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기사 세바스티안 카니발 문고 1
호세 루이스 올라이솔라 지음, 성초림 옮김, 이영옥 그림 / 스콜라(위즈덤하우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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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이라구? 옛 시인들의 영원한 소재인 기사문학의 후예일까? 이번에 위즈덤하우스의 임프린트인 스콜라에서 출간된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을 접하는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게다가 에스파냐의 전설적 영웅이라는 엘시드까지 나온다고 하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이 엘시드를 도와 전쟁터를 누비는 이야기라는 거지? 이런 나의 생각은 책장을 넘기면서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물론 실존했던 영웅 엘시드가 등장하는 건 맞지만, 그에 관련된 몇몇 이야기들을 빼고서는 모두가 전적으로 작가 호세 루이스 올라이솔라의 창작이었다. 우리의 실질적인 주인공 세바스티안은 정보를 파는 첩자들의 후예로 올해 14살 난 소년이다. 11세기 후반, 에스파냐는 기독교도들이 다스리는 지역과 무슬림들의 지배하에 이는 지역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겠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기독교도, 무슬림 그리고 유대인들이 나름대로 고유의 영역을 지키면서 조화를 이루고 살고 있었다. 역설적인 것은 그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에스파냐가 중세 가장 잔혹한 종교탄압과 마녀재판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래의 첩자를 꿈꾸던 돼지치기 목동 세바스티안은 우연히 만난 크리스티나 공주의 행방을 밀고해서, 라카르 공작부인에게서 훌륭한 말을 얻게 된다. 이제 본격적인 첩자의 길을 들어서게 된, 세바스티안에게 라카르 공작부인은 팜므 파탈 그 자체였다. 자신도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공작부인의 마력에 빠져 로렌소 할아버지나 마을의 현인 블란디나 아줌마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세바스티안. 어떻게, 요즘 청소년들의 모습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세바스티안이 온 에스파냐를 정복하려는 라카르 공작 남매의 야망에 협력해서, 기사가 되었다면 아마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의 이야기는 그렇게 흥미롭지 않았으리라. 전쟁터에서 양쪽 진영에 발을 걸치고, 수입을 올리는 첩자의 운명처럼 자신에게 접근해온 크리스티나 공주의 제안을 받아들인 세바스티안은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한 라카르 공작부인 배신하고, 크리스티나 공주를 구해줄 용사 엘시드를 찾아 나선다.

엘시드를 찾아가는 길은, 세바스티안이 보다 다른 단계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영웅기사문학에서 어느 순간, 성장소설로 변신한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은 크리스티나 공주의 운명을 걸고, 사악하고 잔혹한 라카르 공작과 정의감과 자신의 주군이었던 산초 왕에 대한 충성으로 불타는 용사 엘시드의 대결로 클라이맥스를 향해 달려간다.

어떻게 보면 소년들을 위한 간단해 보이는 줄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정의를 실천하고 신의를 지켜야 한다는 마초이즘에 입각한 기사문학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운명을 오로지 남성들에게 의존해야 했던 중세 여성관이 누구나 자신의 의지에 의해 행복을 추구할 수가 있다는 근대적 사고와 충돌하고 있다. 장원제도에 입각한 귀족과 농노 간의 철저한 신분제의 타파에 대한 열망 역시 읽을 수가 있었다. 누구나 다 경멸하는 첩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세바스티안은 자신도 언젠가는 멋진 말을 타고, 용사 엘시드와 같은 기사가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어느 소년의 목숨을 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한 멋진 모험담을 읽는 재미만으로도 <소년 기사 세바스티안>은 읽을 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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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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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며칠 사이에 쉴 새 없이 오쿠다 히데오가 만들어낸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닥터 이라부 이치로에 빠져 살았다. <공중그네>로 시작된 이라부 탐험기는 <면장 선거>를 거쳐 마침내, <인 더 풀>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물론, 앞으로 오쿠다 히데오가 당분간 닥터 이라부 시리즈를 발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인 더 풀>에서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어떻게 해서 이라부 이치로라는 희대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도대체 밉지 않은 엉뚱한 정신과 의사가 탄생하게 되었는가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캐릭터의 낙천성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근한 몸매와 누구라도 이 사람이 정말 의사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전형적인 의사 상에 반하는 닥터 이라부,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까지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떤 의사도 해내지 못한 난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당사자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는, 평범한 속의 진리라는 아주 간단한 원리다. 우리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어렵게 보려는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에 기초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라부 이치로가 독자들에게 주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무 복잡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구, 이 바보들아!

