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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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발자크와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23일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였다. 난 당시 마리아 칼라스의 묘역을 찾고 있었고, 우연히 발자크의 묘역을 찾는 어느 미국 여인을 따라 발자크의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묘지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는데,  그 사진을 2010년 벽두에 만난 발자크의 <나귀 가죽> 리뷰에 담게 됐다.

사실 최근 들어 책 좀 읽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발자크나 스탕달 같은 프랑스 고전 작가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끝없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고전, 클래식으로 회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의 신년 프로젝트는 고전읽기로 지난주에 읽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이어, 이번에 국내에 초역되었다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을 악전고투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 있다.

오늘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식으로 리뷰를 풀어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작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와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발랑탱 드 라파엘에게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주는 “나귀 가죽”은 마치 기호학에서 말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섬망(譫妄)으로.

고전읽기라는 미명에 현혹돼서 야심 차게 도전했던 나의 발자크 읽기는 절반 정도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솔직히 자수하자면, 책을 다 읽고 나서 역자인 이철희 선생이 책의 뒷부분에 달아준 해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의 원제에 등장하는 chagrin은 가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근심’이라는 다른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을수록 그 이유가 절절하게 이해가 됐다.

도박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재산인 20프랑짜리 금화를 잃은 우리의 주인공 발랑탱은 때 이른 삶의 종결을 준비한다. 그러던 차에 볼테르 강변 가에서 우연히 들른 골동품상에서 만난 신비스러운 노인으로부터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난다. 발랑탱의 첫 번째 소원은 호화찬란한 야회(royal banquet)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 에밀에게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비롯해서, 어떻게 자신이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는가, 페도라 백작부인과의 쓰디쓴 실패한 연애담, 소설에서 중요한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라스티냐크와의 만남과 이어지는 방탕한 생활에 그야말로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아들 발랑탱을 정치가로 만들려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무 살의 발랑탱은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 훗날 자신을 물질적 파산으로 몰고 가게 되는 도박의 세계에 빠져든다. 평민 출신이었던 발자크의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조롱이라고나 할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진 라파엘은 자발적 가난과 학문적 성찰의 세계를 탐닉하기도 한다. 그 가난 중에 만난 14살난 폴린과의 관계는, 단테 알리기에리와 베아트리체의 그것처럼 운명적 사랑을 예고하기도 한다.

2부 <무정한 여인>에서 발랑탱이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백작 부인 페도라에 대한 섬망(譫妄)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문제적 청년 쥘리앵 소렐의 페르바크 부인에 대한 연모나 혹은 피에르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후작의 마담 드 투르벨에 대한 끈질긴 욕망으로 다가온다. 페도라에 대한 눈물겨운 발랑탱의 구애는 결국 실패하지만, 라스티냐크의 도박판에서의 대성공으로 방탕한 생활에 접어들게 된 발랑탱!

사실 개인적으로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에서 근대 버전의 재밌는 우화를 예상했지만, 발자크는 나의 그런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린다. 기대한 내러티브 대신 장황하기 짝이 없는 발랑탱의 썰로 나 같은 수준 이하 독자의 기를 대번에 꺾어 놓는다. 게다가 1830년대 시대상을 담보한 발자크의 신랄한 패러디와 정교한 묘사는 정말 역자의 주석 없이는 전진을 불가하게 만들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던 그의 삶에 대한 파노라마가 독백 형식을 빌린 기나긴 하소연을 뚫고 나오니 드디어 “나귀 가죽”과 ‘소원을 말해봐’라는 기대한 신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의 나귀 가죽의 힘을 빌려 발랑탱은 콜카타에 있는 외삼촌으로부터 600만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된다. 한 때 겸손한 학자이자 문필가의 꿈을 꾸던 청년 발랑탱이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점점 방약무인하게 된다. 그를 찾아온 스승 포리케 선생에게 모욕을 주고 쫓아내고, 자신이 한때 그렇게 사랑한다고 믿었던 페도라에게 경멸을 시선을 보내며 성공한 부르주아지로 거듭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발랑탱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의 충직한 집사 조나타의 오만가지 업무 중에서 새로 나온 책을 지체 없이 대령해주는 것이었다. 책 좀 읽는 이들의 꿈이 아닐는지.

