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리커버 특별판. 표지 2종 중 랜덤 발송)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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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5년 만에 다시 한명기 교수의 <광해군>을 다시 읽었다. 다시 읽다 보니 그 시절에 읽었던 기억들이 다시 살아났다. 역시 책은 다시 읽는 법인가 보다. 그리고 그 때보다 부수적으로 너튜브란 녀석이 있어서 관련된 여러 정보들도 같이 업그레이드하면서 읽을 수가 있어 좋았던 독서 체험이었다. 다시 읽기와 책 다이어트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고나 할까.

 

조선 역사에서 역모는 변수가 아닌 상수였다. 체제를 뒤집어 엎으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었고, 딱 두 번 성공했다. 한 번은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그리고 나머지는 이번에 읽은 광해군을 저격한 인조반정이다. 성공하면 반정, 실패하면 역모로 그야말로 집안이 풍지박산나는 그런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일단 이야기는 선조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조의 즉위로 중종 이래 치열하게 이어져온 훈구파와 사림의 대결은 사림의 승리로 귀결된다. 사화로 수많은 사림 출신 선비들이 죽어 나갔고, 최종장에서 권력은 사림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붕당정치가 시작되면서 사림들끼리의 헤게모니 투쟁이 전개된다.

 

일단 그 부분은 상당히 복잡하니 패스하고, 오늘의 주인공인 광해군에 대해 살펴 보도록 하자. 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는 바로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이다. 형님 임해군에 이어 선조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은 조선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임진왜란 중에 세자에 책봉되었다. 군주국가에서 후계자 문제는 가장 중요한 국가 대사 중의 하나였다. 자질이 시원치 않았던 임해군 대신 선조의 선택은 광해군이었다.

 

왜군이 동래에 상륙한 이래 파죽지세로 수도 한양까지 함락시키자, 선조는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오른다. 조선 개국 이래, 수도를 버리고 몽진길에 나선 첫 번째 임금이 바로 선조였다. 그리고 조선 군주 가운데 몽진 삼총사야말로 최악의 군주 트리오로 봐도 될 것 같다. 선조, 인조(3) 그리고 고종이 그들이다. 어쨌든 그렇게 나라가 망할 지도 모르는 위기 가운데, 세자가 된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펼쳤다. 아마 조선의 군주 가운데, 수도 말고 다른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보낸 군주는 광해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나 싶다.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가서 자신의 일신을 위해 명나라 망명까지 시도했지만, 그의 아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끌면서 전쟁에 지친 백성들을 위무하고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 모아 그야말로 사그라져 가는 사직을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러다 전쟁 발발 다음해에는 병까지 들었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광해군 인생에서 빛나는 1부였다면, 그 다음부터는 고난의 행군이 시작된다. 정비가 없었던 선조는 늘그막에 아들 광해군보다 더 젊은 인목대비를 들이고, 인목대비는 영창군을 낳는다. 어쩌면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장성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란을 극복해낸 장성한 예비 군주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창군의 탄생으로 광해군 즉위를 위한 스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이다. 선조 말기는 광해군에게는 그야말로 가시밭길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선조가 1608316일 사망하면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암투는 광해군이 조선 15대 군주로 즉위하면서 종결됐다. 일단, 광해군은 16년을 기다린 끝에 대권을 손에 쥘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첩첩산중처럼 보였다. 우선 임진왜란 이후의 국가 재건 사업을 추진해야 했다. 전쟁으로 실추된 왕권 강화 사업도 필수였다. 마지막으로 중원에서는 명청 교체기라는 조선 건국 이래 최대의 국제적 이벤트가 벌어지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재조지은이란 표현으로 대표되듯 명나라의 지원이 없었다면 조선 국가는 존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는 의식이 조선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그들은 무조건 명나라 편을 들어야 한다는 강상 윤리를 따지며 광해군을 압박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국가가 바로 서기 위해서는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 이에 광해군은 신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훗날 조선의 기본 조세제도를 도입한다. 기존 공납 제도의 폐단을 없애기 위한 혁신적인 법률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전국 단위의 전면적인 시행은 아니었고,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한 시범 운영이었다. 어쨌든 중종 대, 조광조와 정광필의 제안으로 그동안 논의만 되어오던 대동법의 시행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광해군의 치적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다음에는 대규모 궁궐영건 사업과 각종 편찬사업에 착수했다. 임진년 7년 대전란은 조선 사회 전반을 뒤흔드는 일대 사건이었다. 개국 이래 200년 동안, 그 전란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보낸 조선은 임진왜란을 통해 신분제를 필두로 해서 그동안 공고하게 지켜져 오던 사회 질서들이 무너져 내렸다. 정통 성리학이 국시인 조선에서 아무리 강상 윤리를 따져본들, 당장의 생존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전쟁 시기에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어지러워진 사회 질서를 바로 잡기 위해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그리고 전란으로 건강을 해친 이들을 위해 비싼 중국산 약재 대신 토산 약재를 이용할 수 있는 <동의보감>도 펴냈다. 전쟁 와중에 소실된 조선왕조실록을 다시 복간하는 작업도 동시에 추진했다. 그나저나 이런 도서 편찬작업은 글을 읽을 수 있는 양반 계층에나 해당되는 일일 텐데, 민생과는 좀 동떨어진 이슈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광해군은 전란 동안 불에 타고 무너져 버린 궁궐을 영건해서 국왕의 권위를 과시하고자 노력했다. 전쟁 복구가 우선이라는 신료들의 반대에도 막대한 비용과 인력이 소모되는 궁궐 영건 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자고로, 이런 대규모 토목사업은 가능하면 치세 기간 내에 자제하는 게 권력자의 기본이 아닌가. 그것도 전쟁으로 입은 피해들이 아직 복구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대단위 궁궐 영건사업은 아무리 왕권강화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반대자들의 비난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광해군 폐위 이유로 들었던 이른바 폐모살제의 근원이 되는 계축옥사(1613년 광해군 5)로 결국 나이 어린 영창군은 폐위되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광해군 집권기를 대표하는 북인의 영수는 임진왜란 의병 출신 정인홍과 훈구파 출신 이이첨이었다. 광해군 집권 초기에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삼고, 이항복과 이덕형 같은 서인 출신 정치인들도 등용하는 연립정권을 출발시켰지만, 광해군 후반으로 갈수록 이이첨을 필두로 한 북인들이 정권 요직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들에게 좀 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여 주었더라면, 과연 인조반정을 막을 수 있었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한명기 교수의 역사평전 <광해군>의 상당 부분은 결국 외교의 달인으로서의 광해군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는 건주-해서-야인 여진족으로 나뉘어져 있던 무리들을 통합하면서, 서방의 명나라와의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중에 선조에게 왜군과 싸울 기마병을 파견하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건국 이래 여진족을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조선에게는 있을 수가 없었던 일이었다.

