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은 맛있다! - 셰프 김문정이 요리하는 스페인 식도락 여행
김문정 지음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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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세계 최고의 요리는 프랑스 요리라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다. 와인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솔직하게 고백을 하자면, 프랑스 요리에 대해서도 프랑스 요리와 마리아주를 맞추는 프랑스 와인에 대해서도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그러던 차에, 태양의 나라 스페인에서 태양이 빚어낸 식재료들을 가지고 직접 요리를 하는 김문정 씨가 쓴 <스페인은 맛있다!>라는 책과 만나게 됐다.

작년 가을에 가수 이상은 씨가 쓴 <올라! 투명한 평화의 땅, 스페인>을 보면서 감상적으로 ‘아, 나도 스페인에 가보고 싶다’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스페인은 맛있다!>을 읽고 나서는 스페인에 가야겠다는 강박에 사로잡히게 됐다.

유럽 배낭시절 마지막 코스였던 바르셀로나에 들렀던 작가가 어느 바르(bar)에서 타파스를 먹던 순간, 그녀의 운명은 스페인 행으로 귀결 지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확실히 삶에는 미래의 그것을 좌우하게 되는 운명적 순간이 존재하는가 보다. 가장 먼저 김문정 씨가 식재료를 조달하는 노획 포인트인 보케리아 시장으로부터 시작을 한다. 보케리아에 없다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는 말처럼, 온갖 식재료들의 보고(寶庫)인 보케리아 시장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푸근해질 것 같다.

비싼 레스토랑 소개보다는 서두에서부터 우리 같은 보통의 서민들이 즐겨 먹을 수 있는 토마토 빵과 칼솟요리로 시작하는 작가의 따뜻한 마음결이 느껴진다. 아마 나중에 등장하게 될 세계 최고급 레스토랑들인 <엘 불리>나 <산 파우> 같은 식당들이 처음에 소개가 되었다면 거부감부터 들었을지 모르겠다. 누구나 즐길 수 있는 평범한 음식으로 시작을 해서, 고급 요리에까지 독자들을 인도하는 작가와 편집진의 점층의 묘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스페인은 확실히 그 넓은 땅덩이만큼이나 다양한 식재료들을 생산해내고 있었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기 때문에 매우 다양한 해산물들은 물론이고, 처음 들어 보는 시갈라를 비롯해서, 스페인의 국민음식이라고 할 수 있는 ‘돼지 뒷허벅다리 염장햄’ 하몬(Jamon), 지중해 태양이 만들어낸 진주의 추출물인 올리브유, 냉(冷)수프인 가스파초, 가벼운 요깃거리인 형형색색의 타파스와 핀초의 연이은 향연은 책을 보는 내내 당장이라도 스페인으로 달려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좀처럼 사용하지 않는 야생토끼요리, 새끼양요리 그리고 생후 21일된 새끼돼지를 잡아 만든 코치닐요(Cochinillo) 등의 식재료의 다양성에는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아울러 작가가 직접 스페인에서 체험한 수많은 요리들과의 사연 있는 이야기들은 글의 현장성을 극대화시켜주고 있었다. 고급 레스토랑인 <드롤마>에서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식재료들을 밑준비하는 도제의 모습으로부터 시작을 해서, 스페인 친구의 초대를 받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든 스페인식 전골요리 파에야를 맛봤다는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마치 한 편의 생생한 현지 리포트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각 장마다 두 개씩 달린 레시피는 간단하게 준비해볼 수 있는 스페인 요리에 초대장이었다. 아울러 현지와 같이 똑같은 재료들을 준비할 수 없는 우리네 사정을 고려해서 대체 식재료들을 알려주는 친절함까지! 게다가 마치 바로 오븐에서 만들어낸 요리들을 접하는 듯한 멋진 사진 역시 일품이었다. 요리책에서 빼놓을 수 없는 “맛집탐방” 코너 역시 나중에 정말 스페인을 찾을 독자들을 위한 최고의 서비스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가의 경험은 역시 코스 요리 매 순간마다 감동을 받았다는 카탈루냐에 자리한 <산 파우(Sant Pau>였다. 오죽했으면, 카르멘 아줌마가 직접 경영한다는 <산 파우> 레스토랑의 홈피까지 직접 찾아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을까. 지중해 연안에 자리 잡은 <산 파우> 레스토랑은 1988년 여름에 처음으로 개업했다고 한다. 그 당시만 해도, <산 파우>의 요리 메뉴들은 지금보다 훨씬 간략했었다고 한다. 카탈루냐 지방의 전통 음식들의 재창조를 해낸다는 문구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말이 필요없다, 나도 가보고 싶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먹어 싶은 요리는 바로 세고비아 지방의 <호세 마리아> 레스토랑에서 제공한다는 코치닐요 즉 다시 말해 아기돼지구이 다른 말로는 애저구이였다. 얼마나 연한지 나이프 대용으로 접시를 사용해서 서브한다는 코치닐요는 “스페인 사람들의 영혼이 담긴 요리”라고도 한다고 했던가. 와인보다는 맥주 한 잔을 곁들인다면 더 바랄게 없을 것 같다는 환상에 빠져 본다.

