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의 십자군 이야기 1
시오노 나나미 지음, 송태욱 옮김, 차용구 감수 / 문학동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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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동안 저술했다는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로마인 이야기>를 완독했다. 가히 작가의 필생의 역작이라고 할 만한 작품이었다. 고대 로마의 개국으로부터 시작해서, 공화정-제정, 동서로마의 분열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오롯하게 담아낸 작품이었다. 초심이 끝까지 유지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긴 하지만 일본 출신의 이방인이 방대한 로마사에 대해 이런 도전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감탄할 만했다. 사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글쓰기는 르네상스 시대 베네치아에 대한 사랑으로 시작됐다. 고대 로마와 근대가 태동하던 르네상스 시대를 다뤘는데 뭐가 하나 빠진 것 같지 않나? 시오노 여사는 그 부분을 메우기 위해 <십자군 전쟁>이라는 스펙터클한 테마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이 그것을 바라신다(Deus lo vult)"는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치 종교적 선동으로 시작된 장장 200년에 걸친 십자군 원정은 느린 속도로 굴러가고 있던 중세 사회에 변화의 단초를 제공했다. 저자는 노르만 공 윌리엄의 잉글랜드 정복, 카노사의 굴욕(1077년), 에스파냐에서 이슬람 세력을 축출하려는 레콘키스타 운동을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되는 대사건으로 꼽는다. 그 중에서도 세속권의 교황권의 승리를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에 초점을 맞춘다.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비잔틴 제국의 구조요청에 응답한 우르바누스 2세의 막강한 권력행사를 십자군 원정의 시발점으로 삼는다. 그런데 신은 왜 그 순간에 “그것”을 바라셨을까?

시오노 여사는 동방의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중요한 사건 하나를 간과한다. 1071년 비잔틴 제국의 황제 로마누스 4세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아르메니아 만지케르트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결정적 패배를 당한다. 그동안 서방을 형해 파도처럼 밀려오던 사라센 세력으로부터 지켜주던 비잔틴 제국은 이 전투를 계기로 제국의 근간이었던 아나톨리아를 상실하고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신세로 전락하게 됐다. 그래서 동방정교를 신봉하던 비잔틴제국은 서방 가톨릭과의 뿌리 깊은 반목을 뒤로 하고, 교황에게 S.O.S.를 친다. 우르바누스 2세는 이 구조요청을 ‘신의 섭리’로 받아 들였고, 성지 예루살렘 해방전쟁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중세를 뒤흔든 대원정을 조직한다.

시오노 여사는 중세 시대에 이미 글로벌 경영자였던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유럽 각지에 있던 생산기지이자 경제기지로 상호간에 연결되어 있던 수도원의 종교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교묘한 정치, 종교적 선동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성지 예루살렘을 이교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원대한 교황의 전략적 목표는 유럽 각국의 기사 계급은 물론이고 민중까지도 종교적 법열의 상태로 몰아넣는다. 다만, 교황권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독일)을 비롯한 각국의 왕들 대신 각국을 대표하는 제후, 기사 계급 선수들이 적극적으로 대원정에 참여했다. 



 

우선 독일 대표 선수로 로렌 공작 출신의 고드프루아 드 부용과 보두앵, 프랑스 대표로 툴루즈 백작 레몽 드 생질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대표 선수 풀리아 공작 보에몽과 탕크레드를 저자는 세속적 욕망과 종교적 신념의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십자군 이야기> 1편에서는 이들 십자군 1세대의 활약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오노 여사는 기존의 서방과 기사계급 위주의 역사 서술에서 탈피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어쩔 수 없이 이들 기사들의 활약에 기초한 영웅주의 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그녀의 글이 “히스토리아(historia)”가 아닌 “게스타이(gestae)”라는 점을 이미 전작 <로마인 이야기>에서 언급하지 않았던가. 책의 제목에 “이야기”가 들어간 것만 보더라도 불문가지(不問可知)다.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는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하고 재출간된 김태권 작가의 <십자군 이야기>와 비교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전자가 정사(正史) 스타일이라면 후자는 퓨전 스타일이다. 김태권 작가가 비교적 상세하게 그리고 있는 은자 피에르가 이끄는 민중 십자군 부분이 시오노 여사의 책에서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보급과 병참을 무시하고 오로지 종교적 신념만으로 무장하고 출발한 민중 십자군의 몰락은 예견된 실패였다. 