이 책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19세기 프랑스의 연금제도가 어떻게 운용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었기에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연금 타령을 그렇게 해대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한편,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나귀 가죽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귀 가죽의 주인 발랑탱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크기만큼, 줄어드는 발랑탱의 수명, 다시 말해서 죽음이었다. 중세 이래 예술과 문학에서 주요한 소재로 사용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발자크의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의 낫질을 하며 주인공을 위협한다. 부유한 병자 특유의 괴팍함으로 무장한 발랑탱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변한 추레한 그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그는 이탈리아 극장에서 자신에게 불행과 행복의 숙명적 선물인 나귀 가죽을 안겨준 예의 골동품상에서 만난 노인, 페도라 그리고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이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생캉탱 여관에서 이 여인의 오랜 짝사랑에 대한 번민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모두 씻어주는 발랑탱의 키스란...

소설 <나귀 가죽>의 보편적 이해를 위해서, 1830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815~1830년의 왕정복고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왕당파 등 온갖 정치세력들이 준동하는 가운데, 토지경제에 근거했던 프랑스는 비로소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게 된다. 왕정복고를 기도하던 귀족세력과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르던 부르주아 계급과의 일대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발랑탱이 처음 소원했던 야회에서, 두서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논전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당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시대상의 발현이었다.

소설에서 극히 중요한 시간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830년 7월혁명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들춰 보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글에 의하면 7월혁명은 귀족세력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명백한 패배였고, 대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나서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과격한 정치혁신은 노동계급의 독자세력화와 민족주의 운동 출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홉스봄은 예의 책에서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완벽하게 사회적 관심의 한 기념비”(혁명의 시대, 474쪽, 한길사, 1998)였다고 기술했다. 위대한 역사가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니 발자크의 소설이 갖는 시대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됐다.

<나귀 가죽>은 발자크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극> 총 89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등이 있는데 시간이 되는 대로 발자크의 문학을 하나씩 접해볼 계획이다. 어렵긴 했지만, 시대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2세기가 흐르고 나서도 여전히 그 보편적인 광휘를 잃지 않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과 만날 수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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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깐한 독서본능 - 책 읽기 고수 '파란여우'의 종횡무진 독서기
윤미화 지음 / 21세기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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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어쩌면 이럴 수가 있나 그래! 이 책의 저자 파란여우님이 리뷰를 한 86편의 책 중에 크로스오버 되는 책이 단 한 권도 없다니 말이다. 다시 한 번 책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오묘하며 무궁무진한지 깨달을 수가 있는 좋은 계기였다. 지난 5년간 독서 일천 권의 내공을 쌓아, 그 가락을 배경으로 해서 세상에 책 한 권을 낳는 개가를 올린 파란여우님께 우선 축하를 드리고 싶다. “책 좀 읽는” 이들의 로망에 선빵을 날리시는 데 대한 존경과 시기를 적절히 비벼서. 책이 책을 낳는다는 내 생각을 입증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좋은 케이스가 있을까?

파란여우님의 서평집인 <깐깐한 독서본능>을 읽기에 앞서 알라딘에 차린 파란여우님의 블로그를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걸, 리뷰들이 나의 수준이 맞지 않게 너무 어려운 게 아닌가! 그래서 사실 겁을 집어먹고서는 읽어 보지도 않고 바로 블로그를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책 읽을 생각에 조금씩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부터 고지식하게 읽을 생각도 없었지만, 책에 실린 서평 중에서 나의 기호에 맞을만한 책에 대한 리뷰부터 골라 먹기 시작했다. 파란여우님의 아이디와 책의 제목으로 뽑은 “깐깐한” 사이에는 왠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묘한 동질감이 배어 있는 것 같아 슬며시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파란여우님 이전에도 책에 대한 서평을 모은 서평책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하지만, 파란여우님은 인터넷 파워블로거로서 그녀가 생산해내는 글들이 거대한 하나의 담론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이래서 바로 선빵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담론을 통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신기원을 창조해 나가면서 자신이 담론 그 자체가 된다는 것! 듣기만 해도 매혹적이지 않은가?

