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피부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1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 지음, 유혜경 옮김 / 들녘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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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책을 읽는 동안 두 개의 영화에서 보고 느낀 기시감이 엄습해 왔다. 하나는 1982년 존 카펜터 감독의 <괴물>(The Thing) 그리고 다른 하나는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데블스 오운>이었다. 전자는 카탈루냐 출신의 문화 인류학자이자 작가 알베르트 산체스 피뇰의 <차가운 피부>의 전반적인 줄거리가, 그리고 후자는 이 소설의 주인공의 인생의 궤적을 조명해 준다는 점에서 서로 공명하고 있었다.

소설의 초반부에서는 어떻게 해서 화자이자 주인공인 내가 남대서양의 외딴 섬에 흘러들어오게 되었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지난 세기 초반까지도 해도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일랜드 고아 출신의 주인공은 후견인을 만나, 인생 전반에 대해 배우게 된다. 하지만, 태어나면서부터 반란의 기질을 지닌 아일랜드인의 후예답게 공화국군에 가담하면서, 삶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결국, 영국으로부터 그렇게 원하던 독립을 쟁취했건만 새로 들어선 신정부 역시 기존의 영국과 다를 것이 없는 전제정치를 펼친다. 이에 환멸을 느낀 주인공 나는 자발적 망명길에 나서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이름 모를 섬에 기상관으로 발을 내딛게 된 나는, 행적을 찾을 수 없는 전임자의 부재 가운데 곧 삶을 위한 치열한 투쟁에 나서게 된다. 밤만 되면 출몰해서 습격을 가하는 정체불명의 ‘괴물’들로부터 오로지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할 수가 없다. 이런 인간과 괴물 간의 이분법적 대립구도 속에서, 다른 것들은 돌아볼 여지가 없다.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을 하는 주인공과 이웃 등대에 거주하는 오스트리아 사람 바티스 카포라는 역시 신원을 알 수 없는 동지와 공통의 목적인 생존으로 의기투합한다.

끝없이 밀려드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주인공과 바티스 카포는 바리케이드와 소총 심지어는 다이너마이트까지 동원해서 무자비한 폭력으로 맞선다. 하지만, 어느 순간 주인공은 괴물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런 설정은 마치 영국 식민주의자들이 남아프리카를 침략할 당시, 그에 대항해서 맞선 줄루족 전사들과의 전쟁을 연상시켰다. 철저하게 서구인들의 처지에서 본 야만족들이 소설 <차가운 피부>에서는 무식하게 아무런 전략도 없이 오로지 인해전술로 밀어닥치는 “괴물”로 치환되고 있었다.

하지만, 주인공의 평화와 공존에 대한 생각은 소수의 의견일 뿐이다. 자신과는 다른 의견과는 일체의 소통을 거부하는 바티스 카포야말로 주류 식민주의자들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게다가 바티스 카포가 마스코트로 데리고 있는 아네리스는 성적 착취의 대상이자 쾌락의 도구일 뿐이다. 왠지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노라는 침략과 폭력 그리고 수탈로 일관했던 식민제국시대의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주인공은 그 와중에서도 자신이 섬에 파견된 임무를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일지도 기록하지만 거듭하는 괴물들의 공격 앞에 모두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어느 순간, 괴물들의 세계에 침입한 인간들이야말로 이질적인 존재로 이 모든 갈등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물론 바티스 카포의 비협조 탓도 있지만, 여전히 총을 내려놓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바티스 카포도 그리고 주인공도 마침내 1년마다 한 번씩 들르는 구원의 손길이 도착했을 때, 왜 그 지옥 같은 섬을 떠나지 않았을까? 거의 광기에 사로잡히다시피 해서, 살기 위해 수도 없이 총질을 하고 다이너마이트로 거의 자신들의 아지트인 등대를 날려 버릴 뻔 했으면서도 끝내 섬에서 벗어나는 걸 거부한 이유가 무얼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작가의 첫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흡입력이 점층적으로 작동하면서, <차가운 피부>에 몰입하게 하여 주었다. 괴물들에 대항하기 위해 마련된 레밍턴 소총과 2천 발의 탄알 그리고 어마어마한 양의 다이너마이트라는 소설적 장치들이 조금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그 수많은 괴물을 달랑 두 명이 함께 도끼나 칼로 상대하는 게 말이 되지 않았을테니까 말이다.

