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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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어느 날, 윌리엄 스토너가 내 삶에 들어왔다. 그는 미국 중부 미주리 주 분빌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갈라진 손 틈에서 흙을 떨어낼 수 없는 그런 농부였다. 스토너 역시 억센 농사일을 거들었다. 그런 아버지 밑에 지내던 주인공이 우연한 기회에 농과대학으로 진학하게 되었다가 영문학의 세계에 매료되어 교육자의 길을 걷게 되는, 어떻게 보면 평범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자수성가의 롤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남자의 삶의 어떤 점에 나는 매료된 걸까.

 

빌 스토너를 창조해낸 존 윌리엄스를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처음 듣게 됐다. 이미 오래 전에 작고한 작가로, 생전에 네 권의 소설을 발표했다고 한다. 그의 작품 <스토너>는 사후 반세기 뒤에 고향인 미국도 아닌 유럽에서 재평가를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고 우리에게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소설 <스토너>는 주인공의 부고로 시작해서 그의 전 생애를 다루고 있다. 톰 행크스가 말한 대로 어느 청년이 대학에 가 교수가 된 이야기라는 것이 이 소설을 집대성하는 한 문장일 것이다. 하지만, 존 윌리엄스는 어떻게 보면 진부해 보이는 개인의 내면세계를 집요할 정도로 깊숙하게 파고들면서 독자의 공감대를 형성한다. 작가는 간결하면서도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소설을 진행하면서, 인생의 실패자로 보일 수도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미국이 패권국가로 발돋움하게 된 두 번의 전쟁과정 동안, 대학이라는 학문의 전당에서 세월을 보낸 스토너 교수의 삶은 참으로 파란만장했다. 가진 것 없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 자신도 당연히 농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의 삶의 여정은 그를 교육자의 길로 인도했다. 사람은 자신을 어떤 길로 인도할 인생의 멘토를 만나기 마련인데, 미주리 대학교 영문학과의 아처 슬론 교수가 이 소설에서는 그런 역할을 했다. 농과대학생이 교양 강의 시간에 들은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그의 삶의 진로를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과연 그가 가진 학구열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자신은 당시엔 몰랐겠지만, 학문에 대한 사랑이 온갖 역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폭풍 같은 스토너의 삶의 현장에서 그를 영원한 안식처로 인도했다고 하면 과언일까.

 

독자라는 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그의 삶은 평범해 보였지만 그 역시 다른 이들처럼 비슷한 좌절과 고통에 시달려야 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스토너는 멘토 아처 슬론 교수의 충고를 받아 들여 친구 데이비드 매스터스나 고든 핀치처럼 열정에 휩싸여 전쟁터로 나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연구를 계속했다. 징병 유예가 어쩌면 그의 주홍글씨처럼 남을 수도 있었지만, 무소뿔처럼 혼자서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막을 수는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유명한 클레어몬트 학장의 집에서 열린 파티에서 세인트루이스 출신 아가씨 이디스를 만나 사랑에 빠진 스토너는 일사천리로 결혼까지 하게 된다. 영문학에 대한 첫 번째 사랑은 스토너의 인생 동안 계속해서 유지되었지만, 두 번째 사랑이었던 이디스와의 결혼은 훗날 스토너의 삶에 잿빛 암운을 드리우게 하는 결정적 실수였노라고 소설은 조용하게 증언한다.

 

스토너가 가정에서 멀어질수록 그의 학문과 강의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가정에서 찾을 수 없었던 내면의 행복과 안식을 그는 다른 곳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사랑하는 딸 그레이스가 태어나면서 아버지가 된 스토너는 이제는 타인처럼 되어버린 부인 이디스를 대신해서 가사와 일까지 도맡아 하는 헌신적인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고향 아버지의 밭에서 아무 말 없이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기대할 만한 소출이 나지 않는 밭은 가는 심정이지 않았을까. 좀 더 심하게 말하자면, 이디스는 그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간신히 자신만의 서재를 꾸미며 안식을 찾은 스토너의 공간을 빼앗고, 사교모임을 한다는 핑계로 낯선 이들을 쉴 새 없이 집으로 불러들이고, 딸 그레이스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꼴을 보지 못해 교육을 빌미로 둘 사이를 떼어놓는 장면은 압권이었다.

