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 -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과 대표 단편들 펭귄클래식 70
안톤 파블로비치 체홉 지음, 안지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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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누가 그랬던가. 러시아 소설에서 등장인물의 이름만 영어식 이름으로 고쳐도 책이 반은 줄어들 거라고. 확실히 러시아 소설에 나오는 인물의 이름은 기억하기가 쉽지 않다. 작년에 그렇게 애를 써가며 읽었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남편 이름이 안드로비치였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그래서 선뜻 러시아 소설은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수년 전에 산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은 어디에 갔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러시아 문학 특유의 만연체는 어떻고? 하지만, 여기 오늘 이야기할 안톤 체호프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 아니 톨스토이나 도스토옙스키 같은 작가와 달리 그의 스타일은 간결 그 자체다. 게다가 장편보다는 단편에 강하다고 하니 부담 없이 도전해 보련다.

러시아 19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당당하게 손꼽히는 안톤 체호프의 <사랑에 관하여>에는 모두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굴>은 거리에 구걸하러 나선 아버지를 보는 아들의 시선을 좇는다. 가장이라는 족쇄는 생존을 위해 거리에 나서게 하지만, 선뜻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도움을 청할 배짱도 없다. 그가 쭈뼛쭈뼛하는 사이에 허기를 참지 못한 아들은 굴을 먹겠다고 덤빈다.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은 아들을 데리고 주점에 데려가고, 굴을 먹을 줄 모르는 아들은 껍질째 굴을 먹는다. 가난과 부르주아의 가난에 대한 경멸이 단편적으로 읽힌다.

다음에 등장하는 <진창>은 제목 그대로 의미심장한 이야기다. 미수금을 받기 위해 수산나 모이세예브나라는 유대인 여성을 찾아간 주인공은, 그녀에게 결혼자금을 융통하려다 그녀의 마력에 그만 빠져 버리고 만다. 유럽 사회에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의 흔적이 엿보인다. 유대인 다음으로 프랑스인과 러시아인을 좋아한다는 그녀의 말에서는, 모국어 대신 프랑스어를 교양의 척도로 삼은 러시아 귀족의 허영도 잠깐 스치고 지나간다. 여자와 ‘진창’에 빠져 버린 중위의 형 알렉세이 역시 마찬가지다. 수산나의 마력에 빠져 귀대마저 미룬 중위를 그녀의 집에서 맞닥뜨린 순간의 낭패란!

반유대주의와 여성에 대한 비하는 <로실드의 바이올린>에서도 반복된다. 장의사 야코프는 모든 것을 자본주의적 관념에서 수치화하고 계량화한다. 자신이 못한 일조차도, 손실로 생각하는 그야말로 뼛속까지 자본주의에 물든 남자다. 그렇게 돈타령을 해대면서도 정작 수십 년을 함께 한 부인에게는 야박하기 짝이 없다. 러시아말을 서툰 유대인 로실드를 표현하기 위해 경음으로 번역한 낱말들이 인상적이다. 부인 마르파의 죽음을 앞두고 관을 만들면서도 “2루블 40페코이카”라고 기록하고 한숨을 내쉬는 야코프의 모습은 차라리 서글프기까지 하다. 도대체 뭣 때문에 강아지도 먹지 않는 돈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체호프는 서구 자본주의의 유입으로 전통 가치를 상실한 러시아 민중의 삶을 그리려고 했던 걸까.

<상자 속의 사나이>에서는 달뜬 사랑 이야기로 전개되는 듯하다가 냉큼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기다린다. <산딸기>에서는 자신이 평생 꾸던 꿈을 이루지만 막상 그 행복의 맛은 기대와는 다르다는 어쩌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의 씁쓰름함을 직접 들려준다. 개인적으로 <사랑에 관하여>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은 역시 <검은 수사>라고 생각한다.

