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탄생 - 만화로 보는 패션 디자이너 히스토리
강민지 지음 / 루비박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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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일러스트레이터 출신의 강민지 씨가 그리고 쓴 <패션의 탄생>을 통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위 말하는 명품의 역사를 엿보게 됐다. 그녀는 모두 26명의 근대 패션을 주름잡았던 디자이너들의 삶을 통해 그네들이 만들어낸 패션이 어떻게 우리 삶 속에 스며들었는지 적확하게 잡아냈다. 사실 평소에 패션이 관심이 없다 보니 옷이 큰 의미로 다가오지 않지만, 패션과 스타일을 중시하는 이들의 입장에선 보면 자신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션의 탄생>은 근대 패션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티에리 에르메스와 루이 뷔통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구찌오 구찌처럼 에르메스는 마구상 제조업자로 패션계에 입문했다. 에르메스와 루이 뷔통은 마차가 주요 교통수단이었던 시대에서 자동차로 여행하는 시대에 뛰어난 성능과 디자인의 휴대용 여행 가방을 개발하면서 명성을 떨치기 시작했다. 이렇게 패션은 단순히 보기에 좋은 옷뿐만이 아니라 사회발전과 시대의 변화를 선도하는 순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는 점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어려서부터 패션에 관심을 보이던 세계 유수의 디자이너들은 하나같이 입지전적 자수성가를 이룬 인물들이라는 점도 눈에 띈다. 화려한 칵테일 드레스 같은 오트 쿠튀르 전성시대를 지나 프레타포르테로 대변되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 속에서 패션 사업은 장인들이 한 땀씩 직접 손으로 바느질하는 가내수공업 스타일의 제작 방식에서 탈피해 대중이 원하는 제품을 공급해야 했다. 그래서 세상 모든 것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천재 디자이너와 LVMH 그룹의 베르나르 아르도 같은 CEO의 결합은 필연적이었다고나 할까. 패션의 대중적 소비라는 점에서 긍정적이지만, 세계 패션을 선도하는 프랑스 전통의 오트 쿠튀르 지지자들에게는 불편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독창적이고 뛰어난 패션이라고 해도 홍보가 따르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저명한 디자이너와 영감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는 세기의 스타와의 만남 역시 운명적이었다. 위베르 드 지방시와 오드리 헵번의 만남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 세계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자신이 디자인한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을 선전하는데 마다할 디자이너가 누가 있겠는가.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를 통해 프라다가 다시 한 번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영화를 통한 스타마케팅은 선택이 아니라 디자이너의 숙명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고전적인 방식에 비하면 캘빈 클라인의 도발적인 광고 시리즈는 좀 격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이런 주류 패션 업계의 역사적 사실 뿐만 아니라 패션계의 뒷이야기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마치 가문의 내력인 것처럼 구찌 일가의 막장 드라마 뺨치는 불화, 적국의 장교를 사랑한 가브리엘 샤넬의 로맨스, 초등학교 교사 출신으로 자유분방한 영국 펑크록의 기수였던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에피소드는 매력 만점이다. 비교적 신세대 디자이너들이라고 할 수 있는 장 폴 고티에나 존 갈리아노의 등장 역시 흥미진진했다. 물론 크리스찬 디올의 수석디자이너로 최고의 위치에서 반유대주의 발언으로 단박에 추락한 존 갈리아노의 예에서 보듯 아무리 표현과 창작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라도 하더라도 정도를 넘어선 행동에 대해선 법적 책임을 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존 갈리아노는 프랑스 법정에서 유죄가 확정되면 6개월의 실형과 3만 달러 상당의 벌금형에 처할 예정이라고 한다. 나치 장교와의 로맨스로 부역 혐의를 벗지 못한 채 조국 프랑스에 묻히지 못한 가브리엘 샤넬 역시 역사적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패션의 탄생>은 뛰어난 구성과 강민지 씨의 멋진 일러스트레이션에도 곳곳에서 보이는 사소한 오탈자와 부족한 역사 인식으로 책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에서 전쟁이 끝난 건(크리스찬 디올 편, 150쪽) 1941년이 아니고 1945년이다. 전쟁이 1941년에 끝났다면 자유프랑스군을 이끌고 영국에서 망명정부를 이끈 드골 장군이나 조국해방을 위해 목숨 바친 레지스탕스 대원들의 희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지은이나 편집자의 꼼꼼하지 못한 감수가 아쉬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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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여인의 키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7
마누엘 푸익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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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문학을 좋아한다. 루이스 세풀베다, 로베르토 볼라뇨 그리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전작에 도전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라틴문학으로 꼽는 마누엘 푸익의 <거미여인의 키스>하고는 인연이 닿지 않았다. 사실 읽으려고 몇 년 전에 사서 서가에 꽂아 두었지만 선 듯 손이 가지 않았다. 그동안에 헥터 바벤코 감독이 연출을 맡고 라울 줄리아와 윌리엄 허트의 열연이 돋보이는 영화도 봤지만, 원작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올해 첫날 처음으로 읽은 책이 됐다.