 

명나라에 철저하게 신속하던 누르하치의 여진족이 점점 세력을 키워 가면서, 대국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만력제 이래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명나라는 자력으로 동방에서 발흥하는 누르하치의 후금을 상대할 수 없게 되자, 재조지은을 이유로 조선에 대후금과의 전쟁에 파병할 것을 요구한다. 그동안의 냉철한 정보수집과 첩보활동을 바탕으로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하지만, 중화중심의 화이관에 사로잡힌 조선 조정의 신료들은 부모의 나라을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며 파병할 것을 강력하게 광해군에게 주청한다. 오늘날에도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재조지은의 의리와 신료들의 주장 앞에 더 이상의 시간끌기 전술이 먹혀들지 않자 결국 광해군은 파병을 결정한다. 그리고 애써 기른 5천명의 조총수들을 비롯한 만여명의 병사들을 차출해서 이른바 심하전투에 파병한다. 이 때 도원수 강홍립을 불러, 가능하면 명군의 지휘를 받지 않으면서 만주 지역에서 융통성 있는 작전을 부탁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과연 현지에서 그게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다.

 

심하전투는 처음부터 조선군에게 불리한 전투였다. 우선 자국 영토가 아닌 타국의 영토에서 싸우게 되어 지리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게다가 오랜 행군으로 전투지에 도달해서는 이미 병사들이 지쳐 버린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보급도 원활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져 버렸다. 무엇보다 주력군이 되어야 하는 명군은 수만 많았지 오합지졸이었다. 명나라에서는 동방의 오랑캐 누르하치에게 한수 가르쳐 준다는 생각으로 20만에 달하는 대병력을 동원해서 여진족 무리를 일소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그동안의 전쟁으로 단련된 누르하치의 후금군을 너무 얕봤다. 게다가 만주 팔기로 알려진 이른바 철기대는 어중이떠중이 끌어 모은 명나라 기마병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총사령관인 요동경략 양호 아래 편성된 명나라 일선지휘관들은 서로 전공을 세우기에 바빠 실제 전투에서 상호 간에 도무지 협력이 되지 않았다. 결국 버일러로 임명된 누르하치의 아들들인 다이샨과 홍타이지 등이 주력이 된 후금군의 기습으로 모조리 격파되고 거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군 역시 3만의 후금군의 맹공 앞에 눈 녹듯이 사라져 버렸다. 이를 예상한 광해군의 전략적 승리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강홍립이 이끄는 조선파병군의 패전은 조선에 재앙이었다. 파병군의 절반이 현장에서 전사했고, 나머지는 노동력이 현저하게 부족한 후금의 포로로 끌려갔다. 남의 전쟁에 투입되었다가 사랑하는 이들을 잃은 고향에 남은 가족들의 절절한 심정이 시가로 남아 있다.