 

여기까지가 몸풀기였다면 기사 계급이 주축을 이룬 정규 십자군이 등장할 차례다. 경무장과 기동력을 위주로 구성된 이슬람 전사들 눈에 중무장한 갑옷과 투구를 쓴 프랑크 기사단의 위용은 근대전의 전장에서 탱크를 처음 맞닥뜨린 것과 같았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술탄 클르츠 아르슬란과 다니슈멘드의 분열을 이용해서 파죽지세로 니케아와 도릴라이움을 거쳐 소아시아를 통과한 십자군은 마침내 성도 예루살렘의 입구라고 할 수 있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공방전에 나선다.

이에 앞서 로렌군의 보두앵은 우연한 기회에 킬리키아와 에데사를 손에 넣게 되는데,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보두앵의 정복이 향후 200년간 지속된 팔레스타인의 십자군 국가 방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에데사의 보두앵은 곧이어 진행된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모술과 이라크 방면에서 안티오키아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케르보가의 이슬람 지원군을 저지하는데 혁혁한 공훈을 세운다. 시오노 여사는 역사의 자락에서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일개 사건이 역사의 큰 흐름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예리하게 짚어낸다.


이런 행운과 보에몽의 분전에 힘입어 악전고투 끝에 동방의 대도시 안티오키아를 마침내 함락시킨 십자군의 창끝은 최후의 목적지 예루살렘으로 향한다. 이때만 하더라도 이슬람 지도자들은 십자군 전쟁을 단지 영토 확보를 위한 침공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전선에서 악귀 같이 달려드는 프랑크 기사들은 ‘신의 명령’이 아닌 단지 비잔틴제국 황제의 용병에 불과했다. 설상가상으로 프랑크족의 가공할 침공 앞에 분열한 이슬람 세력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서는 예루살렘이 십자군 손에 들어간 이후 1세기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총 3부작으로 구성된 <십자군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 여사는 십자군 1세대의 빛나는 성공과 예루살렘 해방 이후 전개된 십자군 내부의 갈등에 방점을 찍는다. 성묘의 수호자로 자처하던 고드프루아가 죽은 이후, 예루살렘 왕국의 왕으로 등장한 보두앵과 십자군 국가의 배후 확보를 위해 얼마 되지 않는 병력으로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전사 탕크레드가 <십자군 이야기>의 사실상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다. 저자가 베네치아 상인의 관점에서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가치중립적인 저술을 시도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서구 문명에 대한 편향성과 프랑크 기사(보에몽과 탕크레드)에 대한 찬양은 어쩔 수가 없다.

저자가 어떤 사료를 바탕으로 십자군 전쟁을 재구성했는지 참고 문헌에 대한 목록이 전혀 없는 점도 아쉽다. 어디까지가 “인용”한 역사적 사실이고, 어느 부분부터 저자 자신의 “이야기”인지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독자로서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역사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게스타이)를 풀어내기 위해서는 철저한 역사의 고증이 우선해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등장인물의 심정에 대한 추측 부분이 특히 마음에 걸린다. 역사적 사실과 천년도 지난 후대의 가정은 그간의 유구한 시간만큼 조화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긴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이야기꾼’이지 역사학자는 아니니까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댈 필요는 없겠지.

사실 시오노 나나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에는 경천동지할 새로운 이야기는 없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테마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여기저기서 모을 수 있는 정보의 집대성이다. 옛말에 구슬도 꿰어야 보물이라고 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역사의 단편적 사실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의지를 가진 작가의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십자군의 성공시대가 저물고, 위대한 이슬람 영웅 살라흐 앗 딘의 활약이 시작될 시오노 여사의 <십자군 이야기>의 두 번째 인스톨을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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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스팡 수난기 - 루이 14세에게 아내를 빼앗긴 한 남자의 이야기
장 퇼레 지음, 성귀수 옮김 / 열림원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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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역사적 사실 하나. 1663년 1월 28일 프랑수아즈 드 로슈슈아르 드 모르트마르와 루이 앙리 드 파르다이양 드 공드랭 결혼 서약하다.