문학으로 출발한 이름부터 매력적인 <거미여인의 키스>는 영화는 물론이고 뮤지컬 그리고 연극에 이르는 장르 이종교배의 전범을 보여준다. 책을 읽으면서 감방에 갇힌 두 사나이(발렌틴과 몰리나)의 이야기가 참 연극에 안성맞춤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미국의 브로드웨이에서 바네사 윌리엄스가 타이틀롤을 맡은 뮤지컬로도 상연이 됐다고 하는데, 연극과 뮤지컬 모두 한번 보고 싶다.

<거미여인의 키스>는 미성년자 보호법 위반으로 감옥에 갇힌 몰리나가 유물론자이자 마르크시스트 게릴라 투사인 발렌틴에게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자신이 오래전에 본 영화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구성을 따른다. 문제는 이 두 사나이의 성적 정체성이다. 몰리나는 전직 디스플레이어이자 게이로 예민한 감수성을 자랑한다. 그래서 그는 발렌틴에게 들려주는 영화 속의 정말 디테일한 부분들까지 놓치지 않고 훌륭하게 묘사한다. 영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머리 스타일은 물론이고, 건물의 특성까지 놓치지 않고 청자인 발렌틴에게 전달한다.

한편, 군사독재가 판을 치던 아르헨티나에서 사회혁명을 꿈꾸던 혁명가 발렌틴은 투옥생활 중에 나태해지는 자신을 추스르며 책읽기와 공부에 전념한다. 발렌틴은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는 그저 시간 때우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자위한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한 영화 이야기에 자부심을 품고 있는 몰리나에게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발렌틴은 그저 망상에 빠진 개자식일 뿐이다. 그래서 정작 그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는다.

작품에서 평행을 달리는 몰리나와 발렌틴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 마누엘 푸익은 소설 속 영화에 등장하는 표범여인, 좀비여인 그리고 거미여인으로 대변되는 신화의 탈주술을 시도한다.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몰리나의 성적 취향처럼 정상적이지 못하다. 키스하면 매력적인 여자가 표범으로 변한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 부두교의 주술이 등장하는 미스터리 스릴러 뺨치는 좀비여인 이야기 그리고 거미줄로 남자를 옭아매는 팜므 파탈의 전형 거미여인의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실타래처럼 엉킨 변형된 성적 코드의 해석이 난무한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것의 구원이라고 주장하는 몰리나의 동성애 취향에 발렌틴은 진저리를 친다. 하지만,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 속에 녹아 있는 주술적 사랑 이야기에 자신도 모르게 중독이 되면서 감방 동료 간의 동지애를 넘어선 금지된 사랑으로 전진한다.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프로이트와 마르쿠제 같은 심리학자의 동성애에 대한 진지한 학문적 설명은 다른 두 영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정치성과 대척을 이룬다.

나치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나치즘에 경도되는 여주인공은 탐미주의적 경향을 가진 몰리나의 페르소나였을까? 사회주의자 발렌틴은 나치즘의 선전물이라고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를 깎아내리지만, 몰리나는 영화의 정치성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남미의 부유한 바나나 농장주의 아들로 유럽에서 공부하던 주인공이 게릴라 투사로 변신하는 과정을 다룬 영화에서도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냐 아니면 사회적 책임이 우선인가 하는 해묵은 논쟁을 거듭한다.

