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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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퉁 작가의 <화씨 비가>를 다 읽고 난 느낌은 먹먹하다였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 시달리는 화씨 가족사는 제목 그대로 비극 그 자체다. 중국의 역사를 20년 정도 뒤로 돌렸다는 문화혁명기를 지나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이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를 읽다 보니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왜 어머니 위펑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왜 주인공 화진더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화씨 일가를 맴도는 걸까? 왜 화씨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머니 위펑황이 죽고, 아버지 화진더우 마저 방화죄로 감옥에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니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 아닐 수 없다.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따서 이름 지은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철부지 막내아들 두후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 고모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최고라는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와 고모를 통해 적확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아들 두후에게는 잘 먹이려는 것이 어머니이자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고모의 마음이었을까. 손위 누이들마저 그렇게 두후 녀석을 떠받치다 보니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상한 친구를 만나 게이의 길을 걷질 않나, 두후란 놈은 부모가 속 터져 죽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도는 원혼 화진더우는 지상에서 돌아가는 꼴이 하나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윗물 때문에 아랫물이 깨끗하겠냐고 자조한다.

화씨 일가의 비극은 아버지와 어머니 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계속된다. 둘째딸 신주는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다. 큰딸 신메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불화에 고모의 말실수로 그만 신랑이 반신불수가 된다. 양아치 건달이 된 두후 놈은 매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다. 헌신과 봉사로 화씨 집안을 받쳐온 고모는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서지만, 결국 객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인생들일까. 문득 작년에 읽은 천명관 작가의 한국판 막장 드라마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진행된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해체를 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딸들은 차례로 위펑황이 죽은 연료 창고의 주임 류페이량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합리적인 사고 대신 감정적 대응으로 얻어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늘어놓는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의 대담함이 새삼 눈에 띈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쑤퉁은 화진더우를 물리적 현실세계에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관조적 자세의 서술자로만 활용한다. 하긴 귀신 화진더우가 활약을 했다면 <화씨 비가>는 판타지가 되었겠지. 소설 속에서 화씨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처연한 몸부림을 치지만, 가장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가장이 가져야 할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화진더우의 존재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위펑황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아들 두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진더우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조금이나마 품었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사실 소설 초반에 이런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고모와 신주가 낙향해서 위펑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시중절을 시도하다 봉변을 당하면서 쑤퉁 작가의 서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혁명 시기에 화진더우가 지주 계급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의 순환이 밝혀지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짝으로 나온 <성북지대>가 불량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화씨 비가>는 가족의 구성과 해체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희생과 헌신이 이제는 미덕이 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차마 자식들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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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에서 온 아이 펭귄클래식 21
오스카 와일드 지음, 김전유경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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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책을 많이 읽었다. 그 시절에는 주로 동화를 즐겨 읽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기억나는 작품으로는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소공자> 그리고 <소공녀>다. 지금처럼 책을 읽고 나서 리뷰를 쓰지 않아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때 조금이라도 기록을 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든다. 왜 뜬금없이 오래전 독서 타령을 하냐 하면, 지금 막 읽은 책이 바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 모음집이기 때문이다.
 
당대에 소설가보다는 극작가로 필명을 날렸던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 <별에서 온 아이>를 읽었다. 여기저기서 오스카 와일드의 이름을 듣고, 심지어 그가 조연으로 등장하는 미스터리물도 읽었지만 정작 오스카 와일드가 직접 쓴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아, 그건 아니다. 모두 9편으로 구성된 <별에서 온 아이> 첫 번째로 등장하는 <행복한 왕자>를 읽었었구나 다만 그게 그의 작품인 줄 몰랐을 뿐.
 
아일랜드 출신으로 영국 옥스퍼드에서 수학한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문학 세계보다, 동성애와 송사로 관련된 스캔들로 더 유명한 셀러브리티였다. 극작가로서의 짧은 성공, 친구 아니면 적이라는 관계 공식,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었던 송사로 2년간의 강제 노동형을 선고받고 육신이 만신창이가 된 상황에서 외롭게 세상을 뜬 외로운 영혼이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은 죽고 난지 한 세기가 지나서야 조금씩 인정받고, 재평가가 이루어졌다. 하긴 거의 유명한 예술가들의 삶이 그렇지 않았던가. 고흐가 어디 살아서 자신의 그림 값을 제대로 받았던가 말이다.
 
<별에서 온 아이>는 19세기 말에 출간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와 <석류나무 집> 두 편의 단편모음집을 한데 묶은 책이다. 잊고 있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운 <행복한 왕자>가 일번 타자로 등장한다. 고백하건대 <행복한 왕자>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이란 걸 처음 알게 됐다. 스토리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작품인데 말이다. 초반에 인상적이었던 건, 세상에 ‘행복한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과 아이들의 꿈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제도 교육을 담당한 수학 교사의 말이었다. 놀랍군!
 