<차가운 피부>에 이어 우리나라에 두 번째로 소개된 같은 작가의 <콩고의 판도라>가 기대된다. 이번에도 완전히 예측할 수 없고,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만나게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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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 악어
마리아순 란다 지음, 아르날 바예스테르 그림, 유혜경 옮김 / 책씨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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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기시감으로 서가에서 이 책을 골라냈다. 그 제목만으로 독자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책이 아닌가 말이다. 침대 밑에 악어라니,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우선 글쓴이는 마리아순 란다라는 이름의 스페인 출신의 작가다. 이 책외에도 <벼룩, 루시카>라는 책을 한 권 봤는데 그 책 역시 재밌을 거 같다는 예감이 든다.

우선 주인공으로 작가는 JJ라는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금융업계에 종사하는 샐러리맨을 등장시킨다. 도대체 JJ라는 이름은 뭐의 이니셜일가? 호세 훌리오(Jose Julio) 정도 되려나, 나의 상상력의 한계는 그 정도로 만족하고 물러선다. 어쨌든 잠자리에서 일어난 JJ는 자기 침대 밑에 회색빛을 한 파충류 악어가 떡하니 도사리고 있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여행용 가방 크기만 한 녀석은 JJ의 구두를 씹고 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구두를 먹이로 삼는 악어라니.

도대체 악어가 어디에서 나왔건 간에 독신자 JJ는 그 녀석을 원래 있던 곳에 돌려보내고자 한다. 동물원에서 탈출했을까? 하지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층수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도 황당한 일이다. 악어가 있었음직한 동물원 놀이동산에 전화해 보지만, 미친 놈 취급을 받는다. 그의 유일한 친구인 정육점의 주인장 세페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역시 예상대로 그 구두 먹는 악어는 JJ에게만 보이는 슈퍼 투명 악어였다!

사무실의 참견쟁이 에우랄리아 아줌마와 JJ의 짝사랑녀 엘레나의 시선을 피해 가며, 자기 친구 이야기인양 악어 이야기를 꺼내본다. 결국 JJ는 에우랄리아의 아줌마의 조언대로 병원을 찾는다. 의사에게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처방전을 받은 JJ는 약사로부터 악어병이 거미병보다는 나은 증상이라는 위로를 받는다. 하지만 도대체 약을 먹어도 낫지 않는 그의 악어병은 점점 더 심각해지기만 할 따름이다. 우리의 JJ는 과연 어떻게 이 지긋지긋한 악어병으로부터 탈출할 수가 있을까.

일견 황당해 보이는 악어의 상징성에 대해 곰곰 생각해 보게 됐다. 도대체 이 소설에서 악어는 JJ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거야말로 이 소설을 이해하는 결정적 코드가 아닐까 싶었다. 그 실마리는 의사가 처방해준 크로커다일 알약에서 찾을 수가 있었다. 독신의 광기에 사로 잡혀 홀로 사는, 현대인들의 번뇌, 고독 그리고 불안에서 비롯된 복합적 증세가 타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악어라는 실존적 괴물의 정체인 것이다.

동시에 그 큰 도시에서 친구라고 마땅하게 부를만한 사람이 달랑 한 명 있다는 설정 또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다. 직장 동료로 나오는 매력녀 엘레나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싶지만, 소심하게 말도 채 꺼내지 못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악어에게 잡아 먹힐까봐 전전긍긍하는 JJ에 대한 묘사가 현대인의 심리에 대한 직격탄처럼 날아든다.

이런 불안과 현실로부터의 괴리들은 타인과의 통섭과 교류를 통해 치유된다. 자포자기한 상태의 JJ에게 갑자기 찾아온 엘레나와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주인공은 악어병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흉악한 포식자로 알았던 악어가 알고 보니 보잘 것 없는 도마뱀이었다는 설정에 그만 웃음이 터져 버렸다. 역시 모든 것은 나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유심론(唯心論)의 변주였던걸까.

개인적으로 이런 소품 스타일의 글들이 좋다. 곧바로 마리아순 란다의 다른 책 <벼룩, 루시카>에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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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 Young Author Series 1
남 레 지음, 조동섭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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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책읽기 즐거움 중의 하나는 바로 책에 나오는 지명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읽은 남 레 작가의 <보트>는 나에게 여러 가지 도전을 제공해 주었다. 물론 뉴욕이나 히로시마, 카르타헤나 그리고 테헤란 같이 누구나 다 알만한 지명 말고, 정말 낯선 곳 말이다. 책 속에서 천국보다 낯선 느낌을 구가한다고 해야 할까?

