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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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을 봤다. 그의 장편 데뷔작 <파이> 이후 아마 처음이지 싶다.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파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대 카르발라 신비주의 같은 수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남자의 이야기, 드릴을 든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요즘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블랙 스완>으로 작품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08년 <레슬러>를 뒤늦게 봤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듬해 아카데미상은 이 영화에서 열연한 미키 루크에게 돌아가야 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미키 루크가 누구던가? 1980년대 킴 베신저(지금은 베이싱어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이름이 더 좋다)와 함께 출연했던 <나이 하프 위크>에서 그 멋진 꽃미남 배우가 아니던가. 한 때 권투선수로 배우 대신 외도도 했다고 하는데, 환갑 줄에 들어서서 엉덩이마저 다 드러내고 출연한 영화가 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이거노믹스로 힘센 미국을 주창하던 바로 그 시대, 198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AFKN을 통해 가끔 보던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시절이 떠올랐다.

미키 루크가 맡은 랜디 더 램 로빈슨은 1980년대 끗발 날리던 레슬링 선수였다. 당대의 호적수 아야톨라와 경기에 대한 미디어 뉴스가 파노라마처럼 소개된다. 1989년 4월 6일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랜디는 그저 예전의 영광과 추억을 뜯어 먹고 사는 한물간 레슬러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국 레슬링이 쇼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해주듯 랜디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면도날 트릭 같은 고전 수법과 대결할 선수와 사전 조율을 한다. 한 때,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링 위에서의 격투로 인한 청력 상실 그리고 근육강화를 위해 시시때때로 복용한 약물에 찌든 육신뿐이다. 게다가 트레일러 월세마저 못내 관리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업을 위해 인근 대형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스트립클럽의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와의 짧은 만남이다. 싱글맘으로 근근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캐시디는 단골 손님인 랜디의 말에 곧잘 귀를 기울여준다. 어라, 이거 너무 신파조로 흐르는 거 아냐? 은퇴를 앞둔 레슬러와 스트립클럽 댄서의 사랑이라. 그렇다, 그들이라고 해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말란 법이 없다. 다만, 그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수렁이 너무 깊을 따름이다.

랜디는 어느 시합에서 결국 무리 끝에 정신을 잃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심장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담당 의사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almost died) 랜디에게 경고한다.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은 랜디는 곧 있을 아야톨라와의 20주년 재시합에 대비해서 몸만들기에 나서지만, 심장수술을 받은 몸으론 무리다. 캐시디에게 조언을 구한 랜디는 역시 가족뿐이라는 말에 거의 의절하다시피 한 딸 스테파티(에반 레이철 우드 분)을 찾아가지만, 그녀에게 문전박대당한다.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랜디에게 스테파티는 폭언을 퍼붓는다.

레슬러로서의 인생과 가족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잃어버린 가족애를 되찾고,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디 아니 팸과의 로맨스를 위해 랜디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으로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오로지 레슬링뿐이었고, 그를 구속하는 다른 책임으로부터 도망쳤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퇴락한 영웅 랜디 역에 미키 루크 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든 미키 루크는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관객들의 흥분된 환호에 중독된 레슬러는 링 위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가족보다, 연인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몸으로 외친다. 현대판 로마의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향해 돌격하는 쇼비즈니스 업계의 전사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딸 스테파니와 모처럼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한 번의 실수로 날려 버린 랜디는 결국 목숨을 걸고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방부제를 복용한 것 같이 나이를 먹지 않은 배우 마리사 토메이는 어느새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랜디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스트립댄서라는 밑바닥 인생을 그야말로 품위 있게 연기한 중견배우 역할이 그녀만큼 적격인 배우도 없을 것 같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연 배우인 미키 루크를 지원사격하는 최고의 연기였다.