철새인 제비인 이집트 행을 꿈꾸지만, 번번이 불쌍한 이웃을 돕자는 행복한 왕자의 말에 주저앉는다. 그래서 왕자가 지닌 루비, 사파이어 그리고 금박을 드레스 가공업자, 작가지망생, 성냥팔이 소녀 그리고 굶주린 아이들에게 물어다 주는 메신저 역할을 맡는다.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나눠주자 행복한 왕자는 졸지에 “불쌍한 왕자”로 전락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가진 것의 나눔을 통해 그 누구보다 행복하게 된 왕자를 불쌍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물질만능주의가 판을 치던 19세기 말, 빅토리아 시대에 대한 작가의 적나라한 풍자다.
 
이런 왕자를 보다 못 한 제비는 자기가 이집트에 가서 보석을 가져오겠다고 제안한다. 아, 원작에 이런 제안이 있었구나. 나름 현실적인 이야기인데 왕자는 당장 불우한 이웃을 돕느라 제비의 제안을 가볍게 물리친다. 결말에서는 다분히 기독교적 색채를 보이면서도, 내세의 약속보다는 현세를 중시하는 작가의 생각이 반영된 느낌이 들었다.
 
<자기만 아는 거인>과 <별에서 온 아이>는 인류 구원자로 이 세상에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를 떠올리게 한다. 아름다운 정원을 홀로 독차지하려는 이기적인 거인은 자신의 정원에서 마음껏 아이들이 뛰노는 것이 아름다운 정원의 비밀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그런 깨달음은 정원을 둘러싼 담장을 허물어 버리고 평안한 안식의 세계로 거인을 인도한다. 별에서 온 아이는 자신의 빼어난 외모로 자기밖에 모르는 삶을 산다. 그러다가 자신을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찾아온 거지 여인을 매몰차게 박대했다가, 나락으로 떨어진다. 자신을 구원할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우매한 인류에 대한 패러디일까. 도시의 왕이 된 별에서 온 아이가 3년 만에 세상을 떴다는 설정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삼 년과 기가 막히게 일치한다.
 
<어린 왕> 역시 이상의 두 이야기와 비슷한 궤적을 그린다. 출생의 비밀을 가진 어린 왕은 아름다움에 도취해 있다. 왕위 계승을 앞둔 어린 왕은 대관식 전날, 놀라운 세 개의 꿈을 꾼다. 자신의 대관식에 입을 옷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고생하는 직공, 왕관과 홀에 사용될 진주와 루비를 캐기 위한 흑인 노예의 희생과 죽음의 신 그리고 탐욕의 신이 다투는 장면에 어린 왕위 계승자는 그만 소스라치게 잠에서 깬다. 그리고 염소지기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관식에 나서겠다는 어린 왕의 말에 주위 신하들은 한목소리로 반대한다. 자신들의 이해를 위해 권력자는 허영과 부도덕함이 필수라는 말로 그를 설득한다. 나사렛의 목수였던 예수 그리스도의 문학적 현현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오스카 와일드는 정곡을 찌른다.
 
<어부와 그의 영혼>에서도 인어와의 사랑을 위해 자신의 영혼마저도 포기한 어부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어부에게서 억지로 분리된 영혼은 광야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유혹한 사탄처럼 지혜와 재물 그리고 소녀들의 흰 발로 유혹하지만, 어부의 사랑에 대한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영혼의 끊임없는 유혹에 흔들린 어부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나게 되지만, 방황하던 영혼이 비로소 안식을 찾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별에서 온 아이>에 실린 9개의 단편은 서문을 쓴 이언 스몰 교수가 말한 사랑과 자제심이라는 공통된 주제로 유기적인 연결체를 형성한다. 동성애라는 19세기 영국 형법으로 처벌된 금단의 사랑에까지 도달했던 오스카 와일드는 ‘꿈꾸는 것이 금지’된 어른을 위한 동화에서 기독교 사상의 바탕을 이루는 사랑에 대해 설교한다. 이런 걸 사랑의 역설[irony]이라고 부르는 걸까? 신의 사랑과 인간의 세속적 사랑이 교차하는 중간계가 조금은 혼란스럽다.
 
