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요람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 / 아이필드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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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금으로부터 2년 전 85세의 나이로 영면의 세계로 떠난 미국 출신의 작가 커트 보네거트의 출세작인 <고양이 요람>을 읽었다. 지금까지 모두 세 권의 보네거트가 쓴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먼저 읽었던 <마더 나이트>가 가장 정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마더 나이트> 역시 만만치 않은 책이긴 하지만 말이다.

1963년에 출간된 <고양이 요람>은 보네거트의 네 번째 소설로 원자폭탄의 아버지라 불리는 가상의 인물인 펠릭스 호니커 가족사를 파헤치는 저널리스트 존의 심층취재와 후반부의 산로렌조 공화국에서의 모험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야기는 내내 보코논교라는 산로렌조의 존슨이라는 사람이 만든 사이비 종교의 외경(外經)에 나와 있는 글들을 계속해서 인용하고 있다. 카라스, 듀프라스, 그란팔룬, 웜피터 그리고 포마에 이르기까지 도대체 그 정체들을 알 수 없는 어휘들의 홍수가 쏟아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 존도 보노콘교의 신자였던가? <제5도살장> 첫 머리에 뻔뻔스럽게 정신분열적인 글쓰기를 시도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아마 <고양이 요람>도 비슷한 차원에서 접근을 해야만 했던 걸까. 글 중에서 “역동적 긴장”이라는 표현이 어찌나 이리도 공감이 가던지.

존이 소설 속에서 쫓는 원자폭탄의 아버지이자 노벨상 수상자로 등장하는 펠릭스 호니커 박사의 모델은 실존인물인 1932년에 노벨화학상을 받은 미국 출신의 화학자 어빙 랭뮤어라고 한다. 보네거트는 이 책에서 모든 인간사의 해결책처럼 제시되는 과학과 기술, 동시에 과학기술이 채워줄 수 없는 부분을 파고드는 (사이비) 종교를 전면에 내세운다. 호니커 박사의 자식들을 통해 고인 생존의 모습을 스케치해 나가던 존은 아이스-나인이라는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을 단번에 파괴시킬 수 있는 가공할 절대무기의 존재를 알게 된다. 이것은 50-60년대를 휩쓸던 핵무기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포와 불안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후반부는 카리브 해에 위치한 가상의 섬나라 산로렌조 공화국으로 떠난 존의 취재여행에 집중된다. 존은 그곳에서 그가 찾아 헤매던 호니커 박사들의 자식들을 모두 만나게 되고, 허무주의적이면서도 자연친화적인 사이비 종교인 보코논교와 맞닥뜨리게 된다. 과연 우리 인류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건지 소설은 뒤죽박죽인 상태로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냉전 시대의 무한군비경쟁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담고 있는, 반전 평화주의라는 작가의 뚜렷한 메시지는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지만, 마치 쥘 베른의 철지난 공상과학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이비 보코논교의 이야기들은 작가가 정말 정신분열적인 상태에서 글을 쓴 게 아닌가 하는 의심마저 들게 만들고 있었다. 커트 보네거트는 언젠가 자신의 글에 대해 평가를 매긴 적이 있었는데 <제5도살장>과 더불어 <고양이 요람>에 당당하게 A+를 주었다. 소설 중에 나온 절대 자신의 글에 스스로 색인을 달지 말라고 했던 색인전문가의 경고가 떠올랐다.

냉소적인 블랙유머로 무장한 커트 보네거트는 핵폭탄으로 지구를 몇 번이나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핵무기 경쟁이 치열하던 시대상을 “실뜨기 놀이”(cat's cradle)에 비유하고 있다.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기도 했던 그는 이미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을 교화할 것이 아니라, 그전에 학교에서 지배자들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가르쳐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의 주장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생소한 커트 보네거트 특유의 용어들이 낯설어서 책읽기에 집중력이 떨어지긴 했지만 다시 한 번 한 시대를 풍미한 작가의 위트 넘치는 블랙유머들을 맛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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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파티아 성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7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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쥘 베른이라는 이름에는 언제나 근대 최초의 SF 작가라는 명칭이 따라 다닌다. 그가 활동하던 19세기 말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비행선 혹은 잠수함을 이용해서 육해공 심지어는 우주까지 망라하는 공상과학 소설을 발표했다.