캐시디의 조언으로 스테파니의 선물을 고른 랜디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래트의 “Round and Round"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둘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모멘텀이라고 할까? 랜디에게 닫혀 있던 캐시디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특히, 랜디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스트립클럽에서 뛰쳐나간 그녀가 랜디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심장을 걱정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지만, 아야톨라와의 경기를 앞두고 건즈 앤 로지즈가 부른 “Sweet Child O'Mine"의 그 유명한 기타 리프가 흘러나오는 순간, ”오! 컴 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하진 작가처럼 <레슬러>의 연출을 맡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짜릿한 감동을 연출해낸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슬링 포기하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지만 적응에 실패한 옛 영웅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게다가 과거의 영화를 되새겨 주는 헤비메틀이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의 음악까지 곁들이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랜디의 마지막 다이빙은 전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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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행관람차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7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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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여행을 하다 보면 참 관람차를 많이 본다. 오다이바의 비너스 포트에서도, 그리고 고베와 오사카 가이유칸에서도 엄청나게 큰 관람차를 많이 봤다. 너무 궁금해서 오사카 시내에서 결국 관람차를 타봤는데, 한 바퀴 남짓 도는 동안 메트로폴리탄의 이모저모를 볼 수가 있었다.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야행관람차>의 첫 이미지는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충격적인 데뷔작 <고백>으로 이미 수많은 열혈 독자를 확보한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이번에도 전작의 영광을 재현한다. 히바리가오카라는 고급주택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이 벌어진 다카하시 가는 겉보기에 정말 화목하고 부러운 가정의 표본이다. 아버지는 의사로 일하고 있고, 교양과 미모를 갖춘 어머니 슬하에 남매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명문학교에 재학 중이다. 도대체 무엇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이 가정에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그와는 대조적으로 고급주택이 즐비한 히바리가오카에 어울리지 않는 엔도 가가 있다. 엔도 마유미는 단독주택에서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남편을 졸라 무리를 해가면서 히바리가오카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자식에게 좀 더 좋은 환경과 자신의 꿈을 이루겠다는 소박한 어머니의 꿈은 딸 아야카가 사립명문학교 진학에 실패하면서 비극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아야카가 부리는 히스테리에 정말 기가 찼다. 어쩌면 이렇게 얄미운 캐릭터를 창조해낼 수 있었을까? 아무리 버릇이 없다지만 부모를 당신이라 부르며, 모든 걸 부모의 탓으로 돌리는 철부지의 언행은 정말 한참 도를 넘어섰다. 이렇게 거의 날마다 전쟁을 벌이니 이웃이 보기에도 사건이 터진다면, 다카하시네 집보다는 오히려 엔도네 집이 먼저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고백>에서와 마찬가지로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루된 당사자들의 시선으로 사건의 실체에 조금씩 다가선다. 어떤 경우에는 사건 발생의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도 하면서,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좋은 직장 또 좋은 혼처 같은 부모들의 강압적 권유를 이해못하는 건 아니지만, 과연 당사자가 그걸 감당해낼 수 있을까 하는 점에 의문점이 찍힌다. 어떻게 보면 아야카 역시 엄마 마유미의 빗나간 성공 욕망의 희생자가 아닐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일탈이 용서되는 건 아니겠지만.

등장인물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이 차례로 소개되면서 아직 소개되지 않은 두 사람의 말이 궁금했다. 사실 어떻게 보면 그 두 명의 진술이 이 소설에서 가장 핵심이니 말이다. 하지만, 끝까지 마지막 한 명의 이야기는 소개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렇게 마무리된 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비극의 불편한 진실이 걷게 될 숙명이라고나 할까.

<야행관람차>를 보면서 구로사와 아끼라 감독의 <라쇼몽>이 떠올랐다. 사건을 바라보는 개인의 시각차가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이 미나토 가나에의 <야행관람차>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피해자의 가족이면서도, 동시에 가해자의 가족으로 생면부지의 타인에게 사이버 테러를 당하고 이웃사촌으로부터 경멸의 시선과 돌팔매질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묘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그런 증오와 분노의 실체는 너무나 이기적이었다. 자신이 어렵게 가꾼 히바리가오카의 이미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가해자의 자식과 함께 다닐 수 없다는 극단적 증오의 표출에 어이가 없어졌다. 아무리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라지만, 조금은 타인의 심정도 헤아려 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미나토 가나에 작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독자에게 속삭인다. “너는 어때?”하고 말이다.

