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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라베 난징의 굿맨
존 라베 지음, 에르빈 비커르트 엮음, 장수미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인류 역사상 최악의 재난으로 기록될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오스카 쉰들러라는 휴머니즘에 입각한 양심적인 인물이 있었다면, 노구교사건으로 시작된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의 난징 점령 후 수많은 중국인들의 인명을 구해낸 존 라베가 있었다. 두 인물의 일대기가 모두 영화화되었고, 후자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야기라는 차이점 정도가 있다고 할까.
함부르크 출신의 존 라베는 조국 독일을 떠나 30여 년간 중국에서 일하면서, 중국의 많은 면들을 다른 서양인들에게 비해 더 많이 이해하게 됐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은 그가 난징 학살 당시에 기록한 개인 일기에 근거해서 외교관 출신의 에르빈 비커르트가 전후 수집한 서류들과 편지들을 이용해서 집대성한 저작이다.
중일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한 1937년 당시 존 라베는 지멘스 차이나의 난징(南京) 지사 대표로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였던 난징으로 진격해 오던 일본군 앞에 난징의 상황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결국 압도적인 일본군의 공격 앞에 장제스 대원수가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내륙으로 패퇴하고 근 100만 달하는 수도가 적의 손에 떨어지게 됐다.
수도 방어전에서 수도 난징을 일본군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중국군의 격렬한 저항은 난징 함락 이후 일본군의 만행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이에 앞서 일본군의 온갖 잔학행위로부터 전혀 안전을 보장받을 수 없던 가난한 중국 사람들을 위해 우리의 주인공 존 라베가 주축이 된 ‘난징 안전구 국제위원회’(1937년 11월 24일)가 설립이 되어 중국군이 철수한 난징 시내의 안전과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뉴욕의 센트럴 파크만한 공간에 무려 25만 명이나 되는 중국인들을 수용하게 된 안전구(safety zone) 내의 25개 캠프 역시 살인, 방화, 약탈과 강간을 조직적으로 행하는 무법천지의 일본군들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외교적 항의는 물론이고, 전혀 통제되지 않는 일본 군부에 대한 존 라베의 고뇌를 그의 일기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존 라베가 만난 대다수의 일본 장교들은 30년 전의 러일전쟁 당시 규율 잡혀 있던 일본군의 예를 들면서, 그가 직접 목격한 일본군의 잔학행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미 예의 사실을 알고 있던 일본군은 그들이 벌인 난징 학살의 전모가 외국인들을 통해 서방 세계에 알려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는 것도 존 라베의 예리한 시선을 통해 알 수가 있었다.
훗날 그의 도움으로 인해 목숨을 구한 중국인들로부터 ‘살아 있는 부처’라는 말을 들었던 존 라베는 자신의 지도자 히틀러에게 이 사실을 알려 자신의 조국 독일의 동맹국인 일본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길 바랬지만, 당시 유럽은 물론 세계 정복을 꿈꾸고 있던 중국에서의 이런 사건은 단지 지엽적인 사건에 불과할 따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순수한 박애정신으로 중국인들을 살리려는 존 라베의 행위에 찬탄을 마지않을 수가 없었다. 민간인의 신분으로, 나치 완장과 하켄크로이츠 만으로 안전구 내의 중국인들을 폭행하고 약탈하려는 일본군의 야만적인 행위를 막아낸 것만으로도 존 라베의 행동은 칭찬 받아 마땅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충실한 나치 당원으로, 자신의 지도자 히틀러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훗날 독일에 돌아가 난징 학살 사건에 대한 자신의 기록과 필름을 가지고 강연을 하던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시는 과거사를 언급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방면되기도 한다. <존 라베 난징의 굿맨>에는 난징 학살사건 뿐만 아니라 1945년 4월 러시아군의 베를린 입성 후, 난징에서 일본군이 벌였던 것과 같이 러시아군에 의한 잔학행위와 약탈의 기록인 “베를린 일기”도 함께 담겨져 있다. 개인적으로 전후 독일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충분하지는 않지만 당시 베를린에서 종전을 맞이한 존 라베의 일기를 통해 처참했던 패전 독일의 시대상을 그려볼 수가 있었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시혜를 베풀던 입장에서 점령군의 시혜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상황에 처한 존 라베와 그의 아내 도라의 모습에서 측은한 연민이 정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난징에서의 경험을 통해, 그 어떤 상황도 난징보다는 괜찮고 모든 위기를 다 이겨낼 수 있다는 존 라베의 의연함 앞에 저절로 숙연해졌다.
올해 제작되어 발표된 <존 라베>의 예고편을 지금 막 보았는데, 자신을 위협하는 일본군이 총구 앞에서 목숨을 걸고서 당당하게 자신에게 도움을 청한 중국인들을 구해내는 존 라베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물론 나치 깃발 아래, 중국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모습에서는 여전히 불편한 그 무엇이 있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