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치고 정치 - 김어준의 명랑시민정치교본
김어준 지음, 지승호 엮음 / 푸른숲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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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팟캐스트 방송 <나는 꼼수다>의 열렬한 애청자다. 처음에 듣기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중독이 될 줄 미처 몰랐다. 지난주까지 모두 22회 그리고 호외까지 방송된 모든 방송을 들었다. 그리고 김어준 총수의 책이 곧 나온다는 말을 듣고 바로 주문장을 날렸다. 책을 구입한 지는 제법 됐는데, 이 책 저 책 바람피우다가 오늘 새벽에서야 다 읽을 수가 있었다. 김 총수의 <닥치고 정치>에는 자신이 나꼼수에서 그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의 원형질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끊임없는 소재거리를 제공해 주시는 가카에 대한 무한애정으로 시작된 인터넷 팟캐스트 방송은 오프라인의 세계까지 넘보면서 콘서트와 책으로 우리 곁을 찾아왔다. 나꼼수 애청자라면 <닥치고 정치>는 그동안 김 총수가 방송에서 들려준 이야기의 집대성이라는 걸 한 눈에 알아채리라. 그런데 더 놀라운 건 이 책의 집필시점이 이번 가을이 아니라 지난 봄이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특히나 안풍으로 대변되는 안철수 바람을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개인적으로 가카가 아닌 여집합의 총합으로 우리시대 소통의 상징이자 시대의 결핍을 메워줄 새로운 플랫폼이 안철수가 아닐까 싶다. 물론 김 총수는 조국 교수에서 출발해서 문재인 이사장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지만. 그건 김 총수의 생각이고. 조국과 문재인 그리고 안철수 트로이카를 보유한 것만으로도 든든하지 않을까?

김 총수는 대한민국 우(右)를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지 못하는 ‘겁먹은 동물’이라고 폄하한다. 어쩌면 유전자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지는 모른다고 진보와 대척점에 둔다. 사실 우리나라 보수가 어디 제대로 된 보수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또 도리질을 하게 만든다. 모름지기 진(眞)보수라고 한다면, 원칙과 가치에 어긋나는 것에 자존심 때문에라도 목을 걸고 투쟁하는 짠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 사사로운 이익에 눈먼 우리 보수에게 그런 결기와 폼 그리고 비장미를 볼 수 없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총수는 주장한다.

그렇게 우와 가카가 계속된 헛발질을 하고 있는데도 진보 진영은 무얼 하고 있는가에 대한 총수의 판단은 냉혹하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그대로 현실화되고 있는 시점이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대비해서 연대의 정신에 입각한 합종의 길은 멀기만 하다. 그들의 단일화 논의는 재미도 없고, 듣기만 해도 짜증만 난다. 감동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부질없는 기득권 유지에 급급한 그들의 모습은 김 총수가 책의 초반에서 비판한 유인원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런 저런 정파 간의 이해를 대승적 차원에서 봉합하고 통 크게 합치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단 말인가. 김 총수가 그렇게 목 놓아 외치는 안철수 룰의 작동 원리를 모르는 기성정치권의 몰락을 목도하면서도 말이다.

가카와 그의 수하이자 부패한 폴리널리스트들의 암약으로 메시지 전달 루트는 모두 장악되었다.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과 소통을 하려면, 플랫폼의 확보가 필수적인데 방송과 신문 모두 보수에게 장악된 마당에 무슨 수가 없을까 고민하다가 나온 것이 바로 <나는 꼼수다> 인터넷 팟캐스트였다고 김 총수는 말한다. 무상급식이라는 비밀병기를 선점했지만,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진보의 프레임을 짜기 위해서는 새로운 방식이 절실하다는 것이 김 총수의 분석이었다. 그래서 SNS와 스마트폰을 활용한 팟캐스트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대를 앞서가는 기술에 가카 덕분에 한층 재밌었진 정치라는 양념을 곁들이자 방송은 폭발해 버렸다. 이제 가카와 수하들조차 나꼼수는 무시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되어 버렸다. 지난주 나꼼수 주진우 기자가 예언한 대로 가카의 사저 문제에 대해 청와대가 한 치의 오차 없이 반응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이미 그전에 김 총수의 절친 보수의 고깔콘 시장은 그의 예언대로 행동했다가 여러 사람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 중이고. 살아 움직이는 생물 같은 정치의 세계, 여하튼 너무 재밌다.