 

스토너가 이런 내적 문제에 봉착해 있었다면, 외적으로는 같은 영문과 동료 교수 로맥스와의 불화가 한몫했다. 게다가 로맥스가 자신의 상관격인 학과장이 되고, 엉터리 대학원생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찰스 워커 사건으로 두 사람의 사이가 결정적으로 틀어지게 된다. 로맥스는 스토너가 정식교수로 임용되지 못하게 막는 것은 물론이고, 고참 선임교수임에도 불구하고 강사들이나 맡는 1학년 학부 강의를 맡기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에게 주어진 종신교수직(tenure)은 그가 로맥스에게 맞설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이제 나이가 들어 고집불통이 된 스토너는 로맥스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에게 주어진 강의를 묵묵하게 해내면서 끊임없이 주어지는 가시밭길을 헤쳐 나간다. 스토너는 창조적인 기지를 발휘해서 로맥스에게 반격을 가하기도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그런 해묵은 감정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어 버린다. 그리고 위기마다 등장하는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사이드킥인 고든 핀치와의 격의 없는 대화는 존 윌리엄스 식의 유머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렇게 무미건조해 보이는 스토너의 삶에 어느 날 작은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세상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토너 영감이 그런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다니, 믿기지 않는다. ‘기존 관념’의 기준에서 볼 때, 대학원 세미나 강의 시간에 만난 캐서린 드리콜과의 예상하지 못했던 연애는 불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상실한 불혹의 남자가 보통 사람이라면 십대에 경험했을 그런 불같은 사랑에 눈을 뜨게 되고 일탈로 이어지는 과정은 자못 흥미진진하다. 곧게 뻗은 철로 밖으로 갑자기 이탈한 기차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존 윌리엄스는 가정에서 사랑 받지 못하는 남자에게 주어진 유일한 선택이라는 정말 진부해 보이는 플롯을 전개하면서, 스토너의 마지막 사랑을 배움의 코드로 치환하는 수완을 보이기도 한다. 정말 교수님다운 발상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 <스토너>를 읽으면서, 존 윌리엄스가 기술한 어떤 대목에서는 너무 공감이 되어 격한 감정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굴곡진 빌 스토너의 삶을 읽으면서 그가 체험한 삶의 희로애락에 그만 몰입되어 버렸다. 스토너의 삶에서 고통과 인내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누구에게나 단 한 번 밖에 주어지지 않은 삶 속에 지고의 행복 대신 왜 원하지 않는 고통이 그렇게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걸까? 소설 속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무조건적인 인내가 고통을 경감시키고, 쾌락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바라는 궁극의 행복이 증진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가 문학에서 찾은 영혼의 해방구 이미지는 책의 표지에서 층층이 쌓인 책과 아주 멋지게 형상화되어 있다. 문학이 삶의 모든 것을 다 설명해 주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스토너>에서처럼 타인의 삶을 통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삶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야말로 오늘도 내가 소설을 꾸역꾸역 읽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어쨌든 수고하셨소 스토너 교수님, Rest in peace.

 

[리딩데이트] 2015년 1월 15일 ~ 21일 오후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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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의 그녀
가쿠타 미츠요 지음, 최선임 옮김 / 지식여행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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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 역시 순전히 소설리스트에서 소개된 <종이달> 덕분에 읽게 되었다. 정말 오래간만에 오프라인 서점에 들렀다가 습관처럼 신간 도서 코너를 둘러보게 됐다. 지난 11월부터 시행된 도서정가제 덕분에 이제 더 이상 구간은 잘 사지 않게 되는 경향이 생긴 것 같다. 도서관이나 아니면 중고서점을 이용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어쨌든 서점 매대에서 일본 작가 가쿠타 미치요의 <종이달>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나오키상을 받았다는 내용을 얼핏 본 것 같다. 물론 신간 <종이달>이 나오키상 수상작은 아니다. 그럼 그녀의 나오키상 수상작은 뭐지라는 궁금증에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봤다. 바로 이 책 <대안의 그녀>가 가쿠다 미치요 작가의 나오키상 수상작이었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나온 책인데 벌써절판의 운명에 처해졌다.