그런 점에서 남 레 작가의 세계를 돌며 펼쳐지는 7개의 이야기들 중에서 그 첫 번째 이야기의 배경은 그야말로 미스터리였다. 베트남 출신으로 호주에서 교육받고 자란 작가는 미국 아이오와의 모처에서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던가. 호주에서 살고 있는 그의 아버지와 4년 만의 만나게 되는 곳이 어디일까. 벌링턴 스트리트와 서미트 스트리트만으로 단서로 그가 사는 도시의 이름을 찾는 재미란, 낯선 작가의 이야기의 작은 길을 따라 가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구글맵을 이용해서 아이오와 주와 이웃 위스콘신 주를 가르는 미시시피 강 연안의 더뷰크(Dubuque)라는 도시라는 것을 알아냈다.

창작의 고통에 빠져 있던 작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자신이 쓰고 싶었던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나간다. 자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작가적 임무가 새삼 다가온다. 1975년 사이공 함락, 무력통일, 재교육 수용소 그리고 1979년의 탈출은 맨 마지막 이야기 <보트>의 선순환적 구조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그 사이에 5개의 세계의 곳곳의, 때로는 아마도 어느 부분에 있어서는 작가의 개인적 체험에 의한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들이 전개된다. 사실 이 책의 목차를 보고 가장 관심이 갔던 이야기가 바로 <카르타헤나>였다. 하지만 그 배경은 콜롬비아의 카르타헤나가 아니라, 14살짜리 킬러 주인공이 주무대로 활동하는 메데인이었다. 이 단편의 플롯은 브라질 영화 <시티 오브 갓>을 바로 떠올리게 했다. 무엇보다 과연 14살짜리가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태어나 산 햇수만큼의 사람을 죽이고, 생활비를 벌고 어머니를 위해 집을 샀다는 주인공의 무용담이 허공을 휘젓는다.

그 다음으로 가장 마음을 끄는 이야기는 <히로시마>였다. 2차 세계대전 막바지의 일본을 그 무대로 하고 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후, 1억 총옥쇄를 운운하면서 미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는 모습과 세계 최초로 원폭 피해지인 히로시마의 이미지가 중첩되고 있었다. 원자폭탄 한 방으로 악랄한 침략자·가해자의 입장에서, 피해자로 거듭난 그네들의 변신에 씁쓰름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보트>를 관통하는 키워드를 꼽자면, 죄책감이 아닐까 싶다. 전쟁과 탈출이라는 고통의 순간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죄책감, 어려서 이별한 딸과 함께 하지 못한 죄책감, 죽어가는 어머니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자신에 대한 자책감 등의 비애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그런 비슷하면서도 다양한 상황 가운데 전개되는 이야기의 서술이 매력적이었다.

아쉬운 점은 서로 연관되지 않은 이야기들 때문인지, 책을 읽다가 어느 순간 동력의 실종된 지점에서 책읽기가 버거워져 버렸다. 사실 <테헤란의 전화>는 여전히 이해불가 코드다. 그래도 <보트>는 막 포기하려던 순간에, 작가의 글처럼 “종일 기다리다가 막 떠나려 할 때 무엇을 내놓는다.”(208쪽) 남 레 작가의 타이틀이라고 할 수 있는 마지막 <보트>에 등장하는 죽음의 여행은 사이공 함락 이후, 역사적 고찰 대신에 오로지 탈출과 생존만이 선이었다는 아버지 세대의 변명처럼 다가온다. 보트피플인 마이, 퀴엔 그리고 트렁 간의 죽음 가운데 삶의 희망을 건져 보려는 노력이 그저 무망할 뿐이다. 정말 그런 처참함을 경험한, 세대의 추억담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위험한 과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말하지 않는 과거는 더욱 치명적이겠지만.

책 속에서 남 레 작가가 말했듯이, 오직 자신만이 쓸 수 있는 그만의 다음 글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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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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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누군가 나에게 전작주의를 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 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나에게 전작주의에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두 명의 작가를 만났으니 한 명은 커트 보네거트이고, 다른 한 명은 루이스 세풀베다다. 뒤늦게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세계와 만나게 된 나는 그 늦음을 만회하기 위해 부지런히 세풀베다의 책들을 구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출간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귀향>(모두 절판되었다)에 이어 네 번째로 내가 만난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은 바로 <핫 라인>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친환경적인 자연과 동화된 삶을 그린 자연주의적 색채를 가진 작품 군과 추리소설의 양식을 품은 흑색소설 혹은 누아르 소설로 나뉜다고 한다. 폰 섹스를 뜻하는 <핫 라인>은 후자의 분류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시작은 파타고니아 아이센 부근해서 가축도둑과 밀매업자들을 사냥하는 마푸체 인디오 출신 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으로부터 시작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즐겨 읽었다는 아버지가 지은 이름 조지 워싱턴은 한 때 사회주의 국가 칠레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부까지 동원해서 군부의 쿠데타를 유도한 어느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름에서 유래한다. 자기 동네 쇠똥의 냄새만으로도 사건을 해결해낸다는 카우카만 형사는 어느 날, 가축도둑질을 하던 유력자의 아들의 엉덩이를 장총으로 날려 버리게 되면서 폭력형사로 낙인이 찍혀 수도 산티아고의 성범죄 연구소로 좌천(?)이 된다.