마지막으로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처방하지 않고, 단순히 등장하는 모든 고민 남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그의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어쩌면 그런 그의 태도야말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고수하는 방어기제를 무장해제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문제들’을 술술 털어놓는 것이다. 당연히, 그에 앞서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의사와의 공감대가 우선으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감대 역시 의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성질 급한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한 박자 느리게 조절하는 운영의 묘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모든 남자가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모델 도우미, 음경강직증이라는 해괴한 병에 시달리는 직장의 샐러리맨, 수영 중독에 빠져 하루에 몇 시간씩 수영장을 찾지 않으면 안달복달하는 중년 남성, 휴대전화와 문자에 중독되어 쉴 새 없이 주변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마는 어린 고등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습관성 강박증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작가에 이르기까지 정말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법한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문제들을 오쿠다 히데오는 도마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자, 모든 게 준비됐다. 이제 등장인물을 등장시켜서 이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버무리고, 갖가지 소재들로 양념해서 한 그릇의 맛있는 이야기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것은 온전하게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에 달렸다. 그저 독자들은 수저를 들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인 더 풀>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바로 <프렌즈>였다. 그전에 언젠가 아는 동생으로부터, 요즘 아이들은 MP3 플레이어가 없으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프렌즈>의 주인공 유타의 강박증 시발점은 바로 휴대전화였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이어서 많은 친구들과 다양한 교제를 경험하지 못해온 유타는 휴대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끊이지 않고 소통을 시도한다.

그런 유타의 내면에는 홀로이고 싶지 않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닥터 이라부를 찾은 유타는 별다른 친구 없이 지내는 이라부-마유미 듀엣에게서 비로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유타. 그렇다, 오쿠다 히데오는 우리가 병원에서 받는 천편일률적인 처방을 거부한다. 물론, 느닷없이 팔뚝을 쑤시는 비타민 주사는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심신증 치료에는 이라부표 수다와 유머야말로 특효약이다. 하긴 그들 스스로 미쳤다는걸(물론 정도의 차이겠지만)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치유는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 시리즈가 어디까지 나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거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의 마음만큼이나 알 도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닥터 이라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나설 용의가 있는 열혈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당장에라도 집필 활동에 나설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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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래그먼트 - 5억년을 기다려온 생물학적 재앙!
워렌 페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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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십수 년 전,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을 정말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중에 잔뜩 기대를 하고 영화도 보았는데 책보다 못해서 실망했던 일이 떠오른다. 미국 출신의 작가 워렌 페이의 SF소설인 <프래그먼트>는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에, 최근 유행하는 텔레비전의 리얼리티 쇼를 적절하게 배합해서 태어난 이종교배의 멋진 돌연변이처럼 그렇게 다가온다.

프롤로그에서 소개되는 워렌 페이가 나열한 새로운 서식지에 새로운 생물군의 도입이 우리가 사는 환경 시스템에 얼마나 큰 재앙인지에 대한 생생한 경고가 눈에 보이는 듯하다. 그리고 200여 년 전, 이 책의 주요 무대가 되는 남태평양의 외딴 헨더스 섬으로 독자들을 조용하게 초대한다.

일련의 과학자들과 방송 출연진들을 실은 리얼리티 쇼의 지원을 받는 “트라이던트”호가 지구 상의 가장 외딴곳들을 탐험하겠다는 목적에서 1년간 세계를 누비며 위성으로 생생한 방송을 송출하고 있다. 물론 트라이던트 호에는 하루에 3,000 갤런의 담수를 만들어내는 시설에서부터 시작해서, 모든 문명의 이기들이 잘 어우러져 있다. 여느 리얼리티 쇼처럼, 그들의 목적은 더욱 이국적이면서도 자극적인 방송으로 케이블TV의 시청률을 높이고, 더 많은 스폰서들의 지원을 받는 것이다. 다분히 자본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그렇게 무난한 항해를 하던, 시 라이프(Sea Life) 팀은 조난신호 자동발생장치(EPIRB)를 수신한다. 이 책의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식물학자 넬 덕워스는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섬인 헨더스 섬에 기착하고 싶어 하지만, 전혀 상업적 매력이 없는 외딴 섬에 머물고 싶지 않았던 시 라이프 팀도 조난신호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꾸려진 일단의 탐험대는 예의 헨더스 섬에 상륙해서, 제대로 된 탐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섬의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에게 처참하게 학살당하고, 그 모든 과정이 전 세계로 위성을 타고 중계된다.