책 좀 읽는 사람으로서 나의 관심은 인문, 역사 그리고 소설 정도에 치우쳐 있다. 그 누군가 어느 모임에서 말했듯이 나도 당당한 편협한 독서편식가다. 자신도 이미 그 증세를 잘 알고 있어서 아예 고칠 생각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파란여우님의 지평은 더욱 광활하고 드넓다. 한국문학, 외국문학, 고전과 인문을 에둘러 평전과 환경, 생태 그리고 문화 예술에 다다를 때에는 정말 상대의 내공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로그를 둘러보고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책에 실린 서평들은 부담 없이 즐길 수가 있었다. 부질없는 극단적 사고의 부산물인 노파심 덕에 단디 겁을 먹었었나 보다. 한 시절을 풍미했던 딴지총수의 유럽에 경도된 신사대주의를 신랄하게 꼬집어 대고, 최근 <공무도하>를 발표해서 성공 가도를 질주하고 있는 노작가를 철저한 계산가이자, 수려한 언어의 설계사라는 표현으로 둘러메치는 통쾌함도 책쟁이들에게 선사해 준다.

좀 고상한 리뷰어들이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오쿠다 히데오를 ‘짧은 문장, 발랄한 문체 그리고 간단한 마무리’라는 특징으로 무장한 일단의 일본 작가군의 대표격으로 지목해서 요리를 즐긴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노르웨이 출신의 노작가 크누트 함순의 나치 부역에 대해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콜롬비아 출신의 수다쟁이로 노벨문학상 수상에 빛나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현란한 구라와 뻥이라는 주술에 걸려 읽게 된 <백년 동안의 고독>의 추억에 잠시 젖기도 했다. 독서토론회에서 발표하기 위해 시작은 했지만 결국 완독하는데는 실패했던...

오쿠다 히데오의 사두기만 하고 아직 읽지 못한 <남쪽으로 튀어>에 이어, 전설적 아니 주술적 구라쟁이 마르케스의 읽다 만 <백년 동안의 고독> 그리고 존 키건의 <2차세계대전사>가 아닌 왜 <1차세계대전사>냔 말이다. 이렇게 슬쩍슬쩍 비켜 가던 책들이, 고우영 작가의 <삼국지>에서 비로소 그 절대적 공감을 형성하게 된다. <열국지> 혹은 <초한지>의 캐릭터들의 변용이라고나 할까? 이모 작가의 공전 베스트셀러를 기록한 <삼국지>에서 촉한정통론과 관우숭배를 건드리지 말라고 했던가. 고우영 선생은 제갈공명과 관우와의 대결을 유비가 거느린 가신그룹 내 신구세력의 대결로 몰고 간다. 하지만, 동쪽의 오나라오 협력하고 북쪽의 위나라와 대결하라는 공명의 말 대신 만인지용으로 중원을 내달리던 관운장은 중원통일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형주를 빼앗기고, 자신의 목숨마저도 잃게 된다. 파란여우님이 리뷰한 고우영 선생의 <삼국지>가 없었더라면 정말 아쉬울 뻔했다.

개인적으로 서평이란 어느 특정한 담론과 타자와의 소통을 그 전제로 한다고 생각한다. 나 혼자 보고서 자위할 서평이라면 굳이 블로그라는 오픈 공간에 내놓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파란여우님이 제시한 서평공책-나는 독서노트라고 부른다-에 고이 모셔 두면 될 것이다. 파란여우님은 자신의 서평이 책으로 나오는 데 대해 겸연쩍어 했지만, 사실 시간과 방법상의 문제일 따름이지 않은가. 게다가 아직 책을 읽지 않았거나 혹은 책을 읽었어도 여전히 깨달음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나 같은 중생들을 위해 글 잘 쓰는 법도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있나 그래.

