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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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책을 다시 읽게 되는 건 아무래도 운명이지 않을까 싶다. 무려 18년 전에 읽은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쳐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그 때 밀레니엄 감성으로 에미 로트너와 레오 라이케가 빚어내는 이메일 사랑을 읽었다면, 지금은 또 다른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나이가 들고 보니 사람들간의 관계는 아무래도 운명적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만남의 계기로부터 시작해서 내가 평생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이들과 관계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항상 나의 예상을 벗어나기 마련이니 말이다.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는 에미와 레오의 관계를 잘못된 이메일 수신으로부터 시작한다.

 

잡지 구독 취소를 여주인공이자 웹디자이너 에미 로트너가 엉뚱한 이메일 주소로 보내면서 판타스틱한 이메일 사랑이 시작된다. 수신자는 언리심릭학자라는 레오 라이케.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실시간도 아닌, 시간차를 두고 마치 핑퐁 게임을 하는 것처럼 진행되는 이메일 주고받기는 독자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러 일으킨다.

 

직접 대면으로 만난 사이가 아니다 보니, 어느 일방이 답신을 하지 않으면 당장에라도 끊어질 수 있는 아주 위태로운 관계였다. 물론 에미와 레오가 계속해서 이메일을 주고받으면서 그런 위기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또 관계의 묘미란 게 그런 게 아니겠는가.

 

나는 단박에 에미 로트너가 타고난 냉소주의자라는 느낌을 받았다. 생판 모르는 남자에게 1, 2번 식으로 번호를 매겨 가며 쪼아대는 품새에서 그런 점들을 느낄 수가 있었다. 레오가 구사하는 독일식 유머도 딱히 호감이 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사건들, 레오의 전여친 마를레네의 등장, 어머니의 죽음 같은 사건들이 차례로 등장하고, 갈등이 빚어지고 풀어지기를 반복하면서 에미와 레오는 가상현실적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국 둘은 손님들로 북적이는 후버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다. 하지만, 소설의 어디선가 지인들이 말해준 것처럼 에미와 레오가 현실 세계에서 만나는 순간 그들이 빚어내는 서사는 바로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레오는 식별놀이라는 미명 아래 여동생 아드리네를 동원해서 세 명의 에미 후보들을 선발하는 꼼수를 쓰기도 한다. 나는 어느 지점에서 레오를 요즘 말로 하면 영포티가 아닐까 하는 추정을 하기도 했다. 무시로 들어오는 에미의 공격을 능란하게 받아치는 재치가 마음에 들었다고나 할까.

 

와인이나 위스키에 취해 취중진담을 하는 장면에서는 그런 연애의 실수들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다를 게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전에는 보통 전화가 매개체였었는데, 이 책에서는 이메일로 진화했다는 점 정도를 변별점으로 들 수 있을까. 하긴 요즘에는 전화-이메일을 뛰어 넘은 메신저라는 아주 효과적이면서 치명적인 대체 수단이 개발되긴 했지만 말이지.

 

에미와 레오는 결국 음성메시지라는 방법을 동원해서 서로의 실체에 다가서는 방식을 택했던가. 18년 전에는 마침 오디오 레코딩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메시지를 녹음해서 파일로 만들어서 보내는 건 어떨까라는 상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것조차 유치해 보이게 되었지만. 어떻게 보면 서간체 소설로도 분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다만 그 방식이 편지가 아닌 이메일이라는 어떻게 보면 상당히 일방적인 방식이었다는 느낌이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메일 역시 즉답을 받으면 좋겠지만, 드라마 <글로리>에서 하도영이 말했다시피 무응답도 응답의 한 표현일 수 있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했다. 물론 상대방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미치고 팔딱 뛰겠지만.

 

에미와 레오 간의 소위 밀당은 에미의 남편 베른하르트가 둘 사이의 오간 이메일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그동안은 판타지에 가까웠다면, 베른하르트라는 변수이자 메기가 느닷없이 등장해, 레오에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메일로 전달하면서 조금 당혹스럽게 리얼리티의 세계로 진입한다. 그리고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고 있던 에미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아 그전에 에미가 자신의 멋쟁이 친구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 주는 장면도 있었지. 에미는 왜 자신이 직접 레오를 만나지 않고 대리인으로 미아를 선택해서 레오와의 만남을 주선했을까. 아마 에미는 레오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할 거라고 예상하고 그런 시도를 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레오는 에미가 던진 제안을 덥썩 물었고, 레오는 에미의 예상과는 달리 미아와 썸을 타기도 했다. 문제는 레오와 미아는 에미가 설정한 대로, 썸 이상의 선을 넘을 수가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을 에미가 설정한 거라면, 정말 대단한 연애의 고수가 아닐까.