당연히 시 라이프의 방송분은 전 세계에 파문을 불러일으키고, 곳곳에서 시청률을 노린 조작이다 아니다로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소설의 초반 미국의 동물학자로 등장해서, 진화와 생태계에 대해 자유로운 토론을 하는 주요 인물로 역시 제프리 빈스뱅거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한편, 미국은 헨더스 섬 주변을 완전 봉쇄하고 통제하면서 도대체 그 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한 조사에 착수한다. 자, 이제 독자들은 원반 개미, 송곳 벌레, 헨더스 그리고 스피거 같이 정말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들이 득시글거리는 미지의 헨더스 섬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조금 진부하기는 하지만 <프래그먼트>는 지구의 진화에서 동떨어진 채, 격리되어 평화로운 공존이라는 자연계의 개념에 반하는 오로지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전혀 새로운 헨더스 섬의 생태계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몇몇 캐릭터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작가 워렌 페이는 캐릭터 설정이나 묘사보다는 인류의 삶과 진화 같은 좀 더 거창해 보이는 주제에 집중한다. 테크노 스릴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새로운 기술을 바탕으로 한, 첨단 장비들이 속속들이 소개된다. 하지만, 헨더스 섬의 치열한 삶의 각축장에서 살아남은 괴생물체들은 지구 상의 그 어떤 다른 종보다도 우월하다는 것이 실험을 통해, 그리고 계속되는 인간들의 도전을 분쇄하면서 입증된다.

<프래그먼트>는 확실히 비채의 다른 책들처럼 기대 이상의 재미가 있다. 물론 시 라이프 팀들의 사투에 비해, 대학의 세미나실에서 과학자들이 벌이는 과학의 본질적 토론 부분은 상대적으로 그 재미가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소설의 균형을 맞추는데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 너무 황당한 이야기들만 나오면, 그 현실감이 떨어질 테니 말이다. 아쉬웠던 점은, 이러구러 잘 진행이 되던 이야기가 마지막 100페이지 정도를 남겨 두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캐릭터의 등장으로 소설 전개의 집중력이 급속하게 떨어졌다는 것이다.

워렌 페이의 <프래그먼트>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간단하다. 나와 다른 종, 혹은 개체와 충분히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이 지구에서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한계는 우리 인간과 대화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작가는 곳곳에서 그런 자신의 메시지를 표출해 내고 있다. 물론 그렇지 못한 대처 레드먼드 같은 이는 권선징악의 법칙에 따라 응징된다.

마지막으로 하나 궁금한 건, 과연 <프래그먼트>가 언제 영화화가 되느냐는 것이다. 아마 이보다 더 흥미진진한 시나리오 감이 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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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장 선거
오쿠다 히데오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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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올해 추석맞이 독서의 키워드 작가는 바로 오쿠다 히데오였다. 추석 연휴 전에 우연한 기회에 헌책방에 들러 <공중그네>를 샀다. 이미 <공중그네> 전에 두 권의 오쿠다 히데오의 책들을 만나 봤지만 그다지 큰 감명을 받지 못했었다. 그런데 <공중그네>의 주인공 이라부 이치로를 알게 된 순간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곧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닥터 이라부 이치로 시리즈를 모두 사들였다.

순서는 원래 <인 더 풀>, <공중그네> 그리고 <면장 선거>인데 나는 <공중그네>, <면장 선거> 그리고 <인 더 풀>의 순서로 읽고 있다. <면장 선거>는 나오키상을 받은 전작 <공중그네>만큼이나 기대되는 이야기들로 가득한 유쾌한 독서 체험이었다. 뭐랄까, 자신을 찾아온 환자들이 모두 바보, 괴짜 의사선생이라고 생각하는 이라부 이치로는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고 느낌이 들었다. 아울러 가슴 계곡의 비밀로 환자들의 넋을 빼고 몽롱하게 만들고 자신이 어느새 주사대에 묶여 비타민-포도당 주사를 맞고 있는지도 모르는 얼빠진 환자들을 양산해 내는 펑크록 밴드의 멤버인 간호사 마유미짱의 활약 역시 멋지다, 올레!!!