단, 너무 진중하면서 과학적인 분석을 원하는 독자라면 <닥치고 정치>는 삼가야 할지도 모르겠다. 김 총수가 내내 말하는 대로 이 책의 근간은 ‘무학의 통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으며, 감성적 접근, 추정과 소설적 추론이 난무하는 사문난적(斯文亂賊) 그 자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 사문난적스러운 주장이 진실처럼 들리니 큰 일이다.

언뜻 보기에도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처럼 보이겠지만, 쫄지 마라. 잘못됐으면 고치면 된다, 선거로. 이제 얼마 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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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0-12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셨군요. 나꼼수를 듣지는 않지만 김어준의 책이 어떨지 궁금하네요.
쫄지 마라... 명쾌한 정치 철학이에요 ㅎㅎ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레삭매냐 2011-10-12 17:22   좋아요 0 | URL
방송을 다시 듣는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다 읽고 나니 마치 무슨 숙제라도 마친 것
같은 그런 상쾌한 느낌이랍니다 :>
 
세상 끝의 골목들 쇳물처럼 새벽 출정 봄비 내리는 날 매향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6
방현석.김한수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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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 정화진 작가의 <쇳물처럼>이라는 작품에 대해 듣게 됐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대통령 직선제를 위한 거대한 함성이 온 사회를 넘실거리던 바로 그 해에 나온 작품이다. 국가주도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도전하고, 시민이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주인이라는 시대정신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제 퇴근하자마자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전자도서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하던데, 여전히 우리나라 공공시스템의 안정성은 정말 기대에 미치지 못하더라.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인천의 어느 주물공장이다. 작가는 타자화된 시점으로 노동자들의 신산한 삶에 돋보기를 들이댄다. 때는 김장철, 모두가 김장 보너스를 기대하지만 그들이 생업터전인 <태양주물>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10%를 넘는 불량률을 이유로 들면서, 늬들이 그러고서도 보너스를 달라고 할 수 있냐고 회사의 대변인으로 등장하는 전 상무는 칠성이에게 퉁바리로 모욕한다.

언제나 그렇듯 시작은 미약했다. 이십대 후반, 삼십대 초반의 유부남들보다 좀 더 자유로운 총각들이 뭉치기 시작한다. 그렇다고 무슨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등장이 아니라 왜 우리가 이런 처우를 받으면서 열악한 환경에서 일해야 하는가에 대한 절절한 자각이다. 그리고 그들을 바라보는 선배 노동자들의 시선은 오늘날 우리사회가 겪고 있는 정규직-비정규직 간의 냉혹한 노노대결의 그것이 아닌 서로를 품는 따뜻함이 배어 있다.

그렇게 자신도 모르게 하나가 된 태양주물의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힘의 위력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도가니에서 녹은 쇳물처럼 하나가 된 그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시키는데 성공한다. 어쩌면 작가 자신이 투영된 주인공일지도 모르는 천 씨는 현장에서 그들이 그렇게 바라던 리더십을 발휘한다. 사측이 양보를 하게 된 배경에는 어쩌면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입게 될 어마어마한 물적 손해가 그들의 이탈한 이성을 바로 잡아주었는지도 모르겠다. 임금 노동자들을 자극해서 과연 그들이 얻는 게 무엇이겠는가? 당시 막 자리 잡기 시작한 노사협상의 원형질을 단편 <쇳물처럼>은 보여준다.

탄광에서 잔뼈가 굵은 천 씨는 규폐나 막장사고로 자신의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아 탈출하지만, 탄가루와의 연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주물공장에 터전을 잡았고 정당한 자신의 노동의 대가를 받고 있나 하는 그런 복잡한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천 씨는 연전에 칠성이의 보너스 요구사건 이래 그네들이 어떤 움직임을 하고 있는 알았을까? 11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거대한 바위의 밑동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을 느낀다. 딱딱하게 굳어버린 자신의 ‘권리’라는 쇳덩어리를 녹이기 위해 그들은 준비를 마친 것이다.

작가는 어찌 보면 지극하게 평범한 밥벌이를 매개로 일상의 위대함을 역설한다. 처자식을 벌어 먹이겠다는 인간 본능 때문에 억눌러왔던 이성이 폭발하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게 된다. 어쩌면 극한으로 치닫을 수 있는 순간, 천 씨의 한 마디로 그들은 연대의 중요성에 도달한다. 사회를 움직이는 거대한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나 혼자의 힘이 아닌 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결론 말이다.