한 나라의 문화를 가장 빨리 이해하는 방법은 그 나라 음식을 맛보는 거라는 말이 있다. <스페인은 맛있다!>를 읽으면서 다른 것은 몰라도 마늘과 쌀을 주된 식재료로 사용하는 스페인의 음식문화를 체험하게 되면서 왠지 모를 친근감이 느껴졌다. 시간 내서 근래에 많이 생긴 스페인 레스토랑을 찾아 타파스 맛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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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사생활
이응준 지음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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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이응준 작가의 <국가의 사생활>이 책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다. 도대체 얼마나 재밌기에 그렇게 입소문이 자자한 걸까? 아쉽게도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응준 작가의 전작을 읽어본 적이 없어서, 그의 전작들과는 문체나 전개 방식 등에서 상이하게 다르다고 하는데 알 도리가 없다.

책을 다 읽고 난 소감은 확실히 재밌다는거다. 늘 하는 생각이지만, 책장이 술술 넘어가는 책이야말로 정말 좋은 책이라고 생각을 한다. 우선 언제인가 우리의 관심사에서 사라져 버린 통일이라는 주제를 필두로 해서, 2011년 어느 날 갑자기 흡수통일이 되어 버린 5년 후의 대한민국의 모습을 이응준 작가는 담담하게 스케치해내고 있다.

자그마치 120만 명이나 되는 북한 군인들이 사회에 쏟아져 들어오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무기들이 시장에 깔리면서, 통일 한국에는 폭력이 난무한다. 사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폭력보다도 어느 순간 2등 국민으로 전락해 버린 공화국 신민들의 처우 문제다. 물론 가상의 이야기이지만, 현재에도 비정규직과 이주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엄청난 통일비용이 들 미래의 디스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냉철한 분석들이 주도면밀하게 이어진다.

게다가 주인공은 북한 최정예 전사 출신의 리강이다. 그가 하는 일은 (일본 긴자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최고급 술집 은좌가 자리 잡은 건물 안에 둥지를 튼 대동강이라는 폭력 조직의 행동대장 정도라고 해야 할까. 냉혈한 킬러로 과거 공화국의 혁명수출 전략의 일환으로 아프리카에까지 가서 그 실력을 보여 주었었다. 그가 속해 있는 대동강 조직의 보스 오남철은 단고기를 먹으며, 부르고뉴산 와인을 마시는 별난 취미의 소유자다.

리강이 아끼는 조직의 후배 림병모가 어느 날 갑자기 의문의 죽음을 당하면서 이야기에 박차가 가해진다. 통일이라는 묵직한 주제를 기본 줄거리로 해서, 암흑가의 이면을 다루는 느와르 스타일의 전개는 확실히 독자들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지 너무나 궁금해서, 책장이 절로 넘어가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어려서 맹목적으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는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왜 통일을 해야 하는지 그에 대한 당위성에 대해 알 도리가 없는 나이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분단은 해가 갈수록 공고해졌고 자본이 판을 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통일은 어느 순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타인의 문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응준 작가가 글 속에서 언급했지만, 20년 전 극적인 통일을 이뤘던 독일 역시 사회주의권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동독을 껴안으면서도 엄청난 통일비용으로 휘청거렸다고 한다.

얼마 전 전 세계적인 경제위기 속에서 갈팡질팡했던 우리나라가 과연 독일 통일보다도 훨씬 더 많은 비용이 요구될 통일을 감당할 수가 있을까. 경제적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국가의 사생활>에서는 63년간 상이한 체제 속에서 살아온 이들의 갈등에 주목한다. 체제가 붕괴된 이들의 공허한 가슴을 종교나 무속(장군 도령)으로 채우려고 하지만 별무소용이다.