 

그 때 이미 난 다른 책을 읽고 있었는데 <대안의 그녀>를 한 번 읽기 시작하니까 자꾸만 이 책에 손길이 갔다. <대안의 그녀>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남편 슈지와 결혼하면서 전업주부로 세 살박이 아카리를 키우고 있는 사요코, 그런 사요코가 구직에 나서 만나게 된 플래티나 플래닛의 사장 동갑내기 사장 아오이 그리고 아오이의 고등학교 시절 단짝친구 물고기 새끼[魚子]라는 이름의 나나코. 작가처럼 주인공 모두 여성이다. 가쿠타 미치요는 사요코의 현재와 아오이의 과거라는 교차서사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현재의 사요코는 딸 아카리와 더불어 공원순례를 다닌다. 자신처럼 숫기가 없어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딸을 보며, 어느 순간 자신도 자신만의 일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직업전선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이웃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경단녀(경력단절녀)에 아이까지 가진 유부녀가 일자리 찾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남편 슈지와 아카리를 맡아주는 시어머니의 시선도 곱지 않다. 이런 와중에 대뜸 자신을 받아 주겠다고 하니 그녀는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그녀의 보스는 바로 또 다른 주인공 아오이다.

 

그렇게 현재의 주인공이 사요코라면, 과거의 주인공은 아오이다.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가 대도시 요코하마에서 왕따사건에 휘말린 아오이는 부모님을 졸라 시골 군마에서 새출발을 다짐한다. 왕따는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인 문제인 걸까? 책을 읽는 내내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는 사요코와 아오이가 겹쳐 보였다. 너무 튀지도 그 반대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에 서서 아오이는 하루를 살아간다. 그러다 만난 나나코는 그녀와는 너무 다른 성향의 밝은 성격을 가지고 있기에 아오이는 당연히 그녀는 자신 같은 삶을 살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한다. 물론 나나코 삶의 이면을 알기 전까진 말이다.

 

가쿠타 미치요 작가는 마치 한편의 미스터리물을 풀어 가는 그런 구성을 따른다. 현재의 사요코에게 과거의 아오이가 가진 사연에 대한 실마리를 슬쩍 흘리며, 독자를 유혹한다. 도대체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까하고 독자를 유혹해내는 작가의 뛰어난 수완이 돋보였다. 한편, 사요코는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청소대행업을 하면서 존재감이 엷어진 자신의 자아를 찾기 시작한다. 사요코가 어렵게 찾은 두 번째 직업은 청소다. 지우고 싶은 과거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리고 노동과 그에 따른 소득을 통한 자존감의 회복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한 걸까. 그녀의 대척점에 놓인 매사에 자신감 넘치고 앞뒤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스타일의 사장 아오이를 그녀를 마냥 부러워한다. 마치 그녀와 함께라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을 것 같다고까지 생각하지만, 그 정점에서 그녀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는 친구 나나코가 왕따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 적극적으로 나서서 변호해주지 못한 자신의 비겁한 모습에 환멸하던 아오이의 감정이 연상됐다. 나나코와 아오이가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 펜션 아르바이트를 마친 뒤 감행했던 일탈에서 나이든 독자는 그녀들이 행여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지 노파심이 앞선다. 정말 그들은 어디로 가려고 했던 것일까.

 

이 작품에서 가쿠타 미치요 작가의 방점은 모두 관계로 모아진다. 우리는 살기 위해 사회적 관계가 필요하다. 그런데 관계는 일방통행이 아니다. 내가 시리게 투명한 관계를 원한다면, 진정성 있게 상대방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렇지 않은 관계는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휘발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왕따문제는 삶이 너무 단조롭기 때문이라는 작가의 지적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뒤틀리고 파행적인 관계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영혼을 어떻게 파괴할 수 있는지 강 건너 기슭에 서 있는 그녀들의 이야기를 통해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물질적 궁핍 때문에 아이들이 서로에게 잔인해질 수 있다는 점도 그 과정에서 읽을 수가 있었다. 나나코가 사는 임대주택이라는 공간이 누군가에게 관계의 카스트제도로 작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대안의 그녀>의 결말은 상대방을 이해하게 된 이들의 새출발로 귀결된다. 아니 새출발이라는 진부한 표현보다 리셋(reset)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진정성 있는 관계를 바라는 사요코처럼 작은 희망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보다 상대방을 우선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녀처럼 용기를 내어 자신의 실수에 대해 사과하고 리셋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보통 이상의 용기가 필요하겠지만. 사요코와 아오이 그리고 나나코의 이야기를 통해 관계에 대해 한 수 배웠다.

