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의 축제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지음, 송병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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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인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2010년 노벨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스웨덴 한림원은 요사의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를 “개인의 저항과 봉기 그리고 패배에 대한 정곡을 찌르는 묘사”로 꼽았는데, 현재까지 국내에 출간된 책 중에서 이번에 나온 <염소의 축제>야말로 이에 딱 들어맞는 작품이다.

뉴욕타임즈는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수상 소식을 다루면서, <세상 종말 전쟁>과 <염소의 축제>를 대표작으로 꼽았는데 후자는 31년간 도미니카 공화국을 철권통치한 엘 헤페(El Hefe) 라파엘 레오니다스 트루히요 몰리나의 몰락을 그린 독재자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올해 우리나라를 방문한 미국의 퓰리처상 수상작가인 주노 디아스도 자신의 출세작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 희대의 독재자 트루히요의 악몽 같은 독재를 다루고 있다.

모두 24개의 장으로 구성된 <염소의 축제>는 1961년 5월 30일 화요일, 31년 동안 도미니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총통 라파엘 트루히요 저격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소설의 주인공 우라니아 카브랄의 자기 고백이라는 소설적 허구를 추가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35년간 조국 도미니카를 떠나 미국에서 성공한 입지전적 인물인 우라니아는 죽어가는 아버지를 찾아 고통스러웠던 트루히요 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반신불수가 되어 외동딸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에게서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가 없다.

이 첫 번째 화소(話素)에 이어, 두 번째로는 독재자 트루히요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허수아비 대통령 발라게르 박사를 내세워, 공화국의 새로운 아버지로 평화와 경제발전 그리고 이웃 아이티와의 국경분쟁을 말끔하게 해결한 지도자 트루히요는 국민으로부터 추앙받는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트루히요 통치에 대한 추악한 진실이 숨겨져 있다. 8년간의 미국 점령기간 동안, 미 해병대로부터 교육을 받은 트루히요는 청결함, 건강한 육체 그리고 의상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진 독재자로 도미니카에 군림한다. 조니 아베스 가르시아 대령이 이끄는 비밀첩보부대로 공포정치를 통해 반대파를 숙청하고, 정적 암살은 물론 산 채로 바다에 상어 밥으로 던지는 인권유린을 서슴지 않는다.

제목에도 등장하는 “염소”는 바로 이런 트루히요를 지칭하는 말로, 독재자는 자신 각료들의 부인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딸도 성적 노리갯감으로 이용하는 파렴치한이다. 트루히요 체제의 수호자들조차도 이런 그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필연적으로 반체제 행동에 나서게 된다. 우라니아, 트루히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트루히요 독재를 끝장내기 위해 그를 암살하려는 일단의 비밀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로테이션 형식으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염소의 축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60년 초반 도미니카의 정치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쿠바혁명군의 침공기도, 무차별적인 인권유린에 대한 가톨릭의 반발, 로물로 베탕쿠르 베네수엘라 대통령에 대한 암살 기도로 미주기구(OAS)의 경제 제재 조치가 이어지면서 트루히요 정권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우라니아의 아버지 ‘지식인’ 아구스틴, 음모가이고 ‘걸어다니는 오물덩어리’라 불리지만 탁월한 책략가인 헨리 치리노스 의원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라게르 박사가 트루히요 체제를 유지하는 트로이카로 활약하지만,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오는 30년이라는 세월에 걸친 독재로 말미암은 폐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종결부에 가서 밝혀지는 우라니아의 트라우마는 트루히요 시절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낸다. 마초 같이 도미니카를 폭력적으로 지배한 독재자였던 ‘엘 헤페’의 실체는 발정 난 늙은 염소에 지나지 않았다고 우라니아는 가족들에게 폭로한다. 암살 공모자들이 트루히요를 성공적으로 암살하고 나서, 조직적인 사후처리를 하지 못하면서 트루히요주의자들에게 보복당하는 장면에서는 그들도 결국엔 트루히요 통치의 공모자였다는 자조적인 자기 고백에 도달한다. 이렇게 개인적 수치와 트라우마는 주노 디아스가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에서도 언급했다시피 트루히요의 독재라는 마법이 해제되고 나서도 여전히 수많은 도미니카 사람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겼다. 그들 역시 죽은 염소의 희생제물이었던 것이다. 독재자의 죽음 후의 탈주술화 과정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수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예리하게 지적한다.