한편, 사랑에 버금가는 미덕으로 자제심을 상징하는 중용(中庸)을 오스카 와일드는 강조한다. 사랑과 우정도 지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는 고래의 진리가 반복된다. <공주의 생일>에서 자신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인지하지 못한 난쟁이의 나르시서스 같은 모습은 파멸의 전주곡이다. 예술의 이기적 속성을 예리하게 짚어낸 <나이팅게일과 장미꽃>에서도 능력 이상의 것을 대가로 요구하는 사랑의 속성을 파헤친다.
 
오스카 와일드와의 첫 만남은 쉽고 평안했다. 지금으로부터 또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다시 만나게 될 <행복한 왕자>는 또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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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지대
쑤퉁 지음, 송하진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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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장 최근에 읽은 쑤퉁 작가의 책은 <측천무후>였다.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했던 여황제의 삶을 조명했던 쑤퉁 작가는 ‘성북지대’라는 가상의 공간에 네 명의 발칙한 청소년 성장기를 욱여넣는다.

우선 쑤퉁 작가는 성북지대(城北地帶) 참죽나무길이라는 공간에 자신의 문학적 페르소나를 투영한다. 장소가 준비되었으니 그 공간을 채울 캐릭터를 만들 차례다. 사사건건 문제를 일으켜 학교에서 퇴출당한 네 명이 바로 그들이다. 화냥 진란과 바람이 나서 그녀의 고향 칭다오로 줄행랑을 치는 선쉬더, 철사꼬챙이로 동네 개를 날름해 버리고 모른척하는 쩔룩이, 이웃집 소녀를 겁탈하고 ‘푸른잔디길’에서 9년을 복역하게 된 홍치 그리고 언젠가 영웅적 삶을 살겠노라고 호언장담하다가 저탄장에서 비운의 삶을 마친 리다성에 이르기까지 ‘뭐 이런 녀석들이 다 있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비범한 캐릭터의 향연이 펼쳐진다.

소설 소재로 써먹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지만, 참죽나무길에 사는 이들의 운명은 하나같이 가혹하기만 하다. 우리네 소시민들의 특별할 것이 없는 일상 가운데, 아이들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장소를 순례하고 어른들은 이웃에서 벌어지는 아귀다툼에 눈과 귀를 집중한다. 도무지 희망이나 탈출구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건, 사고는 끊이지 않는다. 이곳이 사회주의 이상국가 중국이란 말인가? 아버지와 아들이 화냥 진란과 관계하고, 십수 년째 홀로된 아버지를 부양한 딸의 귀가가 늦었다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가 봉변을 당하질 않나, 과부가 된 딸은 뱀장수 아버지를 매몰차게 내쫓아 결국 한겨울에 동사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다. 요즘 한창 인기 있는 막장드라마 뺨치는 수준의 자극적인 이야기가 <성북지대>를 수놓는다.

이런 상황에서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자라는 것이 더 이상한 게 아닐까? 학교 교육은 오수가 터져 흐르는 참죽나무길의 진창처럼 엉망이고, 교사들은 학생들을 선도할 의욕마저 상실했다. 교내 폭력이 난무하는 가운데, 말썽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선 총기와 실탄이 필요하다고 교사들은 자조 섞인 농담을 날린다. 이렇게 쑤퉁 작가는 전체주의 국가와 당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 대신 인민들의 치부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욕망에 우선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찌질한 이 네 청춘이 그렇다고 나중에 극적인 반전을 도모하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불행의 선순환은 억울하게 죽은 메이치의 유령처럼 참죽나무길을 휩쓴다.

쉬더, 쩔룩이, 홍치 그리고 다성 이 네 악당의 우정의 깊이는 얇은 종잇장보다도 가볍다. 이들에게 진지함이란 다른 별나라의 이야기고 오로지 말초적인 즐거움만이 지고의 선이다. 신세를 망치고, 목숨을 잃는 순간까지도 도무지 뉘우치는 빛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보이질 않는다. 도대체 얼마만큼 더 망가져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까? 하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기회마저 사라져 버렸으니.

중국어를 전혀 몰라 과연 어떻게 번역이 되었는지 가늠할 길이 없지만, 표의문자인 한자를 번역하는 건 우리말과 같은 표음문자인 영어와는 또 다른 차원의 상상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몹쓸 공상을 해봤다. 읽으면서는 재밌고 즐거웠지만, 다 읽고 나서는 희극보다는 비극에 가까운 결말에 마음이 좀 허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중국 소설치고는 너무 한자가 없어서 오히려 더 작품을 이해하는데 어렵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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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욘더 - Good-bye Yonder, 제4회 대한민국 뉴웨이브 문학상 수상작
김장환 지음 / 김영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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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랍다. 연휴의 끄트머리에 그저 잠들기 전에 몇 장 읽겠다고 펼쳐든 김장환 작가의 <굿바이, 욘더>는 이백 몇 장을 읽고서야 간신히 잠들 수가 있었다. 도대체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게 하는 이 마력적인 흡입력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기계문명이 확실하게 더 발전할 미래가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쩌면 디스토피아일지도 모르겠다는 막연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을 통해 거의 확신하는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