내가 읽은 <면장 선거>는 2007년 초판이 나온 이래, 무려 15쇄나 찍은 버전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많은 독자가 닥터 이라부에게 열광하는 걸까? 그건 아마 오쿠다 히데오의 닥터 이라부 시리즈에 나오는 주인공 이라부 이치로의 파격에 있지 않을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과는 왠지 괴리된 세상에 살고 있을법한 의사 선생님이 알고 보면, 돌아이 포스라는 거다. 엄청나게 음식을 밝히고,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에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서슴지 않고 테러를 꼬드기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반달리즘마저 공모하는 의사 선생이 이 세상천지에 또 어디겠느냐는 말이다. 물론 타인에게 최소한의 피해를 주는 한도에서 말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독자들의 통쾌한 공감대가 폭발한다.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다.

책을 읽다 보니 하나의 간단하면서도, 전체 에피소드들을 관통하는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이라부를 찾아오게 되는 이들은 누구나 한가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일종의 강박으로 보고 싶은데, 그런 강박증을 가진 이들이 이런저런 인연으로 해서 이라부 박사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들 모두에게 이라부와 마유미는 천편일률적인 처방, 요청하지도 않은 주사를 맞힌다. 물론 저항하는 이들도 있지만, 이런 소동을 통해 환자들은 심리적인 안정을 찾는다. 이라부가 아무 생각 없이 툭툭 던진 한 마디에 바로 걸려들면서, 주기적으로 그를 찾게 된다. 그리고 어이없어 보이는 이라부와의 직접 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정답을 만들어 가는 패턴이 읽히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보면, 참으로 무책임해 보이는 서사 기법처럼 보이기 하지만 심각한 인문 서적이 아닐 바에야 어떤 구체적인 대안이 필요하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읽어서 즐겁고, 지속적으로 허를 찌르는 이라부 선생의 처방전이야말로 온통 혼란스러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푸근해져 온다.

이제 그만 물러나라는 세대교체 요구에 꿋꿋하게 버티는 전후세대의 상징처럼 다가오는 인물이 환자로 나선 <구단주>, 능률과 효율만이 삶의 전부라고 믿는 IT업계의 풍운아를 다룬 <안퐁맨>,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카리스마 직업>을 가진 중년 여배우 그리고 마지막 어느 시골 섬의 면장 자리를 두고 2,500명 정도 되는 섬사람들이 두 패로 갈려서 막장 대결을 펼치는 <면장 선거>의 네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전 <공중그네>와는 달리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전개가 된다는 점에서 아주 작은 변별점을 보여 준다.

세상사가 답답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렇게 자신의 속을 툭 털어 넣고 사뭇 엉뚱해 보이는 공모를 할 수 있는 의사이자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상상을 해본다. 오쿠다 히데오의 이야기들은 어쩌면 현실 세계에서는 볼 수 없는 이야기라서 더 독자들에게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오쿠다 히데오의 이 맛깔 나면서도 중독성이 강한 닥터 이라부 시리즈가 계속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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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본능 - 법의곤충학자가 들려주는 살인자 추적기
마크 베네케 지음, 김희상 옮김 / 알마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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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의 탁월한 법의학곤충학자 마르크 베네케의 범죄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살인 본능>을 읽었다. 아쉽게도 첫 번째 작품인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는 아직 읽어 보지 못했지만, 올해 초에 <연쇄살인범의 고백>에 이어 <살인 본능>도 접할 수가 있었다. 아무래도 나중에 시간을 내서 이 3부작의 시작이 되는 <모든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도 읽어봐야 할 것 같다.

범죄의 흔적을 쫓는 범죄 과학 수사의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범죄의 미스터리를 푸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알려진 지문 감식은 도입된 지가 100여 년 남짓이고, 유전자 감식은 20년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요즘 텔레비전을 통해 쉽게 접할 수 있는 CSI 같은 프로그램들은 불과 십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다년간 범죄 현장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며 이 책을 저술한 마르크 베네케는 이러한 증거들조차 절대적으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하고 있다. 범죄를 입증하기 위한 하나의 객관적인 증거로만 받아들일 것을 주문한다. 지문이나 유전자감식을 통해 얻어진 증거들은 하나의 증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하물며, 증인들이나 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한 신빙성은 더더욱 떨어진다.

