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레슬러 - The Wrestl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오랜만에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작품을 봤다. 그의 장편 데뷔작 <파이> 이후 아마 처음이지 싶다. 극장에서 처음으로 만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파이>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유대 카르발라 신비주의 같은 수로 이루어진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남자의 이야기, 드릴을 든 주인공의 마지막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요즘 나탈리 포트만 주연의 <블랙 스완>으로 작품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만끽하고 있는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2008년 <레슬러>를 뒤늦게 봤다. 이유는 단 한 가지, 이듬해 아카데미상은 이 영화에서 열연한 미키 루크에게 돌아가야 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서였다.

미키 루크가 누구던가? 1980년대 킴 베신저(지금은 베이싱어로 불리지만, 오래전 이 이름이 더 좋다)와 함께 출연했던 <나이 하프 위크>에서 그 멋진 꽃미남 배우가 아니던가. 한 때 권투선수로 배우 대신 외도도 했다고 하는데, 환갑 줄에 들어서서 엉덩이마저 다 드러내고 출연한 영화가 바로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레슬러>였다니! 놀랍기만 하다. 레이거노믹스로 힘센 미국을 주창하던 바로 그 시대, 1980년대에 대한 향수가 느껴진다. AFKN을 통해 가끔 보던 WWF(World Wrestling Federation) 시절이 떠올랐다.

미키 루크가 맡은 랜디 더 램 로빈슨은 1980년대 끗발 날리던 레슬링 선수였다. 당대의 호적수 아야톨라와 경기에 대한 미디어 뉴스가 파노라마처럼 소개된다. 1989년 4월 6일 그리고 20년이 지난 현재, 랜디는 그저 예전의 영광과 추억을 뜯어 먹고 사는 한물간 레슬러일 뿐이다. 오래전부터 미국 레슬링이 쇼라고 했지만, 그 사실을 확인해주듯 랜디는 경기에 나서기 전에 면도날 트릭 같은 고전 수법과 대결할 선수와 사전 조율을 한다. 한 때,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했지만 지금 그에게 남은 건 링 위에서의 격투로 인한 청력 상실 그리고 근육강화를 위해 시시때때로 복용한 약물에 찌든 육신뿐이다. 게다가 트레일러 월세마저 못내 관리인에게 문전박대를 당하고 생업을 위해 인근 대형마트에서 파트타임으로 뛰고 있다.

그의 유일한 위안은 스트립클럽의 댄서 캐시디(마리사 토메이 분)와의 짧은 만남이다. 싱글맘으로 근근하게 하루하루를 사는 캐시디는 단골 손님인 랜디의 말에 곧잘 귀를 기울여준다. 어라, 이거 너무 신파조로 흐르는 거 아냐? 은퇴를 앞둔 레슬러와 스트립클럽 댄서의 사랑이라. 그렇다, 그들이라고 해서 행복한 미래에 대한 꿈을 꾸지 말란 법이 없다. 다만, 그들이 벗어나려고 하는 수렁이 너무 깊을 따름이다.

랜디는 어느 시합에서 결국 무리 끝에 정신을 잃는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보니 심장수술을 받고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담당 의사는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고(almost died) 랜디에게 경고한다.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 들은 랜디는 곧 있을 아야톨라와의 20주년 재시합에 대비해서 몸만들기에 나서지만, 심장수술을 받은 몸으론 무리다. 캐시디에게 조언을 구한 랜디는 역시 가족뿐이라는 말에 거의 의절하다시피 한 딸 스테파티(에반 레이철 우드 분)을 찾아가지만, 그녀에게 문전박대당한다. 아버지로서 의무를 다하지 못한 랜디에게 스테파티는 폭언을 퍼붓는다.

레슬러로서의 인생과 가족에게마저 인정받지 못한 아버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란 말인가.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이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한다. 잃어버린 가족애를 되찾고, 자신이 사랑하는 캐시디 아니 팸과의 로맨스를 위해 랜디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한다. 문제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랑으로 하고 어떻게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의 삶은 오로지 레슬링뿐이었고, 그를 구속하는 다른 책임으로부터 도망쳤었다. 이제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퇴락한 영웅 랜디 역에 미키 루크 만큼 어울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나이 든 미키 루크는 그야말로 혼신의 연기를 펼쳐 보인다. 관객들의 흥분된 환호에 중독된 레슬러는 링 위의 삶이야말로 자신이 가족보다, 연인보다도 더 사랑하는 것이라고 몸으로 외친다. 현대판 로마의 검투사처럼 상대방을 향해 돌격하는 쇼비즈니스 업계의 전사는 그렇게 자신의 몸을 학대한다. 딸 스테파니와 모처럼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한 번의 실수로 날려 버린 랜디는 결국 목숨을 걸고 마지막 무대에 오른다.

방부제를 복용한 것 같이 나이를 먹지 않은 배우 마리사 토메이는 어느새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홀로 아이를 키우면서 랜디에게 조금씩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는 스트립댄서라는 밑바닥 인생을 그야말로 품위 있게 연기한 중견배우 역할이 그녀만큼 적격인 배우도 없을 것 같다. 전면에 나서지 않고, 주연 배우인 미키 루크를 지원사격하는 최고의 연기였다.

캐시디의 조언으로 스테파니의 선물을 고른 랜디와 바에서 맥주를 마시며 래트의 “Round and Round"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둘이 서로 교감을 나누는 장면도 빼놓을 수 없다. 모멘텀이라고 할까? 랜디에게 닫혀 있던 캐시디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게 되는. 특히, 랜디의 마지막 무대를 앞두고 스트립클럽에서 뛰쳐나간 그녀가 랜디의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심장을 걱정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하지만, 아야톨라와의 경기를 앞두고 건즈 앤 로지즈가 부른 “Sweet Child O'Mine"의 그 유명한 기타 리프가 흘러나오는 순간, ”오! 컴 온!“이 절로 터져 나온다.

내가 좋아하는 하진 작가처럼 <레슬러>의 연출을 맡은 대런 아로노프스키 역시 특이할 것 없는 평범한 이야기에서 관객의 심금을 울리는 그런 짜릿한 감동을 연출해낸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살기 위해 자신이 그렇게 좋아하는 레슬링 포기하고 삶의 현장에 뛰어들지만 적응에 실패한 옛 영웅의 이야기는 너무나 현실적이다. 게다가 과거의 영화를 되새겨 주는 헤비메틀이 전성을 구가하던 시절의 음악까지 곁들이니 더 바랄 게 없었다. 랜디의 마지막 다이빙은 전율 그 자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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