스크린셀러가 대세인 요즘 <야행관람차>도 분명히 영화화될 거라고 확신한다. 소설에서 사건의 핵심적인 증인 역할을 하게 될 다카하시 신지 역을 누가 맡을지 궁금해졌다. 아이돌 뺨치는 준수한 외모의 소유자라고 하니, 잘 나가는 아이돌을 캐스팅해도 무난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의 영상화, 한편으로는 반가우면서도 소설보다 못한 영화가 되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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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진영화 옮김 / 책만드는집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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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한낱 고양이보다 못하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는가? 지금으로부터 1세기 전,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 씨는 어쩌면 우리네 호모 사피엔스가 하릴없이 골목을 누비는 고양이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인간들을 위한 우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창조해냈다.

페르시아 종으로 보이는 이름 없는 고양이 “나”는 언제 어디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학교에서 선생으로 근무하는 구샤미 씨네 집에 기거하게 된다. 고양이 녀석의 탄생에서부터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인간의 삶을 작가는 넌지시 꼬집는다. 만성 위장병으로 고생하는 구샤미 선생은 스스로 지식인이라 자부하며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이지만, 나의 관찰에 의하면 무엇하나 빼어나게 잘하는 건 없다. 지식인이 달래 지식인이던가.

내(고양이)가 보기에 선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좋은 직업이다. 특히나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구샤미 선생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연구합네 하고 서재에 틀어박히기 일쑤지만, 정작 제대로 공부한 적이 거의 없다. 고양이의 날카로운 관찰이 번득이는 순간이다. 지식인 흉내를 내기 위해 어려운 책도 읽는다고 하지만 실제 용도는 수면 활성제란다. 이름 하나 없는 고양이 주제에 이렇게 냉소적이기까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동양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청나라를 격파하고, 강국 러시아마저 소설에서도 잠시 언급되는 뤼순전투에서 격파하면서 세계열강의 하나로 인정받은 20세기 초반 일본의 기개가 하늘 높은 줄 모르던 시절이다. 부국강병을 모토로 삼은 메이지 유신의 성공으로 잔뜩 고양된 당대 지식인과 달리 고양이인 내가 보는 구샤미 선생과 그의 친구 메이테이 등은 하나같이 더리적어 보일 뿐이다.

구샤미 선생의 제자인 미즈시마 간게쓰의 뒷조사를 위해 예고도 없이 선생의 집으로 쫓아온 가네다 집안 여주인의 코를 골려 먹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돈은 많지만 어떻게 보면 성공한 상인에 지나지 않는 실업가를 면박하는 지식인의 단면도 빠지지 않는다. 가네다 집안의 하수인으로 등장한 스즈키 도주로의 관계는 제국주의 침략전쟁이 본궤도에 오르는 과정에서 보이는 경학유착의 전형으로 보인다.

문학이라는 변용을 통해 보는 고양이의 시선만큼이나, 고양이에게 인간사는 알쏭달쏭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호기심 많은 고양이 녀석은 주인이 먹다 남긴 떡국을 먹다 떡이 이빨에 걸려 춤을 추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으로 독자를 즐겁게 해준다. 남의 연애사에는 왜 이렇게 관심이 많은지 들키면 작대기에 두들겨 맞을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에서 자신처럼 잠입에 뛰어난 닌자 고양이는 없을 거라며 가네다 집안에 침투하기도 한다. 이렇게 인간보다 잘났다고 주절대는 이름 없는 고양이 이야기가 참 재밌다.

한편, 고양이가 주제넘게 너무 인간사에 많이 개입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시시콜콜한 묘사에서는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구샤미 선생의 지나친 잘난 척과 문학작품의 인용은 소설의 흥미진진한 전개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어쩌면 그 점이 나쓰메 소세키 선생의 스타일일지도 모르겠다. 일본의 셰익스피어라고 불리는 작가의 한 작품만으로 그를 평가한다는 것이 무리였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보통 고양이처럼 쥐잡기에도 능하지 못하고, 이웃의 검둥이처럼 다랑어 토막을 탐내지도 않는 이 이름 없는 고양이의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삶의 자세가 어떻게 보면 부럽게 느껴졌다. 자그마치 한 세기 전에 아직까지도 살아 숨 쉬는 것 같이 놀라운 캐릭터를 만들어낸 나쓰메 소세키 선생의 필력에 그저 존경을 보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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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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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색 표지의 분홍 돼지 인형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야자키 아리미라는 금시초문의 작가인데,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일본에서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서 10권이 넘는 책이 나왔다고 했던가. 제목에 나오는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판타지스러운 주인공 돼지돼지 씨가 주인공이다.