특히 그의 대표작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경이의 여행” 시리즈는 모두 54편으로, 1892년에 발표된 <카르파티아 성>은 37번째에 해당한다. 세상의 모든 신기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던 쥘 베른은 이 책에서 유럽의 오지인 오늘날의 루마니아(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의 일부였던)의 트란실바니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작가는 왜 그 많은 장소들 중에서 트란실바니아를 골랐을까? 책을 읽으면서 알게 되지만 고대 로마시대 다키아 지역으로 불린 이래 유럽의 변방으로 이 글이 씌여지던 19세기말에도 여전히 미신과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일상화되었던 지역이라는 점에 주목하자. 이 책보다 5년 뒤에 출간된 브람 스토커가 “드라큘라”의 본고장으로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를 고른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카르파티아 성>은 현대 루마니아의 중앙부를 이루는 트란실바니아 중에서도 카르파티아 산맥에 자리한 웨르슈트 마을에서 시작된다. 마을의 양치기인 프리크가 떠돌이 방물장수에게 망원경을 구입하고, 예의 저주 받은 성으로 알려진 로돌프 데 고르치 남작의 “카르파티아 성”에서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보고를 하자, 대뜸 삼림감독원이자 마을 판사인 콜츠 씨의 미래의 사윗감인 닉 데크가 자발적으로 원인규명에 나선다.

닉 데크와 함께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탐험에 나선 파타크 의원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의 경고를 무시하고 성에 진입하려다가 낭패를 당한 채 마을로 철수를 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전반부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렇게 실의에 빠져 있던 마을에 프란츠 데 텔레크(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다)와 그의 하인 로츠코가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본격적인 미스터리로 접어들기 시작한다.

텔레크 백작과 희대의 오페라 가수 스틸라의 슬픈 사랑 이야기에, 그들의 사랑의 장애물이었던 고르치 남작과 그의 과학자 동료 오르파니크의 이야기가 곁들여지면서 카르파티아 성의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이야기들이 어우러져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 신화를 모티브로 삼았다는 책 소개가 문득 떠올랐다.

5년 전에 불의의 사고로 죽은 스틸라와 다시 만나기 위해, 죽음마저도 불사하는 델레크 백작의 모습은 독사에게 물려 죽은 에우리디케를 죽음에서 구하기 위해 하데스의 명부로 뛰어드는 오르페우스의 현현이었다. 과연 델레크 백작은 스틸라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도대체 카르파티아 성의 비밀은 무엇인가.

역시 백여 년 전의 글이라 그런 진 몰라도, <카르파티아 성>의 놀라운 비밀은 오늘날에 보면 사실 아무 것도 아닌 문명의 이기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역시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답게 쥘 베른은 당시 놀라운 문명의 발명품이었던 장치들을 이용해서, 여전히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힘의 존재를 믿고 있던 이들을 계몽하고 있었다.

스틸라라는 아름답고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여성을 사이에 둔 연적 텔레크 백작과 고르치 남작의 로맨스 대결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요소다. 이야기의 전개에 있어, 개연성이 좀 떨어지긴 하지만 고르치 남작과 오르파니크의 카르파티아 성 칩거의 이유에 있어 아주 납득이 가지 않는 것도 아닌 듯 싶었다.