<검은 수사>를 읽으면서 얼마 전에 읽었던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등장하는 위버멘시가 떠올랐다. 주인공 코브린은 우연히 만난 ‘검은 수사’가 속삭인 신의 선민, 영원한 진리 그리고 인류의 빛나는 미래에 대한 감언이설에 자극받는다. 그 정도 되는 인물이라면 누구나 다 그런 경지에 다다르고 싶은 걸까? 현실을 초월한 광기에 사로잡힌 코브린은 아리따운 아내와 장인의 보살핌도 마다하고 ‘선택받고 재능있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에 검은 수사와의 재회만을 꿈꾼다. <검은 수사>를 읽으면서, 코브린이 만난 검은 수사의 정체가 어쩌면 “메피스토펠레스”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체호프는 검은 수사가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정말 놀라운 묘사를 선보인다. 만약 이 장면을 영화화한다면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공포의 대상이 아닌, 인간에게 놀라운 우주의 비밀을 전달한 메신저에 대한 섬망(譫妄)이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부질없는 희망일진 모르겠지만, 다른 러시아 문학도 체호프의 책처럼 간결하면서도 재기 넘치는 해학을 담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상상을 해본다. 아무래도 깊이보다는 스타일이 더 좋은 모양이다. 어쨌든 체호프와의 첫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뱀다리] 표지에 실린 칸딘스키의 <모스크바의 여인>이라는 그림에 보이는 시커먼 부분의 정체를 알고자 인터넷을 뒤졌지만, 아무런 정보도 얻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책 표지의 그림과 원본은 달라 보였다. 검은 칠이 된 부분의 정체가 너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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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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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런드 러셀, 난 러셀이 위대한 철학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로지코믹스>를 읽으면서 그에 다른 면들을 알 수가 있었다. 러셀은 수학자로 출발해서, 논리학자 그리고 철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우주생성의 비밀과 진리를 탐구한 구도자였다. 그리스 출신의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와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콤비는 20세기 초반 치열하게 전개된 논리학 논쟁의 중심에 서 있던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만화적 상상력을 가미해서 소개한다.

영국 백작 가문에서 태어난 버트런드 러셀은 조실부모하고 펨브로크로지에서 종교적으로 엄격한 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여느 천재들처럼 러셀 역시 어려서부터 그 따분하다는 라틴 어는 물론이고, 훗날 자신의 학문 탐구에 도움이 될 독일어를 열심히 익힌다. 이 책 <로지코믹스>의 저자들은 논리와 광기의 연관성에 집착하는데, 어린 러셀이 밤마다 들은 ‘고삐 풀린 짐승의 감정이 가득 서린 신음’이 자신의 큰아버지가 내는 소리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의 부모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사실과 함께 상이군인 “올드 파커”를 만나면서 훗날 자신이 걷게 될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만나 자연과학의 제왕이라고 할 수 있는 수학에 매력을 느낀 러셀은 논리학 세계에 첫발을 내딛는다. 대학에 진학해서 만난 첫 번째 부인 앨리스와의 로맨스도 잠시뿐, 러셀은 논리학을 통해 몰랐던 것을 알게 된 즐거움의 세계 속에서 자신을 투영한다. 수학의 토대를 찾기 위한 러셀의 정진을 계속된다. 이때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교수였다. 화이트헤드와의 사제 관계는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이어지는 사제의 순환이었다고나 할까.

오늘 아침 우연히 듣게 된 라디오 사설에서 서울대의 모 교수가 주장했다는 사이비 도제식 교육이 화이트헤드, 러셀 그리고 비트겐슈타인의 관계처럼 끝없는 학문의 발전에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에 슬며시 미소가 떠오른다. 러셀이 주창한 역설처럼 교수지만 그 스스로는 교수 집단의 일원이 될 수 없는 명제에 작금의 교수 사태를 대입해 보고 싶다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학문적 명제라도 하더라도, 현실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게오르크 칸토어 그리고 나중에 반유대주의로 학문의 빛나는 성과가 탈색하긴 했지만, 여전히 아우라를 발하는 프레게 교수와의 만남의 핵심을 <로지코믹스>는 그야말로 코믹하게 다룬다. 어쩌면 너무 복잡해서 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런 예민한 부분까지도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다룰 수 있다는 만화의 장점이 아닐까 싶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저자들은 정말 대단한 성과를 창출해냈다.