발렌틴은 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를 들으면서 소통을 원하지만, 보통 사람과 그런 소통을 경험해 보지 못한 몰리나는 생래적으로 그런 발렌틴의 시도를 거부한다. 일련의 과정을 통해 몰리나를 이해하게 된 발렌틴은 가석방을 앞둔 몰리나에게 (성적) 약자로서의 삶에서 탈피하라는 조언을 해준다. 결혼조차도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적 알고리즘으로 파악하는 유물론자의 사랑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과 자신의 게릴라 집단이 사회 변혁을 이룰 수 있다는 몽상적 사고를 버리지 못한다. 도대체 그런 투쟁이 뭐냐고 묻는 몰리나가 어쩌면 더 현실적일지도 모르겠다.

소설을 읽으면서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 이야기가 실재한 것인지 아니면 모두가 몰리나의 상상 속에서 빚어진 이야기인지 궁금했다. 몰리나는 중요한 부분에서 계속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며 시간을 벌고, 그 짧은 사이에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꾸며낸 것은 아니었을까? 몰리나는 심장병을 앓는 어머니의 간호를 위한 가석방의 도구로 거미여인처럼 치명적인 유혹이라는 거미줄로 발렌틴을 옭아맨 게 아니었을까? 그것은 마치 탈주술을 줄기차게 주장하면서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주술적 사랑에 빠져 자기 파멸의 길에 들어선 자아의 모습으로 치환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영화 버전의 <거미여인의 키스>가 보고 싶어졌다. 처음 영화를 볼 때, 미처 보지 못했던 것들을 책읽기를 통해 보충하고 싶다고나 할까. 새해 처음으로 읽는 책이라 그런지 개인적으로 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모양이다.

사랑은 바로 그런 거야.
사랑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은 채
사랑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 <거미여인의 키스,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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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엠 넘버 포 - I Am Number Fou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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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이 영화는 어떻게 정의를 해야 할까. 영화 <아이 엠 넘버 포>를 보면서 자꾸만 크립톤 행성에서 날아와 지구를 외계의 악당으로부터 지키는 슈퍼맨 생각이 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재밌는 건 슈퍼맨은 넘버 원을 상징하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인 존(알렉스 페티퍼 분)은 아주 처음부터 대놓고 자신이 넘버 포란다. 물론 그 말에 수긍하는 이는 얼마 되지 않겠지만.

어느 정글 같아 보이는 곳에 은신하던 로리언 행성 출신의 넘버 쓰리를 모가도리언이라는 이름의 외계인들이 습격한다. 미국 플로리다의 바닷가에서 놀던 넘버 포 존은 발에 타는 통증을 느끼면서 정신을 잃는다. 그리고 자신의 수호자인 헨리(티모시 올리펀트 분)와 함께 흔적을 모두 지우고 아무도 모를 어느 곳, 오하이오주 패러다이스로 떠난다.

플롯의 전개가 어떻게 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쨌든 존은 로리언 행성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9명의 전사 중의 한 명이다. 넘버 쓰리까지 당했으니, 앞으로 남은 6명이 힘을 합쳐서 잔인무도한 사냥꾼인 모가도리언에에게 대항해야 한다. 다만, 신세대 젊은이답게 존은 은둔의 삶이 아닌 나름 달달한 사랑도 해보고 싶고 보통 청소년 같은 삶을 살고 싶어 한다. 물론 그의 수호자 헨리는 절대 허락하지 않겠지만.

패러다이스에서 이들의 은둔의 삶을 방해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그녀의 이름은 새라(다이아나 애그론 분). 동네 청년들이 모두 좋아할 만한 캐릭터다. 하지만 원치 않게 동네 노는 형들인 마크 제임스 패거리와 어울리게 되면서 좀 꼬이게 된다. 한편, 진짜 아버지를 외계인에게 납치당한 왕따 소년 샘도 빼놓으면 안되겠다. 어느 영화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이런 종류의 사이드킥은 빠지면 안되는가 보다. 넘버 포 존의 뒤를 쫓은 정체불명의 오토바이 아가씨와 흉포한 모가도리언의 숨 막히는 추적이 시작된다.