 

어쨌든 그 수많은 고민과 오해의 시간을 뛰어 넘어 에미와 레오는 결국 만나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그 둘은 과연 만났을까? 적절한 순간에 소설을 끝맺는 다니엘 글라타우어 작가는 마치 후속작 <일곱번째 파도>를 예상하고 이런 결말을 예비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18년 전에도 너무 재밌게 봐서 당연히 후속작인 <일곱번째 파도>도 봤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리뷰 기록을 찾아보니 아무래도 그 책은 읽지 않은 것 같다. 그건 1년이라는 출간의 시간차 공격 때문이었을까? 이제라도 구해서 읽어봐야지 싶어졌다.

 

처음 읽을 적에는 내가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이라도 된 양 그렇게 공감하지 않았나 싶다. 에미와 레오의 감정들이 충돌할 때는 같이 공조하면서 흥분하기도 했고, 둘이 온라인 와인 데이트를 할 때는 그 정취에 취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덤덤할 따름이다. 그냥 그렇구나, 그럴 수도 있겠지라는 관조가 섞인 무심한 감정이 들 뿐. 그래도 여전히 에미와 레오의 티키타카는 재밌고 유쾌했다. 물론 한줌의 씁쓸함도 빠질 수는 없겠지. 그렇게 내 삶에 스쳐 지나간 다양한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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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 - 봉쇄된 도시의 비극 1941~44
안나 리드 지음, 육연정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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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이유를 모르게 마음이 어지러웠던 것 같다. 그래서 독서에 오롯하게 집중하기 쉽지 않았다. 어제 마친 <레닌그라드>까지 두 권을 읽은 모양이다. 새로운 책들을 많이 시작했는데 완독하지 못한 책들이 너무 많다.

 

마침 역전다방에서 독소전을 다루고 있어서 책을 읽으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역시 영상 콘텐츠 교보재의 힘이라고나 할까. 영국 출신 저널리스트이자 대학에서 러시아 역사를 전공한 애나 리드가 다룬 장장 872일에 걸친 레닌그라드 포위전의 시작부터 끝까지 그리고 포위전이 끝난 다음의 이야기까지 광범위하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모두가 알다시피 파시스트 제3제국의 독일과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이 맞붙은 독소전은 장장 5년에 걸친 어느 한쪽이 쓰러질 수밖에 없는 절멸전이었다. 히틀러는 숙적 스탈린과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되는 2차 세계대전에 앞서 상호불가침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를 속이려는 기만전인 동시에 시간벌기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이 서방의 프랑스를 제압하고 나자, 다음 상대는 바로 동방의 맹주 소련이었다.

 

히틀러는 가용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군대를 동원해서 1941622일 이른바 <바르바로사 작전>이라는 명칭으로 소련 침공에 나섰다. 서방과 소련의 정보부에서는 독일의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고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에게 계속해서 경고 메시지를 날렸지만 자기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스탈린은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외면했고, 독소전 초기 속수무책으로 독일의 전격전에 연전연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북부와 중부 그리고 남부로 나뉜 독일의 기갑부대들은 파죽지세로 광활한 소련 영토를 휩쓸었다. 스몰렌스크와 키예프에서 기록적인 승전을 구가한 독일의 다음 목표는 바로 레닌그라드와 수도 모스크바였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가 이끄는 독일 북부집단군은 겨울전쟁에서 소련에게 패해 막대한 영토를 뺏기고 복수전에 나선 핀란드군과 함께 98일 레닌그라드를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었고, 당시 250만에 달하는 소련 제2의 도시 레닌그라드에 거주하던 250만의 시민 가운데 상당수가 피난길에 나서지 못하고 도시에 갇히고 말았다. 비극의 시작은 장기간의 포위전에 대비하지 못한 소련 정부의 패착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레닌그라드 포위전에 따른 전투 경과에 보다 관심이 있었지만, 저자인 애나 리드는 독일군의 가공할 공격과 포위전을 이겨낸 레닌그라드 도시와 시민들의 영웅적 서사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나 싶다.