 

심하전투에 명나라의 강권과 조정 신료들의 열화와 같은 주장으로 파병하긴 했지만, 결국 광해군의 예측이 맞았다. 설상가상으로 요동 반도 전체가 만주족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면서 이른바 요민들이 조선에 들어오는 사태가 발생했다. 천조국 사람들을 냉정하게 대할 수도 없고 그야말로 조선 정부 입장에서는 낭패였다. 게다가 가도에 요동에서 패퇴한 모문룡이 실지회복을 주장하면서 주저 앉게 되면서 조선의 입장은 더욱 난감해졌다. 밀수업자에 가까운 깡패 모문룡은 조선 조정에 물자를 요구하고, 명나라에도 지원을 요청하면서 요동반도를 수복하겠다고 큰소리쳤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히려 후금과 내통까지 했다. 결국 명나라의 마지막 충신 원숭환에게 잡혀 처형당하고 만다.

 

또 다른 이야기이긴 하지만, 심하전투가 발생했던 1619년 과거에 급제해서 조정에 진출하는데 성공한 원숭환은 산해관에서 누르하치와 그의 후계자 홍타이지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천혜의 요새라는 산해관이 뚫리면 북경 역시 순식간에 함락될 지도 몰랐다. 원숭환은 산해관 서쪽에 영원성을 건축해서 산해관 이전에 후금을 저지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1626년 최신무기인 홍이포로 방비가 업그레이드된 영원성 전투에서 원숭환은 누르하치의 군대를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런 명나라의 충신 원숭환 혼자만의 노력으로 국운이 쇠하는 명나라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말이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 보자. 광해군은 명청교체기라는 동아시아 역사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조선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외교전문가였다. 정보전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은 광해군은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을 통해, 후금의 내부 사정을 비밀리에 보고받았다. 동시에 조선 내부의 정보가 외부로 유출되는 것도 철저하게 막았다. 이게 바로 외교의 기본이 아니던가.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발생했다.

 

광해군이 명나라와 후금 상에서 줄타기 외교를 하는 동안, 인조반정의 준비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평산부사 이귀가 중심이 되어 광해군이 최근에 다시 기용한 김류와 최명길 등의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의 조카 능양군 이종을 새로운 국왕으로 세우겠다는 역모가 진행되었다. 16233월 즈음해서 이들의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파악한 조정의 신료들이 이귀 일당을 잡아들여 국문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빗발쳤지만, 광해군의 움직임보다 반정군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무엇보다 국왕의 친위대 역할을 맡은 훈련대장이 반정군에 붙으면서 광해군은 결국 몰락해 버렸다.

 

그렇게 광해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고, 그때까지 정권을 잡고 있었던 북인들은 일거에 숙청되었다. 광해군 시절 이데올로그로 활동하던 정인홍을 필두로 해서 이이첨 일당이 바로 처형되었다. 친명배금 정책을 이행하겠다고 나선 서인 반정정권이 그렇다고 하루 아침에 광해군이 조심스럽게 추진해온 줄타기 외교를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명나라의 반정 추인을 받기 위해 노력을 하는 동시에 명나라와 후금 모두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문제는 인조 정권의 대세가 척화로 흐르면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국가적 위기를 초래했다는 점이다.

 

광해군식 외교가 빛나던 17세기 초반의 조선의 상황과 미중 무역대결의 여파로 관세협상의 파고가 몰아붙이는 현재의 상황이 묘하게 겹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반대파의 무력 쿠데타로 비록 정권을 잃긴 했지만, 광해군은 국익을 위해서라면 외교에서 사술도 마다하지 않는 군주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자국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재조지은같은 명분보다 현재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게 바로 민생을 해결하고 국가의 지속적 발전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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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격자 마르코폴로의 도서관
후안 호세 사에르 지음, 유지선 옮김 / 마르코폴로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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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신대륙이 발견되었던 16세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공포 그리고 미지의 대륙이 가져다 줄 물질적 축복에 대해 모두가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아르헨티나 출신의 후안 호세 사에르 작가의 책 <목격자>에서도 그런 시선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사에르 작가는 주인공 소년에게 익명을 부여했다. 하지만 동방의 이 엉뚱한 독자는 마음대로 그를 아노니마토(무명씨)라고 부르기로 마음먹었다. <목격자>가 내 손에 들어온 이상, 독서는 내 마음대로니 말이다. 이름이 있다면 다른 이름을 붙이는 게 안되겠지만, 주인공 소년은 이름이 없었으니까.