마르크 베네케는 무겁지 않고 가벼운 주제로 책을 시작한다. 명예와 양심 코너에서,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결투”를 무대 위에 올린다. 우리가 잘 아는 철혈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자존심과 오만으로 똘똘 뭉친 프로이센 귀족 출신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조그만 시비라도 붙으면 절대 넘겨버리지 못하고 피를 결투로 결판을 내곤 했던 이 정치가는, 훗날 프로이센 지방의회에서 자신을 공격한 정적으로부터 명예를 지키기 위해 법으로 금지된 결투를 신청하기에 이른다. 그 누구보다도 법질서를 우선으로 지켜야 하는 이들이 초법적인 행위를 하겠다고 나서는 장면이 우스꽝스럽기만 했다. 작가는 과연 명예훼손의 범주가 어디까지 해당되는지, 건전한 상식의 범위에서 해결될 수는 없는지를 독자들에게 묻는다.

테네시 대학교 녹스빌에 존재한 “보디 팜”의 기원에 대한 설명 또한 주목할 만하다. 보디 팜은 조직의 부패 정도와 곤충들의 활동 양태를 과학적으로 규명하기 위해 윌리엄 배스라는 이가 만든 연구소의 이름이다. 다양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통한 뼈 연구를 통한, 얼굴 복원 작업 또한 범죄수사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 중의 하나로 소개가 된다.

물론 범죄 사건들이 치밀한 수사와 증거물 수집으로만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고 마르크 베네케는 말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1930년대 전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찰스 린드버그 주니어의 납치사건을 제시하고 있다. 사건 초기부터 미국의 국민적 영웅인 실종된 주니어의 아버지 찰스 린드버그는 경찰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으면서, 사건의 체계적인 수사에 훼방을 놓았다. 이렇게 미궁에 빠져 있던 사건은 주니어의 몸값으로 지급된 금화증권이 우연히 발견되면서, 뉴욕 브롱크스에 사는 브루노 하우프트만을 유괴범으로 검거하게 된다. 하지만, 마르크 베네케는 다시 한 번 물증만으로 정황이 참작되지 않은 판단에 대해 독자들의 의견을 구한다.

1990년대 캐나다에서 벌어진 폴 베르나르도와 칼라 호몰카의 연쇄 성폭행과 살인사건이 어떻게 캐나다 국민에게 경찰에 대한 불신을 심어 주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추적을 보여준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이는 이들이, 믿을 수 없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면서 평범한 이웃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하게 된다. 이렇게 살인자의 모습은 우리의 상상과는 달리 남다르지 않고, 지극히 일상적인 삶을 사는 가운데 끔찍한 일탈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제보와 정황 증거들에도, 무능력한 경찰들은 그런 범죄자들을 활개치게 놔두었다는 점에서 비난받아 마땅하다.

마지막으로 작가는 사형제도에 반하는 태도에서, 사형제도가 과연 범죄 예방과 재발을 막기 위한 제일 나은 방법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한 발짝 더 나아가, 과연 현재 우리의 사법 제도에 문제는 없는가에 대해서는 세기의 재판으로 불렸던 O.J. 심슨 사건을 그 예로 든다. 누가 봐도, O.J. 심슨이 끔찍하게 살해된 그의 전 부인 니콜 브라운과 그녀의 남자 친구 론 골드만을 살해한 것으로 생각했지만, O.J. 심슨의 유능한 변호인들은 이 살인사건의 본질을 인종차별로 흐리고 배심원들의 인간적인 측면에 최대한으로 호소하면서 결국 O.J. 심슨의 무죄방면을 이끌어냈다. O.J. 심슨의 변호사들은 재판에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심지어 여론몰이까지 마다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물론 뒤이은 민사재판에서 O.J. 심슨은 패소하면서 빈털터리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공정한 재판이 아닌 한 편의 쇼를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전과 응전의 역사대로 범죄의 기술 역시 범죄수사학의 신기술 개발과 발전에 비례해서 날이 갈수록 지능적이고 교묘하게 진화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법의 테두리에서 발생하는 심각한 문제들 역시 간과할 수가 없을 것이다. 당장에 되돌릴 수 없는 사법 살인이나 증인 혹은 피해자들이 무고한 이들을 범인으로 지목하면서 생긴 오심에 대한 책임은 도대체 누가 지느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정확한 물증의 채택과 명백한 정황들의 톱니바퀴 맞추기 그리고 공정한 재판 절차를 통한 진실확인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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