 

도시가 포위되기 전에 에르미타주 박물관에 소장된 진귀한 소장품들부터 소개하기 시작했다고 했던가. 만약 그러지 않았다면 인류 역사의 귀중한 유물들이 독일군의 포격과 폭격으로 모두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물론 상상을 초월하는 기아와 추위 때문에 전몰한 수많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의 생명들과 비교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독소전 개전 다음해인 1942년 라도가 호수를 통한 아이스 로드로 소련 정부에서 준비한 식량과 보급품들이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전달되기 전까지 포위된 시민들이 당한 고초는 정말 상상을 초월한다. 소련 정부에서는 외부로 진실이 새어나가는 걸 막기 위해 극구 노력했지만, 카니발리즘을 비롯해서 레닌그라드에 갇힌 시민들은 단 한 조각의 빵을 얻기 위해 죽은 사람에게 배급된 식량 배급 카드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 유명을 달리한 가족들과 한 공간에서 그 혹독한 겨울을 보내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보통의 시민들은 절대적 식량 부족으로 매일 같이 죽어 나갔지만, 부정부패를 일삼는 당간부들은 상대적으로 호의호식하면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독일군의 관심이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 공략으로 이전되면서 레닌그라드는 공격을 통한 함락보다 포위전으로 도시를 말려 죽이겠다는 전략으로 전환되었다. 어떤 면에서 레닌그라드는 수도 모스크바를 대신한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소련군 지도부는 모스크바를 거의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독일군으로부터 사수하는데 성공했고, 레닌그라드 역시 극한의 상황 속에서도 독일에 대한 철저한 항전 의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당시 레닌그라드의 상황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올가 베르그골츠로 대변되는 문인들의 활약도 간과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소련 당국은 전쟁에서 선전전의 효능성을 일찍이 파악하고,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시민들의 저항 의식을 고취시키는데 전력을 다했다. 음악계에서는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레닌그라드를 위한 교향곡 7번이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했다. 포위된 도시 레닌그라드에 남아 소방관 역할을 했던 쇼스타코비치의 이미지는 선전에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이렇게 소련은 엄격한 검열과 통제로 봉쇄된 도시의 비극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파시스트 독일에 맞선 영웅적 도시의 저항이라는 서사에 방점을 찍었다.

 

레닌그라드의 포위를 풀기 위해 소련군은 많은 병력을 동원해서 작전에 나섰지만, 그때마다 독일군의 맹반격을 받아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동부전선에서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전투로 전세가 바뀐 1944127일이 되어서야 봉쇄를 풀 수가 있었다.

 

독소전은 소련의 승리로 끝났지만, 무능한 지도자의 오판과 일선 지휘관들의 무모한 보병돌격전으로 수많은 인명이 희생되었다. 복기해 보면 전쟁 자체부터 문제였고, 불필요한 소모와 인명 피해를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레닌그라드 포위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제공한다. 혹독한 시련 뒤에도 여전히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저자 애나 리드는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다시 중동에서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현재 상황이 85년 전 봉쇄된 도시의 자화상을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더 늦기 전에 대화와 타협 그리고 상호간의 양보로 긴장을 풀고, 갈등 상황을 조정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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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한중일 세계사 20 - 1910 망국 본격 한중일 세계사 20
굽시니스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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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년이라는 대장정 끝에 결국 굽시니스트 작가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가 작년 여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난 그리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지난 다음에 마지막 <망국>편을 만날 수가 있었다.