 

[리딩데이트] 2015116~ 18일 오후 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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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노버트 데이비스 시리즈 Norbert Davis Series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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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년 새해 들어 오래 전에 작고한, 그리고 당대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글을 연달아 접하게 됐다. 지금 막 읽은 미국 출신의 하드보일드 작가 노버트 데이비스를 필두로 해서, 플래너리 오코너의 단편들 그리고 오늘 막 도착한 존 윌리엄스의 <스토너>가 그 주인공들이다. 먼저 정말 처음 들어보는 노버트 데이비스란 작가는 마포 김사장님의 열렬한 찬사 덕분에 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게다가 철학 천재 비트겐슈타인이 절찬한 바로 그 소설이라고 하니 어찌 거부할 수 있으리오.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1940년대 멕시코의 로스알토스라는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해서 펼쳐지는 탐정물이다. 하드보일드 소설답게, 감상이나 한가한 경치 묘사 따위는 일체 거부하고 액션과 속도감 넘치는 진행이 돋보인다. 우리의 주인공으로 사립탐정 도앤은 뚱보 스타일의 냉혈한이다. 자신의 안위를 위협하는 악당들에게 총질하는 것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으며, 이익을 위해 거짓말도 서슴지 않는다. 제목부터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라고 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탐정이 누구인진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버디로 등장하는 거구의 그레이드데인으로 끝장 비주얼을 가진 카스테어스의 존재감도 빼놓을 수 없다. 낯선 장소의 등장한 낯선 인물처럼 탐정 도앤의 곁을 지키는 친구 역시 낯설기 짝이 없다.

 

아즈테카 호텔을 떠난 일단의 미국인 관광객들이 로스알토스 마을에 지진 때문에 외부와 통신과 교통이 단절되어 고립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해프닝들은 확실히 재밌다. 게다가 로스알토스에서는 흉악한 범죄자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암약하고 있다고 한다. 거의 완벽한 설정이 아닌가. 여느 탐정물처럼 초반의 등장인물 소개와 어떻게 해서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가 세팅되고 나면 나머지는 휙휙 돌아가는 수레바큇살처럼 일사천리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요즘 들어 이상한 독서 습관 때문에 이책 저책 지분대는 바람에 바로 단숨에 읽진 못했지만, 가뜩이나 느려 터진 요즘 책읽기에 비하면 나름 선방한 셈이다.

 

탐정소설의 리뷰를 쓰면서 항상 하는 고민이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으면서,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이끌어 가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줄거리를 다 알려 주면 도대체 어느 독자가 예의 리뷰를 보고 그 책을 보려고 하겠는가. 그러니 적당한 관심을 보여 주면서도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적당히 넘어가주는 그런 기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개인적으로 탐정소설 리뷰를 쓸 적에는 주로 캐릭터 분석에 공을 들이는 편이다.

 

