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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과 흑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
스탕달 지음, 이규식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2010년 경인년을 맞아 나의 책읽기 코드를 고전(classic)으로 정했다. 그리고 그 대망의 첫 번째 선택은 지난 연말에 야심 차게 출간된 문학동네 세계문학 전집 중에서 스탕달의 <적과 흑>이었다. 책을 읽기 전에 스탕달에 대해 더 알고 싶어서 아주 오래전에 한길사에서 한길로로로 시리즈 중에 구해둔 <스탕달>을 읽고 싶었지만, 책 한 권 분량이라 대신 위키피디아를 통해 간략하게 그의 생애를 살펴봤다.
(이 책의 저자 스탕달의 캐리커처)
부르주아 출신으로 프랑스 대혁명기와 나폴레옹 치세 그리고 그 후의 왕정복고시대를 두루 경험한 스탕달은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처럼 실제로도 파리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맹활약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시절의 경험이 <적과 흑>에 녹아 있는 걸까.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 쥘리앵의 모습이 작가 스탕달의 페르소나처럼 다가온다.
부르주아 출신으로 프랑스 대혁명기와 나폴레옹 치세 그리고 그 후의 왕정복고시대를 두루 경험한 스탕달은 <적과 흑>에 나오는 쥘리앵 소렐처럼 실제로도 파리 사교계에서 소문난 바람둥이로 맹활약했다고 한다. 아마 그런 시절의 경험이 <적과 흑>에 녹아 있는 걸까. 목수의 아들이라는 신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주인공 쥘리앵의 모습이 작가 스탕달의 페르소나처럼 다가온다.
소설 <적과 흑>은 <파르마의 수도원>과 더불어 스탕달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책이다. 사실 소설의 어디에선가 제목에 대한 설명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었지만, 나중에 해설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제목 ‘적과 흑’이 뜻하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모르는 것을 배우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적[red]은 나폴레옹 군대를 상징하는 군복의 이미지로 자유주의자를 그리고 흑[black]은 나폴레옹의 몰락 후, 왕정복고 시대에 다시 권력을 행사하게 된 사제 계급의 복장인 수단(soutane)으로 대표되는 보수 왕당파를 의미한다. 아무리 근대소설이라고 하지만 19세기에 스탕달이 창조한 보기 드문 입체적 캐릭터로서의 보나파르티스트 쥘리앵이 자신의 출세길에서 고민하게 되는 군인과 사제의 상징 정도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1922년 파리에서 출간된 판본의 일러스트, 쥘리앵 소렐의 일생을 언뜻 볼 수 있다)
소설 <적과 흑>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는데, 1부는 스탕달이 창조해낸 쥐라 산맥 부근 프랑세-콩테 지방의 베리에르와 브장송을 배경으로 그리고 2부는 라 몰 후작의 도움으로 파리 사교계로 진출한 우리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활약상을 그리고 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난 18세의 쥘리앵은 지방 사제로부터 라틴어 교육을 받게 되면서,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된다. 서양 문화의 원류를 이루는 라틴어는 상류계층으로의 진입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 묘사된다. 베리에르 시장인 레날 씨 아이들의 가정교사로 취업하게 되면서 쥘리앵의 운이 트이기 시작한다. 라틴어 성경에 대한 지식과 놀라운 기억력은 쥘리앵의 출세를 위한 사다리로 작용한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왕정복고 시대에 왕당파들이 다시 득세를 한 시기에 쥘리앵은 남몰래 나폴레옹을 숭배한다. 그것은 마치 자유주의자로서 자신의 본질을 숨기고, 보수 왕당파 사이에서 출세를 도모하는 위험천만한 줄타기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폴레옹 전쟁을 통해 전 유럽에 전파된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 정신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1830년 샤를 10세의 보수반동 정치에 대항해서 일어난 부르주아 계급의 7월혁명의 여진을 소설의 곳곳에서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왜 스탕달은 소설의 배경을 인구 2만 명 정도의 전원도시 베리에르에서 시작했을까? 책을 읽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계급적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쥘리앵의 야망과 더불어서 그만큼 배경의 무대로 커진다는 스탕달의 구상한 인과관계 때문이 아니었을까? 십 대 소년으로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청년에게 베리에르는 적당한 크기였을지 모르지만, 레날 부인과의 얼치기 사랑으로 자신의 계급적 혹은 물질적 한계를 경험한 주인공에게 다음 무대는 군사도시 브장송이었다. 브장송의 신학교에서 자신의 멘토라고 할 수 있는 피라르 사제를 만나면서 다음 단계로의 도약이 예고된다.
불 같은 영혼을 지닌 놀라운 기억력의 쥘리앵은 어린 나이에 왕정복고 시대의 실제적인 권력의 중추인 사제 계급의 힘을 체험하게 된다. 하지만,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쥘리앵의 권력에의 해바라기와 불신앙의 위선은 그에게 갈등을 선사한다. 동시에 지중해 코르시카 출신의 시골뜨기 나폴레옹이 황제에 자리에까지 오르는 대성공에 고무된 프랑스 청년들의 초상으로도 다가온다.