조금 아쉬운 점으로는 파란여우님의 책읽기와 인터넷 검색에 그 넓음의 풍성함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곳곳에서 깊이의 부족이 느껴지기도 했다. 예를 들어, 존 키건의 <1차세계대전사>에서 1차세계대전 발발의 원인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 독일-오스트리아에 대결한 세르비아의 뒤에 러시아가 있다고 간단하게 짚고 넘어갔는데 게르만족과 슬라브 민족주의라는 뿌리 깊은 반목이라는 역사적 배경을 설명해 주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내가 좋아하는 하워드 진의 <미국민중사>에서는 내가 어렸을 적에 흑인의 대명사로 불리던 쿤타 킨테가 나온 <뿌리>를 텔레비전 미니시리즈가 아닌 영화로 착각하기도 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서평을 읽으면서 문학적 상상력보다 영화적 비주얼이 우선하는 걸까 하는 착시가 일기도 했다.

<깐깐한 독서본능>을 읽으면서 서평을 읽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호소력 있는 글을 쓸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진지한 고민의 시간을 가질 수가 있었다. 파란여우님이 책에도 썼다시피, 타인의 방법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면서 나만의 독서스타일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책쟁이들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암묵지가 있지 않은가 말이다. 책읽기와 글쓰기에 왕도는 없는 것 같다, 다독(多讀)과 꾸준한 공부만이 책 좀 읽는 이들을 위한 고언(苦言)이란 생각이다. 물론, 글 잘 쓰는 마법의 로션 같은 게 있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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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뿔 - 이외수 우화상자
이외수 지음 / 해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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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장 최근에 이외수 작가의 이름을 들어본 것은 지난가을 막을 내린 MBC 시트콤 <크크섬의 비밀>에서였다. 우리 나이로 예순네 살에 첫 연기자로 데뷔한 이외수 작가는 예의 시트콤에서 치매에 걸린 이선장 역을 맡아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한다. 아쉽게도 방영 중에는 미처 보지 못하고, 오늘에서야 당시 이외수 선생의 인터뷰를 봤다. 하여튼 그의 기인 캐릭터는 일면 황당해 보이는 시트콤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각설하고, 오늘 이야기할 이외수 선생의 2001년 작 <외뿔>은 그가 발표한 ‘우화상자’ 연작 중 <사부님 싸부님>에 이은 후속편이라고 할까. 역시 피씨통신이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던 십 년 전에 피통체(피시통신에서 사용되는 문체)를 남발하면서 우리네 세태에 대한 날 선 비판을 아끼지 않는다.

전작에서 강원도 어느 산골에 사는 하얀 올챙이와 그의 제자 까만 올챙이가 주인공이었다면 이번에는 춘천 의암호에 서식하는 물벌레를 그 주인공으로 삼았다. 세상의 오만가지 열등감에 시달리는 아름답지 못하고 하찮은 물벌레의 입을 빌려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로 서두를 시작한다. 외형적 아름다움이냐, 아니면 내면의 아름다움이냐 하는 고전적 질문으로부터 공주병환자와 살다 보면 어떤 남자라도 3년 안에 지극히 평범한 마부가 된다는 썰에 이르기까지 이외수 선생, 아니 물벌레는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유감없이 펼쳐낸다.

아름다움에 대한 깨달음을 구도하는 물벌레는 왠지 거북스러운 염세주의자의 초상으로 다가온다. 물벌레의 세상에 대한 한탄에서 종교도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는데, 거기에도 역시나 “사랑을 빙자한 욕망의 독버섯”(67쪽)이 창궐하고 있다는 독설을 퍼붓는다. 물벌레의 진리와 사랑에 대한 간구는 깨달음을 통해 욕망과 허영을 털어내야 한다는 결론을 도출하기도 한다. 아따, 그놈의 물벌레가 사람보다 훨씬 낫구먼 그래. 아니 그건 물벌레에 대한 모욕이던가.