프랑스 출신으로 시나리오 작가, 희극배우, 영화배우, 만화작가 그리고 소설의 영역에까지 손을 뻗친 장 퇼레의 <몽테스팡 수난기>는 왕권신수설을 바탕으로 강력한 중앙집권에 성공한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에 있었던 스캔들에 블랙유머를 양념 삼아 기가 막히게 버무린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군주에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사랑하는 금발의 고혹적인 미녀 아내를 뺏긴 어느 오쟁이 진 남자 몽테스팡 후작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태양왕 루이 14세(1638~1715) 이야기가 궁금해서 네이버캐스트에 나온 태양왕 편을 읽어봤다. 사실 즉위 초기만 하더라도, 루이 14세는 후세에 알려진 것으로 그렇게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왕권은 신성하다는 정치적 프로파간다와 지롱드의 난 그리고 30년 전쟁으로 강력한 중앙정부를 원하던 시대정신은 루이 14세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마자랭과 콜베르라는 명재상을 기용해서 내치를 다진 태양왕의 프랑스는 유럽의 강국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베르사유 건설과 상비군의 강화 그리고 근대적 예술가 후원 시스템의 확립은 루이 14세 시기를 상징한다. 주목할 점 중의 하나는 복잡하기 짝이 없고 세련된 궁정 예법을 도입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루이 14세는 연애활동에도 열심인 왕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의 오쟁이 진 남편 몽테스팡 후작과 그의 아내 아테나이가 등장한다. 어처구니없는 결투로 약혼자를 잃은 프랑수아즈는 당탱의 동생 루이 앙리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된다. 가난하지만 사랑에 불타는 젊은 부부는 사랑놀음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하지만 놀음을 위해선 고금을 막론하고 자금이 필요한 법. 가스코뉴 귀족은 자비를 들여 몇 번의 원정에 나서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고 빚만 잔뜩 지게 된다. 시시각각 조여 오는 채무자들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 철부지 부부는 ‘덩더쿵’ 사랑놀음에 정신이 없다.

한 방으로 인생역전의 기회를 찾던 루이 앙리에게 드디어 기회가 찾아오는데, 그것은 온전하게 자신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아내 아테나이를 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행운은 루이 앙리와의 바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부부가 세 들어 사는 가발가게의 도제들을 온통 흥분의 바다로 몰아넣은 천하절색 아테나이가 왕비의 시녀로 발탁된 것이다. 그것으로 그쳤다면 좋았으련만, 호색가 루이 14세의 눈에 든 아테나이는 아예 그의 정부가 된다.

이제부터 장 퇼레의 블랙유머가 작렬하기 시작한다. 다른 이들은 절대군주의 정부가 된 아내 덕분에 금력과 권력을 모두 행사하게 된 루이 앙리를 부러워하지만, 진심으로 아테나이를 사랑하는 이 가스코뉴 남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회유와 협박, 유배 그리고 암살기도까지 차단해 내면서 오로지 사랑하는 아테나이가 자신에게 돌아오기만을 바란다. 하지만, 이미 베르사유의 진한 향기에 취해 버린 아테나이가 돌아올 리는 만무하다. 국왕을 조롱하기 위해 사슴뿔로 장식한 마차를 타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남의 아내를 뺏어간 루이 14세를 비난하는 루이 앙리는 그야말로 왕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장인마저 왕의 정부가 되어 버린 딸을 두둔하는 말에 “장인 살해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쓸까 1초간 고민하는 몽테스팡 후작의 상상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나 더 추가하면, 베르사유에 잠입한 몽테스팡을 도와주려고 가발가게 도제들이 만든 인간 사다리는 정말 눈물겨웠다.

