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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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그래픽 노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청소년 유해매체로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 때문이었다. 스페인 내전기를 다룬 그래픽 노블이라고 하는데, 청소년 유해매체라니 고개가 절로 갸우뚱해졌다. 알고 보니 청소년 유해매체 논란은 이 책에 묘사된 몇몇 섹스 씬 때문이었고 결국 나중에 판정이 번복되었다고 한다. 그 이유 말고도 지난 세기 베트남 전쟁과 더불어 인류사에 상처로 남았다는 스페인 내전을 다뤘다는 점에서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래픽 노블은 주인공 안토니오 알타리바(지은이와 같은 이름으로 작가의 아버지다)가 요양원으로 죽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래서인지 난 이 책의 제목을 자꾸만 <어느 아나키스트의 죽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작가는 플래시백 기법으로 안토니오의 고향 스페인 사라고사 지방의 페나플로로 독자를 인도한다. 안토니오는 소작농이었던 아버지처럼 밭을 일구는 농부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도시로 탈출을 감행하기도 하지만, 아무런 기술도 없는 소년에게 일거리를 덥석 안겨줄 정도로 도시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그가 버티기 힘들었던 시골처럼 도시에서의 삶도 팍팍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 친구 바실리오와 자동차 타는 꿈을 꾸던 안토니오는 지주의 차를 훔쳐 달리던 바실리오가 교통사고로 죽으면서 다시 한 번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21살에 사라고사에 도착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동차 운전면허를 딴 날, 스페인은 딴 세상이 되었다. 1931년 마침내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수백년 왕조국가였던 스페인도 이웃 프랑스의 뒤를 따라 공화국이 되긴 했지만, 역시나 부르주아 계급의 지배는 여전했고 주인공 안토니오 같은 무산계급에게 모두가 평등한 공화국의 이상은 요원하기만 했다. 자기 같이 어려운 이들을 돌봐주는 하숙집 생활과 수많은 토론 과정을 거치면서 안토니오는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을 몸으로 습득하게 됐다. 혼란과 무질서가 반복되던 과정 중에, 모로코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파시스트 집단이 공화국 정부에 반란을 일으키고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한다. 청년이었던 안토니오 역시 반군에 의해 징집되어 전선에 투입되지만, 이상이 다른 집단에 속할 수 없었기에 목숨을 걸고 정부군에 투항해서 반파시스트 의용군으로 활약을 펼친다.

 

어려서부터 명사수였지만, 사람을 살상하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안토니오는 누구보다 잘할 수 있는 운전실력을 발휘해서 전선을 누비며 우편물을 전달한다. 안토니오가 속한 아나키스트 의용군들은 모두가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에 나섰지만, 전세는 녹록하지 않았다. 같은 파시즘 진영인 독일의 히틀러와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프랑코 반군은 공화국을 궁지에 몰아넣었고, 유일하게 공화국을 지원하던 소련의 지나친 간섭과 군편제의 개편 등으로 의용군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갔다. 격렬했던 반란군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안토니오는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길에 오른다. 그들이 피신했던 프랑스 역시 나치 독일의 전격전에 속수무책으로 패배하게 낯선 망명객들을 환영할 처지가 아니었다. 숱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면서, 안토니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합류해서 반파시즘 투쟁을 이어간다.

 

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암시장 거래를 통해 많은 돈을 벌기도 하지만, 약자들을 착취해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자신의 이상과 맞지 않기에 과감하게 거부하고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선택하는 안토니오. 독재자 프랑코가 집권한 스페인은 더 이상 그가 꿈꾸던 조국이 아니었다. 가톨릭 교회의 절대적 지지를 얻은 기득권 세력과 영합한 프랑코주의는 사회와 시민들을 억압했다. 사촌 엘비라의 도움으로 귀국해서 그가 전쟁터에서 적으로 맞서 싸웠던 팔랑헤당 출신의 기업가 도로테오 아신의 수하에서 일하게 된다. 사라고사에서 내로라하던 지주였던 도로레오는 공기업의 지분은 물론이고 상당한 부동산과 특히 막대한 수익을 내던 과자공장 경영을 통해 많은 이윤을 창출하고 있었다. 그 즈음에 아내 페트라와 결혼한 안토니오는 자신의 혁명대의가 죽었음을 깨닫는다. 아나키스트 혁명가에게 가정 우선주의를 주문하는 결혼은 무덤이었다. 그리고 그 역시 다른 대부분의 스페인 사람들처럼 시체처럼 살기를 선택했다고 말한다.

 

그 이후의 삶은 독실한 신자였던 아내와의 불화로 결국 별거로 이어지며 안토니오는 조기 은퇴를 하고 자발적으로 양로원 생활을 택한다. 생의 마지막을 보내야 했던 양로원 생활 역시 늙은 아나키스트에게는 안식처가 되지 못했다. 강압적인 치료와 자신의 영혼을 좀먹는 보이지 않는 두더지와의 싸움은 결국 노전사의 선택지를 하나도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독자는 맨 처음 만화의 시작점으로 되돌아온다.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은 제목처럼 아나키스트처럼 살다간 아버지 안토니오의 삶을 아들 안토니오가 재구성한 작품이다. 정식 교육은 물론,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던 한 청년의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배운 아나키즘을 신조로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행복을 추구할 수 있었지만, 이상주의자는 끝내 자신의 지키고자 했던 이상과 전혀 다른 세상과 타협할 수 없었다. 그의 삶 전반부가 이상에 가득찬 희망의 전주곡이었다면, 전쟁 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의 석탄과 각종 물자를 암거래하던 시절과 귀국해서 지낸 스페인에서의 삶은 죽음에 앞선 진혼곡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의용군 시절 생사를 함께 하던 동지들과 함께 만든 납탄 반지는 세월이 갈수록 안토니오에게 삶의 견딜 수 없는 무게로 다가왔다. 소중하게 간직해왔던 전설적 아나키스트 부에나벤투라 두루티의 신발을 불태우며 승자(프랑코)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정의로운 투쟁을 포기하기 위해 결심하는 장면은 <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의 하이라이트가 아닐 수 없다. 안토니오는 자신의 양심을 괴롭히는 문제들을 보는 것이 점점 두려워진다. 꿈에 등장한 프랑코의 독수리가 그의 눈을 쪼아 먹자 아무 것도 안 보이니 차라리 낫다는 고백은 처연하기만 하다.

 

그렇게 한 세기를 아우르는 역사를 직접 체험한 한 남자의 이야기는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머물던 양로원 원장이 보냈다는 월 시설 이용료 34유로 청구서는 작가 안토니오로 하여금 아버지의 투쟁을 이어 받는 계기가 되었다. 오랜 세월 정의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운 용감한 남자의 기록을 생전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아들이 완성했다는 점에서 안토니오는 위로를 받을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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