치열한 대립은 대폿집으로 향하는 천 씨 부자의 훈훈한 광경으로 마무리된다. 아들에게 직접 대폿집 문을 열라는 천 씨의 말은 새로운 세상의 주인이 될 미래의 후손에 대한 희망으로 읽힌다. 한 세대 전의 그런 빛나는 희망이 지금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 소설 속의 주인공이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도 글을 쓰게 된다면 이런 시대정신이 담긴 글을 쓰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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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고양이 눈 - 2011년 제44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최제훈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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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행이다. 최제훈 작가가 단 두 개의 작품을 낸 것이. 왜냐하면, 한 번 어느 작가에 꽂히게 되면 바로 그 작가가 발표한 책을 다 구해서 읽어야 속이 시원하니까 말이다. 이번 주에 최제훈 작가의 데뷔 소설집인 <퀴르발 남작의 성>을 아주 만족스럽게 읽었고, 내친 김에 네 개의 중편으로 구성된 장편 <일곱 개의 고양이 눈>도 읽었다.

<퀴르발 남작의 성>을 읽고 나서, 인터넷으로 작가의 인터뷰 기사를 찾아 봤다. 제가 그 인터뷰에서 언급한(진짜 그렇게 언급한 적이 있었나?) ‘나선형’이라는 단어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을 읽는 내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전작에서 살짝 맛을 보여줬던 이제 어쩌면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소설 속의 소설 “메타픽션” 기법은 그 광휘를 더한다. 구성은 더 탄탄해졌고, 나선형으로 꼬이며 솎아내는 이야깃거리의 행렬에 그만 황홀해졌다.

전형적인 밀실 트릭과 아가사 크리스티의 <열 개의 인디언 인형>을 떠올리는 <여섯번째 꿈>은 어느 고립된 산장에 모인 6명의 연쇄살인범을 주제로 다루는 인터넷 동호회 “실버 해머” 동호회원이 차례로 보이지 않는 “악마”에 의해 죽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교통과 통신이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는 당연히 두절되었고, 기아와 불면의 공포 속에서 도대체 영문을 알 수 없는 ‘게임의 법칙’을 알아내려는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진다. 이야기를 더 쫄깃하게 만드는 건, 이 중편소설에 등장한 주인공들이 뒤에 나올 소설에 직간접적으로 어떻게든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물론, 원형 그대로가 아닌 원주율 π처럼 무한반복이라는 과정을 거쳐 변용된다. 바로 그 지점에서 <일곱 개의 고양이 눈>의 가치는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복수의 공식>에서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된 복수의 연쇄반응을 일으킨다. 오죽했으면 슈베르트 현악4중주 <죽음과 소녀>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가 그린 동명의 그림까지 찾아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을까. 이 음악과 그림은 ‘복수의 공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니 가능하면 듣고 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그리고 보니 QR마크가 인도하는 사이트로 들어가 좀 해괴한 내레이션도 들었다.

개연성이라는 매개체를 이용해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엉킨 복수의 화살은 엉뚱한 사람에게 날아가 꽂힌다. 자신의 운명을 바꾸려고 아등바등하지 말라고 계언(戒言)인가. 슬쩍슬쩍 자신이 맡은 번역에서 장난질을 치는 번역가처럼 작가의 블랙유머가 반짝반짝 빛난다. 소용이 다한 캐릭터를 사골 국물 우려먹듯 다른 공간으로 확장, 전이시키는 아이디어가 멋지다. 이국적 난초 향기가 어우러진 화원을 배경으로 한 치정극과 개인의 도서관을 통해 소장자의 결핍과 욕망의 궤적을 추적할 수 있노라는 서술도 일품이다.

최제훈 작가는 음악의 소나타 형식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반복과 변주(변용)를 소설이라는 문학형식에도 뻔뻔하게 도입한다. 이 두 가지가 얼마나 효과적이냐 하면, 각각의 중편에서 독자는 어느새 이런 반복과 변주에 포로가 되어 밤마다 셰에라자드의 귀가 솔깃하게 하는 마력 같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적으로는 딱 절반까지는 그야말로 몰입해서 읽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띄엄띄엄 읽다 보니 후반부에서는 왠지 동력이 급속하게 떨어진다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첫 두 이야기는 유기적 연결이 되어 있지만 나머지 두 편은 좀 느슨해서였을까? 한 번 읽고 말 책이 아니니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생각해봐야할 것 같다.

<π>와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는 어쩌면 완벽한 한 편의 미스터리 소설을 창작하겠다는 작가 욕망의 발현이라는 느낌이 스친다. 현실과 섬망의 경계를 넘나드는 그의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로 보기에도 전혀 손색이 없다. 어떻게 보느냐는 전적으로 독자의 의지에 달린 거니까. 굳이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독자는 자신이 <일곱 개의 고양이 눈>에서 읽고 있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현실인가 아닌가를 반복해서 묻게 된다. 이런 유의미하지 않는 관계의 설정을 통해 작가는 독자를 자신이 창조해낸 “메타픽션”의 질곡 속에 빠트린다. 질척질척한 질곡이 아닌 아주 유쾌한 질곡에 말이다. 그러니 이런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독자의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가 아닐까.