이 소설에서 개인적으로 나의 관심을 끈 캐릭터는 바로 고아로 미국 사립학교 출신의 여교수라는 재닛 마틴 양이었다. 하드보일드 탐정물에 어울리지 않는 블랙유머 때문에 고전했다는 노버트 데이비스 작가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소설 속에서 재닛 양과 주인공 도앤이 벌이는 다양한 대화를 통해 접할 수 있는 1940년대 시대상을 읽는 재미도 쏠쏠했다. 아마 소설이 발표될 즈음인 1943년 2차세계대전이 한창이었는지 유럽대륙을 제패한 히틀러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그리고 소설에서 희대의 악당으로 나오는 보티스트 보노파일이 멕시코혁명의 전설이었던 사파타와 판초 비야가 몰래 숨겨 놓은 막대한 무기를 횡재하게 됐다는 설정도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전 세계 유명한 관광지를 누비는 미국 관광객들에 대한 노버트 데이비스 식의 신랄한 풍자도 빼놓을 수 없다. 1920년대말 시작된 대공황에 허덕이던 미국 경제는 유럽과 태평양에서 시작된 2차세계대전으로 미국본토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상태에서 전선에서 소용되는 막대한 군수물자를 생산해 내면서 불황에서 벗어나 완전고용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런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은 패권국가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소득과 휴가시간의 증가로 특권층 뿐만 아니라 보통 시민들도 해외여행에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게 됐다. 그렇게 관광지를 찾은 미국인들의 관광형태를 로스알토스라는 공간적 배경을 통해 역시 지식인 계급으로 좀 배운 페로나 대위의 입을 빌어 신랄하게 비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느 나라고 가서 그 나라 말이 아닌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그들의 자신감이란.

 

소설을 관통하는 상당히 시니컬하지만 능숙하게 사건을 대하는 탐정 도앤의 쿨함도 하드보일드를 더 뜨겁게 만들어주는 요소지만, 코르테스의 멕시코정복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노버트 데이비스의 역사적 접근방식이 놀랍다. 결국 코르테스의 부관 페로나의 친구였던 길 데 리코가 남겼다는 연대기 기록을 바탕으로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사건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는 주인공이 바로 재닛 양이 아니던가. 그녀의 순진함은 능구렁이 같은 도앤의 잔머리와 묘한 화학반응을 일으키면서 소설을 더 재밌게 만들어준다. 이렇게 당대에 자신의 작품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않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 탐정소설가는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에 탐정소설이 갖출 수 있는 모든 재밌는 요소들을 두루 투입했던 것이다. 그리고 반세기도 넘어서 우리에게 도착했다.

 

책과 함께 온 르 지라시 8호는 아직 읽어보진 못했지만 기대가 크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여전히 신비에 휩싸인 그리고 나같은 범인(凡人)은 잘 알지도 못하는 철학천재 비트겐슈타인을 마케팅에 활용한 아이디어는 끝내줬다. 브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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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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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그래픽 노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청소년 유해매체로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기를 다룬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는데, 청소년 유해매체라니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알고 보니 청소년 유해매체 논란은 이 책에 묘사된 몇몇 섹스 씬 때문이었고 결국 나중에 판정이 번복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 말고도 지난 세기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인류사에 상처로 남았다는 스페인 내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픽 노블은 주인공 안토니오 알타리바(지은이와 같은 이름으로 작가의 아버지다)가 요양원으로 죽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난 이 책의 제목을 자꾸만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작가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안토니오의 고향 스페인 사라고사 지방의 페나플로로 독자를 인도한다. 안토니오는 소작농이었던 아버지처럼 밭을 일구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시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는 소년에게 일거리를 덥석 안겨줄 정도로 도시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버티기 힘들었던 시골처럼 도시에서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친구 바실리오와 자동차 타는 꿈을 꾸던 안토니오는 지주의 차를 훔쳐 달리던 바실리오가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다시 한 번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21살에 사라고사에 도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날, 스페인은 딴 세상이 되었다. 1931년 마침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수백년 왕조국가였던 스페인도 이웃 프랑스의 뒤를 따라 공화국이 되긴 했지만, 역시나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는 여전했고 주인공 안토니오 같은 무산계급에게 모두가 평등한 공화국의 이상은 요원하기만 했다. 자기 같이 어려운 이들을 돌봐주는 하숙집 생활과 수많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안토니오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몸으로 습득하게 됐다. 혼란과 무질서가 반복되던 과정 중에,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집단이 공화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한다. 청년이었던 안토니오 역시 반군에 의해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지만, 이상이 다른 집단에 속할 수 없었기에 목숨을 걸고 정부군에 투항해서 반파시스트 의용군으로 활약을 펼친다.