<몽테스팡 수난기>를 읽으면서 신화의 재현이 떠올랐다. 제우스가 영웅 암피트리온의 아내 알크메네를 취해 낳은 헤라클레스 이야기와 아테나이를 자신의 정부로 만들어 무려 6명의 사생아를 낳은 루이 14세의 실화는 그대로 공명한다. 수많은 공국으로 나뉘어 있던 프랑스의 국가질서를 바로 잡고, 국왕-귀족 그리고 평민의 질서를 세우겠다고 공언하던 태양왕이 실제로는 파렴치하게 시골 귀족의 아리따운 아내를 취해 부도덕한 일을 공공연하게 벌였다는 역사적 사실은 당시 지배계급의 치부를 그대로 들어낸다. 루이 14세가 원하던 국왕의 권위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 사치스러운 궁정 생활이나 국민의 생활을 피폐하게 만든 대규모 원정이 아니라 청렴과 결백의 기초를 이루는 공명정대한 군주의 도덕성에 있었다는 점을 그는 정녕 몰랐을까?

장 퇼레의 책은 처음으로 읽었는데, 팩션 장르로 역사의 빈 공간을 예리하게 파고드는 작가의 역량에 깜짝 놀랐다. 자신을 버린 아테나이를 잊지 못해 빈 관으로 장례식을 치르는 오쟁이 진 시골 귀족의 짠한 순애보를 읽으면서, 허구와 사실 사이를 이렇게 능숙한 솜씨로 다룬 작가에게 다시 한 번 감탄했다. <검은 미사 사건> 같이 끔찍한 스캔들과 어쩔 수 없는 육체의 노쇠로 결국 국왕의 총애를 잃은 아테나이가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했을까 과연 루이 앙리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렇게 <몽테스팡 수난기>는 짧은 행복 뒤에 자신을 숙명처럼 쫓아다닌 비극의 연쇄반응에 대담하게 맞선 가스코뉴 남자의 아련한 순애보를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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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세상을 말하다 - 이 시대에 읽어야 할 명저 강의
박찬운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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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가을엔가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하는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를 들었다. 모두 4강으로 되어 있었는데 그중에 막스 베버의 책 때문에 강연을 신청했다. 하지만, 역시나 직장인으로 퇴근한 후에 강연 듣기만 참 난망했다. 2강을 듣고 나머지는 포기해 버렸다. 그렇게 나와 하버마스 그리고 푸코의 인연은 멀어져 갔다. 그래도 첫 강의였던 에밀 뒤르켕과 막스 베버의 강의는 참 인상적이었다. 온라인 매체인 <오마이뉴스>에 연재된 박찬운 교수가 고른 16권의 명저 소개에 들어가 있는 뒤르켕의 <자살론>이 그래서 더 반가웠나 보다.

법학자가 꼭꼭 씹어서 들려주는 사회학의 아버지 뒤르켕의 명저 <자살론> 이야기는 흥미롭다. 수사학과 논리학같이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학문과는 달리 비교적 후발 주자에 속하는 사회학의 연구 범위와 주제를 설정한 연구가는 철저하게 개인의 행위인 자살이 갖는 사회적 의미에 방점을 찍는다. 39분마다 한 명씩 자살한다는 통계처럼 경쟁 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자살공화국에 사는 우리로서는 심각하게 고민해볼 문제가 아닌가 싶다. 뒤르켕은 자살의 이유보다 자살의 사회성에 주목한다. 이 연구과정에서 그가 추론해낸 자살에 대한 사회학적 방법론은 이제 고전이 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이기적, 이타적 그리고 아노미적 자살 분류법은 원전을 통해 다시 한 번 접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자는 여전히 내 사무실 책상에 올려져 있지만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다. 아쉽게도 김호기 교수님의 강좌에서 빼먹은 바로 그 강의다. 평생을 인간의 이성 연구에 소진한 푸코의 글을 어렵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하라는 저자의 말에 용기가 용솟음치지만, 여전히 프랑스 본토인들도 어렵다고 말하는 그의 저작은 그야말로 넘사벽일 뿐이다. 이성이 근대의 기초를 이루었다고 생각되지만, 푸코는 반대로 억압된 자유, 통제 그리고 폭력이라는 이름으로 건설된 허상이 아닌 근대사회의 실체를 보라고 주문한다. 그 대안으로 인간의 이성 능력을 찬양하는 실존주의 철학보다 이성 저 너머에 있는 “구조”로 이 세상에 대한 분석을 시도한다.