화이트헤드와의 공동 연구 역시 진리를 찾는 여정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던 숙명이었으리라. 스승의 젊은 부인에 대한 애정, 끝없이 자신을 극한으로 내모는 십 년간의 연구 과정이 <수학 원리>라는 걸작으로 세상의 빛을 보게 됐지만, 정작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은 또 다른 천재 쿠르트 괴델뿐이었다는 냉소적인 시선도 빠지지 않는다. 정말 어렵다 어려워. 새롭게 등장한 비트겐슈타인과 상부상조하면서 현대철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게 되는 러셀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스승을 극복해야 하는 제자의 운명 같은 도전에 직면하게 된다. 논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서 기호화된 언어의 중요성을 깨달은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설명이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내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를 읽는다고 이해할 수 있을까? 알고 싶은 것은 우주의 별만큼이나 많으나, 내 능력이 턱없이 부족하구나!

현대 논리의 토대를 찾는 전개과정을 전면에 내세운 <로지코믹스>가 결말에 그리스 비극 아이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와 이종 교배를 시도한 장면은 정말 의미심장하다. 만화에 등장한 자기언급처럼 논리와 광기는 정말 종이 한 장의 차이밖에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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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와 준 펭귄클래식 57
아나이스 닌 지음, 홍성영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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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전고투 끝에 아나이스 닌의 일기 <헨리와 준>을 다 읽었다. 책을 읽다 보면 정말 나하고는 궁합이 맞지 않는 책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경우가 있는데 이번이 그랬다. 수도 없이 책을 읽겠다고 집어 들었다가 내팽개쳤다가 또다시 집어 들고를 반복했으니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독서모임을 하면서 궁금증이 풀렸다. 이래서 홀로 하는 독서보다 함께하는 독서가 좋은 걸까.

아나이스 닌은 실재 인물로 개인적으로 보헤미안 같았던 그녀의 삶이 부러웠다. 특히 스페인어를 하는 아버지에, 프랑스어를 하는 어머니 그리고 미국에서 살았다는 그녀의 국제적인 커리어가 마냥 부럽더라. 제도 교육을 충실하게 받지 못한 아나이스는 11살부터 자신의 기록을 남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0살 즈음에 소설(<헨리와 준>을 소설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에도 등장하는 자신의 남편 이언 휴고와 결혼해서 프랑스 파리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자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데카당스한 분위기의 문화수도 파리는 당시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의 집합지였다. 그런 인연으로 해서 만나게 된 헨리 밀러와 그의 아내 준과의 만남은 아나이스의 삶에 극적인 전환점을 제공했다. 아나이스는 책에서도 언급하다시피, 헨리가 자신의 문학적 원천이라고 생각하는 준과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매우 잘 알고 있었음에도 헨리가 지닌 야수성과 그의 천재적 재능에 반해 기존의 결혼제도를 뛰어넘는 파격적 사랑에 돌입한다.

책을 읽다 보면, 아나이스는 자신의 은밀한 일기를 남편인 휴고가 볼 것을 염려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과연 휴고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내의 부정을 과연 몰랐을까? 아니 어쩌면 알면서도 사랑의 조그만 부분이라도 차지하려는 생각으로 아나이스의 부정을 눈감아 줬던 건 아닐까?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역설적으로 남편에게는 보여주지 않았던 자신의 일기를 헨리에게는 스스럼없이 보여주기도 한다. 책에서 계속해서 말했던 것처럼 자신은 문학을 하는 시인이자 작가여서 그래도 괜찮다는 걸까? 보통사람의 사고로는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변명처럼 다가왔다.