 

13세 고아 소년 아노니마토는 브라질 내륙으로 탐험에 나선 배의 사환으로 취업해서 대양에 나선다. 그리고 배 위에서 자신을 스스로 지킬 수 없었던 소년은 양성적 인간 취급을 당한다. 당시에는 그런 게 일상이었는지 좀 의심스럽다. 그의 여정은 내륙에 상륙한 뒤, 현지 인디언들을 만나면서 180도로 바뀌게 된다. 선장을 필두로 한 다른 동료들이 모두 인디언들에게 살해당한 것이다. 아노니마토 홀로 구사일생으로 생존하는데 성공했지만, 끔찍한 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신을 데프-라 부르는 인디언들이 살해당한 아노니마토의 동료들을 잡아먹은 것이었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그래. 그리고 왜 그들은 또 디에고는 살려 두었단 말인가. 아노니마토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인디언들은 석쇠를 준비해서 거대한 말 그대로 카니발을 벌였다. 그리고 술도 마시고 교접도 하며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복귀했다.

 

인디언들과 그렇게 10년의 세월을 보내고 난 뒤, 인디언들은 아노니마토를 해치지 않고 카누에 태워 자신이 있던 사회로 보내졌다. 아노니마토는 스페인에 돌아가 자신이 목격한 것들을 정부 관리와 사제들에게 보고한다. 그리고 케사다 신부를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나는 <목격자>를 읽으면서 아노니마토가 스페인으로 복귀하면서부터가 이 소설의 핵심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도원에서 아노니마토는 7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아버지 같은 케사다 신부에게 글쓰기와 읽기 라틴어 히브리어 같은 전문적인 영역의 학업적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다. 이런 배움이 훗날 아노니마토가 자신이 경험한 일들을 상당히 전문적 관점에서 기록으로 남기게 되는 기반이 되었다.

 

그 다음에는 아노니마토는 유랑극단을 만나 희곡배우이자 전속배우로 변신을 거듭한다. 브라질에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꾼이자 배우가 된 것이다. 누구보다 자신이 직접 목격하고 체험한 이야기들을 아노니마토보다 더 잘하고 연기할 수 있는 자가 누구란 말인가. 그리고 어느 순간, 아노니마토는 그 일을 그만둘 결심을 하게 된다. 동료 배우들의 아이들을 거둬 유사가정을 이루게 되는 아노니마토.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에서 희망도서로 처음에 빌려서 읽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 그리고 지난 주말에 반납하러 가서 연장한 다음, 앉은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다 읽을 수가 있었다. 16세기 초,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모티브로 삼아 사에르 작가는 기억과 구전에 기반한 신화 같은 이야기들을 재창조해냈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경험들을 했던 아노니마토는 반세기 전의 사건들을 기억의 저장소에서 소환하고 분석한다. 뛰어난 지식인들에 버금가는 해석과 상상력 넘치는 주인공의 서사 전개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미지의 신세계와 조우했던 소년의 기억들은 그렇게 새로운 세기에 재탄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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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아이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지음, 손정숙 옮김 / 지식의풍경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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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5년 전에 산 책을 이제야 읽는다. 산 책은 얼마나 시간이 걸리든 읽는다라는 모토를 가지고 책을 읽는다. 금방 다 읽을 줄 알았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긴 내가 책 한 권에만 목숨 걸고 읽는 게 아니니. 다 읽고 나니 속이 시원한 걸 그래.

 

1차 세계대전 후, 정치적 혼란과 극심한 경제적 고통에 시달리던 독일 민족에게 오스트리아 상병 출신 베테랑 아돌프 히틀러라는 희대의 독재자의 출현은 구세주처럼 받아 들여졌다. 전투가 아닌 전쟁에 진 독일인들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으로 야기된 엄청난 금액의 전쟁배상금과 영토 할양 등의 굴욕적 조건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차에, 느닷없이 등장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나치)당의 히틀러는 독일 사람들에게 장밋빛 희망을 약속하기 시작했다. 일자리가 없는 이들에게는 일자리를, 배가 고픈 이들에게는 빵을 주겠다는 간단한 슬로건보다 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구호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는 더더욱.

 

책에서는 히틀러청소년단이라고 하지만, 원어는 히틀러유겐트였다. 책을 펼치면서 가장 뒤에 등장하는 제12SS 무장친위대 히틀러유겐트 사단에 대한 부분부터 읽었다. 청소년기를 히틀러 통치 아래서 보낸 독일의 청년들은 그 누구보다 맹렬하게 조국을 위해 연합군과 대항해서 싸웠다. 그들의 무시무시한 전투력은 상대였던 연합군 병사들도 인정하는 바였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이래, 압도적 공군력과 병력으로 독일 수비대를 몰아붙이던 연합군을 상대로 캉에 투입한 히틀러유겐트 사단은 그야말로 총탄이 다 떨어져서 더 이상 저항이 불가능할 때까지, 아니 문자 그대로 죽을 때까지 싸웠다. 이 지점에서 히틀러의 가스라이팅이 얼마나 무서운지 다시 한 번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책의 초반으로 돌아가 히틀러가 1933130일 히틀러가 바이마르 공화국의 총리가 되면서 전제주의 국가가 되는 모습부터 살펴보자. 히틀러를 필두로 한 나치 일당은 집권하자마자 독일 청소년들을 개조할 필요를 느끼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가스라이팅 작업에 착수한다. 집권 후, 라인란트 진주와 재무장 그리고 베르사유 협약에서 탈퇴하면서 전 국민적 지지를 얻기 시작한 총통에게 대부분의 독일 청소년들은 열광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존재 자체가 위대한 조국 건설이라는 대업을 위한 것이라는 점에 동의했다.