<감시와 처벌> 각론에서는 기존의 신체형이 아닌 범죄의 예방과 교화 차원에서 자유형으로 대변되는 감옥으로의 전환에 대해 푸코는 설명한다. 더 나아가 근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형 구축을 위한 방법론과 고도로 계산된 정치기술을 분석한다. 우리나라에 한 때 성행하던 국민체조 분석을 통해 신체는 물론이고 정신세계마저 지배하려고 했던 권력자의 의도를 저자는 신랄하게 비판한다.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위해서라도 푸코의 책은 꼭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과연 그 때가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권위에 대한 복종> 역시 흥미로운 주제를 다룬 책이다. 일찍이 한나 아렌트는 세기의 재판이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다룬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에 대해 말했다. 수백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몰아넣은 게르만 아저씨들이 절대 원래부터 흉악하거나 난폭한 품성의 소유자가 아니라, 정말 우리 이웃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은 사람들이 생각한 그런 괴물이 아니라, 한 명의 성실한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 미국 출신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비합리적인 권위에 복종하게 되는가에 대한 비극의 원인을 밝히는데 도전했다. 적당히 살고 좋은 게 좋은 것일까? 우리는 너무 익숙한 이런 표현에 길들여진 게 아닐까? 저자는 비합리적인 권위라면 저항하고 분노하라고 분연하게 주문한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을 빌려 불편한 진실이라도 반드시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박찬운 교수는 이런 딱딱해 보이는 책 말고도 C.W. 세람의 <낭만적인 고고학 산책>과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넓힐 수 있는 책도 추천한다.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도 고고학에 정통한 비전문가가 부드럽게 풀이해주는 책이야말로 나같은 문화이방인에게 적합하지 않을까? 세람에 따르면 과거는 미래를 항해하는데 꼭 필요한 나침반과 같은 것이다. 저자가 고른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 해독에 얽힌 부분에 대한 해설은 정말 흥미로워서 당장에라도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아울러 시민을 압도하는 거대한 건축물이 아니라, 우리의 후손에게 문화 유전자를 물려주기 위해 박물관이나 도서관 같은 공공건물이 필요하다는 실질적인 제안도 마다하지 않는다.

2010년 출판계 최고 베스트셀러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였다. 하버드대학교와 정의라는 코드가 맞물리면서, 공정과 정의에 목마른 많은 이들이 서점에서 이 책을 집어 들었다. 샌델 교수의 책이 인식의 문제였다면, 존 롤스의 <정의론>은 그 인식을 실천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롤스식 세상 바꾸기의 시작은 모든 사람이 수긍할 수 있는 정의에 대한 원칙을 세우는 것이었다. 저자는 본격적인 정의에 대한 설명에 앞서 공리주의와 사회주의적 접근의 장단점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소수의 권익 보호와 개인의 자유가 합의된 사회를 만드는 것이 바로 롤스의 꿈이었다. 롤스의 요약을 따르면 사회적 부를 배분하는 원칙이야말로 <정의론>의 핵심이란다.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롤스는 사회주의 시스템이 가진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의 평등적 자유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겠지만,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저자가 무상급식과 건강보험을 우리가 사회가 제공할 수 있는 최소한 사회안전망이라고 규정한 부분에서는 정말 벌떡 일어나 격하게 박수를 치고 싶을 정도였다. 그렇다, 우리가 읽어야할 고전과 명저를 읽었다면 마땅히 의식의 전환과 그에 따른 실천이 뒤따라야할 것이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관념적 책읽기라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책을 읽고 실천에 나서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독서인이 세상에 답하는 방식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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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 - 2011년 제7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강희진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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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한 때 리니지 폐인이었다. 레벨 올리는 재미에 낮과 밤이 바뀐 줄도 모르고 그렇게 컴퓨터 앞에 붙어 앉아 시간을 죽이곤 했다. 레벨 40을 달성하지 못하고 어느 날 돈오의 순간이 찾아왔고, 그 순간으로 바로 게임 중독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리니지라는 가상현실(virtual reality)에서 은퇴했다. 그러다 만난 강희진 작가의 <유령>은 다시 나를 아련한 옛 시절의 추억으로 인도했다. 그의 소설 중심에는 리니지 게임의 <바츠 해방 전쟁>이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직면하게 될 탈북자의 이야기를 적절하게 버무린다.

