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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불평등을 말하다 - 완전한 유토피아를 꿈꾸는 젊음에게
서정욱 지음 / 함께읽는책 / 2010년 12월
평점 :
2010년 인문서적의 돌풍이 거셌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필두로 해서 최근에 나온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 이르기까지 일반 대중의 인문학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것 같다. 역설적으로 문명 역주행과 불황의 시대가 인문 고전의 르네상스를 불러왔다고 하면 과언일까? <철학, 불평등을 말하다>의 저자 서정욱 교수는 근대 서양 철학의 여명기에 등장한 9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 저서를 ‘풀어서’ 재구성한다.
책의 1번 타자는 네덜란드 출신으로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한 에라스뮈스다. 철학이 종교의 시녀라 불리던 중세 말엽, 한 때 가톨릭 사제로 서품까지 받았던 에라스뮈스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던 종교와 가톨릭 교황을 비판했다. 에라스뮈스는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 종교 지도자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있다는 위험한 주장을 자신의 저서 <우신 예찬>에서 선보인다. 우신의 풍자를 통한 당시 권력에 대한 비판은 통쾌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가톨릭의 허위와 위선을 꼬집으면서, 인간의 본성인 쾌락과 은혜를 베푸는 주체가 희화화된 우신이 아니냐고 묻는다. 중세를 휩쓸었던 비이성적 종교재판 같은 어리석음이 광기의 신학에서 비롯되지 않았냐는 복음서에 근거한 귀납적 추론은 명쾌하다!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미치광이식 행복의 추구는 참 간단하고 편리하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유토피아란 말의 뜻이 “아무 곳에도 없는 장소”라는 걸 에라스뮈스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동시대인 토머스 모어의 걸작 <유토피아>에 대한 소개문에서 알게 됐다. 가상의 인물이자 <유토피아>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라파엘 히드로다에우스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비현실의 공간 유토피아야말로 인류의 이상향 같은 곳이 아닐까 싶다. 이원론의 창시자 플라톤이 일찍이 언급했던 이상사회 건설을 꿈꾸었던 이상주의자 토머스 모어는 냉정한 현실 세계에서의 관찰과 분석을 통해 대안에 접근한다.
당시 영국 사회에서 사회 질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절도죄를 범한 이들을 교수형에 처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토머스 모어는 근대적인 방법으로 처벌보다는 교정에 방점을 둔 이상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현대의 교정방법에 가까운 인간적이라는 점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공동생산, 공동소비라는 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적 이상에 가까운 유토피아 섬의 시스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다만, 노예의 존재를 인정했다는 점에서 탈근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을 들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과 보석 같은 장식은 외교관의 광대라는 어느 어머니의 속삭임은 유쾌했다.
데카르트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관심을 가진 철학자로 등장하는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역시 기대 이상이었다. 당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통일의 구세자로 마키아벨리가 생각했던 피렌체의 사보나롤라와 냉혹한 전제군주의 이상형이라는 체사레 보르자를 모델로 해서 저술했다는 이 걸작을 서정욱 교수는 “불온한 책”이라고 부른다. 마키아벨리는 16세기 이탈리아를 무대로 해서 각축을 벌였던 외세(프랑스, 에스파냐)와 교황령, 베네치아 그리고 피렌체 같은 도시국가의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한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신생군주국의 모델을 마키아벨리는 제시한다. 이런 군주국에는 필히 탁월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제군주가 있어야 하는데,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무자비함과 잔혹함이라는 덕목(?)을 지녔던 체사레 보르자야말로 적합한 인물이라고 칭송한다. 문제의 인물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는 여우 같은 교활함과 사자 같은 용맹함의 균형감각을 유지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작년엔가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언급한 어느 신문사의 사설을 읽었는데, 같은 책을 읽고서도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국민의 합의 하에 권력을 위임받은 ‘절대군주’라는 괴물의 횡포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려고 한다면 자신이 쓴 위임장의 무효 선언을 하고 거부할 권리는 없는 것일까? 만인의 투쟁 상태에서 욕망과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자연법에 따라, 군주에게 자유와 권리를 위임했지만 그 위임의 정도를 벗어난 행위는 도대체 어쩔 거냔 말이다.
책 읽는 이의 능력이 부족해서, 9명의 철학자에 대한 설명에서 ‘불평등’이라는 코드를 족족 집어내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그리고 아무래도 풀어 엮은이의 저작으로만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어쨌든 원전에 대한 엮은이의 해석이 아니던가. 서정욱 교수가 머리말에서 당부했듯이, 원전에 읽기 전에 애피타이저로 충분히 자극이 되었다. 책의 첫 두 번째 글을 읽고 나서 바로 에라스뮈스의 <우신 예찬>과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샀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그런지 다양한 종류의 버전 때문에 고르는데 애를 먹었다. 즐거운 마음으로 애피타이저를 먹었으니 이젠 본격적인 앙뜨레를 먹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