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 가죽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철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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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발자크와의 첫 만남은 2007년 5월 23일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서였다. 난 당시 마리아 칼라스의 묘역을 찾고 있었고, 우연히 발자크의 묘역을 찾는 어느 미국 여인을 따라 발자크의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묘지 사진을 찍을 수가 있었는데,  그 사진을 2010년 벽두에 만난 발자크의 <나귀 가죽> 리뷰에 담게 됐다.

사실 최근 들어 책 좀 읽게 되기 전까지만 해도 발자크나 스탕달 같은 프랑스 고전 작가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끝없이 책을 읽다 보니 다시 고전, 클래식으로 회귀하게 되는 자신을 발견할 수가 있었다. 나의 신년 프로젝트는 고전읽기로 지난주에 읽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이어, 이번에 국내에 초역되었다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을 악전고투 끝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지금은 알렉산드르 뿌쉬낀의 <대위의 딸>을 읽고 있다.

오늘 출근길 전철 안에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어떤 식으로 리뷰를 풀어나갈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작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라는 노래가 생각이 났다. 소녀시대의 <소원을 말해봐>와 발자크의 소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발랑탱 드 라파엘에게 무슨 소원이든 이루어주는 “나귀 가죽”은 마치 기호학에서 말하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관계처럼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아니 어쩌면 거의 판타지에 가까운 섬망(譫妄)으로.

고전읽기라는 미명에 현혹돼서 야심 차게 도전했던 나의 발자크 읽기는 절반 정도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솔직히 자수하자면, 책을 다 읽고 나서 역자인 이철희 선생이 책의 뒷부분에 달아준 해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소설의 원제에 등장하는 chagrin은 가죽이라는 뜻도 있지만, 동시에 ‘근심’이라는 다른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을수록 그 이유가 절절하게 이해가 됐다.

도박장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마지막 재산인 20프랑짜리 금화를 잃은 우리의 주인공 발랑탱은 때 이른 삶의 종결을 준비한다. 그러던 차에 볼테르 강변 가에서 우연히 들른 골동품상에서 만난 신비스러운 노인으로부터 무슨 소원이든 들어준다는 “나귀 가죽”을 받아 들고서는 그야말로 대박이 난다. 발랑탱의 첫 번째 소원은 호화찬란한 야회(royal banquet)이었다.

그리고 우연히 만난 친구 에밀에게 자신의 성장 스토리를 비롯해서, 어떻게 자신이 학문에 정진하게 되었는가, 페도라 백작부인과의 쓰디쓴 실패한 연애담, 소설에서 중요한 사이드킥으로 등장하는 라스티냐크와의 만남과 이어지는 방탕한 생활에 그야말로 파도처럼 쉴 새 없이 몰아닥치는 이야기들을 뿜어낸다.

대학에서 법을 공부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아들 발랑탱을 정치가로 만들려던 아버지의 기대를 저버리고, 스무 살의 발랑탱은 일탈과 탈주를 꿈꾼다. 한술 더 떠서, 아버지의 돈을 훔쳐 훗날 자신을 물질적 파산으로 몰고 가게 되는 도박의 세계에 빠져든다. 평민 출신이었던 발자크의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조롱이라고나 할까. 어머니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의지할 데가 없어진 라파엘은 자발적 가난과 학문적 성찰의 세계를 탐닉하기도 한다. 그 가난 중에 만난 14살난 폴린과의 관계는, 단테 알리기에리와 베아트리체의 그것처럼 운명적 사랑을 예고하기도 한다.

2부 <무정한 여인>에서 발랑탱이 온 정성을 다해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백작 부인 페도라에 대한 섬망(譫妄)은 스탕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문제적 청년 쥘리앵 소렐의 페르바크 부인에 대한 연모나 혹은 피에르 쇼데르로스 드 라클로의 <위험한 관계>의 발몽 후작의 마담 드 투르벨에 대한 끈질긴 욕망으로 다가온다. 페도라에 대한 눈물겨운 발랑탱의 구애는 결국 실패하지만, 라스티냐크의 도박판에서의 대성공으로 방탕한 생활에 접어들게 된 발랑탱!