 

190481일에 시작된 일본군의 뤼순 포위전은 어마어마한 사상자를 낸 다음인 190511일 마침내 러시아군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일본에서는 군신이라는 노기 마레스케의 3군은 별다른 전략 없이 오로지 물량공세를 펼쳐 결국 승리를 얻었지만, 너무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전에 러시아 내부에서는 극동에서 그동안 동양의 약소국이라 깔봐 오던 일본군에 연전연패한 차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염증으로 민중의 소요가 발생했다. 1905122<피의 일요일>로 알려지게 된 사건으로 러시아 제국은 외부의 적 뿐 아니라 내부의 적들과도 싸워야 했다. 주러시아 일본 공사관의 주재 무관 아카시 모토시로라는 문제적 인물이 주도한 공작이 과연 1905년 러시아 혁명에 일조했을까라는 지적에 대해 좀 더 알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무대는 나폴레옹 전쟁 이래 최대의 결전이라는 봉천 회전이었다. 일본군은 거의 20만에 달하는 육군을 동원해서 봉천에 포진한 러시아군 주력을 일거에 격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다. 쿠로팟킨이 지휘하는 극동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성동격서식 기동에 농락당해 우왕좌왕하는 등 초전부터 도저히 이길 수가 없는 그런 전투였다. 러시아는 한수 아래로 평가한 일본군에 연전연패하면서 극동 러시아군의 사기는 추락했고, 내부 혁명으로 장기전에 대한 피로도가 쌓이고 있었다.

 

일본 역시 러일전쟁 개전 1년이 지나면서 전쟁물자 생산에 한계점에 달해 있었다. 1903년 일본 국가의 총예산이 26천만 엔이었다. 군부는 총 전비로 44천만 엔을 예상했지만, 최종적으로 19억의 예산이 소요되었다. 사상자 역시 10만에 육박하고 있었다. 이 상태도 일본이 과연을 전쟁 수행을 계속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어쨌든 국운을 건 봉천회전에서 일본은 러시아군을 패퇴시키고 다시 한 번 승리를 거둘 수가 있었다. 물론 상처 뿐인 승리긴 했지만. 전세가 기울자, 러시아군 수뇌는 총퇴각을 선언하고 무의미한 희생을 피하고 후방의 톄링을 지나 시핑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아마 일본군 역시 공세종말점에 도달하지 않았나 싶다.

 

러일전쟁의 최종 무대는 역시 동해였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의 태평양함대는 마다가스카르에서 추가 증원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는 동안, 뤼순 전투에서 만신창이가 된 일본 연합함대가 본국으로 돌아가 재정비할 수 있는 시간을 그냥 넘겨주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 허송세월할 게 아니라 바로 출격에 나서서 일본 연합함대와 대결을 벌이던가 아니면 블라디보스톡으로 가서 훗날을 도모해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진해에서 출격한 연합함대는 1905527일 쓰시마 근방에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는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요격하기 시작했다. 38척으로 구성된 러시아 함대가 일본군의 공격으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으면서 러일전쟁은 일본의 완성으로 끝났다.

 

일본의 조야는 청일전쟁처럼 전후 러시아로부터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영토 할양을 기대했다. 하지만 미국의 중재로 1905829일 포츠머스에서 맺어진 조약에서 일본은 남만주 철도에 대한 이권, 조선의 일본 세력권 인정, 뤼순-다롄 할양과 남부 사할린으로 만족해야 한다. 무려 4년치 국가예산과 23만명에 달하는 전사상자에도 불구하고 외교전의 실패로 일본은 청일전쟁처럼 국가 재건을 위한 비용 마련에는 실패했다. 그것은 아마 미국을 필두로 한 서구 세력들이 극동아시아에서 일본이 너무 과하게 성장하는 것에 대해 이미 견제가 시작된 게 아닌가 싶다.

 

본격적인 대한제국의 망국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기에 앞서 어쩌면 고리타분하고 어려운 근현대사에 “Why so serious?" 같은 걸그룹 노래 제목까지 곁들이고 언 듯 보면 약간 유치해 보이는 라임까지 집어넣으면서 헛웃음을 유발하는 굽시니스트 작가의 창작력에 박수를 보낸다. 짝짝짝. 역사가 반드시 엄숙하고 진지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내가 예전에 <국사>를 배우던 시절에 이렇게 재밌는 교보재가 있었다면, 어렵고 외울 거 천지였던 한국의 근현대사에 좀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국의 망테크 과정은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고통의 연장선이었다. 동학과 독립협회의 잔당 세력을 규합해서 만들어진 일진회의 비상으로부터 시작해서, 훗날 공화정과 독립운동 세력의 핵심이 되는 상동교회 출신들을 중심으로 했던 이른바 상동파’, 친일 관료들에게 포위된 무능력의 끝판왕 고종은 이렇다 할 저항 없이 자주 국가의 외교권을 넘겨주는 을사늑약(2차 한일협약)을 체결하면서 한국은 결국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해 버렸다.