 

희대의 독재자이자 사기꾼이라는 속성을 파악한 아이들의 부모들이 총통에 대한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면 아이들은 지체 없이 당국이나 악명 높은 게슈타포에게 부모를 신고했다. 이런 방식과 과정을 거쳐 자유가 흘러넘치던 바이마르 공화국은 경찰국가 제3제국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소년들은 의무적으로 히틀러유겐트 소속으로 편입되어, 어려서부터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실제로 고속도로 건설 작업에도 투입되어, 그야말로 손에 피가 흐를 때까지 곡괭이질과 삽질을 해야했지만 이미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린 청소년들은 독일 시민으로서 당연히 감수해내야할 그런 임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소년들은 소녀들대로 조직되어 시골 마을에 내려가 육아와 요리 그리고 훗날 청년들이 전쟁터에 징집되어 갔을 때, 생산대 역할을 하기 위한 철저한 준비과정을 경험하게 됐다. 이 모든 상황들이 나치가 미래에 대비한 전쟁 준비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유대인에 대한 홀로코스트 역시 빠질 수가 없는 아이템이다.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강제수용소와 대규머 가스 처형실 이전에, 히틀러 일당들은 독일 제국 건설에 도움이 되지 않는 진짜 독일 시민들을 비밀리에 대규모로 처형하는 시스템을 가동하고 있었다. 정신질환자나 장애인 그리고 동성애자들을 강제수용소나 비밀병원으로 보내 제거했다. 이런 방식을 익힌 나치는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나서, 아인자츠그루펜으로 점령지의 유대인들을 처형할 수 없게 되자 가스처형실이라는 극악무도한 방식을 도입해서 수백만에 달하는 인원들을 학살했다.

 

독일의 모든 청소년들이 그렇게 무력하게 히틀러에게 맹종한 것은 아니었다. 훗날 백장미단으로 알려지게 되는 한스, 소피 숄 남매와 더불어 카를 슈니베 같은 청년들은 히틀러유겐트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히틀러가 숨겨온 진실을 알게 되면서 사실을 알리는 전단지 살포 같은 저항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시도는 비극적으로 끝났지만, 적어도 히틀러 치하의 독일에서 아무런 저항활동도 없었다는 오명만은 면하게 해준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히틀러가 벌인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이른바 히틀러의 아이들은 자신들이 희대의 악당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아니 한스나 소피 숄 그리고 카를 슈니베 같은 청년들이 그들보다 먼저 진실을 깨닫고 행동에 나섰던 것이다. 미니시리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도 나오지만, 유대인 학살에 대한 전모를 모르고 있던 평범한 독일 시민들은 미군이 촬영한 홀로코스트 영상을 보면서도, 프로파간다라며 믿지 않았다. 히틀러 정권이 선전해온 가짜 뉴스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과제인지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는 대목이었다.

 

수전 캠벨 바톨레티 작가는 생존한 히틀러의 아이들과 직접 만나거나 이메일 혹은 전화 같은 방식으로 인터뷰를 통해 피리 부는 사나이에게 홀렸던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우리에게 전달한다. 한 세기만에 다시 전세계적으로 극우 정치들이 득세하고 목소리를 내는 가운데, 되풀이돼서는 안 될 비극의 역사를 체험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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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8 1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히틀러유겐트는 중국에서는 홍위병으로 부활했죠. 맹목적인 저돌성이 독재자의 가스라이팅에 철저하게 이용된 사례들은 일면 끔찍하고 일면 안타깝고 그리고 무서워요.

레삭매냐 2025-07-28 18:26   좋아요 1 | URL
전체주의 국가에서 획일적인 교육을
받고 자라난 청소년들의 모습이
말씀해 주신 대로, 상당히 유사해
보이네요.
그리고 비극적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에서도요.

카스피 2025-07-28 22: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히틀러 유게트를 보니 중국의 소분홍이 생각나더군요.현재 소분홍들은 중국의 정치 지도부가 너무 착해서 중국이 대국의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믿고 있더군요.

레삭매냐 2025-07-29 08:22   좋아요 1 | URL
저는 카스피님 덕분에 ‘소분홍‘
에 대해 처음 알게 되었네요.