DC코믹스의 만화 같은 <아이 엠 넘버 포>는 동명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이 영화에서는 달랑 넘버 포와 넘버 식스만이 등장했다. 앞으로 나올 캐릭터가 이 둘 말고도 넷이나 더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당연히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단, 그 시기는 언제인지 모를 뿐. 외계에서 온 소년이 전사로 탈바꿈한다는 통과의례 같은 공식 외에 청소년들의 달달한 로맨스도 가미된 전형적인 오락물로 보면 될 것 같다.

영화 <트랜스포머>에서도 등장했던 티모시 올리펀트는 수호자로 뛰어난 모습 대신 보통의 평범한 사람에게 인질이 되어 모가도리언의 일격에 당하는 단발성 캐릭터로 등장한다. 그의 역할 중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최첨단 장비를 이용해서, 존이 플로리다에서 남긴 온라인상의 흔적을 모두 지우는 장면이었다. 물론 거의 전지전능한 능력의 헨리도 바닷가에서 존이 찍힌 영상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 흔적을 따라 넘버 식스와 모가도리언들이 존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다.

<비스틀리>에서도 잘생긴 훈남으로 등장했던 알렉스 페티퍼는 <아이 엠 넘버 포>에서도 비슷한 이미지의 역할을 무난하게 수행해냈다. 이런 외모에 뛰어난 운동신경 그리고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미스터리까지 가지고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답답한 시골 마을을 떠나 큰 세상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새라와의 러브라인은 그래서 더 필연적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 혹시 새라 대신 넘버 식스와 삼각관계로 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로리언 행성인들은 사랑에 한 번 빠지면 영원하다는 금언의 족쇄가 그들의 관계를 탄탄하게 만들어 준다. 섬세하게 이런 장치까지 마련하다니 대단하다.

역시 전편보다 더 궁금해지는 속편에서는 로리언 행성인과 모가도리언들의 숙원 그리고 새로 등장할 다양한 개성과 능력의 나머지 ‘넘버’들이 기대된다. <아이 엠 넘버 포>가 가벼운 몸풀기였다면 속편은 본격적인 본 프로 상영이 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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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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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뮌헨 출신의 작가 다니엘 켈만의 책을 두 번째로 읽었다. 나와 그의 첫 만남은 들녘에서 나온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나와 카민스키>였다. 그의 재기 발랄한 글에 반해 바로 후속작인 <세계를 재다>도 샀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책을 사서 모두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명예>를 단박에 읽었다.

1년 동안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발표했다는 <명예>는 소설과 사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작가의 포인트를 파악하는 순간 책은 오롯하게 독자의 수중에 들어온다. 사실 단편은 짧은 시간 내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므로 중견작가들도 부담스러워 한단다. 다니엘 켈만은 비록 짧은 작가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복잡하게 구성된 단편 모음집을 성공적으로 완성해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어느 사이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작금의 세태를 다니엘 켈만은 냉정하게 꼬집는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모두 소통을 위한 도구들이지만, 도구가 사용자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상황에 대한 풍자가 <목소리>에 담겨 있다. 자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 휴대전화로 자꾸만 엉뚱한 사람인 랄프를 찾는 전화가 오면서 주인공 에블링은 점점 랄프라는 사나이의 삶에 집착하게 된다.

그 다음 단편에서 소설가 레오 리히터는 최근에 사귀게 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국제 분쟁지역을 누비며 구호활동을 하는 엘리자베스와 강연여행을 떠난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고, 글은 언제 쓰며 자신이 그의 작품을 어느 순간에 읽었는지 끊임없이 읊조려 대는 독자들의 성화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중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대신 보낸 마리아 루빈슈타인은 비자가 만료된 상황에서 여행가방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마저 잃어버린 상태에서 어느 농가의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전락한다.