 

어쩌면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순간, 망국의 숙명은 결정이 난 게 아니었을까. 그후에도 고종은 1907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과 이준 그리고 이위종을 파견해서 만국에 일본이 한국에서 벌이고 있는 만행을 고발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제국주의 열강들에게 외교권을 상실한 한국의 호소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일제는 대한제국에 대한 압박의 강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고종 퇴위와 이어지는 정미칠조약으로 한국의 군대가 해산되고 내정권마저 상실해 버렸다. 해산된 군대가 기존의 의병 조직에 가담하면서 의병들의 무장투쟁의 차원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19081월 서울 진격에 나섰지만, 일제는 정규군까지 동원해서 전국의 의병활동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일본군은 특히 4천명에 달하는 조선인 헌병 보조원들을 동원해서 의병 색출에 나섰다. 그 결과 1908년부터 1909년까지 수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장인환-전명운 의사들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을 필두로 한 수많은 의거들과 저항들이 있었지만, 망국의 수레바퀴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본격 한중일 세계사>는 배드엔딩으로 끝나고 말았다.

 

지난 8년 동안, 굽시니스트 선생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를 통해 미처 모르고 있던 역사의 많은 부분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최근 읽고 있는 <태평천국>에 대해서도 그가 이미 다룬 부분들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20권이나 되는 대작을 마침내 완성한 굽시니스트 작가에게 경의를. 리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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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라이프 6 어쿠스틱 라이프 6
난다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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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가져다 읽다가 말았다. 왜 마저 읽지 않았을까? 이유는 모르겠다. 뭐 그럴 때도 있는 법이지. 오늘은 아예 작정하고 있으니 금방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아 지금 막 도서관에 상호대차를 신청한 굽시니스트 양반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마지막 편이 도착했다고 한다. 어서 그것부터 픽업해야 하는데 말이지.

 

이 책은 무려 13년 전에 나온 책이다. 그 때는 가요대전에 소녀시대가 나와서 <더 보이즈>를 부르던 시절이었나 보다. 아마 제식칼이도 한 팀에 있었겠지. 몇 권까지 나왔나 싶어서 찾아보니 <어쿠스틱라이프>는 모두 14권까지 나온 모양이다. 대단하구나 그래.

 

질풍노도의 삼십대를 건너고 있던 화자 난다 작가와 그녀의 동갑내기 신랑 한군이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은 무슨 대단한 이야기의 주인공이 아니다. 그냥 우리네처럼 보통의 평범한 일상을 살아나가는 이들이다. 그래서 좀 친근하게 다가왔다. 이런 내적 친밀감은 혹시 나만 느끼는 건가 싶기도 하다.

 

역시 노동자 신분이라 그런지 <일의 기쁨과 슬픔>이 가장 마음에 와 닿더라. 누구나 다 일은 하기 싫다. 하지만 일상을 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다. 우리는 노동시장에 참여해서 나의 노동을 팔고, 그 댓가로 돈을 받아서 먹을 것도 사고 주거 문제도 해결하고 또 약간의 유흥도 즐기는 그런 생활을 한다는 거지.

 

그러니까 우리가 노동하는 이유는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라는 말이지.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그에 부수적으로 따라 붙은 불안한 미래에 대한 걱정 근심으로부터 정녕 우리는 자유로워질 수는 없는 걸까. 뭐 그렇다고. 마감의 압박에 시달리는 난다 작가의 모습이 왜 그렇게 애처로워 보이는지. 참 어그 부츠 값도 내야 한다고 했던가. 한겨울에 쓰레빠를 직직 끌고 다닐 수는 없다고 신랑 한군에게 사자후를 토하는 작가의 모습이 너무 리얼리스틱하게 다가오더라. 뭐 그렇게 사는 거지 다들.