과연 소분홍들 다운 발언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레이스 2025-07-29 18: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소분홍 처음 듣네요!
오래전 읽었던 책인데,,, 인종우월주의, 순혈주의가 만들어낸 비극 넘 충격이었어요

레삭매냐 2025-07-29 20:32   좋아요 1 | URL
제3제국의 역사에 대해 관심
이 많아서 이러저러한 책들
을 많이 읽어서 아는 내용들
이라고 생각했지만 또 그 시
대를 지나온 히틀러유겐트
입장에서의 시각은 새롭더군요.
 
레오 아프리카누스
아민 말루프 지음, 이원희 옮김 / 교양인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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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되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아민 말루프의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드디어 출간됐다. 세상에 이 책이 나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그리고 바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지만, 정작 다 읽는 데는 두달여가 걸렸다. 사실 집중해서 읽는다면 많이 걸려도 일주일 정도면 되지 않았을까. 상관없다. 드디어 다 읽었고, 독서는 역시나 대만족스러웠다.

15세기 말, 서방에는 그라나다로 알려진 알 안달루스의 가르나타 출신의 알 하산 무함마드 알와잔이 바로 이 책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주인공이다. 무슬림 가정에서 자란 하산은 카스티야 왕국의 레콩키스타로 나스르 왕조가 가르나타를 잃은 뒤, 마그레브의 페스로 이주했다. 이 부분은 왠지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타리크 알리의 <석류 나무 그늘 아래>의 후속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수한 그라나다 시절을 뒤로 하고, 실향민이 된 하산 가족은 전혀 새로운 환경의 페스에서 적응해야 했다. 그라나다에서 검량관으로 활동하던 하산의 아버지는 페스에서 애증의 관계를 엮어간다. 어려서부터 책과 학문을 사랑한 주인공 하산(미래의 조반니 레오)은 페스에서 착실하게 학업을 쌓아 가면서 미래의 자산을 쌓아간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는 외숙부와 함께 말리 왕국의 팀북투로 외교 사절로 출동하기도 한다. 사막을 가로 지르는 카라반의 일원으로 하산을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평생의 친구가 될 하룬과의 관계도 페스에서 시작된다. 하룬은 하산의 누이 마리암과 사랑에 빠지지만, 타향에서의 삶은 하산 가족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산에게도 대운이 터서 재물을 쌓아 상인으로 성공하는 입지전적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여인 복도 많아서 가는 곳마다 애인들이 끊이지 않는다. 외숙부가 죽고 난 뒤, 그의 딸인 파티마와 결혼해서 딸 사르와트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누이 마리암을 괴롭히던 자르왈리를 하룬이 암살하면서, 페스에서 하산은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여기까지가 역사 소설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가르나타와 페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다음 하산의 무대는 맘무르 왕조의 술탄 칸수가 지배하는 카이로다. 당시 하산 같이 가르나타에서 쫓겨난 무슬림들은 동방에서 한창 부상 중이던 오스만 제국이 가르나타를 다시 카스티야 왕국의 손에서 해방시켜 줄 거라고 믿고 있었다. 지금은 포르투갈 세력과 카스티야 왕국의 도전으로 마그레브 상당 부분이 기독교도 진영에 떨어졌지만, 맘루크 왕조와 오스만 제국이 힘을 합쳐 서진을 개시한다면 무슬림 제국의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을 부활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카이로에서도 하산은 누르라는 오스만 제국 술탄 조카 미망인 누르와 만나 로맨스를 꽃피운다. 하산이야말로 16세기판 '펠릭스'가 아닐까 싶다.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된 오랜 친구 하룬에게 발탁되어 하산은 이번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가게 된다.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여러 제국을 오가면서, 16세기에 이런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인사가 얼마나 되었을까 과연 의문이 든다. 다양한 언어에 능통한 하산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서 외교 사절로 유감 없는 활약을 펼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오스만 제국이 사실은 맘루크 왕조와 동맹을 맺을 생각이 아니라, 맘루크가 다스리는 이집트를 복속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온 하산은 이집트 공략에 나선 오스만 제국과의 치열한 전쟁에 휩싸이게 된다.술탄 칸수에 이어 맘루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의 자리에 오른 투만베이는 월등한 군세를 자랑하는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지만, 결국 게릴라전 끝에 배신당하고 포로가 되어 처형당한다. 한 명의 문제적 인간이 이 모든 아수라장 속에서 생존에 성공하고 삶을 영위해갈 수 있다는 상황이 너무 신기하게 다가왔다.

이것만으로도 하산의 파란만장한 삶은 충분히 후대에 기억할 만한 그런 서사였다. 하지만 주인공의 간난신고는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 무대인 로마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성지 메카 순례를 마치고 어머니와 가족이 기다리는 튀니스로 가던 제르바에서 하산은 기독교 해적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그렇게 기독교 노예 신세로 전락한 무슬림 지식인 하산은 로마 교황 레오 10세가 다스리는 로마의 산탄젤로성으로 끌려간다.