첫 단편에서 등장했던 랄프는 유명한 영화배우로 다시 다른 단편에 재등장한다. 이번에는 에블링이 아니라 진짜 자신으로. 문제는 자신의 삶을 어느 대역 배우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편에서는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연상됐다. 행복을 일상으로 누리는 이는 불행의 나락에서 비로소 행복을 깨닫는다고 했던가. 피곤한 진짜 배우의 삶 대신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리던 인기와 재산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건 원하지 않겠지?

소설 속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가 좋아하는 미구엘 아우리스토스 블랑코스의 온 힘을 다한 글쓰기에 대한 묘사 역시 일품이다. 공기가 어둠을 잠식해 가는 동안에도, 석양의 불길이 사위어 가는 동안 땀에 푹 젖을 정도로 열정을 다해 수녀원장에게 답장을 쓰는 미구엘과 창작의 고통을 공유하는 다니엘 켈만의 이미지가 현현되었다. 각각의 다른 이야기의 연결이 되는 단서를 찾는 재미는 켈만식 보물찾기의 변형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토론에 글 올리기>와 그 다음 편인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다. 두 편에 잇달아 등장하는 키보드 워리어 몰비츠는 전형적인 인터넷 중독증 환자다. 잠시라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에 시달리는 그는 무려 만 개나 되는 포스팅의 보유자다. 사루만 같은 보스에 의해 강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회의가 열리는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레오 리히터의 소설에 들어가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현실과 가상 세계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

보스 사루만의 이중생활을 그린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가는지>는 최근 외도를 시작한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부인과 애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의 스릴넘치는 심리상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거짓말을 한 번 하기가 어렵지 일단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달리게 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멀쩡한 몰비츠를 죽이기도 하고, 동명이인으로 조작하는 장면에선 우리나라 직장인의 변명과 겹치기도 한다.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읽을수록 감칠맛이 난다고 할까? 차곡차곡 쌓인 단서들은 뒤로 갈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단편 간의 전후좌우가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면서 초반의 시큰둥했던 반응은 사라지고 어느새 열기를 띠기 시작한다. 작가가 치밀하게 짠 플롯에 반응하면서 <명예>의 공통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소통과 교감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즐거움은 가상세계와 현실의 복잡한 변주곡일 뿐이다. 단편 모음으로 이렇게 멋진 작업을 완수한 다니엘 켈만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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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론드 1
조이스 캐럴 오츠 지음, 강성희.송기철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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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스 캐럴 오츠. 코맥 매카시, 돈 드릴로 그리고 필립 로스와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된다는 미국 출신 대가를 마릴린 먼로의 일대기를 소설화한 <블론드>로 처음 만나게 됐다. 아직도 미국과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섹스 심벌이자 사랑의 여신 그리고 그녀의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뉴욕 지하철 위에서 바람에 부푼 흰색 드레스를 부여잡은 그녀의 이미지는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조이스 캐럴 오츠는 한 시대를 풍미한 이 사랑의 여신의 신화에 도전한다.

우선 오츠 작가는 노마 진 베이커(마릴린 먼로의 본명)의 유년시절로 소설을 시작한다. 실재 인물로 주인공으로 했지만, 전기가 아닌 소설인 만큼 그녀는 사실적 바탕에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모든 이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지만, 이생에서 36년이라면 짧은 삶 속에 끝없이 사랑을 갈구했던 은막의 스타 마릴린 먼로의 내면세계를 해부한다. 수줍은 성격에 말까지 더듬고 항상 불면에 시달려야 했던 스타의 가족사로 시작한다.

엄마라는 말 대신 언제나 어머니라고 불러야 했고, 할리우드 영화산업계의 귀퉁이에서 은막의 스타들을 동경하며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떠난 노마 진의 아버지가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글래디스 모텐슨은 나이 어린 딸에게 확실히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가난한 모녀의 유일한 즐거움은 자동차에 휘발유를 채우고, 할리우드 명사들의 으리으리한 저택 순례에 나서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잇장 같은 글래디스의 정신이 분열하면서 어린 나이에 노마 진은 고아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하게 된다. 실제로 노마 진은 여러 위탁 가정에 맡겨졌다고 하지만, 소설에서 작가는 워렌 피릭 가정 하나로 축약한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달랐다고 했던가. 어려서부터 예쁘고 귀여웠던 노마 진은 아름다운 아이에서 소녀로 그리고 여자로 성장한다. 고아원 시절 크리스천사이언스를 신봉했던 원장의 영향으로 가족에 대한 사랑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이 가질 수 없었던 애정의 외연을 확대하기도 한다. 노마 진의 양어머니 엘지 피릭은 그녀에 대한 남편의 뜨거운 시선과 뭇 남성들이 노마 진에게 던지는 추파의 의미를 파악하고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나어린 노마 진을 시집보내기로 한다.