아, 북글을 마무리하면서 든 생각인데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어도 참 재밌지 않을까 뭐 그런 상상을 해봤다. 복잡한 스토리텔링을 관객이 정신줄을 놓지 않고 쉴 새 없이 좇아가기가 쉽지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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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 레터
틸만 람슈테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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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만 람슈테트?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이다. 그전에 먼저, 독일작가와 나는 아무래도 궁합이 맞질 않는 모양이다. 일전에도 카챠 랑게-뮐러라는 독일 작가의 <차마 그 사랑을>, 얼마 전에 읽었던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귀향> 그리고 잔뜩 기대를 했던 헤르타 뮐러의 <숨그네>에 이르기까지 기대했던 재미를 느낄 수가 없었다. 소설을 읽을 적에 무언가 감칠맛이 나는 그런 쏠쏠한 재미를 원하는데, 아무래도 독일 작가의 글은 나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것 같다.
 
2008년 잉게보르크 바흐만 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책 띠지의 소개와 책 표지의 만리장성을 배경으로 한 마술사(?)의 유쾌한 표정에도 불구하고 <베이징 레터>는 시종일관 어떤 죽음을 이야기한다. 주인공이자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키스 슈타페르페니히는 항상 중국 타령을 하던 할아버지가 오스트리아도 아닌 독일에서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중국발 가짜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키스가 들려주는 할아버지는 참 특이한 캐릭터다. 수도 없이 할머니를 바꾸는 바람둥이에다, 손자들을 운전사로 부려 먹기 위해 브레이크에 발이 닿을 만한 나이가 되면서부터 운전교습을 시킨 엽기적인 노인네다. 하긴,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인 키스 역시 할아버지의 젊은 ‘할머니’ 프란치스카와 눈이 맞아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하고 결혼까지 결심한다. 자신을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라고 생각하는 키스는 가족들이 할아버지의 소원인 중국 여행을 위해 모아준 돈을 프란치스카와 함께 카지노에서 한방에 날려 버리는 대담함도 보여준다. 왜 갑자기 천명관 작가의 <고령화 가족>이 떠오르는 걸까? 가족의 해체는 우리나라나 독일이나 비슷하게 진행되는 모양이다. 다만 한 가지 차이라면 독일판 콩가루 패밀리는 좀 더 파격적이라는 점 정도?
 
<베이징 레터>는 실제 독일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키스가 할아버지와 중국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쓴 가짜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전자도 그렇지만 후자는 더욱 더 철저하게 허구다. 아무리 허구라지만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행 책인 <론니 플래닛>을 잘 연구하고 써서 그런지 마치 현재 중국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런 게 작가의 역량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현실세계에서는 돈을 다 날려 버린 키스가 중국행을 닦달하는 할아버지를 무마하면서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이 아주 리얼하게 그려진다. 한편, 베이징과 시안을 거치는 여행을 하는 편지 부분은 서구인의 눈에 비친 이국적인 풍광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중국을 그린다. 만리장성 투어를 마치고는, 돌팔이 한의사에게 약을 한 첩 짓기도 하고, 국수를 주문한 식당에서는 어디선가 나타난 할아범의 젓가락질로 사이좋게 국수 한 그릇을 싹 비우기도 한다.
 
다음 목적지인 시안에서는 드디어 할아버지는 자신이 그렇게 중국에 오고 싶어 한 이유를 살짝 드러내 보인다. 아주 오래 전, 만났던 ‘월드 센세이션’ 리안의 이야기가 중심으로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은 간직하고 싶은 청춘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 현실에서는 할아버지 카를의 죽음으로 비롯된 신원 확인 절차가 진행 중인 가운데, 키스는 베르터발트에서 확인한 할아버지의 시신을 보고서도 부인한다. 어느 순간, 현실과 허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만다. 에라, 모르겠다 어디 한 번 끝까지 읽어 보자!
 