도미니카의 진짜 비극은, 국가에서 가장 유능하고 똑똑한 사람은 결국 염소를 위해 일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고 작가는 증언한다. 더 끔찍한 일은 하느님이 주신 자유의지를 트루히요가 박탈했다는 사실이다. 마치 국가의 돌멩이 하나까지 소모사 일가의 것이 아닌 것이 없었다는 니카라과처럼 트루히요 일가 역시 도미니카를 온전하게 소유했다. 그래서 트루히요 체제에 대한 부역혐의에 대해 망명자들과 죽은 이들만이 자유롭다고 했던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는 일찍이 <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좋은 소설은 주제와 형식이 분리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지난 반세기에 걸쳐 글쓰기의 전범을 확립한 저자는 <염소의 축제>에서 화자-서술공간-서술시간이라는 소설구성 요소를 적절하게 배치하고,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을 통해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트루히요의 암살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7인의 ‘처형자’들의 활약과 그들의 영웅적인 최후 그리고 우라니아 개인의 치유와 화해를 이끌어낸다. 중첩된 플래시백 기법이라는 형식을 통해 저항할 수 없는 설득력을 확보하는 작가로서의 역량에 경의를 표한다.

여러 가지 삶의 방식 중에서 최고라는 글쓰기 하는 삶을 살아온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은 아마도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싶다. 국내에 아직 소개되지 않았거나 절판된 그의 저작들이 이번 기회를 빌려 계속해서 출간되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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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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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관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레지스탕스였던 로맹 가리의 데뷔작 <유럽의 교육>은 물론이고, 관련된 주제는 모두 환영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새로 출간된 르클레지오의 <허기의 간주곡>은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책이었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작가가 우리나라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집필한 것으로 알려져서 더 친근감이 간다고 하면 과언일까.

르클레지오의 신작 <허기의 간주곡>은 작가의 물리적 허기에 대한 유년시절의 고백으로 시작된다. 우리나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주둔한 미군이 던져주던 추잉검이나 쪼코렛을 무턱대고 받아먹었던 것처럼 유럽 아이들 역시 우리네와 다를 게 없었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굶주림으로서의 허기가 아닌 허기의 본질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과 맞닥뜨리게 됐다. 도대체 작가가 이 소설에서 말하고 싶은 건 무엇일까 하는.

1930년대 파리에 사는 브룅 가족, 그중에서도 감수성 예민한 부르주아 가정의 소녀 에텔이 주인공이다. 마다가스카르 옆에 있는 인도양의 작은 섬 모리셔스 출신의 아버지 알렉상드르는 집안의 유산 덕분에 변호사라는 어엿한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한량이다. 에텔의 종조부 사뮈엘 솔리망 씨는 그녀를 끔찍하게 아끼지만, 자신의 조카사위에 대해서는 냉정한 평가를 아끼지 않는다. 자신의 유산마저 에텔에게 물려주지만, 알렉상드르는 친권자로서 에텔이 미래에 누려야 할 유복한 삶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다.

에텔은 학교에서 만난 러시아 망명객 출신의 제니아 샤비로프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되지만, 혁명으로 모든 것을 잃은 제니아에게는 사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샤비로프라는 이름 자체가 몰락과 파멸을 상징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제니아는 어린 나이에 모욕과 치유하는 법을 잘 아는 처세의 달인이 되어 버렸다. 한편, 에텔의 삶은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아버지의 여가수 모드와의 외도는 브룅 가족의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에텔이 소녀에서 청소년기를 거쳐 어엿한 숙녀로 성장하는 동안, 유럽 역사의 쳇바퀴는 퓌러 히틀러의 등장으로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브룅 가족이 물질적 풍요를 유지하는 동안 개최된 살롱에서의 모임은 자유주의적 사회주의와 파시즘이 대두하는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한다. 각계의 다양한 인사들이 모여 다룰 수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해 논의하지만, 종착점은 언제나 전쟁이다.