배구공만 한 크기의 귀여운 분홍 돼지 인형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집사)로 홀을 종횡무진 누비며, 호텔 종업원들을 교육하고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은 물론이고 아픈 투숙객을 정성껏 모시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돼지돼지 씨는 평소에는 눈에 안 띄는 모양이다. 무언가 마음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만 눈에 띄는 걸까?

엉뚱한 상상일진 모르겠지만, 이런 친절한 돼지돼지 씨와 만난다면 그랜드 호텔에서의 투숙이 더욱 즐거워질 것 같은 느낌이다. 가만 그런데 돼지돼지 씨의 실존은 뭐지? 봉제인형이라는 데 말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심지어 연극무대에까지 오른다? 이렇게 너무 따지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앨리스의 미궁호텔>에 흥미를 잃을 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는 그저 판타지로 보자.

마을의 벚꽃 축제 20주년 기념연극으로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소설의 중심에 연착륙한다. 프로 연출가 스자쿠 선생의 지휘 아래, <오셀로>에 대한 캐스팅이 진행된다. 오셀로나 데스데모나보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아고 역에 우리의 돼지돼지 씨가 뽑힌다. 아무리 아마추어 연극이라지만, 정식으로 무대에 오르는 연극에 부담감을 가진 출연진들은 돼지돼지 씨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무어냐는 자신감으로 연극에 달려든다. 다양한 군상들이 그랜드 호텔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연극과 접촉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 간다.

영화 <샤이닝>과 <미저리>를 연상시키는 외딴곳에 갇혀 글을 쓰는 소설가는 그랜드 호텔에서 칙사 대접을 받지만, 글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고민한다. 이 소설가도 돼지돼지 씨의 도움으로 글쓰기의 돌파구를 찾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딸 히로코와 화해를 원하는 아버지 우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돼지 봉제인형의 격려에 힘입어 연극 오디션에 응모하고 결국 주인공 오셀로 역을 따낸다. 히로코 역시 얼결에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전격 캐스팅된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미인 가나에와 그랜드 호텔로 꿈꾸던 밀월여행을 떠난 아키미쓰는 보기 좋게 그녀에게 차이고 돼지돼지 씨에게 위로를 받는다.

마치 지구의 정반대에서 온 것 같이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그랜드 호텔에 모여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설정에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야자키 아리미 작가가 창조해낸 소설의 구조는 이 모든 것을 맨 끝에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지다. 이런 연작이라면 환영이다. 과연 또 다른 버전에서는 돼지돼지 씨가 어떤 활약을 할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책의 노란 겉표지 속에는 쪽지를 들고 있거나, 호텔의 카펫을 밀고 있는 혹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돼지돼지 씨를 볼 수 있다. 호텔에 사는 요정처럼 쉼을 찾아온 이에게만 보이는 돼지돼지 씨를 나도 언젠가 만나 보고 싶다는 상상에 빠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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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비가
쑤퉁 지음, 허유영 옮김 / 비채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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쑤퉁 작가의 <화씨 비가>를 다 읽고 난 느낌은 먹먹하다였다. 가난과 고통의 질곡에 시달리는 화씨 가족사는 제목 그대로 비극 그 자체다. 중국의 역사를 20년 정도 뒤로 돌렸다는 문화혁명기를 지나 1970년대를 시작으로 이십 년에 걸친 슬픈 가족사를 읽다 보니 “왜”라는 질문이 끝없이 터져 나온다. 왜 어머니 위펑황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가? 왜 주인공 화진더우는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화씨 일가를 맴도는 걸까? 왜 화씨들은 대오각성하여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을 하지 못하는 걸까?