이렇게 세상의 온갖 고민을 지고 사는 물벌레가 과연 세상과 타협할 것인가, 아니면 절연할 것인가에 고민하고 있을 때, 홀연히 등장한 물벼룩이 ‘아니다, 그게 아니라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야 한다’라는 독자적인 썰을 풀기 시작한다. 이어 나오는 도깨비 이야기에서 이 도깨비 녀석들이 희한하게도 깨달음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는데, 어디 가십니까? 혹은 식사는 하셨습니까? 라는 지극히 단순해 보이는 문답을 통해 도(道)와 깨달음에 대해 이외수식 썰을 한바탕 풀어 젖힌다. 나는 이에 대해 ‘꿈보다 해몽이로소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다.

(탐관)오리들을 비판하는 이외수 선생의 발언에는 통쾌함마저 느낄 수가 있었다. 재산, 명예, 학벌 그리고 권력으로 무장한 기득권자야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온갖 부조리의 근원이라는 그의 선언이 어찌나 그렇게 마음에 들던지. 아울러, 사랑과 깨달음 대신 취업의 전당이 돼버린 오늘날 대학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에도 공감이 가더라. 감각이 온통 시장을 지배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과연 우리가 깨달음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란 묘연하기만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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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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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경인년을 맞아 나의 책읽기 코드를 고전(classic)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 번째 선택은 지난 연말에 야심 차게 출간된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에서 스탕달의 <적과 흑>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스탕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에 한길사에서 한길로로로 시리즈 중에 구해둔 <스탕달>을 읽고 싶었지만, 책 한 권 분량이라 대신 위키피디아를 통해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살펴봤다. 




 (이 책의 저자 스탕달의 캐리커처) 


부르주아 출신으로 프랑스 대혁명기와 나폴레옹 치세 그리고 그 후의 왕정복고시대를 두루 경험한 스탕달은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처럼 실제로도 파리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맹활약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시절의 경험이 <적과 흑>에 녹아 있는 걸까.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 쥘리앵의 모습이 작가 스탕달의 페르소나처럼 다가온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프랑스 대혁명기와 나폴레옹 치세 그리고 그 후의 왕정복고시대를 두루 경험한 스탕달은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처럼 실제로도 파리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맹활약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시절의 경험이 <적과 흑>에 녹아 있는 걸까.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 쥘리앵의 모습이 작가 스탕달의 페르소나처럼 다가온다.
 

소설 <적과 흑>은 <파르마의 수도원>과 더불어 스탕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사실 소설의 어디에선가 제목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나중에 해설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제목 ‘적과 흑’이 뜻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적[red]은 나폴레옹 군대를 상징하는 군복의 이미지로 자유주의자를 그리고 흑[black]은 나폴레옹의 몰락 후, 왕정복고 시대에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사제 계급의 복장인 수단(soutane)으로 대표되는 보수 왕당파를 의미한다. 아무리 근대소설이라고 하지만 19세기에 스탕달이 창조한 보기 드문 입체적 캐릭터로서의 보나파르티스트 쥘리앵이 자신의 출세길에서 고민하게 되는 군인과 사제의 상징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1922년 파리에서 출간된 판본의 일러스트, 쥘리앵 소렐의 일생을 언뜻 볼 수 있다) 

 

소설 <적과 흑>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스탕달이 창조해낸 쥐라 산맥 부근 프랑세-콩테 지방의 베리에르와 브장송을 배경으로 그리고 2부는 라 몰 후작의 도움으로 파리 사교계로 진출한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18세의 쥘리앵은 지방 사제로부터 라틴어 교육을 받게 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서양 문화의 원류를 이루는 라틴어는 상류계층으로의 진입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 씨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취업하게 되면서 쥘리앵의 운이 트이기 시작한다. 라틴어 성경에 대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은 쥘리앵의 출세를 위한 사다리로 작용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왕정복고 시대에 왕당파들이 다시 득세를 한 시기에 쥘리앵은 남몰래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그것은 마치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보수 왕당파 사이에서 출세를 도모하는 위험천만한 줄타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전파된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1830년 샤를 10세의 보수반동 정치에 대항해서 일어난 부르주아 계급의 7월혁명의 여진을 소설의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스탕달은 소설의 배경을 인구 2만 명 정도의 전원도시 베리에르에서 시작했을까?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계급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쥘리앵의 야망과 더불어서 그만큼 배경의 무대로 커진다는 스탕달의 구상한 인과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십 대 소년으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에게 베리에르는 적당한 크기였을지 모르지만, 레날 부인과의 얼치기 사랑으로 자신의 계급적 혹은 물질적 한계를 경험한 주인공에게 다음 무대는 군사도시 브장송이었다. 브장송의 신학교에서 자신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피라르 사제를 만나면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예고된다.