<국가의 사생활>에는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하지만, 역시 이야기는 리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공화국 최정예전사가 통일 후에는 일개 조폭 행동대장으로 전락해 버린 비애는 그를 영웅으로 떠받들던 장용수의 거울 이미지로 대체가 된다. 변질된 소영웅주의의 화신은 그렇게 레드아이의 힘으로 힘겨운 하루하루를 버텨 나가고 있다. 어쩌면 그의 일상의 모습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작가가 이 책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게 무엇일까. 궁극의 구원? 어쩌면 그런건 애시당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평화통일이 가져다 줄 물질적 번영에 대한 신기루 대신 아파트 공원에 모여 앉아 주인 없는 고양이를 잡아 불에 구워 먹는 이들의 모습에서 기대보다 걱정이 앞서는 것도 사실이다. 술집에서 술에 취한 천사표 아가씨가 손님들을 상대로 해서 전도를 하고, 유물론만을 신봉하는 공화국에서 신내림을 받은 장군도령이 활개를 치는 지독한 욕망의 카니발은 현상을 파괴하는 본질로 다가온다.

속도감 넘치는 전개, 뚜렷한 캐릭터의 설정 그리고 무엇보다 호감을 가질 만한 주제의 선택 삼박자가 빚어내는 <국가의 사생활>은 확실히 재밌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체제전복적인 작가의 상상력이 흡수통일을 택했다는 점이다. 문학에서도 자본주의는 보고 싶어하는 현실만을 다루게 하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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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베 난징의 굿맨
존 라베 지음, 에르빈 비커르트 엮음, 장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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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오스카 쉰들러라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양심적인 인물이 있었다면,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난징 점령 후 수많은 중국인들의 인명을 구해낸 존 라베가 있었다. 두 인물의 일대기가 모두 영화화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야기라는 차이점 정도가 있다고 할까.

함부르크 출신의 존 라베는 조국 독일을 떠나 30여 년간 중국에서 일하면서, 중국의 많은 면들을 다른 서양인들에게 비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은 그가 난징 학살 당시에 기록한 개인 일기에 근거해서 외교관 출신의 에르빈 비커르트가 전후 수집한 서류들과 편지들을 이용해서 집대성한 저작이다.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1937년 당시 존 라베는 지멘스 차이나의 난징(南京) 지사 대표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진격해 오던 일본군 앞에 난징의 상황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결국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격 앞에 장제스 대원수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내륙으로 패퇴하고 근 100만 달하는 수도가 적의 손에 떨어지게 됐다.

수도 방어전에서 수도 난징을 일본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은 난징 함락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에 앞서 일본군의 온갖 잔학행위로부터 전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던 가난한 중국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주인공 존 라베가 주축이 된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1937년 11월 24일)가 설립이 되어 중국군이 철수한 난징 시내의 안전과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만한 공간에 무려 25만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수용하게 된 안전구(safety zone) 내의 25개 캠프 역시 살인, 방화, 약탈과 강간을 조직적으로 행하는 무법천지의 일본군들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외교적 항의는 물론이고, 전혀 통제되지 않는 일본 군부에 대한 존 라베의 고뇌를 그의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존 라베가 만난 대다수의 일본 장교들은 30년 전의 러일전쟁 당시 규율 잡혀 있던 일본군의 예를 들면서, 그가 직접 목격한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예의 사실을 알고 있던 일본군은 그들이 벌인 난징 학살의 전모가 외국인들을 통해 서방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존 라베의 예리한 시선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훗날 그의 도움으로 인해 목숨을 구한 중국인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라는 말을 들었던 존 라베는 자신의 지도자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조국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길 바랬지만,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던 중국에서의 이런 사건은 단지 지엽적인 사건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순수한 박애정신으로 중국인들을 살리려는 존 라베의 행위에 찬탄을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나치 완장과 하켄크로이츠 만으로 안전구 내의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약탈하려는 일본군의 야만적인 행위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존 라베의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충실한 나치 당원으로, 자신의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훗날 독일에 돌아가 난징 학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록과 필름을 가지고 강연을 하던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시는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방면되기도 한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에는 난징 학살사건 뿐만 아니라 1945년 4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입성 후, 난징에서 일본군이 벌였던 것과 같이 러시아군에 의한 잔학행위와 약탈의 기록인 “베를린 일기”도 함께 담겨져 있다. 개인적으로 전후 독일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충분하지는 않지만 당시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이한 존 라베의 일기를 통해 처참했던 패전 독일의 시대상을 그려볼 수가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시혜를 베풀던 입장에서 점령군의 시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한 존 라베와 그의 아내 도라의 모습에서 측은한 연민이 정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난징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 어떤 상황도 난징보다는 괜찮고 모든 위기를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존 라베의 의연함 앞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올해 제작되어 발표된 <존 라베>의 예고편을 지금 막 보았는데, 자신을 위협하는 일본군이 총구 앞에서 목숨을 걸고서 당당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중국인들을 구해내는 존 라베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나치 깃발 아래, 중국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그 무엇이 있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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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셔넬라 Passionella
줄스 파이퍼 글.그림, 구자명 옮김 / 이숲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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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스 파이퍼, 사실 이 책 <패셔넬라>를 접하기 전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장 자끄 상뻬의 책들은 많이 접해 봤었는데 줄스 파이퍼는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의 책날개에 실려 있는 작가의 경력을 보니 대단한 인물이었다.