사실 개인적으로 <나귀 가죽>이라는 제목에서 근대 버전의 재밌는 우화를 예상했지만, 발자크는 나의 그런 기대를 산산이 부숴 버린다. 기대한 내러티브 대신 장황하기 짝이 없는 발랑탱의 썰로 나 같은 수준 이하 독자의 기를 대번에 꺾어 놓는다. 게다가 1830년대 시대상을 담보한 발자크의 신랄한 패러디와 정교한 묘사는 정말 역자의 주석 없이는 전진을 불가하게 만들고 있었다. 짧지만 강렬하고 인상적이었던 그의 삶에 대한 파노라마가 독백 형식을 빌린 기나긴 하소연을 뚫고 나오니 드디어 “나귀 가죽”과 ‘소원을 말해봐’라는 기대한 신천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마법의 나귀 가죽의 힘을 빌려 발랑탱은 콜카타에 있는 외삼촌으로부터 600만 프랑이라는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아 거부가 된다. 한 때 겸손한 학자이자 문필가의 꿈을 꾸던 청년 발랑탱이 물질적 풍요로 말미암아 점점 방약무인하게 된다. 그를 찾아온 스승 포리케 선생에게 모욕을 주고 쫓아내고, 자신이 한때 그렇게 사랑한다고 믿었던 페도라에게 경멸을 시선을 보내며 성공한 부르주아지로 거듭나게 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발랑탱에게서 가장 부러웠던 점은 그의 충직한 집사 조나타의 오만가지 업무 중에서 새로 나온 책을 지체 없이 대령해주는 것이었다. 책 좀 읽는 이들의 꿈이 아닐는지.

이 책과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으면서 궁금했던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19세기 프랑스의 연금제도가 어떻게 운용이 되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운영이 되었기에 소설에 나오는 거의 모든 이들이 연금 타령을 그렇게 해대는지 궁금하기만 했다.

한편,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나귀 가죽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나귀 가죽의 주인 발랑탱의 걷잡을 수 없는 욕망의 크기만큼, 줄어드는 발랑탱의 수명, 다시 말해서 죽음이었다. 중세 이래 예술과 문학에서 주요한 소재로 사용된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발자크의 소설에서도 어김없이 시간의 낫질을 하며 주인공을 위협한다. 부유한 병자 특유의 괴팍함으로 무장한 발랑탱은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철저한 이기주의자로 변한 추레한 그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했다. 그는 이탈리아 극장에서 자신에게 불행과 행복의 숙명적 선물인 나귀 가죽을 안겨준 예의 골동품상에서 만난 노인, 페도라 그리고 미지의 여인을 만나게 된다. 이 부분에서 이 미지의 여인과의 만남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특히 생캉탱 여관에서 이 여인의 오랜 짝사랑에 대한 번민과 슬픔 그리고 고통을 모두 씻어주는 발랑탱의 키스란...

소설 <나귀 가죽>의 보편적 이해를 위해서, 1830년의 정치적 상황에 대한 이해는 반드시 필요하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1815~1830년의 왕정복고 시대는 혼란 그 자체였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로 급진주의자, 자유주의자 그리고 왕당파 등 온갖 정치세력들이 준동하는 가운데, 토지경제에 근거했던 프랑스는 비로소 산업혁명의 세례를 받게 된다. 왕정복고를 기도하던 귀족세력과 물적 토대 위에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떠오르던 부르주아 계급과의 일대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발랑탱이 처음 소원했던 야회에서, 두서없이 끝없이 계속되는 논전에 대한 발자크의 묘사는 당시 극도의 혼란에 빠진 시대상의 발현이었다.

소설에서 극히 중요한 시간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830년 7월혁명의 이해를 위해 마르크시스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의 <혁명의 시대>를 들춰 보는 수고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글에 의하면 7월혁명은 귀족세력의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명백한 패배였고, 대부르주아지가 지배계급으로 나서게 되는 결정적 계기였다고 한다. 당시 과격한 정치혁신은 노동계급의 독자세력화와 민족주의 운동 출현의 바탕이 되기도 했다. 아울러 홉스봄은 예의 책에서 “발자크의 <인간희극>은 완벽하게 사회적 관심의 한 기념비”(혁명의 시대, 474쪽, 한길사, 1998)였다고 기술했다. 위대한 역사가로부터 이런 평가를 받을 정도니 발자크의 소설이 갖는 시대정신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됐다.

<나귀 가죽>은 발자크 평생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인간극> 총 89편 중의 하나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고리오 영감>, <골짜기의 백합> 등이 있는데 시간이 되는 대로 발자크의 문학을 하나씩 접해볼 계획이다. 어렵긴 했지만, 시대정신을 담고 있으면서도 2세기가 흐르고 나서도 여전히 그 보편적인 광휘를 잃지 않는 발자크의 <나귀 가죽>과 만날 수가 있어서 즐거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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