어머니 위펑황이 죽고, 아버지 화진더우 마저 방화죄로 감옥에서 스스로 세상을 하직한다. 아니 남은 가족들은 어떡하라고?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 아닐 수 없다. 사군자 매란국죽(梅蘭菊竹)을 따서 이름 지은 네 딸 신메이, 신란, 신주, 신쥐와 철부지 막내아들 두후 그리고 이들을 돌보는 화진더우의 누이 고모가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여전히 가부장제를 고수하면서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서는 아들이 최고라는 봉건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않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와 고모를 통해 적확하게 짚어낸다.

그렇게 배를 곯으면서도 아들 두후에게는 잘 먹이려는 것이 어머니이자 아버지 역할을 떠맡은 고모의 마음이었을까. 손위 누이들마저 그렇게 두후 녀석을 떠받치다 보니 그만 망나니가 되어 버렸다. 게다가 이상한 친구를 만나 게이의 길을 걷질 않나, 두후란 놈은 부모가 속 터져 죽게 만드는 비상한 재주를 가지고 있는가 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도는 원혼 화진더우는 지상에서 돌아가는 꼴이 하나도 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더러운 윗물 때문에 아랫물이 깨끗하겠냐고 자조한다.

화씨 일가의 비극은 아버지와 어머니 대에서 끝나지 않고, 자손에게까지 계속된다. 둘째딸 신주는 임신해서 중절 수술을 하던 중에 불의의 사고로 그만 꽃다운 나이에 죽고 만다. 큰딸 신메이는 우여곡절 끝에 결혼하지만, 가정불화에 고모의 말실수로 그만 신랑이 반신불수가 된다. 양아치 건달이 된 두후 놈은 매춘 혐의로 경찰에 연행된다. 헌신과 봉사로 화씨 집안을 받쳐온 고모는 조카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노구를 이끌고 나서지만, 결국 객사하고 만다. 어쩌면 이렇게 구질구질한 인생들일까. 문득 작년에 읽은 천명관 작가의 한국판 막장 드라마 <고령화 가족>이 떠올랐다.

쑤퉁 작가는 화진더우 일가의 비극을 통해, 사회주의 국가 중국에서 진행된 전통적 가족관에 대한 해체를 그리고 있다. 삶의 마지막 보루가 되어야 할 가족은 서로에게 짐이 될 뿐이다. 어머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는 딸들은 차례로 위펑황이 죽은 연료 창고의 주임 류페이량을 찾아가 행패를 부린다. 합리적인 사고 대신 감정적 대응으로 얻어질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들은 세상을 향해 분풀이를 늘어놓는다.

유물론을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이승을 떠도는 원혼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가의 대담함이 새삼 눈에 띈다. 현실감각을 잃지 않은 쑤퉁은 화진더우를 물리적 현실세계에 개입시키지 않고 오로지 관조적 자세의 서술자로만 활용한다. 하긴 귀신 화진더우가 활약을 했다면 <화씨 비가>는 판타지가 되었겠지. 소설 속에서 화씨들은 가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렇게 처연한 몸부림을 치지만, 가장의 부재로 인한 빈곤의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가장이 가져야 할 경제적 책임으로부터 해방된 화진더우의 존재는 가족에게 외면당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으로 위펑황의 죽음에 대한 미스터리와 아들 두후 출생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화진더우의 위신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다. 조금이나마 품었던 해피엔딩에 대한 기대를 한 방에 날려 버린다.

사실 소설 초반에 이런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의 향연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었다. 하지만, 고모와 신주가 낙향해서 위펑황의 경고를 무시하고 임시중절을 시도하다 봉변을 당하면서 쑤퉁 작가의 서사는 힘을 얻는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문화혁명 시기에 화진더우가 지주 계급에 대한 악의적 공격을 했던 사실이 밝혀지고 그에 따른 인과응보의 순환이 밝혀지면서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는다.

짝으로 나온 <성북지대>가 불량소년들의 성장기를 그렸다면, <화씨 비가>는 가족의 구성과 해체를 그 중심에 두고 있다. 어쩌면 가족 내의 희생과 헌신이 이제는 미덕이 되지 못한 새로운 시대의 초상이라고나 할까. 자신을 속이면서까지 차마 자식들을 떠날 수 없었던 어느 아버지의 솔직한 고백은 그래서 더 진한 여운을 남기는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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