1929년 생으로 올해 81세의 만화 작가인 줄스 파이퍼는 뉴욕 브롱스 출신으로 1940년에 대작가 윌 아이즈너의 휘하에서 스토리텔링과 만화 작법을 배웠다고 한다. 파이퍼는 로스 앤젤레스 타임즈, 뉴요커, 네이션 그리고 플레이보이 같이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왔다. 특히 그의 출세의 발판이 되었던 “빌리지 보이스”에는 자그마치 42년 동안이나 만화를 연재하기로 했다. 그가 그린 만화들은 19권의 전집에 수록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는 처음으로 소개된 줄스 파이퍼의 책인 <패셔넬라>에는 모두 해서 6편의 만화가 실려 있다. 가장 먼저 타이틀인 <패셔넬라>에서는 미모 지상주의에 물든 현 세태를 굴뚝 청소부 넬라의 화려한 변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특히 연기보다도 외적인 면, 특히 글래머 미녀스타라는 정형만을 원하는 할리우드 영화판을 파이퍼는 적나라하게 풍자한다.

물론 잘 먹고 잘 살았다는 디즈니 전형의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나긴 하지만, 전래 동화인 <신데렐라>와 <개구리 왕자>의 절묘한 조합에 작가 나름의 비판 정신을 담아내고 있다.

두 번째 이야기인 <꼬마 병사 먼로 이야기>는 <패셔넬라>에 실린 만화 중에 단연 압권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작가의 경험을 바탕으로 구성된 <먼로>에서는, 네 살짜리 어린 아이가 군에 입대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을 다루고 있다. 그리스 출신 영화감독인 코스타 가브라스가 언젠가 말했듯이 학교와 군대가 사람을 개조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라고 했던가.

군대라는 획일화된 조직을 통해, 개성을 잃어버리고 철저하게 조직에 충성하는 인간들이 되어 가는 과정이 네 살배기 먼로의 눈을 통해 제시된다. 사실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 미국의 청소년들이 나이를 속여 가면서 입대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물론 그 후에 벌어진 베트남 전쟁의 병역기피와는 좋은 대조를 이루게 되지만 말이다.

냉전시대 전체주의의 모습을 우화화한 <해롤드 스워그> 또한 <먼로>의 연장선상에 서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냉전시대 불구대천의 원수인 구 소련과 대결을 위해 경쟁에는 전혀 관심을 없는 보통 사람 해롤드 스워그를 올림픽 경기에 출전시키기 위해 사회의 모든 단체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주인공을 압박하는 장면에서는 50년대 전 미국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매카시즘의 광기가 연상되기도 했다.

후반의 세 작품들인 <조지의 달>, <외로운 기계> 그리고 <관계>는 이전 작품의 무거운 주제들과는 달리 삶에 있어서 “관계”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패셔넬라>를 보면서 작가 줄스 파이퍼의 정밀하기 보다는 사물의 특징들과 형태를 잡아내며 작법이 왠지 낯선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아마 그가 오랫동안 <뉴요커>지를 비롯한 유력지들에 카툰들을 기고해서 그래서였나 보다.

줄스 파이퍼와의 나의 첫 만남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꼬마 병사 먼로 이야기>가 만화로도 제작이 되었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이퍼는 미국의 명문대학인 예일과 노스웨스턴 그리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강의했다. 지난 1986년에 다년간 “빌리지 보이스”지에 만평을 게재한 공로로 퓰리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패셔넬라>의 출간을 계기로 해서, 앞으로 다양한 그의 작품 세계를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하는 기대를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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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 - 우디 앨런 단편소설집
우디 앨런 지음, 성지원.권도희 옮김, 이우일 그림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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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앨런 스튜어트 코니스버그. 우리가 우디 앨런으로 알고 있는 미국 유대계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극작가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국 감독을 꼽으라고 한다면 마틴 스코시즈와 함께 꼽는 감독이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35살이나 차이가 나는 순이 프레빈과의 결혼으로 인해, 파렴치한 노인네로 평가절하 받고 있지만.