깡촌 파타고니아에서 서울 산티아고로 전보된 것이 영전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다스리면서 다시 소설에 집중한다. 사실 평생을 파타고니아에서 자고 나란 인디오 형사가 수도에서 할 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기 부서 사람들조차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인종적 차별과 더불어 “폭력”이라는 딱지가 붙은 형사를 환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아이러니는 피노체트 독재 아래서, 수십 년간 참을 수 없는 끔찍한 폭력들을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군사독재의 찌꺼기들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여전히 칠레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

퇴근길에 택시 기사 아니타 레데스마와 우연하게 만나게 된 카우카만 형사는 곧 자신을 옭아매는 이전의 가축도둑 사건과 연계된 <핫 라인> 사건을 맡게 되면서 위기 속으로 뛰어든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매너가 필요했다는 회상을 통해 다른 차원의 똥이 차고 넘치는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그런 절차들을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들만이 들끓는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필적할만한 서민적 주인공의 도전을 주로 그리고 있는 세풀베다의 캐릭터 창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핫 라인>에서도 작가는 깡촌 출신의 촌뜨기 형사와 한가닥 한다는 마누엘 칸테라스 장군(아주 의미심장한 안티 캐릭터 설정이다)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간다. 이는 개인과 권력의 실체로서의 도전과 응전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그 한편에는 사회적 부조리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직된 사회 체제에 대한 분노가 그야말로 악머구리 끓듯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론에서 작가가 말했다시피, <핫 라인>은 대중 연재소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풀베다의 작품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는 바로 “대중”이다. 다른 책들도 물론 대중적인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핫 라인>은 지금까지 읽을 책 중에서도 다른건 몰라도 그 점에서만큼은 최고다. 오히려 책의 말미로 갈수록 이렇게 짧아도 되는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전개와 결말의 속도감이 빠르다. 물론 그에 대해 전혀 불만은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서 흘리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칠레식 사회주의 실험과 그 실패의 단서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빅토르 하라의 이름이 접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1973년 9월 쿠데타 당시 아옌데 대통령의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 연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던 이들의 숱한 변절을 목도하면서, 이 시대 지식인과 작가들에 대한 실망은 거의 좌절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여전히 글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충실한 한 인물과 만난 즐거움이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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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남두리 2009-10-01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의 책, 구입해 놓고 아직 읽기를 미루고 있는데 꼭 봐야겠네요^^
 
그리스도 철학자
프레데릭 르누아르 지음, 김모세.김용석 옮김 / 연암서가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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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어떻게 시작을 해야 할까.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그의 철학(아마도 종교적 구원)을 포함한 기독교 이천 년사를 책 한 권에 넣는 작업은 수월치 않았으리라. 특히 프랑스 작가들의 책은 생소할 따름인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종교사학자인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이 엄청난 미션에 도전장을 던졌다.

역시 작가는 철학자답게, 종교적 측면보다는 철학적인 측면에서 접근을 시도한다. 서구사회의 근간을 이뤄온 기독교가 최근 들어, 그 원류를 자랑하는 서구사회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 가고 있다는 지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왜 그렇다면 근대화가 상대적으로 먼저 진행이 된 서구사회에서 기독교가 날이 갈수록 쇠퇴하고 있는걸까. 그 유래를 작가는 2,000년 전에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강림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남긴 철학적 유산에서 찾고 있다.