그 누구보다도 세속적이었던 메디치 가문 출신의 레오 10세에게 가르나타-아프리카 출신 지식인이자 외교관이었던 하산은 소중한 존재였다. 동방의 오스만 제국은 술레이만 대제가 지휘하는 정복 사업으로 로도스를 함락시키고, 서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빈이 다음 목표였다. 서방에서는 카스티야와 신성로마제국을 아우른 칼 5세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면서 이탈리아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레오 10세 그리고 그의 조카 줄리오 추기경(훗날 클레멘스 7세)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교황령 확대라는 지극히 세속적인 목표에 매진하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하산은 그야말로 신이 보내준 사자가 아니었을까. 이에 레오 10세는 하산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고, 조반니 레오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양자로 삼을 정도의 절대적 신임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레오 10세는 줄리오 추기경의 유대계 정부 마달레나를 이제 레오 아프리카누스가 된 하산의 부인으로 삼게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마달레나는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그가 바라던 아들 주세페를 안겨 준다.

로마에서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기념비적인 저술 <아프리카 지리지>을 쓸 준비하는 동시에, 로마 지식인들에게 아랍어를 가르키는 교사의 역할도 맡게 된다. 물론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라틴어와 기독교 교리 그리고 복음서를 배우는 학생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 중에 작센 출신으로 한스라는 이름의 사제가 있었는데 훗날 한스 사제가 그의 목숨을 구하게 된다.

로마에서 계속해서 꽃길을 걸을 것만 같았던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은 그를 전폭적으로 지지하던 레오 10세가 선종하고, 하드리아노 6세가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레오 아프리카누스의 운명이 다시 꼬이기 시작한다. 산탈젤로성의 죄수 같은 신세로 유폐되어 있던 그는 개혁적 성향의 하드리아노 6세가 선종하고 줄리오 추기경이 클레멘스 7세가 되면서 다시 한 번 인생역전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고난이 끝난 건 아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의 칼 5세 대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자신의 전략적 파트너로 삼았고, 1525년 2월 24일 파비아 전투에서 코냑 동맹군이 칼 5세의 제국군에게 대패하고 포로로 잡히면서 교황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에 놓이게 되었다. 결국 1527년 5월 6일 란츠크네이트 용병대가 주축이 된 제국군이 로마에 진입하면서 비극의 서막이 올랐다. 이 사건은 훗날 "사코 디 로마(로마 약탈)'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우리의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는 이 대살륙전 속에서도 신의 가호와 옛 제자 한스 사제의 도움으로 살아남는 무쌍의 정수를 보여준다.

우선 격변의 16세기를 살아낸 문제적 실존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는 마치 "포레스트 검프"처럼 가르나타 함락에서부터 시작해서, 페스로의 강제 이주, 마그레브 일대를 주유하고 맘루크 제국의 멸망을 지근거리에서 직접 목격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를 알현하기도 했다. 로마에서는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비호를 받기도 했다. 로마 약탈은 레오 아프리카누스 일생에 방점을 찍는 대사건이었다. 그는 정말 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체험한 몇 세기에 나올까 말까한 그런 인물이 아니었던가.

아민 말루프는 이 방대한 대서사시의 신화적 주인공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역사 소설이라는 방식으로 현대에 소환하는데 성공했다. 영국 BBC에서는 이미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고 한다. 무슬림과 기독교 세계를 경험하고, 명멸하는 제국들의 흥망성쇠를 직접 목격한 매력적인 인물 레오 아프리카누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드라마를 기대해 본다면 너무 과도한 기대일까. 대가의 작품은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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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5-07-25 20: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읽고싶어지게 만드는 리뷰입니다

레삭매냐 2025-07-25 20:56   좋아요 0 | URL
리뷰어에게 최고의 상찬이십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09-27 19: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 읽고 다시 와 레삭매냐님의 리뷰 정독했습니다. 방대한 내용을 어쩜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 놓으셨는지요. 저는 엄두가 안 나더라고요.
이 작품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작가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레삭매냐 2025-09-27 19:2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어느 너튜버가 이 책
을 상찬하는 걸 보고서 출간되길
오매불망 기다렸답니다.

비슷한 결의 작품에 관심이 있으
시다면, 타리크 알리의 <석류나무
그늘 아래>를 추천해 드립니다.

슬프고 처연하고 흥미진진한
그런 이야기랍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 책이랍니다.
단,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빌려야
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만.

페넬로페 2025-09-27 19:27   좋아요 1 | URL

꼭 읽어보겠습니다^^
 
우리의 제철은 지금
섬멍 지음 / 창비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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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토 파실린나의 절판책을 사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 앉은 자리에서 읽은 책이다. 모두 8개의 이야기들로 구성된 웹툰이다. 우리네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단 말이지.

