핫 라인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권미선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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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누군가 나에게 전작주의를 하는 작가가 있냐고 물으면 없다고 자신 있게 대답해 왔다. 하지만 올해 들어 나에게 전작주의에 도전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두 명의 작가를 만났으니 한 명은 커트 보네거트이고, 다른 한 명은 루이스 세풀베다다. 뒤늦게 루이스 세풀베다의 작품세계와 만나게 된 나는 그 늦음을 만회하기 위해 부지런히 세풀베다의 책들을 구해서 읽고 있는 중이다.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출간된 지 채 몇 년이 되지 않았지만 그의 책들이 절판의 운명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감상적 킬러의 고백>, <파타고니아 특급 열차>, <귀향>(모두 절판되었다)에 이어 네 번째로 내가 만난 루이스 세풀베다의 책은 바로 <핫 라인>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친환경적인 자연과 동화된 삶을 그린 자연주의적 색채를 가진 작품 군과 추리소설의 양식을 품은 흑색소설 혹은 누아르 소설로 나뉜다고 한다. 폰 섹스를 뜻하는 <핫 라인>은 후자의 분류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겠다.

이번에도 이야기의 시작은 파타고니아 아이센 부근해서 가축도둑과 밀매업자들을 사냥하는 마푸체 인디오 출신 형사 조지 워싱턴 카우카만으로부터 시작된다.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즐겨 읽었다는 아버지가 지은 이름 조지 워싱턴은 한 때 사회주의 국가 칠레를 전복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보부까지 동원해서 군부의 쿠데타를 유도한 어느 나라의 초대 대통령 이름에서 유래한다. 자기 동네 쇠똥의 냄새만으로도 사건을 해결해낸다는 카우카만 형사는 어느 날, 가축도둑질을 하던 유력자의 아들의 엉덩이를 장총으로 날려 버리게 되면서 폭력형사로 낙인이 찍혀 수도 산티아고의 성범죄 연구소로 좌천(?)이 된다.

깡촌 파타고니아에서 서울 산티아고로 전보된 것이 영전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상상을 다스리면서 다시 소설에 집중한다. 사실 평생을 파타고니아에서 자고 나란 인디오 형사가 수도에서 할 일은 그다지 없어 보인다. 게다가 자기 부서 사람들조차 그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인종적 차별과 더불어 “폭력”이라는 딱지가 붙은 형사를 환영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아이러니는 피노체트 독재 아래서, 수십 년간 참을 수 없는 끔찍한 폭력들을 경험한 이들이 여전히 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군사독재의 찌꺼기들에 대해 관대하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작가는 여전히 칠레의 민주화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있는 것일까?

퇴근길에 택시 기사 아니타 레데스마와 우연하게 만나게 된 카우카만 형사는 곧 자신을 옭아매는 이전의 가축도둑 사건과 연계된 <핫 라인> 사건을 맡게 되면서 위기 속으로 뛰어든다. 파타고니아에서는 여자를 만나기 위해서, 최소한의 매너가 필요했다는 회상을 통해 다른 차원의 똥이 차고 넘치는 수도 산티아고에서는 그런 절차들을 모두 생략해 버리고 오로지 자신의 성적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한 욕망들만이 들끓는다고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에 필적할만한 서민적 주인공의 도전을 주로 그리고 있는 세풀베다의 캐릭터 창조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핫 라인>에서도 작가는 깡촌 출신의 촌뜨기 형사와 한가닥 한다는 마누엘 칸테라스 장군(아주 의미심장한 안티 캐릭터 설정이다)의 대결 구도로 몰고 간다. 이는 개인과 권력의 실체로서의 도전과 응전을 형상화하고 있다. 물론 그 한편에는 사회적 부조리와 민주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경직된 사회 체제에 대한 분노가 그야말로 악머구리 끓듯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서론에서 작가가 말했다시피, <핫 라인>은 대중 연재소설의 양식을 취하고 있다. 세풀베다의 작품들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는 바로 “대중”이다. 다른 책들도 물론 대중적인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지만 <핫 라인>은 지금까지 읽을 책 중에서도 다른건 몰라도 그 점에서만큼은 최고다. 오히려 책의 말미로 갈수록 이렇게 짧아도 되는거야?라고 생각할 정도로 그 전개와 결말의 속도감이 빠르다. 물론 그에 대해 전혀 불만은 없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곳곳에서 흘리고 있는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칠레식 사회주의 실험과 그 실패의 단서들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그 중에서도 피노체트의 쿠데타 이후, 비극적인 최후를 마친 빅토르 하라의 이름이 접하는 순간은 그야말로 전율 그 자체였다. 1973년 9월 쿠데타 당시 아옌데 대통령의 듣는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지막 연설은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한 때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던 이들의 숱한 변절을 목도하면서, 이 시대 지식인과 작가들에 대한 실망은 거의 좌절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그들과는 달리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자>는 자신의 신념을 꺾지 않고, 여전히 글을 통해 실천에 옮기고 있는 루이스 세풀베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작가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충실한 한 인물과 만난 즐거움이 그 자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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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남두리 2009-10-01 0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풀베다의 책, 구입해 놓고 아직 읽기를 미루고 있는데 꼭 봐야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