역시 독자는 자신이 체험하거나 관심이 있는 주제에 쏠리기 마련인가 보다. 어제 책을 받았는데 그날로 다 읽어 버렸으니 말이다. 우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에 앞서 도대체 이놈의 <바츠 해방 전쟁>이 무언가 싶어서 인터넷 검색을 통해 이인화 선생의 사설을 만났고, 온라인 게임계의 전설처럼 남은 혁명전쟁의 실체를 접할 수가 있었다. 다중접속 게임의 신화를 창출한 엔씨소프트의 대작 게임 리니지2의 바츠 서버에서 일어난 디케이 연합의 독재와 횡포에 맞선 하층 민중의 반발이 이 엄청난 서사의 실마리를 이루는 발단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현실의 그것과 닮았는지, NPC 몬스터를 사냥하는 사냥터와 물물교환이 이루어지는 장터를 장악한 디케이 연합의 증세로 촉발된 이 대서사극은 뼈단검이라는 기본 무기와 변변한 갑옷도 하나 없는 내복단의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웅적 활약으로 마침내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를 앞세운 혁명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물론,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고 승리 후의 혁명군 내부의 분열과 절치부심하며 실력을 기른 디케이연합군의 역습으로 모든 것은 일장춘몽의 신화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런데 그 이야기가 <유령>에서 어떻게 구현되었는데?

소설을 쓰기 위해 <바츠 해방 전쟁>과 리니지 게임을 직접 해봤을 작가는 주인공 화림/주철(그의 정체성도 모호하기만 하다)이 <바츠 해방 전쟁>을 주도한 온라인 게임의 영웅이자 군주 쿠사나기라고 설정한다. 조지프 캠벨의 신화론을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비록 온라인의 세계이긴 하지만 남들보다 정말 특이한 체험(<바츠 해방 전쟁>의 지도자이자 영웅)을 한 주인공이 현실 세계에 적응하기란 정말 난망하다. 게다가 그는 아사가 만연한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자 출신이다. 게다가 백석 시인의 필명을 딴 백석공원에서 벌어지는 엽기적인 연쇄살인이라는 미스터리까지 가세해서 이야기는 미궁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사실 소설에서 그 범인이 누구냐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가상현실(virtual reality)와 현실세계를 도대체 구분하지 못하는 주인공 삶의 궤적에 더 관심이 간다. 솔직히 온라인 세계에서는 최고 절정의 기량과 리더십을 자랑하는 전사가 현실세계에서는 정말 찌질한 캐릭터일 수도 있다는 설정은 진부하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현실세계에서 잘 나가는 놈이 가상현실에서도 짱이다라면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긴 현실세계에서 그렇게 바쁜 사람이 온라인 게임에 투자할 시간이 어디 있겠냐만서도.

작가가 또 다른 이야기의 축으로 삼은 탈북자의 삶도 왠지 겉도는 느낌이다. 그가 그리는 북한의 실상은 너무 피상적이고 감상적이다. 몇 줄만 검색창에 치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바츠 해방 전쟁> 같은 소재 말고, 탈북자들의 진짜 모습을 찾기 위해 고심한 흔적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 보편적인 이야기가 어쩌면 가장 특수한 예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바츠 해방 전쟁>이 나 같은 보통 독자에겐 특별한 것처럼 어마이를 찾아 남녘으로 내려온 주인공의 신산한 삶에 대해서도 좀 더 정교한 통찰이 필요하지 않았나 싶다. 집단화된 사회주의도 싫지만, 인간미를 찾을 수 없는 자본주의는 더 나쁘다는 식의 양비론도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신의 가르침보다 개인의 욕망을 쫓는 전도사를 보니 종교도 답이 아닌가 보다. 그럼 도대체 우리는 어디서 구원과 안식을 얻어야 한다는 말인가.