 

그냥 나는 난다 작가가 그렇게 일상에서 픽업하는 소소하고 작은 이야기들이 마음에 들더라. 거창하게 무슨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대한 담론보다는 이런 사소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서사 말이지. 캐롤 추천에 등장한 마이클 부블레가 정말 느끼하다는 거에는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너끼남 마이클 부블레가 한껏 힘주어 느끼하게 부른 지금은 고인이 된 조지 마이클의 <Kissing a Fool> 커버를 아주 좋아한다네. "You are far~"로 시작하는 그 노래는 정말 크하.

 

아무래도 동갑내기 부부다 보니 서로에게 날리는 독기어린 로맨스도 재미지다구. 난다 작가의 시어머니가 단 하나 며느리에게 부탁한 것이 남편 한군에게 채소를 먹이라는 지상명령이었다고 했던가. 짬뽕에 들어간 죽순을 오징어라고 속이고 먹이려는 난다 작가의 사투나 해물 밑장에 채소를 깔았지만, 교묘하게 해물만 샤삭 골라 먹는 한군의 아웅다웅 독기어린 로맨스라니 이 어찌 재밌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어지러운 집안 청소를 위해 S.O.S.를 쳐서 등장한 청소요정님의 에피는 또 어떤가. 과연 청소요정님은 프로다웠다. 난다 작가가 일주일 걸릴 일을 단 4시간에 아주 효율적으로 처리해 주시는 신공을 보여주셨단 말이지. 나는 겁시 나서 도저히 뚜겅을 열 생각도 하지 못하는 2주된 된장찌개를 거침없이 오픈하는 박력에 그만... 하지만 그 위대하신 청소요정님도 그건 버거웠던 모양이지.

 

청소요정님은 냉장고에서 하루가 다르게 미라가 되어 가는 채소들도 과감하게 내 대신해서 정리해 주신다. 게다가 내가 돈 주고 산 것들이라 버리려면 반드시 동반하게 되는 죄책감으로부터도 거뜬하게 해방시켜 주셨다네. 이 어찌 고맙지 아니한가. 물론 한군은 자신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들을 비용을 주고 대리하게 만드는 사치라고 비난하지만, 앞으로 집안일을 분담하자는 난다 씨의 제안에 결국 자신의 용돈을 허물어 청소요정님을 다시 부르게 되었다나 어쨌다나. 아 참, 음식물 쓰레기의 냄새 방지를 위해 비닐봉지에 잘 싸서 냉장고에 보관하는 방식은, 회사에서 동료 여직원분이 하는 걸 보고 좀 충격을 먹었었는데 그런 방식을 애용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난 오늘 아침에도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왔다네.

 

이직이 잦은 한군의 오피스 허즈번드에게 경계심을 품는 장면도 재밌었다. 이미 한군은 게임회사 개발자인 것 같은데, 기여워 같은 타이틀을 대신 셔틀해서 사다 주고 발컨이나 트롤링 같은 그 쪽 분야 용어를 설명해주는 장면도 재밌었다. 엔딩의 뷰티 부분은 내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패스.

 

엔딩에 보니 연재하던 중에 아기도 생겼다고 하는데, 혹시 다른 편에는 육아 로맨스도 추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재밌고 즐겁게 봤다. 그러면 되는 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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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멤논의 딸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우종길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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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에서 두 권의 이스마일 카다레 작가의 작품을 꺼내든다. 하나는 <꿈의 궁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아가멤논의 딸>이란 책이다. 언제 샀는지 검색해 보니 무려 14년 전에 산 책이다. 그리고 그 동안 난 이 책들을 읽지 않았다. 결심하고 <아가멤논의 딸>을 읽기 시작한다. 어제 하루 동안에 다 읽을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 정말 작정하고 책읽던 시절이 잠깐 주마등처럼 그렇게 스치고 지나갔다.

 

서론에 프랑스 편집자가 암담한 알바니아의 현실을 다룬 카다레의 <아가멤논의 딸>이 어떻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는지에 대한 소개가 등장한다. 희대의 독재자 엔베르 호자가 통치하고 있단 알바니아는 1980년대 당시 사상과 문화 그리고 사회 전반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다. 카다레의 사회비판 소설이었던 <아가멤논의 딸> 역시 국경을 넘을 수가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서방으로 넘어가 금고에 잠자고 있던 이 책이 독재자가 죽고, 철의 장막이 걷혀진 뒤 발표가 되었나 보다. 이런 우여곡절을 품고 있는 책이라니, 놀랍군 그래.

