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 더 풀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억관 옮김 / 은행나무 / 2005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지난 며칠 사이에 쉴 새 없이 오쿠다 히데오가 만들어낸 안티-히어로 스타일의 주인공 닥터 이라부 이치로에 빠져 살았다. <공중그네>로 시작된 이라부 탐험기는 <면장 선거>를 거쳐 마침내, <인 더 풀>로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됐다. 물론, 앞으로 오쿠다 히데오가 당분간 닥터 이라부 시리즈를 발표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인 더 풀>에서 작가 오쿠다 히데오는 어떻게 해서 이라부 이치로라는 희대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도대체 밉지 않은 엉뚱한 정신과 의사가 탄생하게 되었는가의 원형을 제시하고 있다. 우선 첫 번째로, 캐릭터의 낙천성이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푸근한 몸매와 누구라도 이 사람이 정말 의사야? 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통 사람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전형적인 의사 상에 반하는 닥터 이라부, 그렇다고 해서 그의 능력까지 깎아내려서는 안 될 것이다. 그 어떤 의사도 해내지 못한 난제들을 척척 해결하는 당사자니까 말이다.
두 번째로는, 평범한 속의 진리라는 아주 간단한 원리다. 우리네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어렵게 보려는 고정관념 속에서 살아간다. 때로는 모든 것을 자신의 감정에 기초한 가장 기본적인 측면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라부 이치로가 독자들에게 주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페르소나로 보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를 통해 작가는 독자들에게 이렇게 외치고 있다. 너무 복잡해, 자기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구, 이 바보들아!
마지막으로 그는 실제로 아무것도 처방하지 않고, 단순히 등장하는 모든 고민 남녀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물론 그의 태도에 혀를 내두르는 이들도 적지 않지만, 어쩌면 그런 그의 태도야말로 환자들이 마지막으로 고수하는 방어기제를 무장해제시키고 비로소 자신의 ‘진짜 문제들’을 술술 털어놓는 것이다. 당연히, 그에 앞서 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의사와의 공감대가 우선으로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감대 역시 의무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냥 때가 되면 저절로 만들어진다. 그러니 성질 급한 분들은 책을 읽으면서 한 박자 느리게 조절하는 운영의 묘미가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주변의 모든 남자가 자신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착각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모델 도우미, 음경강직증이라는 해괴한 병에 시달리는 직장의 샐러리맨, 수영 중독에 빠져 하루에 몇 시간씩 수영장을 찾지 않으면 안달복달하는 중년 남성, 휴대전화와 문자에 중독되어 쉴 새 없이 주변과 소통을 시도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마는 어린 고등학생 그리고 마지막으로 습관성 강박증에 시달리는 프리랜서 작가에 이르기까지 정말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을법한 이들의 평범하지 않은 문제들을 오쿠다 히데오는 도마 위에 살포시 올려놓는다.
자, 모든 게 준비됐다. 이제 등장인물을 등장시켜서 이 맛깔스런 이야기들을 버무리고, 갖가지 소재들로 양념해서 한 그릇의 맛있는 이야기 비빔밥을 만들어내는 것은 온전하게 작가 오쿠다 히데오의 능력에 달렸다. 그저 독자들은 수저를 들고, 맛있게 먹으면 된다.
개인적으로 <인 더 풀>에서 가장 재밌게 읽었던 에피소드는 바로 <프렌즈>였다. 그전에 언젠가 아는 동생으로부터, 요즘 아이들은 MP3 플레이어가 없으면, 불안정한 모습을 보인다는 말을 들었었는데 <프렌즈>의 주인공 유타의 강박증 시발점은 바로 휴대전화였다. 어려서부터 내성적이어서 많은 친구들과 다양한 교제를 경험하지 못해온 유타는 휴대전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끊이지 않고 소통을 시도한다.
그런 유타의 내면에는 홀로이고 싶지 않다는,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결국, 자신의 강박증 때문에, 닥터 이라부를 찾은 유타는 별다른 친구 없이 지내는 이라부-마유미 듀엣에게서 비로소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유타. 그렇다, 오쿠다 히데오는 우리가 병원에서 받는 천편일률적인 처방을 거부한다. 물론, 느닷없이 팔뚝을 쑤시는 비타민 주사는 강제성을 띠고 있지만, 심신증 치료에는 이라부표 수다와 유머야말로 특효약이다. 하긴 그들 스스로 미쳤다는걸(물론 정도의 차이겠지만) 인정하는 순간, 그들의 치유는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이 시리즈가 어디까지 나갈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거야말로 어디로 튈지 모르는 닥터 이라부 이치로의 마음만큼이나 알 도리가 없을 수밖에. 하지만, 닥터 이라부가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따라나설 용의가 있는 열혈 독자들을 위해서라도 오쿠다 히데오 작가는 당장에라도 집필 활동에 나설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