브룅 가의 살롱을 출입하던 실업가 클로디우스 탈롱과 사기꾼 슈맹 같은 캐릭터는 너무 평면적인 게 아닐까. 치부를 위해 혹은 히틀러의 천년제국의 현혹되어 부역한 인사들의 면면이 파노라마처럼 간략하게 소개된다. 전쟁 이전에 이미 파산한 브룅 가족은 니스로 로크빌리에르로 피난해서 연명한다. 전쟁 중에 다른 가족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이런 전쟁의 와중에 에텔은 살롱에서 알게 된 로랑 펠드와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국 그를 따라 신세계(캐나다)로 떠난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내던져진 에텔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 유럽 대륙에 드리워진 전쟁의 공포를 르클레지오는 분석해낸다. 한때 벨 에포크(Belle Epoque:좋은 시절)라고 불렸던 제국의 영광을 뒤로 하고, 나치의 공격 앞에 무력하게 무릎을 꿇은 조국 프랑스의 모습을 작가는 에텔이 솔리망 씨와 꿈꿨던 연보라색 집의 상실에 비유한다. 그리고 제니아가 부러워하던 브룅 가의 부르주아적 삶의 허상은 아버지 알렉상드르의 계속되는 투자 실패와 슈맹의 사기극에 따른 집안의 몰락으로 폭로된다. 스러져 가는 가세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에텔은 억척 소녀로 거듭나지만, 그녀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이제 다시 ‘허기’의 본질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갈 시간이다. 에텔은 물질적 빈곤이 불러온 공허의 구덩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그녀의 정신적 허기는 더해갈 뿐이다. 작가는 이런 개인의 고통을 역사적 사건에 연결한다. 1942년 7월 16일 벨디브 사건으로 알려진 프랑스 내에서의 유대인 일대 검거는 자유, 평등 그리고 박애를 국가 기조로 삼은 프랑스 양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냈다. 작가 르클레지오는 숨기고 싶은 이 역사를 전면에 내세워, 피할 수 없는 이 역사적 현실을 받아들이고 기억하라고 말한다. 망각을 경계할 것을 주문하며, 반복의 패턴을 강조한다.

어느 인터뷰에선가 르클레지오는 차기작에서 “서울의 골목 풍경 담은 환상소설”을 담아낼 거라는 기사를 읽었다. 우리가 지금 사는 시대의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는 르클레지오가 새로운 작품에서는 우리에게 또 어떤 두통거리를 선사해줄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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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역 사기본기 1 사기 완역본 시리즈 (알마)
사마천 지음, 김영수 옮김 / 알마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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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의 마지막 책으로 태사공 선생의 <사기> 전문가 김영수 역자의 <완역 사기 본기1>를 읽었다. 어려서부터 중국 역사에 많은 관심이 있어서인지 사실 태사공 선생이 각고의 노력으로 집필한 <사기>의 어지간한 내용은 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하지만, 21세기에 다시 읽는 <사기>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마르지 않는 풍부한 콘텐츠의 보고였다. 지난 20년간의 사기 연구를 바탕으로 중국 역사 인문서의 신기원을 이룬 사기 완역에 도전하는 역자의 대장정을 응원한다.

역사서로서 <사기>는 연대순 역사 서술 양식인 편년체 방식과 쌍벽을 이루는 소위 기전체 방식을 채용하고 있다. 태사공 선생은 제왕들의 역사 기록인 본기와 제후에 대한 세가, 영웅, 호걸 그리고 유협 같은 인물을 다룬 열전으로 구성된 기전체라는 역사 서술 방식을 창안해 <사기>에 도입했다. 아직도 신화와 실제 역사의 구분이 잘 안 되는 오제본기로부터 시작해서 태사공 선생과 동시대를 살았던 한무제 연간에 이르는 장장 3,000년 전에 걸친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다.