카르파티아 성이 쇼르(Chort:악마)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웨르슈트 마을 주민들과 탐험에 나선 닉 데크와 파타크 의원의 갈등 구조는 전근대적 미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들과 근대이성에 의한 합리주의의 충돌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거기에 이천년전 그리스 신화의 전설을 근대 버전으로 가미해서 쥘 베른은 트란실바니아라는 미지의 공간을 배경으로 한 미스터리를 멋지게 창조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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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왕비의 유산 - 개정판 쥘 베른 걸작선 (쥘 베른 컬렉션) 8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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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려서 읽었던 책들의 저자들을 다시 만나고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바로 읽었던 마크 트웨인이 그렇고, <인도 왕비의 유산>을 쓴 쥘 베른이 그렇다. 전자의 경우에는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그리고 후자의 경우에는 <15소년 표류기>와 <해저 2만리> 같은 소설을 통해 아주 오래 전에 만났었다. 성인이 되어서 만나게 되는 옛 추억의 작가들의 이름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우선 <인도 왕비의 유산>에는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독일)의 운명을 가른 전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역시 프랑스 출신으로 애국심에 넘치는 쥘 베른은 소설에 등장하는 사라쟁 박사와 독일 예나 출신의 화학자 슐츠 교수라는 캐릭터를 통해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시도한다. 제목으로 나오는 인도 왕비의 어마어마한 유산(5억 프랑)이 예의 두 사람에게 유산으로 분배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프랑스인답게 사라쟁 박사는 유산으로 받은 돈을 인류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 쓸 것을 선언한다. 한편, 자신의 유산의 절반을 사라쟁 박사에게 강탈당했다는 원한을 품은 슐츠 박사는 미국 오리건 주의 모처에 슈탈슈타트(강철도시)를 세워 예의 유토피아 프랑스빌을 파괴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사라쟁 박사의 아들 옥타브의 친구이자 조국 프랑스를 사랑하는 열혈청년 마르셀 브뤼크망은 슈탈슈타트에 비밀리에 침투를 해서 슐츠 박사의 가공할 만한 음모를 알아내는데 매진을 한다. 엄청난 자금과 뛰어난 소재 그리고 최첨단 기술로 40km 이웃한 프랑스빌의 10만 명의 사람들과 도시를 단방에 날려버린다는 끔찍한 계획을 알아낸 마르셀 하지만 그 자신도 생명의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인도 왕비의 유산>은 표면적으로는 각기 다른 두 개의 이상을 가진 과학자들의 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이 책의 저술 8년 전에 프랑스가 프로이센에게 당한 처절한 패배가 자리 잡고 있다. 이 전쟁의 결과 프랑스는 알자스와 로렌 지역의 상당 부분을 프로이센에게 강제로 빼앗기게 된다. 주인공 중의 한 명인 마르셀의 고향이 알자스라는 설정 또한 눈여겨 볼만하다.

19세기에 이르러 전기의 도입으로 이루어진 눈부신 과학 발전의 힘으로 인류의 유토피아 건설에 한 발자국 다가가게 된 이면에는 전쟁기술 역시 발전하게 되면서 그 어느 때보다 대량살상의 위험이 극대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슐츠 박사의 예에서도 보이듯이 거대 자본과 전쟁을 위한 기술력의 결합이 평범한 삶을 사는 현대의 인류에게 얼마나 큰 위협이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쥘 베른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 보지 못해서 그가 계몽주의자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프랑스빌을 건설하면서 중국인 노동자들인 쿨리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이용하면서도, 신세계의 유토피아인 프랑스빌에 황인종의 발을 들여 놓지 못하게 하겠다는 인종차별주의적 제도적 장치를 옹호하는 듯한 발언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어쩔 수 없는 19세기 프랑스 지식인의 한계였을까?

작가의 눈에 비친 독일의 세계 정복 야욕에 대한 예언은 정확하게 반세기 후에 아돌프 히틀러의 제3제국을 통해 현실화된다. 아울러 게르만 민족이 가장 우수하다는 자의적 우생학에 근거한 슐츠 박사의 망상은 나치즘의 그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과연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쥘 베른의 공상과학 소설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가 있는 걸까.

비록 엉성한 이론이긴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미 지구 궤도를 도는 인공위성의 개념을 도입하고, 거대 포탄에 이산화탄소를 탑재한 생화학 무기에 대한 발상을 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쥘 베른의 상상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 수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상상력은 많은 면에서 현실화되기도 했잖은가 말이다.

한 가지 <인도 왕비의 유산>을 읽으면서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 중의 하나는 미국의 영토 내에서 이뤄지는 불법적이면서도 폭력적인 슐츠 박사의 행동이 어째서 미국 연방정부의 개입을 초래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배경은 미국이지만, 프랑스와 독일간의 민족국가의 대립의 연장선이라는 측면이 훨씬 더 크게 부각이 된 모양이다.

그동안 단순하게 아이들이 읽는 SF 공상과학소설 작가라고만 생각해온 쥘 베른의 다양한 작품 세계의 지평을 연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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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
마크 트웨인 지음, 린 살라모 외 엮음, 유슬기 옮김 / 막내집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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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는 <톰 소여의 모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왕자와 거지> 등으로 유명한 마크 트웨인의 일화, 격언과 훈계 등과 같이 다양한 일상의 모습을 담은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을 만나게 됐다. 어려서 마크 트웨인을 읽을 적에는 단순하게 동화작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서 접하게 된 그는 나에게 또 다른 인물로 다가왔다.