소설은 독특한 암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나 결국 일찌감치 세상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졌던 아내 차이후를 떠나보낸 전문 인터뷰어 김홀의 상념으로 시작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대개의 사람처럼 김홀은 상실감에 근 2년간 폐인생활을 한다. 사이버네틱 스페이스가 발전해서 기계적 인터페이스로 소통하고, 사이보그와 안드로이드가 넘실거리지만 죽음과 그에 따른 상실이라는 원시시대 이래 인류에게 주어진 형벌은(아니 어쩌면 축복이던가) 오롯하게 개인이 극복해야 하는 과제로 다가온다.

 그러던 어느 날 주인공 김홀은 돈오하고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한다. 반미래학을 주장하는 장진호 박사와 인터뷰하면서. 원시시대의 신화는 변이의 과정을 통해 미래사회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한다. 그만큼 불멸이라는 주제는 매혹적이니까 말이다. 그러다 죽은 아내로부터 메일을 하나 받게 된다. 두 사건의 순서가 바뀌었나? 그런 건 아무래도 괜찮다. 아니 어떻게 죽은 아내가 나한테 메일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기술이 놀랍게 발전된 사회의 스팸쯤으로 생각하려던 김홀은 아내가 죽기 전에 자신의 기억들을 메모리칩에 이식해서, 바이앤바이(by and by)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정도로는 아직 약하다고? 이제 겨우 시작이다 기대할지라.

상상을 초월하는 브레인 다운로드라는 신기술로 망자의 기억이 살아 있는 공간. 단순하게 기억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육신의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그리고 새로운 “욘더”라는 세계가 탄생한다. 선사시대 이래 인간이 꿈꿔온 영생불멸이 상상을 무대로 한 유비쿼터스 시대에 마침내 이루어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 보도록 하자. 인간은 육신이라는 물적 토대 대신 불멸을 선택했는데 과연 행복할까? 그렇지 않다. 행복은 불안이라는 상대적 요소가 있어야 존재 가능하다는 것이다.

욘더에서 아내 이후와 존재를 몰랐던 자신의 아이 지효와 대면한 김홀은 감미로운 허구에 마냥 행복해한다. 하지만, 과연 행복할까? 사시사철 좋은 날씨에, 레스토랑에 가더라도 5분에서 10분 이상 기다리지 않고 끔찍한 교통 트래픽이 없는 그런 지상천국 같은 패러다이스가 왜 싫단 말인가? 바로 이 지점에서 김장환 작가는 불완전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의 희미한 실체를 슬쩍 드러내 보인다. 어디에서도, 심지어 천국에서도 만족할 수 없었노라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설정에 저 멀리 도피안의 세계에 다다른 듯한 느낌이다.

<굿바이, 욘더>를 어떤 장르로 분류해야 할까? SF 공상과학? 판타지? 아니면 치밀한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스릴러라고 해야 할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왜 인간은 하이테크 시대를 살면서도 꾸준하게 로우테크 기술들을 저버리지 못하고 있나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디지털카메라의 편리함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아날로그 필름 카메라로 빛을 담으려는 이들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스마트폰이라는 이름으로 진화한 휴대전화가 마냥 편리하기만 한 걸까? 아날로그 시대에도 휴대전화 없이도 잘만 만나고, 연애하고 소통하지 않았던가. 문명의 이기라는 편리함으로 감춰진 채, 유비쿼터스 공간에 점점 종속되어가는 현실은 굳이 외면하려고 하는 우리의 모습에 씁쓸해졌다.

중반의 놀라운 동력에 비해 소설의 결말은 아쉬웠다. 그간의 내공을 미루어 보아 좀 더 화끈한 엔딩을 기대했던 걸까? 아니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처럼 후속편을 예비한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까지 도달했다. 너무 영화를 자주 본 모양이다, 정신 차리자! 책의 끝자락에 생소한 여러 용어를 아주 친절하게 나열해 줬지만 정작 내가 궁금해하던 “유비쿼터스”는 빠져 있어서 실망했다. 무식한 독자는 천상 인터넷으로 유비쿼터스에 대한 질문을 던져야했다.

