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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예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41
다니엘 켈만 지음, 임정희 옮김 / 민음사 / 2011년 2월
평점 :
독일 뮌헨 출신의 작가 다니엘 켈만의 책을 두 번째로 읽었다. 나와 그의 첫 만남은 들녘에서 나온 일루저니스트 시리즈 <나와 카민스키>였다. 그의 재기 발랄한 글에 반해 바로 후속작인 <세계를 재다>도 샀지만, 아직 읽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에 신작이 나왔다는 소식에 허겁지겁 책을 사서 모두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명예>를 단박에 읽었다.
1년 동안의 치밀한 준비를 거쳐 발표했다는 <명예>는 소설과 사실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특이한 구성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처음에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지만, 일단 작가의 포인트를 파악하는 순간 책은 오롯하게 독자의 수중에 들어온다. 사실 단편은 짧은 시간 내에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므로 중견작가들도 부담스러워 한단다. 다니엘 켈만은 비록 짧은 작가 경력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복잡하게 구성된 단편 모음집을 성공적으로 완성해냈다.
휴대전화와 인터넷이 어느 사이엔가 일상이 되어 버린 작금의 세태를 다니엘 켈만은 냉정하게 꼬집는다. 현대 문명의 이기들은 모두 소통을 위한 도구들이지만, 도구가 사용자의 경계를 넘어서 버린 상황에 대한 풍자가 <목소리>에 담겨 있다. 자신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지인들의 성화에 못 이겨 산 휴대전화로 자꾸만 엉뚱한 사람인 랄프를 찾는 전화가 오면서 주인공 에블링은 점점 랄프라는 사나이의 삶에 집착하게 된다.
그 다음 단편에서 소설가 레오 리히터는 최근에 사귀게 된 국경없는 의사회 소속으로 국제 분쟁지역을 누비며 구호활동을 하는 엘리자베스와 강연여행을 떠난다.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그에게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고, 글은 언제 쓰며 자신이 그의 작품을 어느 순간에 읽었는지 끊임없이 읊조려 대는 독자들의 성화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서 중앙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대신 보낸 마리아 루빈슈타인은 비자가 만료된 상황에서 여행가방과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여권마저 잃어버린 상태에서 어느 농가의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으로 전락한다.
첫 단편에서 등장했던 랄프는 유명한 영화배우로 다시 다른 단편에 재등장한다. 이번에는 에블링이 아니라 진짜 자신으로. 문제는 자신의 삶을 어느 대역 배우가 대신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단편에서는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가 연상됐다. 행복을 일상으로 누리는 이는 불행의 나락에서 비로소 행복을 깨닫는다고 했던가. 피곤한 진짜 배우의 삶 대신 보통 사람의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누리던 인기와 재산까지 모조리 사라져 버리는 건 원하지 않겠지?
소설 속의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이가 좋아하는 미구엘 아우리스토스 블랑코스의 온 힘을 다한 글쓰기에 대한 묘사 역시 일품이다. 공기가 어둠을 잠식해 가는 동안에도, 석양의 불길이 사위어 가는 동안 땀에 푹 젖을 정도로 열정을 다해 수녀원장에게 답장을 쓰는 미구엘과 창작의 고통을 공유하는 다니엘 켈만의 이미지가 현현되었다. 각각의 다른 이야기의 연결이 되는 단서를 찾는 재미는 켈만식 보물찾기의 변형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게 읽은 단편은 <토론에 글 올리기>와 그 다음 편인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갔는지>다. 두 편에 잇달아 등장하는 키보드 워리어 몰비츠는 전형적인 인터넷 중독증 환자다. 잠시라도 키보드 자판을 두드리지 않으면 불안에 시달리는 그는 무려 만 개나 되는 포스팅의 보유자다. 사루만 같은 보스에 의해 강제로 회의에 참석하게 된다. 회의가 열리는 호텔에서 우연히 만난 레오 리히터의 소설에 들어가기 위해 무리수를 두는 모습은 처량하기 짝이 없다. 여기에서 다시 한 번 현실과 가상 세계의 구분이 사라져 버린다.
보스 사루만의 이중생활을 그린 <내가 어떻게 거짓말을 하며 죽어 가는지>는 최근 외도를 시작한 한 남자의 삶의 궤적을 추적한다. 부인과 애인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는 주인공의 스릴넘치는 심리상태를 예리하게 꼬집는다. 거짓말을 한 번 하기가 어렵지 일단 한번 시작하면,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처럼 달리게 된다는 속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가 있었다. 멀쩡한 몰비츠를 죽이기도 하고, 동명이인으로 조작하는 장면에선 우리나라 직장인의 변명과 겹치기도 한다.
다니엘 켈만의 <명예>는 읽을수록 감칠맛이 난다고 할까? 차곡차곡 쌓인 단서들은 뒤로 갈수록 위력을 발휘한다. 마치 레고 블록을 쌓듯이 단편 간의 전후좌우가 빈틈없이 맞아떨어지면서 초반의 시큰둥했던 반응은 사라지고 어느새 열기를 띠기 시작한다. 작가가 치밀하게 짠 플롯에 반응하면서 <명예>의 공통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소통과 교감에 접근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종착역에 도달했다는 즐거움은 가상세계와 현실의 복잡한 변주곡일 뿐이다. 단편 모음으로 이렇게 멋진 작업을 완수한 다니엘 켈만에게 박수를 보낸다.