 

어려서부터 명사수였지만, 사람을 살상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안토니오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운전실력을 발휘해서 전선을 누비며 우편물을 전달한다. 안토니오가 속한 아나키스트 의용군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지만, 전세는 녹록하지 않았다. 같은 파시즘 진영인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프랑코 반군은 공화국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유일하게 공화국을 지원하던 소련의 지나친 간섭과 군편제의 개편 등으로 의용군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갔다. 격렬했던 반란군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오는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들이 피신했던 프랑스 역시 나치 독일의 전격전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게 낯선 망명객들을 환영할 처지가 아니었다.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안토니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서 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간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시장 거래를 통해 많은 돈을 벌기도 하지만, 약자들을 착취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기에 과감하게 거부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하는 안토니오. 독재자 프랑코가 집권한 스페인은 더 이상 그가 꿈꾸던 조국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기득권 세력과 영합한 프랑코주의는 사회와 시민들을 억압했다. 사촌 엘비라의 도움으로 귀국해서 그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맞서 싸웠던 팔랑헤당 출신의 기업가 도로테오 아신의 수하에서 일하게 된다. 사라고사에서 내로라하던 지주였던 도로레오는 공기업의 지분은 물론이고 상당한 부동산과 특히 막대한 수익을 내던 과자공장 경영을 통해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 아내 페트라와 결혼한 안토니오는 자신의 혁명대의가 죽었음을 깨닫는다. 아나키스트 혁명가에게 가정 우선주의를 주문하는 결혼은 무덤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다른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처럼 시체처럼 살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 이후의 삶은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와의 불화로 결국 별거로 이어지며 안토니오는 조기 은퇴를 하고 자발적으로 양로원 생활을 택한다.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했던 양로원 생활 역시 늙은 아나키스트에게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강압적인 치료와 자신의 영혼을 좀먹는 보이지 않는 두더지와의 싸움은 결국 노전사의 선택지를 하나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독자는 맨 처음 만화의 시작점으로 되돌아온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제목처럼 아나키스트처럼 살다간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아들 안토니오가 재구성한 작품이다. 정식 교육은 물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한 청년의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배운 아나키즘을 신조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상주의자는 끝내 자신의 지키고자 했던 이상과 전혀 다른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다. 그의 삶 전반부가 이상에 가득찬 희망의 전주곡이었다면, 전쟁 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의 석탄과 각종 물자를 암거래하던 시절과 귀국해서 지낸 스페인에서의 삶은 죽음에 앞선 진혼곡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의용군 시절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과 함께 만든 납탄 반지는 세월이 갈수록 안토니오에게 삶의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전설적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신발을 불태우며 승자(프랑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정의로운 투쟁을 포기하기 위해 결심하는 장면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보는 것이 점점 두려워진다. 꿈에 등장한 프랑코의 독수리가 그의 눈을 쪼아 먹자 아무 것도 안 보이니 차라리 낫다는 고백은 처연하기만 하다.

 

그렇게 한 세기를 아우르는 역사를 직접 체험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머물던 양로원 원장이 보냈다는 월 시설 이용료 34유로 청구서는 작가 안토니오로 하여금 아버지의 투쟁을 이어 받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용감한 남자의 기록을 생전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아들이 완성했다는 점에서 안토니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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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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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먹먹하다. 요즘 유행인 경장편 분량의 글인데, 도대체 읽히지가 않는다. 하물며 책 읽는 사람도 이럴진대 글 쓰는 이는 오죽했을까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한 번 읽다가 실패하고 나서 한참 있다가 다시 읽기 시작했다. 34년 전에 빛고을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이렇게 현실적이고 가슴 저리게 기록해낼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새삼 놀랐다. 내가 그녀의 작품과 처음 만난 것이 <희랍어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이만큼의 문학적 도약이 있었단 말인가.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한강 작가는 다양한 시각으로 1980년 광주를 독자에게 인도한다. 시민군으로 도청사수에 참가한 소년의 시각으로 혹은 그 소년이 목격한 친구 정대 혼(魂)의 시각으로, 참척한 슬픔을 지닌 어머니의 시각으로. 그 고통의 나락에서 살아남았지만, 죽음보다 삶이 더 고통스러운 이들의 시각으로 회피하고 싶은 진실에 한걸음씩 다가선다.