또 한 가지 궁금했던 점으로는 헨리는 아나이스의 경제적 지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하는 것이다. 당시 파리의 살롱에는 빠트롱(patron) 문화가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전형적 부르주아 직업군인 은행가 휴고를 남편으로 둔 아나이스는 헨리의 작품 활동을 위해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을 때에도 물론이고, 그렇지 못한 상황에서도 ‘문학을 위해’ 그녀는 자신을 희생해 가면서 헨리를 돕는다. 그런데 이 헨리란 작자는 그렇게 지원받은 돈을 그야말로 허랑방탕하게 소진한다. 이들의 사랑은 정말 이해 불가하다.

휴고와 결혼을 유지하면서, 과거의 사랑이었던 사촌 에두아르도, 현재 불같은 사랑에 빠진 헨리 그리고 자신의 심리 분석을 해주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아버린 알렌디 박사와의 관계는 통속적인 삼각관계의 틀을 완전히 부숴버린다. 아나이스 닌이야말로 기존의 도덕관념과 사회적 통념의 벽을 모두 뛰어넘은 시대를 앞서 간 진정한 자유부인이 아니었을까? 바로 이 지점에서 여성작가가 쓴 글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과연 남성작가가 기술했다면 그녀의 감성처럼 그렇데 디테일한 묘사를 할 수가 있었을까?

개인적으로 <헨리와 준>에서 가장 주목한 인물은 바로 알렌디 박사다. 알렌디 박사 앞에서는 아나이스가 하는 거짓말은 무장해제당한다. 남편 휴고에게 거짓말을 하면서 느낀 죄책감,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스스로 준과 라이벌 관계를 설정하고 고통과 번민 속에 몰아넣은 그야말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심리 상태를 알렌디 박사에게 고백하면서 아나이스는 마음의 평안을 얻는다. 알렌디 박사 역시 환자 아나이스와의 정신 분석, 심리 분석의 과정을 거치면서 이 팜므 파탈의 저항할 수 없는 유혹에 빠져 버린다. 기존의 통념에서 일탈한 주인공들의 균형을 잡아 주는 역할이라고 해야 할까? 그 앞에서 발가벗겨진 듯한 느낌을 받은 아나이스의 심정이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다음에 등장하는 질문은 예술과 외설이라는 그야말로 해묵은 논쟁이다. 주도권을 행사한 주체가 여자냐 아니면, 객체로서 타자의 시선으로 보느냐에 따른 이분법적 분류는 너무 도식적인 게 아닐까. 몇몇 어휘에 있어 불편한 점이 없진 않지만, <헨리와 준>은 굳이 외설에까지 도달하지는 않는 것 같다. 아나이스는 자신의 사적 기록인 일기를 작품으로 생각했을까? <헨리와 준>(1986)이 처음에 출간되었을 때와 다른 모습이라는 걸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그녀가 이 세상을 뜬 다음에 출간된 점을 고려해볼 때, 굳이 선정적 묘사로 상업적 이익을 추구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역시 이 점은 읽는 이의 판단에 맡겨야 할 것 같다.

자, 이제 처음에 던졌던 문제로 다시 돌아갈 시간이다. 내게는 왜 이렇게 <헨리와 준>이 읽기 어려웠을까? 책을 읽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닫게 됐다. 일기라는 사적 영역의 글이다 보니, 작가에게는 정말 익숙한 캐릭터지만 독자에게는 생소한 탓을 들 수가 있겠다. 심리적으로 갈팡질팡하는 아나이스 내면세계에 접근하기란 정말 어려웠던 것 같다. 게다가 처음부터 출간을 목적으로 한 글이 아니다 보니, 정보 전달이라는 점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자신에게는 편리하겠지만, 글을 읽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불친절할 순 없었을 것 같다. 이런 분석을 통해 책 읽기가 왜 이렇게 어려웠는지 그리고 철저하게 가려진 그녀의 심리세계에 한 발짝 다가서기가 어려웠는지 이해가 됐다.