불쑥 소설에 등장하는 욘더(yonder)는 천국(heaven)이 아니라 불안한 현대인의 정신적 피난처(haven)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세월 번역을 해온 작가의 미래 디스토피아에 대한 깊은 철학적 사유가 담긴 SF 데뷔작은 세이렌의 유혹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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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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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들어 세 번째로 미국의 살아 있는 양심이라 불리는 하워드 진의 책과 만날 수가 있었다. 보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의 <미국 민중사>와 마이크 코노패키 그리고 폴 불의 공동저작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만화란 매체는 글보다 훨씬 더 전부터 그림이란 형식으로 존재해 왔고, 그 파급력 또한 어떤 면에서 볼 때 글보다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이 책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가 증명해 주고 있다.

폴 불이 책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하워드 진의 명저 <미국 민중사>에서 많은 부분을 발췌해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형태를 집중적으로 다뤘다. 1890년 운디드 니(Wounded Knee)에서 수우족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학살로 미국의 대륙지배를 공고히 만든 과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책은 시작된다. 뒤이어 남북전쟁 후, 고도의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비참한 일상과 자본가들의 착취의 현장들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바로 뒤를 이어 쿠바와 필리핀을 미국식 제국주의의 전초기지로 삼기 위한 스페인과의 전쟁이 뒤따른다. 이것은 비등하는 국내의 불만을 해외로 돌리고, 대외의 적을 공동의 적으로 삼아 애국주의를 고취하기 위한 전형적인 제국주의 전략이라는 사실을 하워드 진은 지적하고 있다. 쿠바와 필리핀 내의 미국 자산과 인명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내정에 개입한 미국은 철저하게 각국의 진보적 자주독립투쟁을 분쇄하고, 거대기업과 자본가들의 이윤을 보호하려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숨기지 않는다.

전 세계적 자본주의 제국들의 충돌로 야기된 소위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으로 불린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대 군수산업체들이 환영할 호재를 맞아 적극적으로 미국은 개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국내적으로 대대적인 양심적 징병거부 사태에 직면하기도 한다.

제2차 세계대전의 과정 속에서는 뉴욕 출신의 가난한 가정 출신의 저자인 하워드 진이 어떻게 반전과 미국의 제국주의적 본질에 대해 눈을 뜨게 되는가에 대한 과정이 자세히 소개된다. 세계대전 당시 폭격수로 참전했던 그는 전쟁의 참혹성과 비인간적인 속성에 회의를 느끼게 된다. 이런 사적인 경험과 성숙의 과정이 훗날 대학교수로서 흑인 민권운동과 베트남전쟁에 대한 반전시위에 나서게 되는 근원이 되었다.

미국이 개국 이래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전의 전개 과정은 2차 세계대전 후 세계의 패권국가로서의 미국의 명성을 실추시킨 최악의 사건이었다. 게다가 빈민들과 흑인들의 처우개선에 사용되어졌어야 할 국가의 모든 재원과 인력을 명분 없는 소모적인 전쟁에서 소진시키면서 국가적 동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하워드 진의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그들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떨쳐낸 것은 아니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닉슨 사임한 후, 포드-카터 그리고 레이건과 부시 행정부로 계승되는 동안에도 미국은 중앙아메리카의 니카라과에서 산디니스타 정권에 반대하는 콘트라 반군을 의회의 동의 없이 불법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냉전 시기 CIA(미 중앙정보부) 공작정치의 최대 성과라고 할 수 있는 이란의 모사데그 정권의 전복과 1979년 이슬람원리주의 혁명으로 결국 미국의 지원을 받던 팔레비 샤의 정권이 전복되고 호메이니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이슬람권과의 고착상태에 대한 서술로 책은 끝이 난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그동안 자유민주주의의 보루로 자처해온 미국의 제국주의적 위선과 이중성을 남김없이 고발하고 있다. 타국의 자주독립과 그 나라 사람들의 인권 같은 요소들은 철저히 무시되고, 오로지 미국의 투자자본가와 다국적 기업이라는 이름의 거대기업들의 무제한적 이윤추구를 위해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개입을 하는 제국주의 역사를 하워드 진은 폭로하고 있다.

아울러 콘트라 스캔들의 과정에서 초법적 불법행위들이 저질러졌음에도 불구하고, 관련자 중에서 수장인 레이건 대통령을 비롯해서 그 어느 누구도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과연 미국이 법치주의 국가인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베트남전에 대한 비밀문건의 기사화 과정에서 닉슨 행정부는 온갖 수단을 다 써서 그 정보의 보도를 막으려 했지만(실제로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보도 금지명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진실을 은폐할 수는 없었다.

마무리 말에서 그가 언급했듯이 “미래는 현재의 무한한 연속”이라는 말처럼 아무리 현재 상황이 암울하다고 하더라도, 진실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이미 검증되었다. 가까운 미래에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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