 어이없는 죽음을 두고, 절규에 가까운 글을 쏟아냈다. “누가 천재를 쏘았는가?” [pp. 249~250]


일제강점기에 마라톤의 손기정, 무용의 최승희와 더불어 일본인이 인정하는 3명의 조선인 가운데 하나였던 천재 예술가는 이렇게 주사(酒邪)로 인해 세상을 떠나야 했다.



‘4장 예술가로 살아갈 운명’은 고통과 방황을 거듭하면서도 오로지 예술을 통해 구원받을 수밖에 없었던 화가들의 짙고 깊은 ‘운명’을 이야기한다.


유아적이고 토속적인 감성을 추상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장욱진(張旭鎭, 1917~1990)의 삶은 예술가로 살아가야 할 운명을 가진 이를 보여준다.


“장 선생님은 도와드릴 건 아무것도 없어요. 혼자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내버려둔 것뿐이에요. 무엇보다 괴로울 때는, 그분이 작품이 안 되고 내부의 갈등이 심해지면 열흘이고 스무 날이고 꼬박 술만 드실 때입니다. 그때는 소금조차도 한 번 안 찍어 잡수시지요.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 그 후에는 다시 캔버스에 밤낮없이 몰두하시지요. 옆에서 보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숫돌에 몸을 가는 것 같은 소모”는 그의 삶뿐 아니라 작품에 철저하게 녹아 있다. 1958년에 그린〈까치〉라는 작품을 보자. 이중섭에게는 ‘황소’가 화가의 자화상과 같은 것이었다면, 장욱진에게는 ‘까치’가 그러했다. 장욱진은 마을 주변을 낮게 날며 세상 사람을 관찰하는 이 작고 영리한 새를 좋아했다. 그림 속 까치는 그믐날 깜깜한 밤에 홀로 나무 위에 앉아 있다. 일견 조형적으로 단순하고 귀여운 작품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자그마한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화가는 화면 전체를 밤의 어둠으로 새까맣게 뒤덮은 다음, 매우 가느다란 도구로 수천 수만 번의 손놀림을 통해 검은 물감을 ‘긁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앙증맞은 까치 한 마리를 남기기 위해, 도대체 화가는 얼마나 여러 번 화면을 긁고 또 긁었을까. 모두가 잠든 새벽에 작업하길 좋아했던 그는 이 작은 화면을 긁느라 얼마나 많은 새벽을 홀로 지냈을까. 작가의 철저한 고독과 치열한 내면세계가 전해져 내게 이 그림은 도무지 귀엽지가 않고, 도리어 아프고 처절해 보인다. [pp. 288~289]


나혜석처럼 ‘최초’의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한국 최초의 여성 추상화가 일무(一無) 이성자(李聖子, 1918~2009)의 삶도 기구했다. 자식을 경성 최고의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기 위한 분가가 끝내 별거로 이어졌다. 남편이 서울 집에 있는 세 아들을 인천으로 데려가자 그녀는 아예 프랑스 파리로 떠나 버렸다. 예상밖에 그녀는 이곳에서 빠르게 성공을 거두었다. 심지어 그녀의 대표작 <내가 아는 어머니>가 1962년 파리 샤르팡티에 갤러리에서 열린 [에콜 드 파리]에 출품되어 파리 화단의 극찬을 받을 정도였다고 한다.


작품을 제작하면서 이성자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고, 동시에 어머니인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세 아들을 생각했다. “내가 붓질을 한 번 하면서, 이건 내가 우리 아이들 밥 한술 떠먹이는 것이고, 이건 우리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이라고 여기며 그렸다”고 이성자는 말했다. 그녀는 자식을 키우던 모든 열정을 오롯이 작품을 생산하는 에너지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성자는 진정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 그녀는 고향이 그립고 그래서 슬프지 않으냐는 파리 친구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슬프지 않다. 내가 서 있는 곳 발끝에 내 고향이 있다.”

그런 ‘초월’의 세계관이 그녀의 삶을 지탱했다. 그러나 막상 그녀의 세 아들은 어땠을까? 진짜 밥을 주는 대신, 밥 주듯이 그림을 그린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았을까? 반전은 여기서 일어난다. 결론적으로 세 아들은 진심으로 예술가로서의 이성자를 존경했다. 물론 성장기에는 고난이 있었겠지만, 세 아들은 결국 이성자를 지지하는 든든한 지원군으로 자라났다. 1965년, 14년 만에 성공한 화가가 되어 귀국한 이성자의 귀국전을 열어 준 것도 첫째 아들 신용석(1941~ )이었다. [pp. 322~323]


나혜석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결말을 보여준 셈이다.


마치 스토리텔링이 있는 전시회 네 개를 본 듯한 느낌이랄까? 전시회장에서 작품을 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옆에서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격정적으로 해당 작품을 그린 이와 작품의 배경 등을 설명해주는 듯했다.

그저 버티기만 하는 것도 힘든 시대였기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작품을 남겼고, 어떤 명성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남긴, 그리고 우리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소중하고 빛나니까.

인간이라는 종(種)은 ‘기억(記憶)’이라는 방식으로 영생(永生)한다고 한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작품을 기억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의미 있지 않을까?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열연한 저격수 안옥윤이 남긴 명대사 “모르지.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처럼 그들의 신념(信念)을, 그들의 노력을 전달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