어쨌든 소설은 참 재밌게 읽었다. 우리나라 소설은 소재가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렇게 온라인 게임에 기초한 디지털 스토리텔링과 예상하지 못했던 서사에서 재밌는 이야깃감을 캐내는 걸 보면 그건 확실히 엄살이다. 강희진 작가가 차기작에서는 또 어떤 기발한 이야기를 들려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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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화점 - 그리고 사물.세계.사람
조경란 지음, 노준구 그림 / 톨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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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만나는 계기는 참 다양하다. 일전에 참가한 어느 독서 모임에서 리뷰 쓰기의 고충을 토로하던 참에, 동료가 조경란 작가의 <백화점>을 인용하면서 아무도 내가 쓰는 리뷰에 관심 두지 않을 거라는 말에 이 책이 읽고 싶어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나중에 책에서 직접 찾아보니 원래의 그것과는 많이 달라지만. 그런데 문득 여성작가가 아닌 남성작가가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썼다면 어떨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여성의 전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쇼핑 공간 ‘백화점’의 생태보고서 양식을 취한다. 그런데 한 꺼풀 벗겨 놓고 보면, 백화점이라는 특수 공간을 빙자한 작가 노트가 아닌가 싶다. 물론 조경란 작가가 열심히 발품을 팔아 백화점이라는 공간에서 취급하는 다양한 상품군, 백화점의 역사 그리고 자전적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 백화점 공간으로 돌아오는 회귀도 빼먹지 않는다.

백화점은 확실히 기존의 파사주 같은 상가에서 진화한 근대적 공간이다. 백화점은 철저하게 고객의 편리를 위해 지상에 재현된 쇼핑을 위한 장소다. 고객을 위한 동선 구성에서부터 시작해서, 쾌적한 쇼핑을 위해 설계된 널찍한 공간 배치, 여성을 에스코트해 따라온 남성을 위해 배치된 적당히 불편한 의자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산된 인공의 향취를 풍긴다. 이런 디테일을 남자 작가에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녀가 말하는 슈어홀릭에 빠진 여성 고객이나 가짓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그 다양한 잇백의 나열은 또 어떤가. 에코가 말하는 나열을 통한 특정한 지식의 외연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백화점>을 통해 개인적으로 배운 것이 많다. 확실히 목적 구매를 하는 남성에 비해, 발견-필요-구매의 진짜 ‘쇼핑’을 즐기는 여성의 차이는 그야말로 지구와 화성 간의 거리만큼이나 멀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고 작가가 백화점 타령만을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아련한 옛 추억을 구수하게 연상시키는 어머니가 털실로 직접 떠주신 스웨터, 무릎과 팔꿈치는 기워가며 대대로 물려 입었던 헌 옷의 기억을 주술처럼 불러일으킨다.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를 읽으면서 떠오른 의문에 대해서도 호탕한 방식으로 궁금증을 해결해준다. 과연 소비라는 행위를 통한 물질적 풍요가 행복을 담보하는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은 과연 인간의 본성일까? 갖고 싶은 것을 다 살 수 있는 게 행복이라는 등식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갖고 싶은 것을 살 수 없는 형편이라면 행복하지 않은 것이라고 작가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한다(177~178쪽). 다른 부분은 몰라도 이 부분에서는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기 중의 장기인 기호학에서 다루는 시니피앙의 예는 물론이고, 독일 사회학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게오르크 짐멜은 물론이고 쇼핑과 소비의 미학에 연관되는 주제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작가의 노련미가 참 일품이다. 백화점이라는 소비 공간에 대한 진중한 고찰은 물론이거니와, 한 때 책에 대한 욕심으로 책을 후무릴 계획까지 세웠던 책쟁이의 심오한 내공이 느껴졌다. 문구류에 대한 집착에서는 동지애마저도 느꼈다. 처음 들렀던 긴자 이토야 문구점에서 미처 사지 못한 스탬프 생각에 입맛이 써지기도 했다.

가끔 주제가 본궤도에서 이탈하기도 하지만, 이 책이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 정도는 무방하지 않나 싶다. 사실 작가의 어느 작품과 관련된 일련의 스캔들로 일부러 다른 책을 읽지 않았는데 이 책으로 해빙 무드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아마 그 기억마저도 희미해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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