 

어라, 맨 처음 이야기가 뭐였더라. 무당산에서 장삼봉 태사부에게 태극권을 연마하던 장무기처럼 그새 까먹은 모양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바로 도루묵이다. 임금님이 피란 시절에 하도 맛나게 자셔서 은어라고 하다가, 나중에 먹어 보니 별 맛이 없어 도루 묵이라고 부르라고 했던가.

 

벼는 보통 익으면 고개를 숙이는데 이 녀석 도루묵은 익을수록 고개를 빳빳이 쳐든다고. 그 이유는 알배기가 한 녀석들이 익으면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했던가. 톡톡 터지는 알맛에 도루묵을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우리네 먹거리에는 그런 재미도 있어야 또 맛도 배가가 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비린내 나는 녀석들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리.

 

마라샹궈에서 발전한 게 마라탕이라고 했던가. 고수도 그렇지만, 향신료 특유의 향과 맛 때문에 잘 찾지 않는 음식이지 싶다. 그 이야기에 같은 동네에 사시면서 호구조사하시는 아저씨에 대한 에피소드가 있었던가. 너무 금방 후루룩 읽다 보니 이야기들이 뒤죽박죽된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스몰톡 정도로 하고 넘어가도 좋지 않을까 싶다. 예를 들어, 어디 가시나라고 묻는다면 네 어디가요라고... 대답하면 너무 버릇 없어 보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답답형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이 이어진다면 그 또한 낭패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물경 하루에 1미터씩 자랄 수도 있다는 죽순, 죽피에 대한 이야기도 재밌다. 그리고 보니 얼마 전에 들른 쭈꾸미 전문점에서 대나무를 왕창 베어 버렸는데 그 뒤에 얼마 안 있다가 방문해 보니 훤하던 대밭에 대나무들이 그새 자라 있더라. 그 정도란 말이지. 문득 그 때 자른 대나무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좀 궁금해졌다.

 

음식을 해서 먹는 즐거움도 있지만, 식재료를 준비하는 과정도 재밌단 말이지. 물론 음식 만들기라는 노동에 들어가는 수고를 빼놓고 또 이야기할 순 없겠지만. 남이 해주는 건, 라면도 맛있다라는 말이 괜히 나온게 아니라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주인공과 함께 사는 망토가 장을 보러 갔다가 체크카드에 잔액이 없어서 낭패를 당한 이야기도 재밌었다. 가끔 그렇게 체크카드 한 장 달랑 들고 무언가 사러 갔다가 펑크가 나면 참 난감할 것 같다. 뒤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항상 마트에서 준비된 자세로 계산에 대한 만반의 준비를 하는 사람으로서 또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나는 보통 집에서 음식 준비보다는 뒤처리를 담당하는 역할을 자처한다. 우리 동생은 설거지가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는데, 예전에 룸메이트랑 같이 살던 시절부터 설거지를 해와서 그런지 나는 설거지에 대한 그런 거부감은 1도 없다. 밥 먹는 대로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설거지 작전에 투입하는 편이다. 그리고 개수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는 꼴도 보지 못한다. 누가 먹었던 간에 바로 설거지부터 한다. 밥을 먹었으니 그 다음에 내 차례가 아닌가. 망토가 초반에 상을 펴라고 했더니만 정말 상만 펴는 장면을 보고는... 그게 상차림 끝은 아니지 않은가. 이 양반 너무 센스가 없으신 건 아니고. 하긴 그런 이야기가 먹거리 차림새에 들어가야 또 이야기가 다채로워질테니까.

 

참 그리고 보니 원제가 제철음식에 관한 것이었지. 누가 모르는가. 다들 제철에 나는 식재료를 이용해서 무언가 한 끼라도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은 걸. 아 그리고 보니 마지막 에피소드가 냉면에 대한 이야기 아니었나. 사실 냉면이 무슨 영양가 있는 음식이라고. 순전히 여름에 시원하게 즐기는 맛으로 먹는 게 아닌가. 요즘에는 냉면값도 하도 올라서 선뜻 먹게 되질 않는다. 만화에서는 다시다를 이용한 육수내기 기법을 보여주는 것 같던데 말이지. 마트에 들렀다가 다시마를 보고는 기념사진을 한 장 찍었다. 요즘에는 밀키트 냉면으로도 괜찮은 녀석들이 많아서 간단하게 먹기 부담이 없지 싶다. 고기 한 점 들어가지 않은 냉면 12,000원은 솔직히 너무 비싼 거 아니구.

 

닐이 너무 덥다 보니, 한 끼 챙기기가 쉽지 않다. 더위를 싫어하는 나로서는 부디 여름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아이 더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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