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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의 미궁호텔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6
야자키 아리미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1년 2월
평점 :
노란색 표지의 분홍 돼지 인형 일러스트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야자키 아리미라는 금시초문의 작가인데, 어떻게 이런 발칙한 상상을 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게다가 이 시리즈가 일본에서는 선풍적 인기를 끌어서 10권이 넘는 책이 나왔다고 했던가. 제목에 나오는 대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상시키는 판타지스러운 주인공 돼지돼지 씨가 주인공이다.
배구공만 한 크기의 귀여운 분홍 돼지 인형이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랜드 호텔의 버틀러(집사)로 홀을 종횡무진 누비며, 호텔 종업원들을 교육하고 떨어진 쓰레기를 줍는 것은 물론이고 아픈 투숙객을 정성껏 모시는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활약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돼지돼지 씨는 평소에는 눈에 안 띄는 모양이다. 무언가 마음에 기대와 희망을 품고 사는 이들에게만 눈에 띄는 걸까?
엉뚱한 상상일진 모르겠지만, 이런 친절한 돼지돼지 씨와 만난다면 그랜드 호텔에서의 투숙이 더욱 즐거워질 것 같은 느낌이다. 가만 그런데 돼지돼지 씨의 실존은 뭐지? 봉제인형이라는 데 말도 하고, 손님을 접대하고 심지어 연극무대에까지 오른다? 이렇게 너무 따지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앨리스의 미궁호텔>에 흥미를 잃을 지도 모르겠다. 판타지는 그저 판타지로 보자.
마을의 벚꽃 축제 20주년 기념연극으로 아마추어 배우들을 기용한 셰익스피어의 비극 <오셀로>가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소설의 중심에 연착륙한다. 프로 연출가 스자쿠 선생의 지휘 아래, <오셀로>에 대한 캐스팅이 진행된다. 오셀로나 데스데모나보다 실질적인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이아고 역에 우리의 돼지돼지 씨가 뽑힌다. 아무리 아마추어 연극이라지만, 정식으로 무대에 오르는 연극에 부담감을 가진 출연진들은 돼지돼지 씨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게 무어냐는 자신감으로 연극에 달려든다. 다양한 군상들이 그랜드 호텔이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연극과 접촉하게 되면서 이야기는 흥미를 더해 간다.
영화 <샤이닝>과 <미저리>를 연상시키는 외딴곳에 갇혀 글을 쓰는 소설가는 그랜드 호텔에서 칙사 대접을 받지만, 글의 실마리가 풀리지 않아 고민한다. 이 소설가도 돼지돼지 씨의 도움으로 글쓰기의 돌파구를 찾는데 성공한다. 자신의 딸 히로코와 화해를 원하는 아버지 우도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돼지 봉제인형의 격려에 힘입어 연극 오디션에 응모하고 결국 주인공 오셀로 역을 따낸다. 히로코 역시 얼결에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전격 캐스팅된다. 회사에서 잘나가는 미인 가나에와 그랜드 호텔로 꿈꾸던 밀월여행을 떠난 아키미쓰는 보기 좋게 그녀에게 차이고 돼지돼지 씨에게 위로를 받는다.
마치 지구의 정반대에서 온 것 같이 서로 공통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캐릭터들이, 그랜드 호텔에 모여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신이 잊고 있었던 소중한 무언가를 찾게 된다는 한 편의 동화 같은 설정에 마음이 절로 흐뭇해진다. 야자키 아리미 작가가 창조해낸 소설의 구조는 이 모든 것을 맨 끝에서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풀어낸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지다. 이런 연작이라면 환영이다. 과연 또 다른 버전에서는 돼지돼지 씨가 어떤 활약을 할까 하는 기대를 품어본다.
책의 노란 겉표지 속에는 쪽지를 들고 있거나, 호텔의 카펫을 밀고 있는 혹은 소파에 앉아 쉬고 있는 돼지돼지 씨를 볼 수 있다. 호텔에 사는 요정처럼 쉼을 찾아온 이에게만 보이는 돼지돼지 씨를 나도 언젠가 만나 보고 싶다는 상상에 빠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