 

소설에서는 지도자라고만 나오지만, 엔베르 호자 시대 어느 노동절 퍼레이드에 초대받은 저널리스트 화자의 시선에서 이야기는 진행된다. 공산주의 국가에서 노동절 퍼레이드는 대단한 행사가 아닐 수 없다. 이 행사에 주인공은 애인 수잔나의 빽으로 초대장을 한 장 얻게 된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시스템에서 초대장은 특권의식을 상징하는 하나의 알레고리로 작동한다. 카다레는 소설의 초반부터 대놓고 당시 알바니아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가득 담긴 묵직한 어퍼컷을 날린다.

 

참고로 수잔나는 당 고위 간부의 딸이다. 소설 초반에 트로이 전쟁에 나서는 그리스 원정군의 총사령관 미케네의 왕 아가멤논의 딸 이피게네이아 공주가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장면이 등장한다. 트로이 원정대의 앞길을 가로 막고 나선 아르테미스 여신의 분노를 잠재울 희생양으로 이피게네이아가 선택된 것이다.

 

수잔나의 아버지는 어쩌면 지도자의 뒤를 이어 후계자가 될지도 모를 자신의 영달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딸 수잔나를 희생양으로 삼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수잔나의 희생을 요구한다. 가장 먼저 수잔나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짝인 주인공과의 이별을 종용한다.

 

텔레비전 방송국에 소속된 저널리스트인 화자는 자유주의적 견해를 지닌 양심적 지식인이다. 그런 화자의 태도는 친척 아저씨와 서로 다른 견해 차이로 앙숙관계를 형성한다. 요즘으로 치면 소위 세대간의 치열한 갈등의 전주곡이라고나 할까. 엔베르 호자가 주도하는 고립주의, 무신론 세계관으로 무장한 알바니아는 유럽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전혀 유럽답지 않은 시대에 뒤쳐진 국가의 전형으로 등장한다. 이웃 국가들은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는데 국가의 총력을 다하고 있지만, 알바니아에서는 먹고사니즘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은 철지난 이데올로기 투쟁이 만연한 모양이다.

 

화자의 과거 전력도 문제다. 철저한 감시 사회였던 알바니아에서 동료에 대한 밀고와 배신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나의 생존과 평온한 일상을 위해서라면 누구도 무고할 수 있다고나 할까. 화자를 비롯한 3명이 취조를 당했고, 나머지 두 명은 먼 곳으로 좌천되었다고 했던가.

 

도중에 어디선가 등장하는 <대머리의 추락>이라는 제목의 우화는 당시 암울했던 알바니아 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풍자에 다름이 아니다. 깊은 어둠 속에 추락한 대머리 남자는 독수리에 얹혀 비상하게 된다. 단 조건이 하나 있으니, 비행하는 동안 내내 날고기를 독수리에게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머리 남자는 독수리와의 비행을 위해 많은 날고기를 준비해서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다. 문제는 날고기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결국 자신의 몸에서 살점을 떼어서 독수리에게 주기 시작한다. 나중에 그의 해골만 남았더라는 이야기. 전체주의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영혼과 육신마저 내줘야 한다는 우화는 마치 그 시대를 살아낸 이들에 대한 르포르타주가 아닌가 말이다.

 

엔베르 호자와 비슷한 결의 독재자 이오시프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 주가슈빌리도 이피게네이아, 수잔나와 같은 희생의 제단에 배치된다. 독소전 초기 스몰렌스크 전투에서 독일군의 포로가 된 야코프는 19434월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 셋의 공통점은 모두 뚜렷한 목적을 지닌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점이다. 카다레 작가는 알바니아 사람들 모두가 독재자와 그 일당들이 선전하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였다는 말을 빗대어 말하고 싶지 않았나 싶다.

 

다시 한 번 이스마일 카다레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자기희생을 통한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지에 대해 묻게 되었다. 날고기를 공급해야 굴러가는 시스템이 가진 태생적 한계와 자유를 향한 인간의 갈급함의 단면들을 <아가멤논의 딸>을 통해 엿볼 수가 있었다. 이런 사유 또한 부질없는 것들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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