먼저 프레데릭 르누아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걸작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문관의 전설로 <그리스도 철학자>를 시작한다. 재림한 예수를 기존의 종교인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는 역설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으로 이미 입증된 바가 있다. 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온 메시아를 당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대한 패러디다. 그리고 작가는 현재 기독교에서 정경으로 인정되고 있는 복음서들에 담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메시지들의 역사적이면서도 철학적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평등, 개인의 자유, 여성해방, 사회정의, 권력의 분리, 비폭력과 용서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덕목인 이웃사랑에 이르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공생애를 통해 직접 실천했다. 인간 개개인의 존엄에 대한 개념조차 형성되지 않았던 시기에 예수가 제시한 윤리들은 기존의 가치들을 전복하는 가히 충격적인 이데올로기들이었다. 아울러 당시 기득권층에게는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 들여졌다.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무조건 탄압하고 보자라는 행동양식을 따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은 종교적으로는 야훼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이루는 동시에, 정치적으로는 유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산헤드린 공회 회원들의 기득권 수호를 위한 격렬한 반발의 결과였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과정을 통해, 기독교는 기존의 유대교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들에서 그 변별력을 가지게 된다. 세례, 성찬예식 그리 제자도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요소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의미에 방점을 찍고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말을 듣고 따른다는 실천의 층위와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선언이다. 이렇게 복음서에서 거듭되고 있는 기독교의 핵심 덕목들은, 로마제국 시대에 들어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치적인 이유로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삼으면서부터 변질되기 시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랑과 박애를 기독교 가치의 전면에 내세웠지만, 중세시대 세속권을 장악하고 있던 교회는 복음서에 나오는 “있는 그대로”의 말씀보다 제도와 질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주요 가치에 반하는 행동들을 일삼게 된다. 특히 중세교회의 결정적 오류로 평가되는 종교재판과 마녀사냥 그리고 십자군원정에 있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박해 이론을 도입해서 이교도와 기독교적 가치를 불신하는 이들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적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사항들은 중세교회의 큰 오점으로 남아 있다.

한편 스콜라 철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이성과 신앙의 화해를 시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아울러 수도원 운동을 통한 가톨릭교회의 자정적인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성직자들의 타락과 권력욕 그리고 교조주의는 명백히 복음서에 나오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의 메시지와 고대인들의 지혜에 반하는 것으로 결국에 가서는 종교개혁의 철퇴를 맞게 된다.

아울러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로마 교황청의 반종교개혁적인 태도와 근대화에 기여한 비판적 이성에 대한 맹목적인 불신으로 인해, 지금까지도 서구인들 사이에서는 가톨릭교회가 근대화를 저해했다는 의식이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고 한다. 사유를 통해 이성을 종교로부터 해방시킨 데카르트를 효시로 하는 근대철학의 상당 부분이 인간의 자유와 존엄을 중요시한 그리스도 본래 가르침의 재발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상당 부분 의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는 것이 프레데릭 르누아르의 주장이다.

기독교의 근대화 과정 서술 중에서 흥미로웠던 점 중의 하나는 칼뱅의 예정설로, 인간의 구원은 신의 의지에 따라 이미 예정되어 있으며, 인간의 행위가 구원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었다. 아울러 기독교의 탈신비화를 주도했던 니체와 더불어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금욕주의에 입각한 노동으로 자본주의의 합리화를 통해 기독교의 탈마법화에 기여했다는 점도 특이할만한 발언들이었다.

하지만 작가에 의하면 지금도 여전히 서구인들의 사고 속에는 부지불식간에 기독교적 가치들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무신론자들을 제외하면, 꾸준하게 예배에 참석하는 정통 종교인들의 수가 줄어들고 있을 진 모르지만 신의 존재에 부인하지 않고, 사회문화 속에 내재되어 있는 축제, 예술의 양식들의 존재 그리고 비가시적인 요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프레데릭 르누아르가 이 책의 독자들을 프랑스 독자들, 나아가서는 유럽의 독자들에게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그 외의 독자들은 자동적 소외를 경험해야 했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책이, 프랑스 밖을 벗어나 멀리 한국에서까지 읽혀질지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스도 철학자> 대단원의 막은 예수 그리스도가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으로 마무리 지어진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을 이 짧은 예화에, 그리스도 가르침의 핵심적인 요소들이 모두 담겨져 있다. 그 중에서 복음서에 나오는 결정적 가르침 두 가지를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사랑이고 두 번째는 인식의 자유에 기초한 영적 삶의 내재화다. 작가는 이런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목적보다 수단이 우선하는 작금의 가치 전도 현상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동시에 작가는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오늘날을 사는 이들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이들 간의 통섭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역설한다. 지금이야말로 그 어느 때보다도, 이성과 신앙의 화해가 필요한 시기가 아닐까 싶다.

*** 내가 찾은 오탈자

1. 가름침 -> 가르침 (38쪽)
2. 가나한 -> 가난한 (93쪽)
3. 회회 -> 회화 (290쪽)
4. 대재사장 -> 대제사장 (31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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