책을 읽던 중에 문득 얼마 전 텔레비전 모항공사의 광고에서 미시시피 강 유역의 마크 트웨인이 유년시절을 보내고 훗날 자신의 작품의 무대가 되었던 해니벌이 떠올랐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인쇄공, 수로안내인, 광부, 저널리스트 그리고 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직업군을 섭렵한 그의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 책을 통해 다양한 새뮤얼 랭혼 클레멘스(마크 트웨인의 본명)의 글들과 일러스트 그리고 사진들을 접할 수가 있었다.

19세기 지극히 평범한 미국의 일상을 멋지게 풍자화해서 스케치해내는 작가의 예리한 관찰력과 역시 대가의 필력이 느껴지는 순간들이었다. 특히 일상의 소재들에 마트 트웨인 특유의 익살과 해학 그리고 냉소를 양념으로 곁들인 글들이 개인적으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역시 세계를 돌며 수많은 강연회를 열었던 마크 트웨인은 세계인들이 바라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그리고 있다. 어쩔 때는 자신 특유의 냉소를 통해 또 어쩔 때는 어린 딸의 시선을 통해 자신들(미국인)이 보는 세계인들의 모습이 아닌 세계인들이 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세계 어느 나라에 가서도 자신들이 사용하는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고 분통을 터뜨리고 있는 오늘날 미국인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세기가 지나도 그네들의 여행 패턴은 바뀌지 않는가 보다.

45쪽에 나오는 마크 트웨인의 친필 사인이 들어가 있는 자신의 집을 불시에 방문하게 될 도둑님에게 알리는 친절한 공지문을 보면서, 그 특유의 블랙유머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게다가 용무를 마치고 나갈 적에는 이렇게 친절하게도 도둑님에게 살포시 문을 닫아 달라는 뻔뻔스러운 주문도 마다 하지 않는다. 하긴 자신의 창작을 괴롭히는 피뢰침 장사에게 막무가내로 피뢰침을 주문했다가 자신의 집이 우스개가 되는 것도 전혀 개의치 않을 정도니. 정말 그렇게 많은 수의 피뢰침을 집에 장착했을까? 에이 설마…….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이 전화를 발명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서, 마크 트웨인은 전화라는 이 최첨단 문명의 이기를 받아 들였던 모양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자동식 전화기가 아닌 항상 교환수를 통해 전화를 해야 했던가 보다. 어쨌든 전화 서비스 이용에 대한 불편은 호사가들의 변하지 않는 주제처럼 보인다.

6장 교육과 도덕적인 어린이 편은 특히나 오늘날의 부모들이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 듬뿍 담겨져 있다. 미국의 국부로 추앙 받는 벤저민 프랭클린은 이미 마크 트웨인 세대에도 모든 이의 귀감이 될 만한 행동과 격언으로 어린이들의 롤모델이었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하자면 엄친아 정도 된다고 할까. 하지만 그렇게 위대한 조상을 둔 어린이들에게는 아마도 엄청난 스트레스로 다가왔을 것이다. 안식일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모습에, 언제나 근면과 노력을 다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위인의 삶 그 자체를 부모들이 말하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짜증을 내지 않았을까? 마크 트웨인은 정확하게 그런 점들을 짚어낸다.