어쨌든 쉽지 않은 도전이었지만, 일단 완독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만한 독서였다. 다음에는 아나이스가 그렇게 열렬하게 사랑하고, 심지어 책이 출간되는데 재정 후원도 마다하지 않았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을 읽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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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교본
베르톨트 브레히트 지음, 배수아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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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언론매체인 프레시안에 토요일마다 올라오는 책소개 코너를 유심히 본다. 주류 언론에서 다루지 않는 그래서 아예 그런 책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책들과 만나는 행운을 종종 얻곤 한다. 지난 주말에 내가 그렇게 해서 만난 책이 바로 독일 출신의 시인이자 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2차 세계대전 당시 언론에 보도된 보도사진에 4행의 사진시(詩)를 단 <전쟁교본>이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신산한 삶을 살았던 브레히트는 독창적 시선으로 독자에게 전쟁의 실제 모습을 알려주는 방법을 제시한다. 비주얼화된 사진이라는 이미지는 카메라맨에 의해 포착된 순간이다. 어제 지인과 이 책을 함께 보면서 한 장의 사진이 얼마나 많은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눴었는데, 브레히트가 선별한 사진을 통해 그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개인적으로 2차 세계대전에 많은 관심이 있어서 눈에 익은 몇몇 사진들을 <전쟁교본>에서 볼 수가 있었다. 마치 복습을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동남아의 새로운 식민지배자로 등장한 일본군에 맞서 싸운 미군의 모습에서 새로운 지배자의 모습을 본다거나, 독일군으로부터 해방한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미군정 장교가 잉여생산으로 남아도는 밀을 해방지역 시민에게 파는 장면 등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 속의 숨겨진 이면의 고발하고 있었다. 골수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전시수상 윈스턴 처칠이 기관단총을 든 사진은 무력으로 세계정복을 하려던 히틀러의 그것과 너무 흡사했다.

자신이 형제라 불렀던 독일 농민과 노동자의 아들들이 러시아 전선에서 역시 자신과 같은 계급의 러시아 사람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 장면에서도 브레히트는 반전 평화주의자로서의 모습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패전한 병사들의 철모에서도, 작가는 그 모자가 주인공들에게 머리에 올려져 있을 때가 실제 비극의 클라이맥스였다고 고발한다. 도대체 어떤 가치를 위해 싸웠단 말인가? 미국과 영국이 스탈린의 줄기찬 요구에도 미적거리던 제2전선은 결국 스탈린이 이끄는 적군이 독일 영토에 들어선 다음 순간에야 비로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전쟁교본>을 통해 처음 알게 됐다. 그동안 서방세계가 끈질기게 주장해온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2차 세계대전의 승기를 잡게 되었다는 주장의 허구를 엿봤다고나 할까.

나치 세 거두로 명명한 히틀러, 괴링 그리고 선전장관 괴벨스를 다룬 일련의 사진에서도 작가의 풍자와 조소는 끊이지 않는다. 1차 세계대전 전쟁영웅이자 제국의 이인자였던 괴링, 히틀러의 순장조였던 괴벨스는 나누는 가상의 대화는 브레히트 특유의 블랙유머가 작렬하는 순간이다(27번째 사진, 괴링과 괴벨스). 독일의 전쟁영웅이었던 6명의 원수(Field Marshall)의 사진에서도 브레히트는 그들을 ‘살인자’라고 명명한다.

사회주의자였던 이 망명 작가에게 암울했던 나치 시절은 꼭 청산하고 넘어가야 할 대상이었다. 그래서 어느 편지에서 나치 시대의 비극을 축출하고, 냉정하고 올바른 평가를 할 것을 주문한다. 동시에 이 신성한 의무를 후대로 미루지 말라고 말한다. 이런 그의 의지는 책의 맨 끝 페이지에 실린 그가 남긴 단 한 편의 <평화교본>에 잘 들어나 있다. 새로운 시대의 전범으로 브레히트가 <평화교본>을 완성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반세기가 흘러 이런 의식 있는 지식인의 글을 만나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책을 읽는 내내 전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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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에브리원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 지음, 이소은 옮김 / 비채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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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레이철 맥아담스가 나오는 <Mean Girls>를 보고 참 캐스팅 한번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없는 십 대 소녀 역할을 어찌나 그렇게 잘하던지. 그런데 이미 그 시절에 그녀는 이십 대 중반이었다. 이번에 <굿모닝 에브리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여전히 자기 나이보다 한참 앞선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지만,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멋져 보였다. 다이애나 피터프로인드의 원작소설 <굿모닝 에브리원>은 그렇게 영화와 같이 쌍둥이처럼 우릴 찾아왔다.