 

소설의 소년은 동호다. 소년은 상무관에서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시민들의 신원 확인을 위해 정성스레 기록을 남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이 어린 소년으로 하여금 총을 들게 했을까. 헌정질서를 뒤집은 쿠데타 세력을 용서할 수 없어 일어선 시민들에게 폭도라는 누명을 씌우고, 군대를 동원해서 함부로 총질하고 살상한 이들에 대한 심판과 진실규명은 아직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역사는 희비극으로 한 번씩 반복된다고 했지만, 2014년 4월 세월호 비극에 대한 진실 규명 역시 공전하고 있는 마당에 한강 작가가 눈물로 쓴 기록들이 전혀 새롭지 않게 다가온다.

 

한강 작가가 쓴 그 도시, 열흘의 기억을 읽으며, 참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던 것 같다. 하지만 모나미 볼펜 한 자루가 생산해낼 수 있는 참혹한 고통과 약솜이 상징하는 힐링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타이핑하는 손마디의 힘을 빼버렸다. 한때 유행하던 정의사회 구현 같은 거창한 구호보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소설 속 캐릭터들의 작은 외침의 가운데 소년이 있었다. 그런 비극을 겪고 나서도,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 소용돌이 속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냐는 등장인물의 독백이 새삼스럽다.

 

지금 우리가 아무런 제재 없이 읽는 책들도 예전에는 검열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했던 엄혹한 시절이 있었단다. 빛고을 그 난리 가운데 살아남아 작은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하던 그녀에게 날아온 일곱 번의 따귀는 존재의 부정에 다름 아니었다. 국민에게 권력을 위임받은 국가가 무슨 권리로 주인에게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명령한단 말인가. 지금은 우스개처럼 들리는 일이지만, 검열관이 먹줄로 죽죽 그은 원고로 고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얼마나 참담했을까. 물리적으로 뺨을 맞은 치욕보다 자신이 애써 창작한 작품을 훼손당한 수치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그렇게 극한의 고통을 겪은 이들에겐 광장의 분수대조차 들어설 심적 여유가 없었다.

 

아우슈비츠에서 프리모 레비가 스스로에게 수없이 물었던 이것이 인간이냐는 질문은 1980년 빛고을의 봄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공수부대 저격수의 총탄에 쓰러진 동료 시민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진 비무장 시민들에게 저격수들은 주저 없이 총탄을 박아 넣는다. 이것이 인간인가? 오로지 단결된 다수의 힘만이 정의를 가로 막는 억압의 고리를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동조하지 않는 대다수의 침묵이 두렵다. 이것이 인간인가? 비루한 삶은 그렇게 연장되었고, 산 자는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실에 대해 증언하라는 연구가의 압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압박하는 사람도, 압박당하는 사람도 고통스럽지 않을까 하는 양가적 감정이 스르륵 고개를 드민다.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열흘을 잊을 수 없다는 동호 엄마의 회상 부분에서는 정말 어쩔 수 없이 감정이 무장해제 되어버렸다. 자식을 잃은 참척의 비극은 올해 다시 되풀이 되었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소복을 입은 동호 엄마가 경찰서에서 내 아들 살려내라며 외치는 절규하는 장면에서는 다시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가 말도 안 되는 물질적 보상이나 명예회복 같은 신원(伸冤)을 바랬던가. 아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사건의 책임 소재와 진실 규명을 원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대가 우발적으로 그런 조준사격을 했단 말인가. 현실계에서 다반사처럼 벌어지는 말도 안 되는 일들의 연속극이 문학적 허구를 능가할 판이다.

 

고통의 기억 속에서 한땀 한땀 새긴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는 80년 빛고을에 대한 진혼곡이다. 80년 5월의 빛고을을 읽기 위해선 깊은 심호흡이 필요할 것이다. 어떤 이에겐 생소한 과거의 사건일 수도, 어떤 이에겐 고통의 재연일 수도, 또 어떤 이에겐 불온한 선동으로 읽힐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리 힘들지라도 대저 문자해독이 가능한 이라면, 반드시 읽어야할 책이다. 단언컨대 2014년 최고의 책으로 꼽기에 일말의 부족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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