해당 장의 마지막에 실린 <젊은이들에게>에서도 그의 블랙유머는 유감없이 그 진자를 발휘한다. 부모에게 순종하라.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이 여러분을 그렇게 만들테니까라는 아주 간단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변하지 않을 격언을 쏟아낸다. 역시 마크 트웨인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유쾌하게 사는 법>에는 일상의 예의범절, 식이요법과 같은 다이어트, 패션, 일상의 불평불만과 제안들을 비롯한 우리네 생활의 모든 것들에 대한 노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차고 넘친다. 동시에 남북전쟁을 통해 내부의 갈등을 내전이라는 방법으로 해결한 후 한창 산업발전기에 있던 미국 사회의 위선과 허영 그리고 거짓선전의 허구를 날카롭게 파헤친 “모럴리스트” 마크 트웨인 만년의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여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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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난 서울 - 미래를 잃어버린 젊은 세대에게 건네는 스무살의 사회학
아마미야 카린, 우석훈 지음, 송태욱 옮김 / 꾸리에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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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일본의 전직 극우파 펑크록가수로, 현재는 프레카리아트 운동의 기수이자 시사 잡지 <주간 금요일>의 편집위원, 작가인 아마미야 카린을 위한, 그녀에 의한 책이다. 물론 최근 <88만원 세대>와 <괴물의 탄생> 등의 저서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우석훈 교수도 공저로 되어 있지만, 기본 줄기는 아마미야 카린의 서울 탐험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마미야 카린의 전력은 특이 그 자체이다. 일본에서 버블경기가 빠지고 나서 취업의 빙하기가 도래했던 1990년대 그녀는 “유신적성숙”이라는 극우적 향기가 풀풀 풍겨나는 펑크록 보컬리스트로 사회경력을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좌파감독과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난 후, 아마미야 카린은 극적인 전향을 이룬다. 그리고 오늘날의 새로운 아마미야 카린이 탄생했다.

OECD 국가 중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비중이 가장 큰 우리나라만큼이나 고용불안과 그로 비롯된 빈곤과 차별이 만연화된 일본에서 그녀는 ‘프리터’라고 불리는 일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허상을 발가벗긴다. 책의 말미에 달린 우석훈 교수의 글에서도 보이듯이, 해방 이후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이렇게 동일하면서도 생존에 위협을 가하는 주제는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한다.

이렇게 점점 사회적 괴물이 되어 가는 자본에 대항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한일양국 비정규직 그리고 가난과 차별로 인해 괴롭힘을 당하는 모든 이들의 연대를 위해 한국을 찾은 아마미야 카린의 눈에 비친 오늘날 서울의 모습이 <성난 서울>이라는 모습으로 세상에 빛을 보게 됐다.

자본주의 대국 미국에서도 아무리 일을 해도 현재와 미래의 빈곤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워킹 푸어(working poor) 계층이 늘어난다는 사실은 작년에 또 다른 일본작가 츠츠미 미카의 <르포 빈곤대국 아메리카>를 통해 알게 됐다. 그런데 그 미국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충실하게 수행해온 일본과 한국에서의 상황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파견근로자법이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이라는 미명 하에 진행된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을 전혀 보호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보호법의 시행으로 정규직으로 일하고 싶어도 일하지 못하는 소위 말하는 노동으로부터 소외되는 이말삼초의 젊은이들이 양산되고 있는 실정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측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교묘한 방법으로 노동자들의 분열을 꾀하고 있다. 언젠가 뉴스에서 통근버스에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좌석제를 실시하겠다는 어느 회사의 공고문을 보고서 지난 세대 미국에서 보았던 인종차별의 광기가 떠올랐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는 21세기판 인종차별 아니 노동차별이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방인인 아마미야 카린의 시선으로 우리네 현실들을 되짚어 읽는 과정이 그렇게 썩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가 이방인인 만큼 그만큼의 객관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짧은 일정 간에 여러 곳을 둘러 보다 보니 그만큼 다루고 있는 이슈들에 대한 깊이가 부족한 것도 불가피하지 않았나 싶다. 하지만 우리도 미처 모르고 있던 사실들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있는 이방인인의 존재에서 경쟁과 성공제일주의가 판을 치는 정글과도 같은 현실세계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과 연대의 씨앗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는 점은 높이 살만하다.

바로 그런 점에서 아마미야 카린의 이야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우리나라 경제 현실에서의 모순들을 짚어내는 저술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는 우석훈 교수의 분석은 그녀의 이야기에서 빠진 점들을 상당 부분을 상쇄시켜 주고 있었다. 읽는 동안 절로 역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기가 막힌 운영의 묘를 보여준 편집인에게도 찬사를 보낸다.

우석훈 교수는 기존에 발표한 저서에서도 밝혔듯이, 안정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고용의 창출을 위해서 기존의 기업들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그 대안으로 사회적 기업들을 육성할 것을 주문한다. 고용시장에서 실제적으로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있는 대기업들이 대안이 아니라는 사실을 톺아낸다. 특히 적게 벌더라도, 적게 쓰면서 자신의 노동을 통해 사회에 되갚는 순환적 경제론에 큰 공감이 되었다.

언제나 시작은 미약하다. 하지만 우리는 작은 희망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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