소설을 읽기 전에 먼저 영화부터 봤다. 아무래도 소설보다는 영화가 보기 편하니까. 영화를 한 절반 정도 보고 나서, 소설도 따라 읽었다. 아니 이렇게 완벽할 수가! 마치 영화 대본을 보는 것처럼 영화는 소설에 충실했다. 물론, 영화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은 소설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놀랍군 놀라워! 이렇게 원작소설을 충실하게 재현한 영화가 있었던가.

줄거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미국 뉴저지 출신의 책임 프로듀서 베키 풀러는 어린 나이에 방송계에 투신해서 십 년간 <굿모닝 뉴저지>라는 아침 프로그램에서 경력을 쌓아왔다. 그녀의 커리어가 한 단계 앞으로 나아가려는 순간, 그녀는 자신의 천직이라고 생각했던 프로듀서 직에서 짤린다. 그것도 자신보다 월등한 학력을 가진 새내기에게 말이다. 소설의 첫 장면은 그녀가 일과 수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데이트에 실패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데, 방송일을 제외한 다른 일에는 젬병인 그녀다. 특히 연애사업에는! 새벽에 일어나 방송을 준비하고 오후 8시면 잠자리에 드는 보통사람과는 전혀 다른 삶의 패턴을 가진 그녀가 과연 정글 같은 방송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해고된 뒤에, 수많은 인터뷰 끝에 IBS 방송의 <데이브레이크>라는 프로그램의 책임 제작자로 화려하게 복귀하지만, 실상은 끔찍하다. 첫날 남성 앵커를 자르고, 자신의 우상 마이크 포머로이를 새로운 앵커로 내정하지만, 그와 여성 앵커 칼린 펙의 불화는 극한으로 치닫는다. 방송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시청률에 목을 맨 프로듀서의 스트레스가 영화와 소설을 통해 피부로 와 닿는다. 그녀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6주! 그 6주 안에 괄목할 만한 시청률 상승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47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수 프로그램은 그걸로 끝이란다. 게다가 누구나 선망하는 멋쟁이 훈남 애덤 베넷과의 달달한 로맨스도 이어가야 한다. 아기 새 베키의 맨해튼 둥지 틀기는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를 표방하지만, 과연 “이런 씨바아아아아~”라고 외치는 기상해설자 어니의 시청률 올리기 고군분투와 앙칼처녀의 직장 생존기는 코미디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 실업이 곧 사회에서 도태를 의미하게 된 현 세태에서 뉴스 프로그램에 올인하는 베키의 모습은 그야말로 돈키호테처럼 보인다. 거물 뉴스 리포터를 자신이 만드는 프로그램의 앵커 자리에 앉혔지만 풋내기 프로듀서가 포머로이를 자신의 마음으로 조종하기란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때로는 협박으로 또 때로는 읍소로 호소해 보지만, 마치 하나의 오케스트라 팀처럼 모든 것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방송은 그녀의 생각처럼 만만하지 않다.

영화에서 대충 생략된 부분은 소설에서 정말 친절하면서도 재밌는 베키의 독백으로 만날 수 있다. 영화의 비주얼로 형성된 이미지를 책으로 확인 사살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마치 보너스처럼 따라붙는 베키의 독백은 완전 재밌다!!! 보통 책을 읽고 나서 영화를 보는 편인데, 이번만큼은 영화를 먼저 보고 나서 책을 본 게 탁월한 선택이었다. 숨 가쁘게 돌아가는 방송계의 일면을 생생하게 그리면서, 그 방송을 만드는 이들의 애환을 진솔하게 담아낸 <굿모닝 에브리원>은 기대 이상이었다. 물론, 레이철 맥아담스 주연의 영화도 한몫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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