불 같은 영혼을 지닌 놀라운 기억력의 쥘리앵은 어린 나이에 왕정복고 시대의 실제적인 권력의 중추인 사제 계급의 힘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쥘리앵의 권력에의 해바라기와 불신앙의 위선은 그에게 갈등을 선사한다. 동시에 지중해 코르시카 출신의 시골뜨기 나폴레옹이 황제에 자리에까지 오르는 대성공에 고무된 프랑스 청년들의 초상으로도 다가온다.

한편, 계급적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오만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쥘리앵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레날 부인에 대한 연정은 베리에르에서의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쥘리앵의 첫사랑은 마치 2부에서 전개될 라 몰 양과의 워밍업처럼 그렇게 조그만 파문으로 시작된다. 그들의 신분을 초월한 금기적 사랑의 근간에는 다음과 같은 치열한 계급적 갈등이 숨겨져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다시 지배계급으로 복귀한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기에 농민들에 의해 처형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언제라도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들보다 못한 계급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공포를 느끼는 이중적인 면면이 그들의 가정교사로 자신들보다 뛰어난 라틴어 실력(암기력)을 갖춘 쥘리앵에게 느끼는 지배계급의 실제 모습이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을 정도로 충실한 보나파르티스트였다. 쥘리앵을 통해 그는 격변의 시대였던 나폴레옹 치세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 보인다. 그와 동시에 혁명을 통해 귀족을 대신해서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신랄한 조롱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용소장 발르노 씨네 집에서의 오찬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결국, 베리에르에서 레날 부인과의 추문을 피해 브장송으로 도피한 쥘리앵은 신학교 생활을 통해 자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미덕에 명석함, 정확함 그리고 분명함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비록 불신앙자이긴 하지만, 조건 없는 복종을 요구하던 당시 프랑스 교회의 반지성주의 시류에 편승해서 권위와 본보기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쥘리앵은 완벽한 위선자로 거듭나게 된다. 



 

(제라르 필립과 다니엘 다리우 주연의 1954년 이탈리아 프랑스 합작영화 포스터)

2부에서는 파리로 진출하게 된 쥘리앵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진다. 레날 부인과의 마지막 애정행각을 마지막으로 파리로 간, 쥘리앵은 라 몰 후작의 후원과 물질적 도움으로 파리 사교계에 데뷔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존심 넘치는 쥘리앵은 보부아지 씨와 우연한 결투로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개시한다. 라 몰 후작의 신임과 브장송 신학교장직을 사임하고 역시 파리로 자리를 옮긴 얀센주의자 피라르 사제의 조언도 쥘리앵의 화려한 사교 활동에 한몫을 하게 된다.

쥘리앵의 신분상승을 위해 숨 막히는 행보를 보여준 1부에 비해 2부에서는 라 몰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지루한 사랑놀음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고용인의 영양으로 등장했던 마틸드가 어느 순간,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부각이 되면서 주인공 쥘리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계급을 뛰어넘는 파멸적 사랑 이야기가 조금은 낡은 설정처럼 보이긴 해도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한 사랑과 이별의 공식이라고나 할까.