태사공 선생이 한무제 시대에 흉노족 정벌에 나섰다가 패전한 장군 이릉을 변호하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치욕스러운 궁형(宮刑)을 받고 목숨을 부지하면서, 아버지의 유언대로 청사에 길이 빛날 <사기>를 저술한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김영수 씨는 바로 이 사건을 기록으로 남긴 <보임안서>와 <사기> 130편의 맨 마지막 편이자 서문에 해당하는 <태사공자서>에서 태사공 선생이 왜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쓰게 되었는가에 대한 집필 의도를 유추한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 죽고,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도 가볍지만, 또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도 무겁다는 말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이겨낸 위대한 역사가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한다.

김영수 씨는 <사기>에 들어가기에 앞서 <하상주단대공정>이라는 중국 국가 차원의 역사 연구에 대한 언급도 빼놓지 않는다. 이 연구는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된 동북공정 혹은 서남공정을 통해 중국사의 시원을 밝히고, 주변 민족에 대한 중국 지배의 당위성을 위한 관제연구라는 지적이다. 19세기 말, 은허 유적지와 갑골문이 발굴되면서 전설로만 알려졌던 은나라가 실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에 힘입어 중국 역사가들은 태사공 선생의 <사기>에 등장하는 오제(황제, 전욱, 제곡, 요, 순)까지 중국사를 소급하려고 기획 중이다.

제왕의 기록에 해당하는 <본기> 12편 중에서 우선 오제본기, 하본기, 은본기, 주본기 그리고 진본기의 다섯 편을 <완역 사기 본기1>에서 다루고 있다. 개인적으로 여전히 전설이라고 생각하는 오제시대와 폭정의 대명사인 걸주가 패망하고 천하는 덕치를 하는 이에게 돌아간다는 태사공 선생의 사관을 드러낸다. 후대에도 그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는 요순시대의 부자상속이 아니라 능력 있는 자에게 천하의 지배권을 넘겨주는 선양이야말로 최고의 권력 세습이라는 저자의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점은 소유와 경영이 분리된 서구 기업문화와 일맥상통하는 것 같다.

하은주 삼대의 기록을 통해 태사공 선생은 국가 흥망성쇠의 본질을 제시한다. 위정자가 덕을 잃은 통치를 한다면, 그에 따른 역성혁명은 불가피하다고 엄숙하게 선언한다. 봉건 전제군주 시대에 이런 놀라운 혜안을 보여준 태사공 선생의 예언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미 주나라 시대에 백성의 언로를 막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에 대해서도 소공의 말을 빌려 일침을 가한다.

12편의 본기 중에서 가장 논란이 이는 것이 진본기(秦本紀), 항우본기 그리고 여태후본기라고 한다. 우선 전국을 통일한 진나라 본기에 대해서 일개 제후국에 대해 굳이 본기로 다룰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그런 차원에서 제왕이라고 볼 수 없는 항우와 여후에 대한 본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에 대해 김영수 씨는 태사공 선생을 위한 변론을 제시한다. 태사공 선생은 본기를 기록함에서, 명목상이 아닌 실제 천하를 경영하였는가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진나라 멸망 후, 실제로 천하의 주인이었던 항우나 고조 유방 사후 한나라의 실권을 장악했던 여후야말로 본기에 들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본 것이다. 진본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진나라가 주나라 시대에 일개 제후국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통일제국으로 나가는 과정에서 다른 전국칠웅과는 차별되는 일정한 역할을 가졌다고 태사공 선생은 인정하고 따로 본기로 기록했다.

견융의 침입으로 서주시대가 끝나고 비로소 제후의 지위를 부여받은 서방의 진나라는 다른 제후국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는 변방 국가였다. 진효공 시대에 외부인사인 상앙의 변법을 바탕으로 국가개조에 나서면서 패주의 길을 걷는다. 유능한 군주는 출신에 구애받지 않고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일깨워준다. 다만, 상앙의 전면적인 개혁은 기득권층과 왕실의 공격을 받아 상앙 자신이 거열형을 받아 죽게 되지만 그가 남긴 개혁의 유산을 바탕으로 진나라는 결국 전국을 통일하게 된다.