한편, 계급적 열등감에 시달리면서 오만한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쥘리앵의 고귀한 신분을 가진 레날 부인에 대한 연정은 베리에르에서의 그의 삶을 파국으로 몰고 간다. 쥘리앵의 첫사랑은 마치 2부에서 전개될 라 몰 양과의 워밍업처럼 그렇게 조그만 파문으로 시작된다. 그들의 신분을 초월한 금기적 사랑의 근간에는 다음과 같은 치열한 계급적 갈등이 숨겨져 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 다시 지배계급으로 복귀한 귀족들은 프랑스 혁명기에 농민들에 의해 처형된 트라우마를 안고 있다. 언제라도 다시 혁명이 일어난다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리고 자신들보다 못한 계급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공포를 느끼는 이중적인 면면이 그들의 가정교사로 자신들보다 뛰어난 라틴어 실력(암기력)을 갖춘 쥘리앵에게 느끼는 지배계급의 실제 모습이다.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은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을 정도로 충실한 보나파르티스트였다. 쥘리앵을 통해 그는 격변의 시대였던 나폴레옹 치세에 대한 향수를 드러내 보인다. 그와 동시에 혁명을 통해 귀족을 대신해서 지배계급으로 등장한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신랄한 조롱도 마다하지 않는다. 수용소장 발르노 씨네 집에서의 오찬이 그 대표적인 경우다.
결국, 베리에르에서 레날 부인과의 추문을 피해 브장송으로 도피한 쥘리앵은 신학교 생활을 통해 자신이 기존에 지니고 있던 미덕에 명석함, 정확함 그리고 분명함을 추가하기에 이른다. 비록 불신앙자이긴 하지만, 조건 없는 복종을 요구하던 당시 프랑스 교회의 반지성주의 시류에 편승해서 권위와 본보기를 충실하게 이행한다. 이 과정을 통해 쥘리앵은 완벽한 위선자로 거듭나게 된다.
(제라르 필립과 다니엘 다리우 주연의 1954년 이탈리아 프랑스 합작영화 포스터)
2부에서는 파리로 진출하게 된 쥘리앵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펼쳐진다. 레날 부인과의 마지막 애정행각을 마지막으로 파리로 간, 쥘리앵은 라 몰 후작의 후원과 물질적 도움으로 파리 사교계에 데뷔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존심 넘치는 쥘리앵은 보부아지 씨와 우연한 결투로 본격적인 사교 활동을 개시한다. 라 몰 후작의 신임과 브장송 신학교장직을 사임하고 역시 파리로 자리를 옮긴 얀센주의자 피라르 사제의 조언도 쥘리앵의 화려한 사교 활동에 한몫을 하게 된다.
쥘리앵의 신분상승을 위해 숨 막히는 행보를 보여준 1부에 비해 2부에서는 라 몰 후작의 딸 마틸드와의 지루한 사랑놀음이 전개된다. 처음에는 고용인의 영양으로 등장했던 마틸드가 어느 순간, 파리 사교계의 꽃으로 부각이 되면서 주인공 쥘리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런 관계 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계급을 뛰어넘는 파멸적 사랑 이야기가 조금은 낡은 설정처럼 보이긴 해도 역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여전히 유효한 사랑과 이별의 공식이라고나 할까.
쥘리앵이 라 몰 양의 사랑을 얻기 위해, 코라소프의 조언대로 페르바크 부인에게 연서를 보내는 장면은 쇼데를로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가 연상되었다. 천편일률적인 권태로운 삶을 배격하면서도, 오만한 허영과 자기애로 무장한 라 몰 양을 정복하기 위해, 거짓 연서를 서슴지 않고 베껴대는 쥘리앵의 모습은 21세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우리네의 그것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쥘리앵은 소설에서 라 몰 양을 사랑하기는 했던가? 아니면 라 몰 양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사랑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이라는 나르시시즘에 근거한 감정에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게 된다.
(1831년 초판본 <적과 흑>에 실린 일러스트)
하지만, 보수반동의 시대에 야심 차게 도전했던 문제적 청년 쥘리앵의 사랑과 야망은 마치 사상누각처럼 한순간에 침몰하고 만다.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했던 쥘리앵은 어느 순간,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해 버리고 결코 되돌릴 수 없는 일탈을 감행한다. 모든 것을 잃은 바로 그 순간에서야 자기 삶의 본질을 깨닫게 된 쥘리앵은 브장송 법정에서 최후의 변론을 통해 치열했던 삶의 종지부를 찍는다.
스탕달은 시대의 반항아 쥘리앵을 통해 자신을 대신 했던 것 아닐까. 주인공 쥘리앵이 자신의 짧은 삶을 통해 절대적으로 숨기려고 하면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았던 나폴레옹에 대한 끝없는 숭배와 불신앙은 19세기 당시로서는 경이로운 캐릭터로서는 경이로울 설정이었다. 아울러 쥘리앵의 혼란스러운 연애 감정에 대한 스탕달에 치밀하면서도 정교한 심리묘사는 시대를 뛰어넘는 에센스를 담고 있다. 권위와 계급에 이렇게 냉소적이면서도 동시에 어리석을 정도로 눈먼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쥘리앵이라는 변화무쌍하면서도 동시에 입체적인 캐릭터에 그만 매혹되어 버리고 말았다.
<적과 흑>은 혁명과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직접 체험한 스탕달의 자전적 소설이다. 동시에 근대적 전환기에 종교에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문인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담긴 귀중한 기록이다.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면서, 데카르트가 방법서설로 근대철학의 기반을 마련한 이래, 그 권위를 상실하고 끝없이 추락하던 종교의 힘이 마지막 광휘를 발휘하던 시절의 아련한 향수로 다가왔다.
[뱀다리] 소설 <적과 흑>을 읽으면서, 생전 처음 읽지도 못하는 불어 원서와 영문 번역서를 다 접해 봤다. 책의 어떤 부분이 문맥상 잘 이해가 되지 않아서 오역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서였을까? 가령 예를 들어, 2부 135쪽에 나오는 ‘무장한 거래’(commerce arm)는 원서대로라면 그 표현이 맞겠지만, 영문 번역서에는 “armed neutrality" 다시 말해서 ”무장한 중립“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