쥘리앵이 라 몰 양의 사랑을 얻기 위해, 코라소프의 조언대로 페르바크 부인에게 연서를 보내는 장면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연상되었다. 천편일률적인 권태로운 삶을 배격하면서도, 오만한 허영과 자기애로 무장한 라 몰 양을 정복하기 위해, 거짓 연서를 서슴지 않고 베껴대는 쥘리앵의 모습은 21세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네의 그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쥘리앵은 소설에서 라 몰 양을 사랑하기는 했던가? 아니면 라 몰 양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나르시시즘에 근거한 감정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1831년 초판본 <적과 흑>에 실린 일러스트)

하지만, 보수반동의 시대에 야심 차게 도전했던 문제적 청년 쥘리앵의 사랑과 야망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한순간에 침몰하고 만다.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했던 쥘리앵은 어느 순간,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해 버리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서야 자기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된 쥘리앵은 브장송 법정에서 최후의 변론을 통해 치열했던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스탕달은 시대의 반항아 쥘리앵을 통해 자신을 대신 했던 것 아닐까. 주인공 쥘리앵이 자신의 짧은 삶을 통해 절대적으로 숨기려고 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에 대한 끝없는 숭배와 불신앙은 19세기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캐릭터로서는 경이로울 설정이었다. 아울러 쥘리앵의 혼란스러운 연애 감정에 대한 스탕달에 치밀하면서도 정교한 심리묘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에센스를 담고 있다. 권위와 계급에 이렇게 냉소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리석을 정도로 눈먼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쥘리앵이라는 변화무쌍하면서도 동시에 입체적인 캐릭터에 그만 매혹되어 버리고 말았다.

<적과 흑>은 혁명과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직접 체험한 스탕달의 자전적 소설이다. 동시에 근대적 전환기에 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문인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담긴 귀중한 기록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로 근대철학의 기반을 마련한 이래, 그 권위를 상실하고 끝없이 추락하던 종교의 힘이 마지막 광휘를 발휘하던 시절의 아련한 향수로 다가왔다.

[뱀다리] 소설 <적과 흑>을 읽으면서, 생전 처음 읽지도 못하는 불어 원서와 영문 번역서를 다 접해 봤다. 책의 어떤 부분이 문맥상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역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였을까? 가령 예를 들어, 2부 135쪽에 나오는 ‘무장한 거래’(commerce arm)는 원서대로라면 그 표현이 맞겠지만, 영문 번역서에는 “armed neutrality" 다시 말해서 ”무장한 중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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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 북유럽에서 만난 유쾌한 몽상가들
박수영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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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은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있는 나라, 스웨덴의 수도다. 예전에는 뉴욕, 런던 혹은 파리 같은 대도시를 다룬 여행 수필들이 주류를 이루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변방의 나라들인 볼리비아, 쿠바 심지어 마다가스카르까지 그 수필 목록에 오르고 있다. 박수영 작가의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 역시 후발 주자로서 천국보다 낯선 이름으로 들리는 스웨덴 중세 도시 웁살라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작가는 어느 날, 삶의 ‘깊이’를 쫓아 북구의 나라 스웨덴행을 결심한다. 조금 어깃장을 놓자면, 그 깊이는 꼭 북구의 나라에서만 찾을 수 있었던 걸까. 책 표지에 나와 있는 카피 문구에 심술이 났나 보다. 우리나라에서 대학 생활은 마치 이십 대의 전유물처럼 되어 있는데 도대체 책의 중간까지 읽기 전에는 작가의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우파 독재정권 아래서, 이십 대를 보냈다고 기술했는데 일단 적은 나이는 아닌 듯. 어쨌든 스웨덴의 명문 웁살라대학으로 역사학을 전공하러 홀연히 떠났다. 21세기 디지털 시대의 전형적인 유목민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고등교육을 어디까지나 전적으로 개인 부담으로 간주하는 신자유주의국가들과는 달리 근 1세기가량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천국으로 세계의 부러움을 받아온 스웨덴에서는 대학교육이 자국민이든 외국인이든 차별하지 않고 무상이라고 한다. 깊이도 깊이지만, 아마 작가가 스웨덴 그중에서도 영어 커리큘럼이 훌륭한 웁살라를 택한 현실적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솔직히 말해서 책을 펴면서, 스톡홀름(왜 웁살라가 아니라 스톡홀름을 제목으로 정했을까! 리뷰를 쓰다가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혹은 스웨덴의 평생 가보지 못할 대부분의 독자를 위한 조금은 색다른 이야기들을 기대했지만, 그런 나의 독서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박수영 작가 이야기의 중심은 이국적인 풍물이나 색다른 경험담이 아닌 웁살라 대학 역사학과에 둥지를 튼 7명의 보헤미안들과의 소통이었다. 그녀가 스웨덴에 체류하는 내내 그렇게 충돌했던 호앙과 같은 남성들이라면 도저히 잡아낼 수 없었을 그런 미묘한 감정의 기술과 관계에서 빚어지는 이야기들은 사실 스웨덴의 스톡홀름, 아니 웁살라가 아니더라도 지구 상의 어디에서도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세계화 시대의 유니버설리즘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는 순간들이었다.