전국시대 진나라의 역사는 거의 매년 하서 지역을 놓고 이웃한 삼진(三晋) 중의 하나인 위나라와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다. 주나라 천자를 옹위한 춘추시대에는 전쟁하면서도 낭만이 있었다면, 전국시대의 전쟁은 약육강식의 전멸전의 성격에 가까웠다. 일찍이 군현제도를 도입해서 전시 동원체제를 마련한 진나라는 혁신적인 조세제도로 끝없는 전쟁을 위한 재원 마련에 성공했다. 상무정신으로 무장된 진나라 군대는 무안군 백기 같은 유능한 사령관의 지휘 아래, 이궐 전투와 장평 전투에서 압도적 승리를 거두면서 천하통일로 나간다. 지금까지가 <완역 사기 본기1>에서 다루고 있는 내용이다.

김영수 씨는 한글세대를 위해 한자로 된 본문 대신 풍부한 주석과 등장인물 그리고 책에 등장하는 지역을 직접 답사한 자료를 바탕으로 태사공 선생의 저술을 돋보이게 하고 있다. 하은주의 제왕 계보 역시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군주의 교체에 따른 역사의 큰 줄거리를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다만, 너무 한자를 사용하지 않다 보니 위(魏)나라와 위(衛)나라 그리고 진(晉)나라, 진(秦)나라 또 다른 진(陳)나라 같은 경우에 구분이 잘되지 않았다.

태사공 선생의 저술이 이천 년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현실세계에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이번 독서를 통해 체험할 수가 있었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옛것에서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한다는 아주 간단한 것일진대 반복되는 역사에서 배우지 못함은 후학의 온전한 책임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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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터홀릭 두 번째 이야기 - 다시 만난 겨울 홋카이도 윈터홀릭 2
윤창호 글.사진 / 시공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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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마다 여행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여행은 겨울이 아니라 여름에 하는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 나에게 윤창호 작가의 윈터홀릭은 신선한 충격이었다고나 할까. 겨울여행에 긴 여행을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윤창호 작가는 <윈터홀릭>에서 겨울여행의 고독과 즐거움을 자신의 장기인 사진이라는 프레임으로 잘 잡아냈다.

그의 전작인 첫 번째 윈터홀릭을 아직 보지 못해서 비교할 방법이 없지만, 스칸디나비아를 누볐던 전작과 겨울여행이 백미라는 일본 홋카이도 사이에는 묘한 공명이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 일상의 권태를 벗어나기 위해? 아니면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해? 세계의 많은 곳을 여행한 작가에게 여행이란 어느덧 삶의 일부분이 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윤창호 작가가 사진으로 담아내는 홋카이도의 풍경도 일품이지만, 역시 여행의 참맛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멋진 곳, 일상에서 잘 볼 수 없는 그런 풍광도 좋지만 역시 여행 에세이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여행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하코다테에서 고장 난 카메라 수리를 위해 찾은 카메라의 명장 미즈코시 씨와의 조우는 참 인상적이었다.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자신이 하는 일에 뜨거운 열정과 삶의 원칙을 지키며 사는 그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여행하는 나라의 말을 할 줄 안다는 것은 축복이다. 서로 불편한 영어보다 그 나라 말로 소통한다면, 여행이 한결 즐거운 것이다. 작가의 일본 유학은 그래서 홋카이도 여행을 더 풍부하게 만드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여행하면서 굳이 무리하지 않는 그의 여행 스타일도 마음에 들었다. 아바시리 교도소행을 포기하고 미니 열차의 몸에 싣는 장면에선, 외로움을 싫어한다고 하면서도 스스로 절대 고독의 세계를 즐기지 않나 싶었다. 발걸음이 인도하는 대로 홋카이도의 곳곳을 누비는 겨울 보헤미안 사진작가는 한때 구도자의 꿈을 꾸었다고 했던가. 이 지독한 리얼리스트는 몽상가의 얼굴도 갖고 있는가 보다.