“빅대디” 버키 글레이저와 행복했던 신혼은 꿈처럼 지나가고, 2차 세계대전 열병에 휘말린 미국의 여느 남성처럼 버키는 군이 입대한다. 이제 소녀에서 여자가 된 노마 진은 블레이저 가문에 들어가 사는 대신, 홀로 서는 삶을 시작한다. 전시에 남성 노동력이 부족해진 미국 사회에서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이 급증하는데, 작가는 이런 사회상을 소설에 적극적으로 반영한다.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어느 카메라맨에게 발탁된 노마 진은 미국의 후방을 지키는 여성 모델로 드디어 그녀가 어려서부터 꿈꾸던 할리우드에 진입하게 된다.

<블론드>는 실제 있었던 사건을 다뤄야 하다 보니, 소송의 천국이라는 미국에서 법적 다툼을 피하고자 이제는 죽고 세상에 없는 노마 진을 제외한 인물에 대해서 가명을 써야 했나 보다. 노마 진의 첫 번째 남편 그리고 그녀가 관계했던 할리우드 제작자도 이니셜로 처리했다. 물론, 알려고 해서 위키피디아나 구글로 인터넷 검색을 하면 바로 다 알 수 사항이었지만.

조이스 캐럴 오츠가 통속적인 소재로 글을 쓴다고 비판하는 이들이 있다고 하는데, 결국 문학이라는 것이 대중을 위한 것이 아닌가.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그 소재를 가지고 어떻게 접근하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책날개에도 나오지만, 남자만의 전유물처럼 그려졌던 광기와 폭력의 세계를 여성에게도 적용하는 작가의 시도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제는 할리우드의 신화가 되어 버린 실존인물 마릴린 먼로의 빛과 어둠 그리고 역사의 빈 공간을 작가적 상상력을 채워 넣은 <블론드>는 어쩌면 조이스 캐럴 오츠만이 쓸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을까.

대공황, 전쟁 그리고 마녀사냥이 몰아닥치기 시작하던 할리우드에 대한 조이스 캐럴 오츠의 해석 역시 일품이다. 대공황 시기 살아남기 위해 무슨 일이라도 하고 무엇이라도 팔아야 했던 시대의 아픔, 모든 것을 바꿔 버린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들썩이던 미국 남자들의 단면도 빠지지 않는다. 전후 공산주의 러시아와 대결하게 된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수호국가라는 미국에서 중세에서나 일어났을 법한 매카시즘, “빨갱이 사냥” 열풍이 벌어진다. 스타가 되기 위해 요즘도 공공연하게 행해지는 성상납이 그 당시에도 횡행했다는 사실에 입맛이 씁쓸해졌다. 남성권력이 지배하는 스튜디오 계에서, 어쩌면 아름다움은 재능이 아니라 고통의 원천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카메라 렌즈를 통해 보이는 화려한 은막의 세계보다 ‘정상’적인 삶을 갈망했던 노마 진이 할리우드에 적응하기란 난망한 일이었으리라.

<블론드> 1권에서는 노마 진이 우리가 아는 스타의 길을 향한 고난의 행진을 시작한 여정을 다루고 있다. 평생 애정 결핍에 시달려야 했던 그녀의 불행한 가족사를 통해 카메라 앞에서는 언제나 매혹적인 웃음을 지었지만, 실제로는 행복하지 않았던 사랑의 여신의 개인사를 알 수가 있었다. 할리우드 진출 초반의 역경과 <아스팔트 정글>과 <나이아가라>를 통해 세기의 스타가 되는 과정이 그려질 2편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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