007 패러디 영화로 유명한 <오스틴 파워즈>에서 스웨덴 사람들은 모두 섹스에 미친 사람들로 묘사하는 장면을 보면서, 정말 서구인들에게 널리 퍼진 그릇된 믿음 중의 하나인 스웨덴은 정말 자유연애의 천국인가라는 나의 착각은 박수영 작가의 양성평등 모범을 보여주는 그네들의 삶을 통해 완전하게 박살이 나 버렸다. 진정한 양성 간의 평등은 다른 성에 의존하지 않고, 무거운 캐리어를 스스로 끌고 금발을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는 스웨덴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올곧이 이해가 되지 시작했다. 솔직한 사랑에서 비롯된 자유연애 역시, 그릇된 시각으로 볼 필요가 없다는 그녀의 주장에도 공감이 갔다.

통신과 인터넷의 발달로 이제는 지구촌이라는 개념이 낯설지 않지만, 여전히 민족 국가라는 개념으로 다문화 국가로의 진화에서 뒤처져 있는 우리나라의 상황을 볼 적에 스웨덴에 사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제기할 수 있는 “야모”(평등기회 옴부즈맨) 에피소드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프랑스의 석학 미셸 푸코가 한 때, 웁살라 대학에서 수학하면서 자신의 박사 논문으로 <광기의 역사>를 제출했다가 보기 좋게 퇴짜를 맞았다는 이야기 역시 흥미로웠다.

유럽의 변방이라고 할 수 있는 스웨덴에서도, 나치 독일 시대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담론들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 참 놀라웠다. 우리의 이웃나라에서 전쟁과 제국주의 식민과거를 후손들에게 아예 알려 주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과 반세기가 지나도록 지울 수 없는 과거의 참혹한 역사를 꾸준하게 후손들에게 알리고 함께 고민하려는 모습이 어쩌면 그렇게도 대조적으로 다가오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박수영 작가는 자신만의 이야기가 아닌 7명의 보헤미안들의 이야기들을 책으로 내면서 그들에게 양해를 구했을까? 어떻게 보면 굉장히 타인의 사적인 담론들인데 말이다. 두 번째 의문은, 보헤미안 친구들과의 대화들에 대한 적확한 기술이다. 작가는 참 기억력이 좋은가 보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두세 시간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면 자기가 한 말도 다 잊어버릴 텐데, 아 놀라운 기억력이여!

어느 책에선가 지난 노무현 정부에서 앞으로 국가 모델을 정하자는 담론이 공론화되었을 대, 사민주의에 입각한 스웨덴과 신자유주의 미국을 놓고 고민하다가 후자 쪽으로 전환했다는 글을 읽은 기억이 난다. 스웨덴 역시 우경화되고 있긴 하지만, 신자유주의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은 지난해 경영진의 부도덕성과 신자유주의 경제의 허구가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망신을 톡톡히 당하고 있다. ‘시카고 보이’들이 주도했던 자유방임에 가까운 신자유주의는 더는 유효하지 않은 지난 십 년의 유산이 되어 버렸다. 그렇다면 정치 경제적 평등을 좌우명으로 하는 스웨덴식 모델이야말로 우리의 미래지향점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스톡홀름, 오후 두 시의 기억>을 통해 북구의 먼 나라 스웨덴을 재발견하는 좋은 기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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