정말 멋진 사진작가는 일상에서 드러나지 않는 특별함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눈이 어디서나 일상적인 홋카이도에서 그 눈과 함께 사는 이들의 일상을 포착하는 테크닉이 정말 일품요리처럼 맛깔났다. 호텔보다 몇 배나 되는 요금의 료칸을 운영하는 오카미상의 단아한 모습, 선술집에서 마신 삿포로 맥주나 연어 알, 홍콩에서 온 여행객들의 설경을 바탕으로 한 사진 찍기까지 모두가 그에겐 이야기가 담긴 소재다.

언제나처럼 여행 에세이를 읽고 나니 일상을 뒤로하고 훌쩍 여행이 떠나고 싶어졌다. 물론 그럴 수 없다는 걸 빤히 알면서도. 그곳이 영화 <러브 레터>의 배경이었다는 홋카이도 오타루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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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불평등을 말하다 - 완전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젊음에게
서정욱 지음 / 함께읽는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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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인문서적의 돌풍이 거셌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해서 최근에 나온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 역설적으로 문명 역주행과 불황의 시대가 인문 고전의 르네상스를 불러왔다고 하면 과언일까? <철학, 불평등을 말하다>의 저자 서정욱 교수는 근대 서양 철학의 여명기에 등장한 9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 저서를 ‘풀어서’ 재구성한다.

책의 1번 타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에라스뮈스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라 불리던 중세 말엽, 한 때 가톨릭 사제로 서품까지 받았던 에라스뮈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종교와 가톨릭 교황을 비판했다. 에라스뮈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위험한 주장을 자신의 저서 <우신 예찬>에서 선보인다. 우신의 풍자를 통한 당시 권력에 대한 비판은 통쾌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가톨릭의 허위와 위선을 꼬집으면서, 인간의 본성인 쾌락과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희화화된 우신이 아니냐고 묻는다. 중세를 휩쓸었던 비이성적 종교재판 같은 어리석음이 광기의 신학에서 비롯되지 않았냐는 복음서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은 명쾌하다!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미치광이식 행복의 추구는 참 간단하고 편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유토피아란 말의 뜻이 “아무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걸 에라스뮈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토머스 모어의 걸작 <유토피아>에 대한 소개문에서 알게 됐다. 가상의 인물이자 <유토피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비현실의 공간 유토피아야말로 인류의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이원론의 창시자 플라톤이 일찍이 언급했던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대안에 접근한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사회 질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절도죄를 범한 이들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토머스 모어는 근대적인 방법으로 처벌보다는 교정에 방점을 둔 이상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교정방법에 가까운 인간적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동생산, 공동소비라는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적 이상에 가까운 유토피아 섬의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만, 노예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과 보석 같은 장식은 외교관의 광대라는 어느 어머니의 속삭임은 유쾌했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진 철학자로 등장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통일의 구세자로 마키아벨리가 생각했던 피렌체의 사보나롤라와 냉혹한 전제군주의 이상형이라는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해서 저술했다는 이 걸작을 서정욱 교수는 “불온한 책”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무대로 해서 각축을 벌였던 외세(프랑스, 에스파냐)와 교황령, 베네치아 그리고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신생군주국의 모델을 마키아벨리는 제시한다. 이런 군주국에는 필히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군주가 있어야 하는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무자비함과 잔혹함이라는 덕목(?)을 지녔던 체사레 보르자야말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문제의 인물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여우 같은 교활함과 사자 같은 용맹함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작년엔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언급한 어느 신문사의 사설을 읽었는데, 같은 책을 읽고서도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국민의 합의 하에 권력을 위임받은 ‘절대군주’라는 괴물의 횡포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쓴 위임장의 무효 선언을 하고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욕망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연법에 따라, 군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위임했지만 그 위임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는 도대체 어쩔 거냔 말이다.

책 읽는 이의 능력이 부족해서, 9명의 철학자에 대한 설명에서 ‘불평등’이라는 코드를 족족 집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고 아무래도 풀어 엮은이의 저작으로만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원전에 대한 엮은이의 해석이 아니던가. 서정욱 교수가 머리말에서 당부했듯이, 원전에 읽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충분히 자극이 되었다. 책의 첫 두 번째 글을 읽고 나서 바로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과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샀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종류의 버전 때문에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애피타이저를 먹었으니 이젠 본격적인 앙뜨레를 먹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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