<베이징 레터>는 아쉽게도 다 읽고 나서도, 헛헛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카를 할아버지의 좌충우돌 중국 여행기는 재밌었지만 현실 세계에서 허물어진 가족관계의 복원은 요원하게만 다가왔다. 그런 게 바로 새로운 밀레니엄 통일시대 독일의 현재 모습일까? 차라리 현재의 이야기를 쏙 빼 버리고 중국여행만으로 책을 구성했으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 사로잡힌 서구인들의 사고와 왜곡이 얼핏얼핏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요즘 마르틴 발저의 책들이 땡기는데, 과연 독일 작가의 책은 지루하다는 개인적 편견을 깰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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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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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성석제 선생님과 만남의 시간을 가졌다. 작가님으로부터 이번에 출간된 <칼과 황홀>에 대한 그리고 책에 들어 있지 않은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보통 작가와의 만남이라고 하면, 책을 먼저 읽고 나서 만나게 되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작가를 먼저 만나고 그 후에 책을 읽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어쩌면 책만 읽어서는 모를 그런 부분까지도 작가와의 만남 시간이 커버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올해 읽은 선생님의 또 다른 작품 <농담하는 카메라>로 음식 이야기에 대한 맛보기를 해서 그런지 이번 작품도 전혀 낯설지 않고 친근하다. 에세이 모음집의 제목에 등장하는 칼은 식재료로부터 맛을 끌어내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도구다. 음식을 조리하는 숙수의 기본 장착 아이템이라는 뜻이다. 숙수의 손끝에서 빚어지는 맛은 우리를 황홀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안에는 반드시 이야기가 있다. 선생님의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정말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음식은 으리으리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값비싼 고급 요리가 아니라 처음 간 중국의 호텔에서 천신만고 끝에 얻은 뜨거운 물로 우린 티백에 담긴 한 잔의 차(茶)고, 독일의 외딴 호텔에서 만난 축복과도 같았던 부드러운 아침 식사, 입국심사대에서 실랑이로 잡친 기분을 달래주는 정말 맛있는 에일 맥주라는 것이다. 정말 공감할 수밖에 없는 글들의 줄줄이 사탕이다.

선생님만큼의 주유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나라에 가면 그 나라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선생님의 지론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맥주의 나라 독일에까지 가서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버드와이저 맥주를 마실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인터넷과 블로그의 발달로 직접 가지 않고서도 눈으로 볼 수 있지만 오미(五味)의 직접적인 체험은 불가능하니까. 미처 몰랐는데 선생님은 20대가 되기 전까지 아예 육식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가? 한창 자랄 나이에 고기를 마다하다니, 놀랍군. 그런 연유에서인지 선생님은 국수를 특히 좋아 하시는 것 같았다. 라오스에 가셨을 적에는 아침에 닭볶음밥, 점심 저녁으로 연달아 닭국수를 드실 정도라고 하니 말이다. 소나 돼지 같은 육식을 즐기지 않는 분들도 닭고기에 대한 거부감은 좀 덜하지 않나 뭐 그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도 내가 한 질문이었지만, 예상대로 천하를 주유하는 선생님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이야기는 바로 글감이었다.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글 솜씨만큼이나 부러운 점이 바로 그런 에피소드의 행진이다. 인위적이지 않고, 물 흘러가듯 그렇게 유유자적한 삶을 사는 선생님의 삶 가운데서 마치 대어를 낚아채는 고수의 풍모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어신이 내리는 순간, 우리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비로소 이런 ‘황홀’경에 도달한다.

선생님은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서 가장 한국적인 입맛 때문에 어지간한 비위가 좋은 사람도 마다하는 세계 각국의 음식에 대한 면역이 생기셨다고 한다. 그 만남의 기원은 바로 선생님의 고향 상주에서의 어린 시절의 추억 때문이리라. 맛의 비결인 글루탐산의 원천인 콩으로 빚은 된장이 익어가던 아랫목의 추억, 논일을 도와주던 일꾼에게 공급하기 위해 할머니가 직접 빚으신 막걸리 주전자를 심부름 길에 통째로 마신 일, 사지를 쭉 뻗은 개구리 튀김과 배추전 이야기, 사회초년병 시절 법성포소주를 마셔가며 벌인 대작사건 등 읽기만 해도 빙그레 웃음이 번지는 에피소드가 책에 가득하다. 선생님이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말씀하신 “결핍에 의한 탐닉”이라는 말이 귓가를 때린다. 이제는 모든 것이 풍족하고 넉넉해졌지만, 우리네 술자리와 밥상머리에는 나중에도 두고두고 나눌 그런 이야기가 결핍되지 않았나 하는 그런 아쉬움 말이다.

이번 가을에는 선생님의 궤적을 좇아 사람 냄새와 사연이 담긴 음식 아니 술자리라도 한 번 가져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런데 어쩌면 그런 기회가 예상보다 더 빨리 올지도 모르겠다. 이번 주말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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