나도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그런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작품은 한 편도 보지 않고서 말이다. 하지만 <마이티 아프로디테>, <한나와 그 자매들> 그리고 <브로드웨이를 쏴라> 같은 그의 걸작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의 작품들을 관통하는 우디 앨런 특유의 걸출한 수다의 입담, 냉소적이 블랙 유머와 그의 현학적인 잘난체에 반해 버렸다. 어찌나 유식한 척 하기를 좋아하는지 <한나와 그 자매들>을 통해 배운 “hypochondriac”(자기 건강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사람)란 단어는 평생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다.

이번에 웅진지식하우스를 통해 출간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를 통해 처음으로 우디 앨런의 글과 만나는 즐거움을 갖게 됐다. 고희가 넘은 나이에도 활동적으로 영화판을 누비고 있는 이 노친네는 저명한 잡지인 <뉴요커>에 기고한 18편의 단편들을 모아 실존주의 철학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니체의 유명한 저서를 팔아 타이틀로 삼았다.

평생 뉴욕을 자신의 활동무대로 삼아온 우디 앨런은 뉴욕 그 중에서도 여피들의 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맨해튼에 서식하는 오만가지 인간군상의 모습을 냉소적으로 그리고 있다. 어려서부터 치열한 교육 경쟁의 단면을 그린 <탈락>에서는 유명 사립유치원 면접에 떨어진 아이를 둔 부모의 고뇌를 스케치해낸다. 이 장면은 최근 우디 앨런의 작품에 연달아 출연하고 있는 스칼렛 요한슨이 출연한 <내니 다이어리>를 떠올리게 한다.

역시 가장 관심이 가는 이야기는 타이틀인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먹었다>였다. 니체의 그 유명한 철학 산문시를 교묘하게 비틀면서 뉴요커들의 섭생의 미학을 신랄하게 조롱하고 있다. 물론 자신의 잘난 현학적 태도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로 인한 무지한 독자들을 자괴감에 빠지게 하는데 있어 일말의 양심도 느끼지 않는 듯하다.

사이비 종교와 보통 사람들의 고혈을 착취하는 건설업자 그리고 자신의 주 무대인 영화판 역시 우디 앨런의 냉소로 가득 찬 독설을 피해갈 수 없긴 마찬가지다. 특히 유사 이래 새로울 것이 없다는 영화판의 (우디 앨런이 한 때 가지고 있었던) ‘천재적 창조성’의 부재에 대한 그의 생각들이 여과 없이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었다. 어쨌거나 쉴 새 없이 글을 쓰고,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열량을 섭취할 재화를 생산한다는 것 자체가 창작자들에겐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겠지?

<오, 친애하는 유모여>에서는 자신들이 고용한 유모가 소설의 주인공 부부를 모델로 해서 쓴 글에 대한 경악과 분노를 다루고 있다. 아마 이것은 우디 앨런의 전처가 그들의 사생활을 책으로 출간을 해서 세간의 화제를 불러 일으켰던 적이 있었는데, 이 사건에 대한 우디 앨런식 패러디가 아닐까 싶다. 아니면 딸 같은 순이 프레빈을 12년째 데리고 사는 것에 대한 자기변명처럼 들린다.

이 책은 특이하게도 두 명의 번역가가 번역을 맡았는데, 글이 너무 재밌어서 그런지 분명 다른 스타일의 번역을 구분할 수가 없었다. 흠, 그 정도로 무지했던걸까. 책의 판형도 보통 책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나고, 일러스트를 맡은 이우일 씨의 그림들이 마치 엽서처럼 책의 곳곳에 끼워져 있는 것도 특이했다. 특히 니체와 같은 식탁에 앉은 우디 앨런의 그림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밀레니엄 캐피털 뉴욕을 배경으로 한 우디 앨런의 글들이 너무 재밌다. 역시 영화에서처럼 그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수다들은 유쾌하기만 하다. 때로는 수줍게, 때로는 뻔뻔하게 자신의 생각들을 이렇게 자신있게 내뱉을 수 있는 그의 작가적 능력이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디 앨런 특유의, 비꼼의 미학이 아주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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